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완독. 쉽지 않은 책이었다.




마침내 안헨은 떠났다. 나는 그날처럼 격하게 울어본 적이 없다. 안헨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나에게 열어 보여주었던, 세상과 인생에 대한 사랑,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달콤한 사랑이 안겨준 지극한 부드러움과 고통을 느끼면서 울었던 것이너무 울어서 멍해지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강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안헨을 역으로 데려갔던 타란타스가 나를 앞질렀다. 마부가 잠시 마차를 멈추고 페테르부르크의 잡지 한 권을 건넸다. 한 달 전에 나는 그 잡지사에 처음으로 시 몇 편을 보냈다. 나는 걸어가면서 잡지를 펼쳤다. 내 이름의 매혹적인 철자가 마치 번갯불처럼 내 눈을 때렸다. - P176

나는 내가 사는 지역의 도시를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고, 내게 세상은 오랫동안 친숙한 들판과 언덕뿐이고, 나는 농부들과 아낙들만을 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두세 개의 조그만 영지와 바실리옙스코예뿐이고, 들어올리는 썩은 창틀에 색유리 겉창이 달려 있고 정원을 향한 두 개의 창문이 달린 낡은 모퉁이 방이 내 모든 꿈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왜 가끔씩이라도 깨닫지 못했던 걸까? - P181

발코니로 나오면서 나는 매번 당혹스러웠고, 심지어 약간 고통까지 느끼면서 밤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곤 했다. 도대체 밤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밤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 - P183

나와 저 달은 이제 오래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고, 말없이 끈기 있게 뭔가를 기대하면서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나는 우리 둘이 뭔가를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 P184

안헨은 오랫동안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심지어 낮에도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모든 것 뒤 안헨이 있었고, 그녀에 대한 사랑과 추억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 P185

나를 에워싸고 있는 영원하고 거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무한함 속에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공간인 바투리노란 곳에서 도대체 나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삶이 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삶이란 서로 무관한 감정과 생각들, 과거에 대한 무질서한 회상, 미래에 대한 모호한 예측의 끊임없는 흐름, 즉 한순간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는 흐름이라는 걸 알았다. - P235

글리케리야는 귀여운 애요. 그리고 숨길 과실도 없어요, 하지만 아주 변덕스러운 애요. 오늘은 이것에 마음이 끌리다가도 내일은 다른 것에 마음을 줄 수도 있어요. 물론 그애가 꿈꾸는 건 전나무 아래에 있는 톨스토이의 작은 승방이 아니오.이 조그만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그애가 옷을 어떻게 입고 있나 보시오. 난 딸애가 절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애는, 말하자면, 절대 당신의 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오. - P315

"자기는 항상 내가 변한 걸 보고 놀라워하지."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자기가 변한 걸 알기나 할까! 자기는 왠지 점점 나에게 관심을 덜보이고 있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땐 특히나 그래. 난 자기에게 마치 공기 같은 것이 될까봐 걱정이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공기에 관심을 갖지는 않아. 사실이잖아? 자기는 이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말하지. 그러나 자기는 이제 나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 P406

당시 나의 모든 생각, 당시 나의 모든 감정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감정이었다. 그것들은 갑자기 나의 생각과 감정이 되었다. - P418

겨울 내내, 매일매일 나는 끈질기게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녀가 그렇게 무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P44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22 0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제 🪓옹 세트 꺼내 보신다에 🖐^^

새파랑 2021-11-22 07:41   좋아요 1 | URL
꺼내만 놔서 넘겨봤는데 파본은 없네요 ^^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책.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내가 처음 목격한 나자의 죽음은 삶의 느낌, 즉 내가 막 알게 된 삶의 느낌을 앗아가버렸다. 나는 내가 죽을 운명이고, 나쟈에게 일어난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 어느 순간 내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지상의 모든 생명체, 육체적·물질적 존재는 반드시 사멸하고 부패하여, 집밖으로 실려 나갈 때까지 나쟈의 입술을 뒤덮었던 연보랏빛 흑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에 젖은 나의 영혼, 마치 무언가에 심하게 창피당하고 모욕당한 듯한 나의 영혼은 도움과 구원을 받기 위해 신을 찾았다. - P66

