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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을 이루지못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고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고 생각한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단편모음집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인정하는 업적을 성취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게 아니고 다정하게 말하고 있다.
이 책에는 총 여덟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독자에게 따뜻함과 여운을 남겨준다.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에서 가장 좋은 작품은 역시 표제작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 였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내 삶은 새로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당시에 곰스크에 걸었던 희망을 나는 거의 잊어버렸다. 곰스크로 가려 했던 이유조차도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져 더이상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곰스크를 향한 열망이 식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는 그 도시에 도착한다는 명백한 확신이 시들해진 것뿐이다.] P.11
어렸을 때 아버지로 부터 들었던 멀고도 멋진 도시‘곰스크‘, 나는 언젠가 곰스크로 떠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라게 된다. 성인이 되어 나는 결혼을 하게 되고, 모든 돈을 들여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를 끈어 신혼여행이자 꿈을 향해 떠나게 된다. 하지만 아내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고, 결국 기차의 중간 경유지에서 부부는 경치를 보느라 기차를 놓치게 된다.
다시 기차를 타고 ‘곰스크‘로 떠나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했고, 그들은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올 ‘곰스크‘행 기차를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아직까지 ‘곰스크‘로 떠나는 꿈을 가지고 있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그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곳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
서빙일을 하면서 기찻값을 모으게 된 그는 ‘곰스크‘행 기차표를 예매하지만, 떠나기를 거부하는, 이미 이곳을 버릴 수 없는, 임신을 한 아내가 떠나는 걸 거부하게 되고, 결국 그는 그곳에 남게 된다. 꿈을 이루는 순간을 다시 한번 미루게 된다.
결국 그곳에 머무르게 된 부부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남편은 선생님으로 취직하게 되며 그렇게 그곳에서 살아간다. ‘곰스크‘로 가는 꿈은 가슴속에 묻어놓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인생을 실패한 것이라 할 수있을까? 그는 자신에게 선생님의 직업을 물려준 한 선생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P.61
그럼에도 그는 오늘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소리를 들으면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열망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어, 너에게는 현재가 있고, 인생은 그렇게 따뜻한거야‘ 라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아주 아주 멋진 작품이라는 감탄이 든다.
표제작인 이 작품 이외에도 다른 일곱작품 모두 아주 훌륭하고 여운이 남는 작품들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각기 다른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를 통해 막막하기만 한 인생에 대한 비유를 보여주는 <배는 북서쪽으로>,
[˝그래요,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가 혹시 정신병원인가요?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다니, 웃긴 일이잖아요.˝] P.75
진정한 행복은 많은 것보다는 소중한 아주 조그마한 것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철학자와 일곱 곡의 모차르트 변주곡>,
[˝너무 많아서 그걸 헤아리다가 인간은 쭈그러들걸, 놀랍지 않소? 바다의 물방울만큼이나 그렇게 많은 곡들이 있건만 나는 이 일곱 곡만 있으면 행복해지니 말이오.˝] P.94
개봉하지 않은 편지에 대한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붉은 부표 저편에>,
[저기 어디쯤 작은 방에 있는 리씨는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다른 날처럼 잠을 잘 것이고 아침에 우편배달부가 오면 이 밤이 다른 밤과 같지 않았음을, 완전히 다른 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P.106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게 위로를 건내는 것 같은 <두 시절의 만남>,
[양귀비꽃은 내일이면 시들 텐데. 양귀비는 넓은 들에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흔한 것이지만 메르체데스를 타고 질주하면서 볼 수는 없는 것이지. 그러나 그것 역시 내일이면 시드는 것을.] P.119
인생은 꽃과 같아서 그 시절이 지나면 향기를 잃지만 그래도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만은 남는다는 <양귀비>,
[˝이걸 선물할 거야.˝ 내가 말했습니다. 아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달랑 꽃잎 한 장인데다 곰팡내가 나는걸요.˝
˝그래.˝ 나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 이젠 너무 늦었지.˝] P.132
한밤중에 목숨까지 내걸 정도로 마시고 싶었던 럼주차의 맛이 궁금해지는 <럼주차> 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남자들이란 그렇거든. 생각하는 것이라곤 차와 럼주, 담배뿐이니, 그나저나 한밤중에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 P.163
특이한 점은 앞에 위치한 단편에 등장하는 단어나 내용들이 뒤에 위치한 단편의 제목이나 소재로 쓰인다는 것이다. 말의 흐름 시리즈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단편집이었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 앞으로 이 책을 가까운 거리에 두고 생각이 날때마다 꺼내 읽어봐야 겠다. 명작이란 이런 책을 말하나 보다. 앞으로 기차를 타거나 멀리서 들리는 기적소리를 들으면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실패한 인생은 없다.
Ps. 비겁한 사람
https://youtu.be/dbHwihUeBys
기차는 여섯 시에 떠나고
너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아니 오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끝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언제쯤 기다리길 멈추고
예정대로 기차에 오를까
(저번에 이 노래를 소개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소개해 본다. 너무 좋아서, 너무 어울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