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사랑이야기일지, 꿈 이야기일지 궁금하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는 대신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기는 태어난 날 저녁에 사망했다. 그 고집불통의 부르주아 여인은 묘지에 묻힌 관 속에서도 여전히 딸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부부는 간절히 갈망했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스무네 해를 보낸 다음에도 그들은 잃어버린 아기를 여전히 슬퍼하며, 죽은 여인의 고집을 영원히 꺾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젖어 있었다. - P13

보몽은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독립된 도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덕 높이 위치한 보몽-교회 구역은 고색창연한 12세기 성당과 17세기에 와서야 지은 주교 관저를 정점으로 그 아래로 겨우 1천여 명의 영혼들이 좁은 길 구석구석에 조밀하게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보몽-도시 구역은 언덕 아래 리뇰 강을 따라 형성되었는데, 레이스와 곱게 짠 흰 리넨 제조업의 융성과 함께 확장된
옛 성의 외곽 지역으로서, 거의 1만여 명의 인구를 헤아릴 정도였고, 널찍한 광장과 신식으로 지은 근사한 시청이 있었다. 이렇게 남쪽과 북쪽에 자리한 두 공동체 구역은 행정적인 것 외에는 어떤 관계도 없이 공존했다. - P26

오직 ‘황금빛 전설‘만이 그를 열광시켰고, 두 손으로 이마를 괴고 페이지 위로 머리를 기울이도록 그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 그는 시간에 대한 의식도 일상적인 삶도 없었으며, 미지의 세계 깊숙한 곳에서 꿈이 커다랗게 꽃을 피우며 솟아나는 광경을 바라보는 듯했다. - P36

그는 그 협소하고 비밀스러운 가게 앞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나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고 그 여자의 동의를 얻어 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부모 자식의 인연을 영원히 잘라 버릴 권리가 그에게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고 정직한 그의 몫이었다. 돌연 그는 등을 돌리고 그날 저녁 보몽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 P67

"아! 허영심 많은 것, 아! 욕심쟁이, 넌 도저히 구제 불능인 거니? 여왕이 되고 싶은 욕심으로 아주 가 버렸어. 그 꿈은 말이야, 설탕을 훔치거나 무례한 대꾸를 하는 것보다는 덜 고약한 거야. 하지만, 흠, 악마가 그 뒤에 숨어 있어. 열정과 오만이 그 뒤에서 말하고 있단 말이지." - P75

"고통 말인데요, 아! 어머니, 제가 그걸 얼마나 비웃는지 아신다면! 우린 자신을 이기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 P77

5월의 어느 날 밤, 그녀는 발코니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다음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슬픔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올 턱이 없음에도 그녀는 어떤 기다림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밤은 몹시 어두웠다. - P99

우리는 무엇이 있는지 소리 높여 말할 필요가 없을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메신저들이 그 사실을 옮겨 주고, 침묵하는 입이 그 사실을 반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가 얼굴을 돌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감미로운 순간이었다. - P112

그는 그녀의 말에 매료되어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달콤한 취기에 빠뜨렸다. 그의 마음을 파고들 듯 길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어떤 극도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 음절 위로 가해지는 다정다감한 어조의 변화가 그의 눈을 적시는 것을 보면 그가 그 인간적인 음악에 특별히 민감한 게 틀림없었다. - P119

아침저녁으로 미소를 주고받는 일은 매우 달콤했다. 그녀는 행복했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빨래는 세 달 후에나 다시 하게 되어 있었고, 정원 문은 그때까지 닫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일 서로 눈으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세달, 세 달은 너무도 빨리 지나갈 것이다. 낮은 저녁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고 밤은 아침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사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있을까? - P122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애인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셔브로트 개울은 더 이상 그녀의 발을 묶을 수 없었다. 그녀는 쫓기는 암사슴처럼 개울 속으로 달려들었다. 차가운 물속에서 떨며 그녀의작고 하얀 발이 조약돌 사이로 달렸다. 정원의 문이 다시 닫혔다. 그녀의 두 발이 사라졌다. - P13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27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11월 마지막 주말은 졸라의 <꿈>!!
을유 책 만듦새 튼튼해서 좋음 ^0^