누구보다 게오르기 형이 그 새로운 생활의 모습으로 나를 고무시키고 들뜨게 했다. 내게 행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당시 형은 늘씬했고, 신선한 젊음, 맑고 훤칠한 이마, 빛나는 눈, 두 뺨에 물든 짙은 홍조로 몹시 아름다웠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모스크바 제국 대학교의 학생이었고, 내가 들어가게 될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 금메달까지 받았다. - P76

이렇게 나는 바스카코프도 올랴도 잊어버릴 테고, 심지어 내가 지금 몹시 사랑하고 있고, 커다란 행복을 느끼며 사냥을 같이 하고 있는 아버지도 잊어버릴 테고, 내게 낯익고 소중한 골목들이 있는 카멘카도 잊어버릴거야. - P80

학창 시절에 대해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때 나는 아이에서 소년으로 변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변화가 나타났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겉보기에 나의 생활은 매우 단조롭고 평범하게 흘러갔다.매일같이 등교하고, 저녁마다 항상 서글픈 마음으로 마지못해 다음날 수업 준비를 하고, 다가오는 방학을 고대하며 끊임없이 꿈꾸고, 크리스마스와 여름방학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항상 세보곤 했다. 아, 이 모든 날들이 더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 P100

이 꽃들이 그저 ‘담배‘라고 불린다는 건 후에야 알았다. 내가 이 냄새를 기억하게 된 까닭은, 그후 며칠 동안 처음으로 달콤하게 앓았던 사랑의 냄새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군에 사는 아가씨 덕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담배 냄새를 맡으면 항상 흥분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전혀 알지 못했고, 내가 평생 동안 담배 냄새를 맡기만 하면 즉시 그녀를, 분수의 신선함을, 군악대의 연주를 떠올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P104

‘도로 젊어지다‘는 한때 양조장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젊고 유쾌한 뭔가가 자기 안으로 들어와 달콤한 발효가 일어나고 이성으로부터, 일상의 얽매임과 규율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하고 싶어했다. 농부들도 보드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능한 한 마셔야지! 보드카를 마시면 사람 마음이 풀어지거든!" ‘러시아의 즐거움은 술 마시는 데 있다‘는 유명한 말은 겉보기와는 달리 전혀 단순하지 않다. - P128

그 겨울밤의 방울 소리, 눈 덮인 텅 빈 벌판의 황량한 밤, 그 놀라움, 추위, 어스름, 부드러움, 떨림 그날 밤 눈과 낮은 하늘이 하나로 합쳐져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앞에서 작은 불빛이 계속 아른거렸는데, 마치 겨울밤이 낳은 신비한 동물의 눈 같았다. 눈 덮인 들판의 밤공기, 너구리털 외투와 얇은 부츠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 모피 장갑에서 빼낸 아가씨의 따스한 손을 난생처음 내 젊고 뜨거운 손으로 잡아본 느낌,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어둠 속에서 사랑스럽게 반짝이던 아가씨의 두눈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P154

‘죽음은 태양 같아서 죽음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는 농부들의 말을 알지요? 바라볼 수도 없고, 바라봐서도 안 돼요.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여전히 걸어다니며 쉰 목소리를 내는 게 부끄럽다오. 그러나 이게 우리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소? - P17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19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작품을 쓴 작가
투르게네프 보다 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


새파랑 2021-11-19 22:50   좋아요 1 | URL
책보면 좀 망했다고(?) 쓰여있던데 그렇게 폭망한건 아니었군요 ^^

2021-11-20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0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11-21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가
여러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새파랑 2021-11-21 12:3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거 같아요. 그래서 자전적인 책이 좀 더 와닿는거 같아요 ^^

서니데이 2021-11-21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도 러시아 작가이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네요.
주말에 미세먼지가 좋지 않습니다.
새파랑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1-11-22 07:43   좋아요 0 | URL
ㅋ 러시아는 광활한거 같아요 ^^ 좋은 한주 시작하세요~!!
 

