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 벌이는 가장 비이성적인 행위이다. 최고 지도자들에겐 전쟁이 정치적인 도구로서 가장 강력한 수단이겠지만 그 피해는 오롯이 일반 시민들이 받으며, 일반 시민은 전쟁의 가장 낮은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죽이고 괴롭게 죽어가는 것은 지도자들이 아니라 시민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는 왜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을까?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런걸까? 아니면 교육이 잘못된 걸까? 로맹가리의 데뷔작인 <유럽의 교육>은 연합국 대 독일 간의 2차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는 유럽을 배경으로, 폴란드의 한 숲속에서 독일군에 저항하는 빨치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교육학에 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14살 소년 ˝야네크˝이다. 폴란드 수하르키의 의사 아버지를 둔 그는 전쟁중에 두 형을 잃었고,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잃어버릴 순 없었기에 아들을 위해 숲에 은신처를 만들어 주고 그곳에 머물게 한다. 그런데 자주 찾오던 아버지가 더이상 오지 않자 ˝야네크˝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고 그는 숲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 레지스탕스에 합류하게 된다.
레지스탕스에서 그는 어린 나이를 이용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점으로 거주민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게 되고, 레지스탕스의 다양한 그룹들과의 교류를 통해 점점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레지스탕스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중 그에게 큰 영향을 주고, 또 내가 흥미롭게 바라봤던 인물은 ˝조시아˝와 ˝도브란스키˝였다.
가족들이 모두 학살당하고 복수를 꿈꾸는 소녀 ˝조시아˝는 독일군들에게 몸을 내주면서 살아가게 되고, 또한 이를 통해 정보를 캐내어 레지스탕스에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숲속에서 ˝야네크˝를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야네크˝ 역시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되고 둘은 은신처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와의 사랑을 통해 ˝조시아˝는 더이상 독일군에게 몸을 주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되지만, 이후 동료인 ˝카지크˝의 부탁으로 독일군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단 하루만 다시 마을로 내려가게 되어 몸을 주고 정보를 얻게 된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하나 만들어낼 거야. 우리가 함께 하나 만들어내자. 너하고 내가. 우리 둘만이 그 말을 알고 있게 될 거야. 우리 둘만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야. 아무한테도 그 단어를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 단어를 우리만의 비밀로 간직하자. 울지 마, 조시아. 언젠가는 독일군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날이 올 거야. 언젠가는 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을 날이 올 거야. 울지 마. 너무나도 널 사랑해.] P.97
대학생 출신의 레지스탕스˝도브란스키˝는 시와 문학에 심취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낭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대한 희망과 유럽의 발달한 교육들이 불합리한 전쟁을 종결시킬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는 ˝야네크˝와의 대화를 통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며,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부조리함을 지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책 <유럽의 교육>을 써나가게 된다.
[진실은 역사의 순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과 같은 시간 속에 있어. 그런 때에는 인간이 절망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모든 것, 인간에게 믿음을 갖게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모든 것이 은신처를, 피난처를 필요로 하지. 그 피난처는 음악일 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어.] P.88
[나는 내 책이 그런 피난처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 전쟁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끝난 후 그 책을 펼 때 사람들이 아직 다치지 않고 남아 있는 자신들의 선의를 다시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 저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살게 했지만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해. 절망한 예술이란 없어. 절망스러운 것, 그건 오직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뿐이야.] P.88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책, 시, 음악 등 예술을 통해 위안을 얻게 되고, 예술이 가진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전투를 수행중인 독일인 역시 자신들과 다를 바 없음을, 그들 역시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자식이고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에 인간의 악한 모습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모른 채 단지 생존을 위해 자신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자존심을 버린 사람도 있었다. 사랑을 버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아닌 정상적인 시대였더라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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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라란 어떤 모습일까?˝
˝증오가 없는 나라겠지.˝
˝그러면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 거야.˝
˝그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 거야.˝
˝그리고 증오는 여전히 남아 있을 거야. 전보다 더 많이.˝
˝그러면 죽이지 않고 그들을 치료해줄 거야. 그들에게 먹을것을 줄 거야. 집을 지어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책을 줄 거야. 그들에게 선의를 가르쳐줄 거야. 그들은 증오라는 걸 배운 경험이 있으니 선의라는 것도 잘 배울 수 있어.˝
˝증오는 잊히지 않아, 사랑과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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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쟁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극단으로 몰리게 되는지, 그리고 적군 역시 단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결말은 해피앤딩이다. 많은 동료들이 죽었지만 결국 독일은 패배하고, ˝야네크˝는 ˝조시아˝는 결혼을 하며, ˝야네크˝는 <유럽의 교육>을 완성하게 된다. 잔인한 전쟁속에서도 어떻게든 절망에 빠지지 않고, 전쟁후에도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인류에 대해 ˝로맹 가리˝는 따뜻한 희망을 보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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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책, 모두를 위한 빵, 형제애의 온기, 전쟁도 없고, 증오도 없고...‘
‘나는 믿어. 이번엔 다를 거야. 이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빛을 향해 가고 있어.‘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 P.338
<유럽의 교육>은 ˝로맹 가리˝의 데뷔작이고, 발간 당시에도 상당한 호평과 인기를 받았다고 한다. 원래 데뷔작은 조금 미숙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런거 없다. 책 자체로도 대단히 재미있고 내포하고 있는 교훈도 상당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유럽의 교육>을 최고의 레지스탕스 소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시대적 배경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레지스탕스를 다루고 있고, 결말이 다소 상반되긴 하지만 전쟁의 냉혹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성과 희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작품 모두 너무너무 좋았다. 이번 기회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꺼내어 다시 읽어봐야 겠다.
지금까지 로맹가리(에밀 아자르 포함)의 책을 총 네권 읽었는데 네권 다 너무 좋았다. 이제 그의 다섯번째 읽을 작품을 골라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