새파랑 2021-11-27 09:15   좋아요 1 | URL
꿈 읽다가 이른 꿈나라로 가버렸어요 😅 스콧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왼손잡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게 아니었다. 이름은 좀 낯설지만 러시아에서는 천재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는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단편집 <왼손잡이>를 읽었다. 예전에 그가 쓴 <러시아의 맥벅스 부인>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었는데, 날씨도 추워지고 하니 러시아가 떠올라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레스코프"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는 정말 러시아 서민의 삶을 잘 안다는게, 사랑한다는게 문장에서 느껴진다. 작품 주인공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서민이고, 이야기 내내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며, 기득권층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이를 조롱한다.


이 책에 실린 <왼손잡이>, <분장예술가>, <봉인된 천사> 세 작품 모두 이런 특징을 보인다.


<왼손잡이>에서는, 비록 유럽에 비해 과학은 덜발달했지만 러시아 장인들이 가진 기술과 정신은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유럽처럼 계산적으로 살아가는게 아니라 본연의 임무와 운명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장인 "왼손잡이"의 삶을 보여주면서 러시아 서민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단지 여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장인인 "왼손잡이"를 무시하고 방치하여 죽게 만든 조국 러시아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풍자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인 "왼손잡이"는 자신에게 해준것도 없는 조국을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워한다.

["그건 아무 상관 없구먼유." 그가 대답했다. "어디서 죽든지 모든건 다 하느님의 뜻이니까유. 어쨌든 저는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고 싶네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구먼유."]  P.67



<분장예술가>에서는, 러시아 서민은 왜 한이 많은지, 왜 보드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의 강압적인 횡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류보피"를 겁탈하려는 주인의 만행을 피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도주하는 분장예술가 "아르카지"는 결국 도주에 실패하게 된다.


그나마 주인의 배려있는 처벌로 "아르카지"는 군에 입대하게 되고, 그곳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되며, "류보피"를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그는 그녀를 만나지도 못한 채 비극적인 사고로 죽게 된다.


사랑하는 "아르카지"를 그리워 한던 "류보피"는 결국 '망각의 독'인 보드카를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보드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그를 잃은 고통과 그리움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 모습이 생생하다. 매일 밤,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이들면, 그녀가 자신의 앙상한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상이 걸린 가느다란 다리를 움직여 창문으로 다가가던 모습이. 그렇게 그녀는 잠깐 동안 서서 혹시 침실에서 어머니가 나오시지나 않을까 주위를 살펴보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고 조용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술을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그렇게 마음속 불을 끄면서 또한 아르카지를 추모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재빨리 이불을 덮으면, 곧바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평생 이보다 더 무섭고 가슴을 찢는 추도식은 본 적이 없다.]  P.136



<봉인된 천사>에서는, 러시아 구교를 믿는 석공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던 '이콘(성상화)'이 관청에 의해 몰수당하게 되자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러시아는 정교가 국교였고 구교는 이단의 성격이 강했으나, 그럼에도 석공들은 주위의 차별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전부인 '이콘'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러시아 서민들이 가지는 신에 대한 믿음의 순수성과 한가지에 빠지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목성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접하게 된 분위기란 것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옛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선의나 경건함이 아닌, 오로지 독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본 것은 조용히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P.209




이 책을 읽고나서 러시아 서민들이 왜 보드카를 좋아하는지, 왜 이콘을 그렇게 소중히 하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은 날씨가 추워서 보드카를 마시는게 아니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한을 녹이기 위해 보드카를 마셨을거고,

아마 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니라 힘들지만 어렵게 버텨낸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기 위해 이콘을 소중히 했을 것이다.



