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과 행위는 어둠에 덮여 망각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기록된 사실과 행위는 마치 생명을 얻은 것과 같다.˝
이반 부닌은 <아르세니프의 인생>이 자서전으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고 하는데, 나는 완전 자전적 이야기로 읽었다. 파리로의 망명 이후 썼다는 이 책은 주인공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처럼 쓰여있다.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아르세니예프˝는 성장해 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가문은 점점 몰락하게 되고, 스쳐 지나가는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작가로서의 인생을 꿈꾸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그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고 이에 대한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특히 사랑이 다가올때마다 설레임을 느끼지만, 결국 사랑을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을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다.
˝이반 부닌˝ 의 단편이 너무 좋았기에 선택했던 그의 장편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며, 러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고 한다. 작품에 큰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메세지가 내포된 것도 아니며, 시종일관 이야기는 담담하게 이어진다.
마치 아름다운 문장들로 쓰여진 단편들이 하나로 이어진 느낌이 더 강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반 부닌˝의 단편이 더 내취향이었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의 외로운 회고와 러시인 소지주로서의 목가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에 비해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서사가 없다보니 약간 호불호가 갈릴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어려웠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올랐다.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잊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영원하고 거대하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무한함 속에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공간인 바투리노란 곳에서 도대체 나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삶이 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삶이란 서로 무관한 감정과 생각들, 과거에 대한 무질서한 회상, 미래에 대한 모호한 예측의 끊임없는 흐름, 즉 한순간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는 흐름이라는 걸 알았다.] P.235
오늘은 매운맛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 P21
나와 저 달은 이제 오래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고, 말없이 끈기 있게 뭔가를 기대하면서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나는 우리 둘이 뭔가를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 P184
당시 나의 모든 생각, 당시 나의 모든 감정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감정이었다. 그것들은 갑자기 나의 생각과 감정이 되었다. - P418
겨울 내내, 매일매일 나는 끈질기게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녀가 그렇게 무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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