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종말은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지˝
문학작품도 나라마다, 대륙마다 어느정도 작품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중남미 문학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 작품의 분위기는 ‘환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SF는 아니지만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는 기분?
이번에 읽은 맥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의지와 문명> 역시 ‘환상‘ 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었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전반적으로 불투명하고 이야기와 인물들도 난해하다 보니 더 ‘환상‘ 적으로 느껴졌다. 읽고 이해하기에는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었으나,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책에 빠져들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다른작품인 <아우라>를 인상깊게 읽어서 였고, 그러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읽었다. 두 작품 모두 특유의 ‘환상‘이 깃들어 있지만, <아우라>가 환상 90, 현실 10이었다면, <의지와 운명>은 환상 50, 현실 50인 작품이었다.
프롤로그부터 작품은 환상적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여호수아˝의 잘린 머리는 태평양 바닷가에 버려져 있고, 잘린 머리는 몸뚱이가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나간다. 낫으로 잘린 머리는 과연 누가, 왜 그랬던 걸까?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채 계모 밑에서 성장한 ˝여호수아˝, 그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아왔다. 18세에 그는 학교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장환경과 취향을 가진 19세 소년 ˝에르고˝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쌍둥이 형제처럼 가까워 지게 된다. 함께한 둘의 만남은 과연 그들만의 의지로 이루어 진걸까? 아니면 어떤 운명이 있었던 걸까?
[우리는 심사숙고한 독서를 통해 우연히 만난 동료였다. 우리의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아슬아슬한)에 의한 것이었지만 운명(위장한 의지)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1권 P.55
그들은 모든 걸 공유한다. 생활, 문학, 심지어 여자까지 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를로스와 플록스‘ 처럼 사이좋은 형제처럼 지내고, 함께 법과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각자의 삶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의 의지가 다름을 알게 되며, 결국 ˝여호수아˝는 변호사가 되기로 하고, 변호사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산후안데아라곤‘이라는 교도소로 실습을 간다. 그리고 ˝에르고˝는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여호수아˝는 교도소 실습중에 미스테리한 인물인 ˝미켈 아파레시도˝라는 죄수를 만나게 된다. 자칭 ‘죄수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는, 죄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교도소에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자신이 그곳을 나가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호수아˝는 그에게 어딘지 수상함을 느끼면서도 동질감을 갖는다. ˝미켈 아파레시도˝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던걸까? 도대체 그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누가 죄인인지 자네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자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2권 P.117
몇년이 흘러 ˝에르고˝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둘 사이는 예전처럼 가깝게 지낼수는 없었다. 이미 각자의 다른 삶을 겪었기에,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쌓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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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멈췄어, 여호수아. 너는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어
˝그 길 끝에는 절벽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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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는 ˝막스 몬로이˝라는 회장이 이끄는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곳에서 회장의 비서인 ˝아순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딘지 미스테리한 인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회장과는 어떤 사이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에르고˝는 그녀에 대한 집착은 날로 커져만 간다.
[특히 나 자신이, 나 자신의 욕망이, 끝도 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나 자신의 욕망이 두려웠다. 바로 이 순간처럼, 내가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은 그 물건들로 만족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혹은 욕망의 대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2권 P.17
한편 ˝에르고˝는 대통령 보좌관이 된다. 권력 유지에 눈이 먼 대통령을 한심하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반란을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막스 몬로이˝의 회사로 피신하게 된다. 그곳에서 ˝아순타˝를 만나게 되고, 하필 그 역시 ˝아순타˝에게 빠지게 된다. 이제 친구사이에서 사랑의 연적이 된 두 남자의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파국으로 흘러간다.
˝아순타˝를 사이에 둔 두 남지의 이야기가 다뤄지는 챕터의 제목은 <카인과 아벨> 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그는 질투로 인해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자이다. 그렇다면 ‘카인‘은 ˝에르고˝ 이고, ‘아벨‘은 ˝여호수아˝이며, ˝에르고˝가 ˝여호수아˝의 목을 자른걸까? 그리고 둘은 실제로 형제 사이였던 걸까?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후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흘러가지 않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파국으로 흘러간다.
과연 둘의 삶과 죽음은 그들의 의지였던 걸까? 아니면 운명이었던 걸까? 성경과 신화를 배경으로 20세기 맥시코의 쿠데타, 빈부격차, 높은 범죄율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 <의지와 운명>은 관련 지식이 없다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특히 망령이 등장하는 비현실성, 다양한 등장인물과 꼬이고 꼬인 관계, 몽환적인 분위기 묘사는 작품을 한층 복잡하게 난해하게 만든다.
[인구 일억이 넘는 나라, 그 인구 중 절반에게 일자리와 먹을거리와 교육을 베풀 수 없는 나라, 노동자 수백만 명을 고용할 수 없는 나라, 도로, 담, 학교, 주택, 병원을 짓기 위해, 숲을 보존하고, 농토를 비옥하게 하고, 공장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들, 허기와 무지와 실직이 범죄를 유도하는 나라, 모든 곳에 범죄가 침투한 나라, 경찰이 범죄자인 나라, 질서가 무너진 나라, 여호수아, 정치는 부패했고, 배는 가라앉았어.] 2권 P.56
역자도 해설에서 이 책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푸엔테스가 항상 비슷비슷한 작품만 쓴다고 투덜거리는 독자도 있다. 푸엔테스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이 책
을 펼치는 순간 ‘아차‘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해 보라. 오묘한 맛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이 책은 분명 ‘오묘‘한 맛이 있다.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섣불리 추천 하기는 망설여지는 작품이나, 새로운 분위기의 책을 찾는 분께는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하셨다면, 완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