<왼손잡이>에 수록된 세 단편은 모두 재미있고, 너무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러시아 서민의 삶과 한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그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상류층의 삶 보다는 오히려 서민의 삶을 들여다 보는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1-11-26 17: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참 재밌게 읽었어요. 같이 수록된 <쌈닭>도요~
저도 이 책 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날이 추워지니 저도 러시아가 생각나 ㅎ 요즘 체호프 읽고 있는데 가장 러시아적인 레스코프가 있었네요~!

새파랑 2021-11-26 18:12   좋아요 3 | URL
ㅋ 쌈닭 생각이 납니다~!! 날이 추워지니 러시아도 생각나고 보드카도 생각나고 😆 체호프 완전 좋죠~!! 체호프 초기작 찾아 읽어야 되는데 쉽지가 않네요 ㅋ 둘다 단편이지만 한명 좀 고급스럽고 한명은 좀 서민적인 차이가 있는거 같아요 ㅋ

stella.K 2021-11-26 18: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은 원래 사철 상관없이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잖아요.
더구나 잘 빠진 도 슨상님 전집도 들여 놓으셨겠다 올겨울이 그 어느 때보다
따땃하겠어요.ㅎㅎ

마침 저도 가지고 있는 책이먼유.
읽어봐야겠구만유.
근디 어느 나라든 외국어 사투리를 있는 그대로 번역할 수는 없고
치환시키면 거의 대부분 충청도 사투리로 하는 것 가터유.^^

새파랑 2021-11-26 18:14   좋아요 4 | URL
저는 러시아가 좋나봐요 ㅋ그래도 추우면 더 생각나는 러시아라는~!! 도선생님 책은 언제 휴가내서 각잡고 읽으려고 준비중입니다 ^^

이 책도 다 시골 사람은 충청도 사투리써요 ㅋ 너무 정겨웠습니다 ^^

청아 2021-11-26 18: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 레스코프군요!! 쌈닭에서 실랄한 풍자에 정신이 아득했었는데 왼손잡이 꼭 읽어야겠어요!😄 추울땐 역시 러시아소설👍

새파랑 2021-11-26 18:15   좋아요 4 | URL
미미님 지금 읽으시는 책 읽다가 이 책 읽으시면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하게되실 겁니다 ^^ 추울때는 북극보다는 러시아죠~!!

페넬로페 2021-11-26 19: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소설 전문가님의 글에 넘 공감합니다, 러시아적인 것, 참 매려적이예요. 러시아 민중들이 보드카를 마셔야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아요.
오죽하면 혁명이 일어났을까요!
저도 러시아와 러시아 소설 좋아해요^^

새파랑 2021-11-26 19:16   좋아요 3 | URL
러시아 보드카도 좋아해주세요 ^^ 제가 러시아 전문은 아니지만 많이 좋아합니다 😆

Falstaff 2021-11-26 19: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문둥이네의 늘이기 편집실력을 감상하실 수 있으며, 무엇보다 더버빌가의 테스로 잉글랜드를 제패하고 이어서 러시아까지 완벽하게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의 세계화된 우월성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새파랑 2021-11-26 19:50   좋아요 5 | URL
앗 ㅋㅋ 그래서 제가 이 책을 금방 읽은거였군요. 페이지에 비해서 책이 금방 읽히더라구요 😅 그래도 가격은 착했던 거 같아요 ㅎㅎ 책에 읽는 충청도 사투리 나름 즐거웠습니다~! 더버빌가의 테스도 곧 읽어야 겠군요~!

scott 2021-11-26 23:39   좋아요 3 | URL
채털리부인에도 충청도 사투리가 나옴요^^

mini74 2021-11-26 23: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맥베스부인 , 왼손잡이 ㅠㅠ ㅎㅎ 읽고 싶은 책은 왜 이리 많은지. 딴 소리지만 저는 러시아 장인하면 파배르제의 달걀이 떠올라요 ㅎㅎ

새파랑 2021-11-27 09:09   좋아요 1 | URL
저는 파베르제의 달걀 몰라서 찾아봤는데 보물이군요 ^^ 이 책보다는 러시아 맥베스 부인이 더 재미있어요 ~!