이 책을 읽고 있으니 그냥 떠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어떤 커피가 맛있습니까?" 라는, 지금 생각해도 아주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는데, 한참을 생각하던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가 맛있습니다"

그날 마셨던 박 선생이 내려준 커피는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다. - P15

이제 내겐 얼마나 많은 하루가 남아 있을까. 돌아가서는 더 열심히 놀아야지 그리고 사랑해야지. - P21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속에 왔다. 삶의 정수를 빨아 들이기 위해 사려 깊게 살고 싶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 P34

"우리가 외롭고 슬프고 쓸쓸할 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 곳은 차가운 바다이거나 끝없이 흘러가는 철길 곁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은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거나 가슴을 울리고 가는 기차 바퀴의 덜컹거림일 수도 있으니" - P87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19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 회복이 안되셔서
당분간 새파랑님 여행지는 요기!
북플
📚탑 속으로~~~**

새파랑 2021-11-19 00:23   좋아요 1 | URL
책으로 그냥 대리만족 해야할거 같아요 ^^

희선 2021-11-19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맛있는 커피는 좋은 사람과 먹는 커피 맞을 듯합니다 커피뿐 아니라 뭐든 좋은 사람과 함께 한다면 좋겠지요


희선

새파랑 2021-11-19 07:38   좋아요 1 | URL
커피맛을 잘 몰라서 그런지 같이 마시는 사람이 확실히 영향이 큰거 같아요. 기억도 많이 남고 ^^

바람돌이 2021-11-19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사람이 좋은 맘으로 정성을 들여서 맛있게 내려준 커피가 맛있습니다. ㅎㅎ
저 조건들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맛 없어지던데요. ㅎㅎ
가령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내린 커피라던가.... ㅎㅎ 저 책 안 읽어도 여행가고 싶습니다. 코로나 오기 직전 1월에 다행히 여행갔다 왔었는데 진짜 그게 딱 마지막이었네요. ㅠ.ㅠ

새파랑 2021-11-19 11:04   좋아요 2 | URL
저도 올해는 놀러를 못간거 같야요 ㅜㅜ 내년에는 이 책에 있는곳을 찾아다니고 싶어요 ^^ 커피는 역시 좋은 사람과~!

하나의책장 2021-11-19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저도 너-무, 너-무 떠나고 싶어요ㅠ

새파랑 2021-11-19 15:34   좋아요 2 | URL
날이 더 추워지기전에 떠나야 겠어요 ^^ 하나님도 꼭 떠나시길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21-11-20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이 좋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는 책이 좋습니다. ^^

새파랑 2021-11-20 15:55   좋아요 0 | URL
뭔든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라면 좋은거 같아요 ^^
 

오늘은 독서가 늦었다. 내일부터 읽어야 겠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행위는 어둠에 덮여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기록된 사실과 행위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과 같다." - P9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내가 죽음에 대해 상상하지 않았다면, 내가 인생을 사랑하고, 사랑해왔던 만큼 이토록 인생을 사랑했을까? - P10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 P2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19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쉬!
새파랑님은 러쉬아 문학 찐 💓

새파랑 2021-11-19 00:21   좋아요 1 | URL
이책 읽다가 잠시 딴책에 빠져서 아직 별로 못읽었어요 😅

페크pek0501 2021-11-20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가 늦은 날도 있어야죠. 저는 오히려 요즘 무리해서 책 읽을까 봐 조심하려고 해요.
며칠 열심히 읽었더니 몸살 나더라고요. 독서 말고도 할일이 많잖아요. 다 합해서 하니까요.
그 정도면 새파랑 님은 잘하고 계신 겁니다. ^^

새파랑 2021-11-20 15:54   좋아요 0 | URL
빨리 퇴근하면 일찍 시작해서 읽고 늦게 퇴근하면 그만큼 늦게 시작? 😅 주말에 놀기 위해서 평일에 열독하려고 합니다~!!
 

˝자네 마음과 내 마음은 대체 어디까지 통하고 있고 어디서부터 떨어져 있을까?˝


살아가면서 가장 알 수 없는건 어떤걸까? 우주의 신비? 인체의 신비?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전망? 나는 단연코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가까워지 더라도, 그 사람과 오래 같이 지내더라도, 예전보다 더 알 수는 있겠으나 완벽히 아는건 불가능하다. 아니 사이가 가까워지고 오래될수록 더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미쳐 알지 못했던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알기 힘든게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P.375


이러한 마음의 어려움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힘들어 하지 않고, 아닌걸 알면 쉽게 마음을 접으며, 어디서든지 무난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동생인 ˝지로˝ 처럼 말이다.