희선 2021-11-27 0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서민 이야기군요 서민은 어느 나라나 살기 어렵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러시아 서민한테도 한이 있다니, 한국 사람이 생각나기도 하는... 충청도 사투리 재미있겠네요 다른 나라 사투리는 한국말로 그대로 옮기기 어렵기도 하죠


희선

새파랑 2021-11-27 09:11   좋아요 2 | URL
그래서 번역을 하면 충청도 사투리로 많이 하는거 같아요. 뒤에 ‘~~유‘만 붙여서요 ㅋ
 

역시 러시아는 훌륭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많다. 니콜라이 레스코프 작품도 부지런히 찾아봐야 겠다.


"저 사람, 루터교인인가요, 아니면 개신교인?"
특사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는 루터교인도, 개신교인도 아닙니다. 러시아 정교도 입니다."
"아니 그런데 왜 왼손으로 성호를 긋지요?"
특사가 답했다.
"저 사람은 왼손잡이라서 모든 걸 왼손으로 합니다." - P58

"그건 아무 상관 없구먼유." 그가 대답했다. "어디서 죽든지 모든건 다 하느님의 뜻이니까유. 어쨌든 저는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고 싶네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구먼유." - P67

"왜 안 됩니까. 형님이 한 약속, 형님이 취소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그러자 집주인인 백작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대구하며 말했다.

"내가 만약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말이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시킬 수가 있겠느냐?" - P101

"두려워 말아요. 내가 데려갈 테니." - P107

"그래, 그랬어요. 아르카지 일리치는 그렇게 그 여인숙 주인에게 살해당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이 무덤에 묻혔지요. 그래요, 그는 지금 여기 우리 아래에, 이 흙무더기 아래에 누워 있어요. 도련님은, 제가 왜 언제나 도련님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산책하러 오는지 궁금해했지요. 저는 이제 저곳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요." - P132

그러면서 그녀는 음울한 잿빛 폐허를 가리켰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잠시라도 그 사람 곁에 앉아서 그의 영혼을 위해 술 한 잔이라도 올리려고. - P132

지금도 나는 그 모습이 생생하다. 매일 밤,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이들면, 그녀가 자신의 앙상한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상이 걸린 가느다란 다리를 움직여 창문으로 다가가던 모습이. 그렇게 그녀는 잠깐 동안 서서 혹시 침실에서 어머니가나오시지나 않을까 주위를 살펴보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고 조용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술을 마셨다. 한 모금, 두모금, 세 모금...그렇게 마음속 불을 끄면서 또한 아르카지를 추모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재빨리 이불을 덮으면, 곧바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평생 이보다 더 무섭고 가슴을 찢는 추도식은 본 적이 없다. - P136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접하게 된 분위기란 것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옛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선의나 경건함이 아닌, 오로지 독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본 것은 조용히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 P2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26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새파랑님
왼🖐오른🖐
모두 회복!

레스코프의 <봉인된 천사>
타르코프스키 영화와도 맞닿는 작품 입니다 ^^

새파랑 2021-11-26 07:45   좋아요 1 | URL
러시아식 민중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역시 읽는 즐거움은 러시아가 👍
 

˝삶의 종말은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지˝


문학작품도 나라마다, 대륙마다 어느정도 작품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중남미 문학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 작품의 분위기는 ‘환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SF는 아니지만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는 기분?


이번에 읽은 맥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의지와 문명> 역시 ‘환상‘ 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었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전반적으로 불투명하고 이야기와 인물들도 난해하다 보니 더 ‘환상‘ 적으로 느껴졌다. 읽고 이해하기에는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었으나,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책에 빠져들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다른작품인 <아우라>를 인상깊게 읽어서 였고, 그러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읽었다. 두 작품 모두 특유의 ‘환상‘이 깃들어 있지만, <아우라>가 환상 90, 현실 10이었다면, <의지와 운명>은 환상 50, 현실 50인 작품이었다.


프롤로그부터 작품은 환상적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여호수아˝의 잘린 머리는 태평양 바닷가에 버려져 있고, 잘린 머리는 몸뚱이가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나간다. 낫으로 잘린 머리는 과연 누가, 왜 그랬던 걸까?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채 계모 밑에서 성장한 ˝여호수아˝, 그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아왔다. 18세에 그는 학교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장환경과 취향을 가진 19세 소년 ˝에르고˝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쌍둥이 형제처럼 가까워 지게 된다. 함께한 둘의 만남은 과연 그들만의 의지로 이루어 진걸까? 아니면 어떤 운명이 있었던 걸까?

[우리는 심사숙고한 독서를 통해 우연히 만난 동료였다. 우리의 만남은 전적으로 우연(아슬아슬한)에 의한 것이었지만 운명(위장한 의지)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1권 P.55



그들은 모든 걸 공유한다. 생활, 문학, 심지어 여자까지 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를로스와 플록스‘ 처럼 사이좋은 형제처럼 지내고, 함께 법과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각자의 삶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의 의지가 다름을 알게 되며, 결국 ˝여호수아˝는 변호사가 되기로 하고, 변호사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산후안데아라곤‘이라는 교도소로 실습을 간다. 그리고 ˝에르고˝는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여호수아˝는 교도소 실습중에 미스테리한 인물인 ˝미켈 아파레시도˝라는 죄수를 만나게 된다. 자칭 ‘죄수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는, 죄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교도소에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자신이 그곳을 나가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호수아˝는 그에게 어딘지 수상함을 느끼면서도 동질감을 갖는다. ˝미켈 아파레시도˝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던걸까? 도대체 그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누가 죄인인지 자네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자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인가?˝]  2권 P.117



몇년이 흘러 ˝에르고˝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둘 사이는 예전처럼 가깝게 지낼수는 없었다. 이미 각자의 다른 삶을 겪었기에,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쌓였기 때문이다.

--‐--------------------
˝너는 멈췄어, 여호수아. 너는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어

˝그 길 끝에는 절벽이 있었으니까.˝
--‐--------------------  2권 P.142



˝에르고˝는 ˝막스 몬로이˝라는 회장이 이끄는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곳에서 회장의 비서인 ˝아순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딘지 미스테리한 인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회장과는 어떤 사이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에르고˝는 그녀에 대한 집착은 날로 커져만 간다.

[특히 나 자신이, 나 자신의 욕망이, 끝도 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나 자신의 욕망이 두려웠다. 바로 이 순간처럼, 내가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은 그 물건들로 만족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혹은 욕망의 대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2권 P.17



한편 ˝에르고˝는 대통령 보좌관이 된다. 권력 유지에 눈이 먼 대통령을 한심하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반란을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고 ˝막스 몬로이˝의 회사로 피신하게 된다. 그곳에서 ˝아순타˝를 만나게 되고, 하필 그 역시 ˝아순타˝에게 빠지게 된다. 이제 친구사이에서 사랑의 연적이 된 두 남자의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파국으로 흘러간다.


˝아순타˝를 사이에 둔 두 남지의 이야기가 다뤄지는 챕터의 제목은 <카인과 아벨> 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그는 질투로 인해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자이다. 그렇다면 ‘카인‘은 ˝에르고˝ 이고, ‘아벨‘은 ˝여호수아˝이며, ˝에르고˝가 ˝여호수아˝의 목을 자른걸까? 그리고 둘은 실제로 형제 사이였던 걸까?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후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흘러가지 않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파국으로 흘러간다.


과연 둘의 삶과 죽음은 그들의 의지였던 걸까? 아니면 운명이었던 걸까? 성경과 신화를 배경으로 20세기 맥시코의 쿠데타, 빈부격차, 높은 범죄율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 <의지와 운명>은 관련 지식이 없다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특히 망령이 등장하는 비현실성, 다양한 등장인물과 꼬이고 꼬인 관계, 몽환적인 분위기 묘사는 작품을 한층 복잡하게 난해하게 만든다.