[˝형님한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무척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남의 마음 같은 건 아무리 학문을 한다고 해도,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님은 저보다 뛰어난 학자니까 물론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형제라고 해도 마음과 마음은 그냥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고 실제로 상대와 자신의 몸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닐까요?˝]  P.139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건 아니다. 속칭 예민한 사람들은 상처받을까봐, 버림받을까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한다.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궁금해한다. 이러한 궁금증이 사랑이라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괴로움이라면 격한 의심에 빠질 것이다. ˝지로˝의 형인 ˝이치로˝ 처럼 말이다.

[˝책을 연구한다거나 심리학적인 설명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번거로운 연구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 내 눈앞에 있고 가장 가까워야 한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안절부절못할 만큼의 필요성에 맞닥뜨린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P.137



아내인 ˝나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고, 남편인 자신에게만 어쩐지 차갑게 대한다고 느낀 형 ˝이치로˝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 미칠듯한 의혹과 불신을 갖게 되고, 결국 아내와 사이가 좋은 동생 ˝지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동생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서 정조를 시험해 달라고까지 요구한다.

----------------
˝형수님한테 무슨 일 있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형에게 되물었다.
˝나오는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형의 말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또한 평소 형이 지니고 있는 품격 에도 맞지 않았다.
˝어째서요?˝
˝어째서냐고 물으면 곤란하지.˝
---------------  P.133



과연 형인 ˝이치로˝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을까? 동생인 ˝지로˝는 정말로 형수님에 대한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없었을까? 아내인 ˝나오˝는 왜 자신의 남편에게만 더 거리를 두는 걸까? 그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걸까? ˝지로˝ 역시 전혀 알수 없는 형수님의 마음을 궁금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서간에서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의 영혼, 이른바 정신을 얻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내게는 연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P.138



아내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할수록 ˝이치로˝는 신경쇠약에 빠지게 되고, 결국 ˝지로˝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이치로˝는 지인인 H씨와 함께 요양차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H씨는 ˝지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치로˝와 겪은 일상을 편지로 알려준다. 그리고 현재 형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경고를 한다.

[˝형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뭘 해도 그게 목적이 되지 않을뿐 아니라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네. 그냥 불안한 거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네. 형님은 차분히 누워 있을 수 없으니까 일어난다고 하네.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걷는다고 하네. 걸으면 그냥 걷고 있을 수 없으니까 달린다고 하네. 이미 달리기 시작한 이상 어디까지 가도 멈출 수 없다고 하네. 멈출 수 없는 것뿐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시시각각 속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네.˝]  P.363

[구름에 싸인 태양을 보고 왜 따뜻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그렇게 다그치는 쪽이 억지일 걸세. 나는 이렇게 함께 있는 동안 가능한 한 형님을 위해 그 구름을 걷어내려 하고있네. 자네나 어르신들도 형님에게 따뜻한 빛을 바라기 전에 우선 형님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주는 게 좋을 걸세. 만약 그걸 걷어낼 수 없다면 가족인 자네나 어르신들에게 슬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형님 자신에게도 슬픈 결과가 되겠지.
나도 슬플 거네.]  P.413



이 책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동생인 ˝지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인 ˝이치로˝를 중심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그가 느꼈을 고독, 의심, 괴로움, 절망이 ˝지로˝의 서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걸까? 절대로 알 수 없는 상대방의 마음은 왜 알고싶은걸까? 마음에 대한 궁금증은 언제나 미스테리다.



<친구>, <형>, <돌아오고 나서>, <번뇌>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서로 상반대는 특징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얼마나 다양하고 이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결코 특정 지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 그래서 인간관계가 흥미로운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나니 자연스럽게 소세키의 다음 작품인 <마음>을 재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플을 하기전에 읽은 책이여서 기록된게 없다보니 내가 어떤 감상으로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새로운 관점으로 <마음>을 읽을 수 있을것 같다. 사람이 사람 때문에 얼마나, 어떻게 극단적으로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소세키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약간 무십기까지 하다.



PS 1. 소세키의 장편 열네작품 중 여덟작품을 읽었다. 50퍼센트를 돌파했다. 소세키 작품도 꼭 완독해봐야 겠다.