[인구 일억이 넘는 나라, 그 인구 중 절반에게 일자리와 먹을거리와 교육을 베풀 수 없는 나라, 노동자 수백만 명을 고용할 수 없는 나라, 도로, 담, 학교, 주택, 병원을 짓기 위해, 숲을 보존하고, 농토를 비옥하게 하고, 공장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들, 허기와 무지와 실직이 범죄를 유도하는 나라, 모든 곳에 범죄가 침투한 나라, 경찰이 범죄자인 나라, 질서가 무너진 나라, 여호수아, 정치는 부패했고, 배는 가라앉았어.]  2권 P.56



역자도 해설에서 이 책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푸엔테스가 항상 비슷비슷한 작품만 쓴다고 투덜거리는 독자도 있다. 푸엔테스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이 책
을 펼치는 순간 ‘아차‘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해 보라. 오묘한 맛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이 책은 분명 ‘오묘‘한 맛이 있다.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섣불리 추천 하기는 망설여지는 작품이나, 새로운 분위기의 책을 찾는 분께는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하셨다면, 완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될 것이다.






댓글(52)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새파랑 2021-12-10 13:47   좋아요 2 | URL
댓글다시던 분들중 저는 완전 초보에요😅 또한번 감사드립니다~!!

희선 2021-12-11 0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또 축하합니다 남은 십이월에도 즐겁게 책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새파랑 2021-12-11 09:35   좋아요 0 | URL
이번달에도 운이 좋았던거 같아요. 노력상입니다 ^^
희선님의 12월도 멋진 책과 시가 함께 하기를 바랄께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겨우 완독. 이 책은 어려운 책이 확실하다 ㅋ






말이 필요했을까? 행위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말들은 쾌락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사랑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린다고 아순타가 말했던가? 노래 가사에서, 시에서, 사랑의 행위와 말 사이의 그 불가능한 비유에서 나온 표현들은 모두 다 그렇단 말인가? - P47

인구 일억이 넘는 나라, 그 인구 중 절반에게 일자리와 먹을거리와 교육을 베풀 수 없는 나라, 노동자 수백만 명을 고용할 수 없는 나라, 도로, 담, 학교, 주택, 병원을 짓기 위해, 숲을 보존하고, 농토를 비옥하게 하고, 공장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들, 허기와 무지와 실직이 범죄를 유도하는 나라, 모든 곳에 범죄가 침투한 나라, 경찰이 범죄자인 나라, 질서가 무너진 나라, 여호수아, 정치는 부패했고, 배는 가라앉았어. - P56

모든 현실은 환상이 아닐까? - P65

예리고와 나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였고, 의지와 운명을 찾아 영원히 탐험을 계속하는 원정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그건 망령을 구해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탐험이었다. - P111

내 출생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수수께끼가 내가 내 삶을, 나 자신이, 내 자유가 결정한 그대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 P132

"너는 멈췄어, 여호수아. 너는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어

"그 길 끝에는 절벽이 있었으니까." - P142

예리고는 폭력으로 권력에 도전하려 했다. 그는 합법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혁명적인 행위와 경찰이 다루는 문제를 혼동했고, 그래서 그 대가로 받은 것은 재앙, 도주, 감옥이었다. - P150

기억이란 단지 일종의 모의실험, 즉 우리가 잊어버린, 혹은 더욱더 좋지 않을 경우, 우리가 결코 살아보지 못한 것을 기억해 내는 그런 게 아닐까? - P189

"삶의 종말은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오지" - P19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24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열독의 의지로 !완독한 이책

리뷰는 운! 命 (-‿◦☀)

새파랑 2021-11-25 00:29   좋아요 2 | URL
이 책의 리뷰(?)가 별로 없는 이유를 알것 같아요 ㅋ 너무 난해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