PS 2. 지금까지 읽은 소세키 작품 중 <행인>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왠지 최근에 읽은 작품으로 계속 바뀌는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초기작 보다는 연애 3부작과 에고 3부작이 확실히 좋았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1-11-18 21:2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꾸준함과 뚝심의 아이콘 새파랑님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란 말이 참 쓸쓸하네요 ㅠㅠ

새파랑 2021-11-18 21:30   좋아요 6 | URL
읽을 수 있을때 부지런히 읽고 쓰고 있습니다 ^^ 다음 책으로 뭘 읽을지 고민중입다 😆

청아 2021-11-18 21: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재독을 부르는 독서였다니 또 솔깃합니다 재찜~♡ 저는 남의 마음 알기는 포기했고 책 읽는 목적중 제 마음알기위함이 있어요ㅋㅋ

새파랑 2021-11-18 21:57   좋아요 6 | URL
기억의 습작을 의도하고 써봤는데 역시 알아차리시는 미미님~!! <마음>이 이책 다음에 출판된건데, 제가 <마음> 읽은지가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 그래서 다시 꺼냈습니다 ㅋ 이건 다음주에 ^^
하긴 내마음도 잘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

coolcat329 2021-11-18 22: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정말 사람은 그 속이 복잡하고 알 수 없는거 같아요.

이 책 잠자냥님도 최애 소세키책으로 뽑으셨는데 새파랑님도 최고군요.
저도 재찜!

얄라알라 2021-11-18 22:35   좋아요 4 | URL
담번엔 쿨캣님의 리뷰로 또 만나게 되겠네요^^

새파랑 2021-11-18 22:43   좋아요 2 | URL
아 잠자냥님도 최애 책이셨군요 ㅋ 이 책은 정말 구성도 탄탄하고 가독성도 좋고 내용도 좋았어요^^

얄라알라 2021-11-18 22: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주의 신비, 바로 그 다음에 나온 게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어서 아주 기억에 콕!

소세키님 애정하시어 강력 추천해주시는 북플친구분들이 많은데도 저는 언제까지 요렇게 간접읽기만 할 건지^^:;

새파랑 2021-11-18 22:45   좋아요 4 | URL
요즘 북플의 대세는 소세키님인거 같아요~! 책을 읽다보면 전작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 작가입니다~! 간접읽기도 좋은것 같아요. 저도 대부분은 간접읽기 입니다 😆

그레이스 2021-11-18 22: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리뷰 읽으니 기억이 새록새록 ^^
제가 처음 만난 소세키 책이예요~♡
리뷰 잘 읽었어요
사람의 마음, 자신의 것조차 모르죠!

새파랑 2021-11-18 23:44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은 이 책이 처음 책이셨군요~!! 전 <그 후>였던거 같아요. 알수없는 마음은 어렵지만 그래서 더 좋은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1-11-18 23: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똑같은 책을 읽어도 이렇게 리뷰를 보면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다시 보이는것 같아요. 사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도 잘 모를때가 많아요. 근데 그냥 믿음을 바탕으로 깔고 살고 있거든요.
그런면에서 이치로가 좀 안타까웠고 누구나 다 지로에게 호감을 가질것 같아요~~
새파랑님의 소세키 전작읽기 응원합니다^^

새파랑 2021-11-18 23:47   좋아요 3 | URL
이 책은 페넬로페님 리뷰 당선작~!! 페넬로페님이 잘 쓰셔서 저는 완전 제 마음대로 썼어요 ㅋ 이치로에 빠져서 저런게 신경쇠약이구나 느꼈어요 ^^ 이젠 소세키 책을 사야겠어요 😆

scott 2021-11-19 0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옹 작품 중 행인이 쵝오!

이치로=소세키옹! ㅎㅎㅎ

새파랑 2021-11-19 00:22   좋아요 1 | URL
역시 형님이 소세키옹이었군요 ㅋ 왠지 삘이 왔습니다~!!

희선 2021-11-19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꾸 좋은 게 바뀌는군요 다음에 《마음》을 보면 어떻게 될지... 이건 먼저 보셨군요 다시 보면 다를지도 모르죠 이치로 마음 어쩐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다는 아니고 아주 조금... 여자라 했지만 사람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이 책 봐야 할 텐데, 언제 볼지...


희선

새파랑 2021-11-19 07:37   좋아요 0 | URL
희선님은 일본 문학 좋아하시니까 금방 보실거 같아요. 언제나 가장 좋은 건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 인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