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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기억할 때마다 아플지라도. 한번 기억속에서 사라지면 영원히 잊혀지기 때문에.
무엇으로부터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을까?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외부와의 접촉도 없이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경하˝, 그녀는 유서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날 과거에 같이 일했던 친한 친구인 ˝인선˝으로부터 한통의 문자를 받는다.
˝경하야, 지금 와줄 수 있어?˝
노환인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팔년 전 서울에서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간 ˝인선˝ 하지만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제주도가 아닌 봉합수술 전문병원 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영상제작 일을 하던 ˝인선˝이었지만, 제주도로 돌아가서는 목공방에서 일을 하던 그녀였기에, ˝경하˝는 ˝인선˝이 일을 하다가 다쳤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인선˝을 만난 ˝경하˝는 그녀가 작업을 하다가 검지와 중지가 잘려서 봉합된 것을 보게 되고, 봉합된 손가락의 신경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삼분에 한번씩 상처를 내어 소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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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신경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뭐, 썩는 거지. 수술한 위쪽 마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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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선˝은 ˝경하˝에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탁을 한다. 지금 바로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에 방문하여 키우고 있는 앵무새를 돌봐달라고, 오늘 가지 않는다면 앵무새는 죽을 거라고. 그녀의 진지한 부탁에 ˝경하˝는 알겠다고 하고, 그녀의 바람대로 자신의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운이 좋구나,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 비행기편으로 섬으로 들어왔고, 인선의 마을로 데려다줄 마지막 지선버스에 방금 올라탔다. 비행기에서 들었던 연인들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P.120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제주도는 폭설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마비에 가까운 지경이었고, ˝인선˝의 집은 산중턱에 위치한 오지였다.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동네 인근까지 가지만, 목적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하˝는 그녀의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미끌어져 없어지게 되고, 의식을 잃게 된다. 이후 꺠어난 그녀는 눈덮인 풍경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는 모르는 이유 때문인지 세계가 약간 바뀐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눈과 추위와의 사투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그녀의 사고현장을 보게 되고,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뒷뜰에 앵무새를 묻어주고, 방으로 돌아와서 얼은 몸을 녹이려고 한다. 그러면서 ˝인선˝이 촬영했던 영화를 떠올리고, 그녀가 작업하고 있던 백그루가 넘는 통나무를 본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이 들어오지 않는 단전이 발생한다. 창문이 덩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한을 견뎌 나가는 ˝경하˝, 그녀 역시 ˝인선˝과 마찬가지로 생과 사의 경계에 있게 된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P.172
오후 네시에 깨어난 ˝경하˝는 열이 내려있고, 평소의 아픔이 사라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묻었던 앵무새가 살아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 놀라운건 공방으로 가보니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있는 것이었다. 이건 꿈일까? 환상일까? 사후 세계일까? 아니면 현실? 그러거 보니 언제부터가 현실이었는지 햇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선˝은 ˝경하˝에게 그동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자신이 어머니가 경험한 이야기를, 어머니와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과 고통에 대해 들려준다. ‘제주도 4.3 사건‘의 진실에 대해.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반공주의와 이데올로기라는 광기에 의해 무고한 제주도 주민들이 학살된 그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였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진상을 밝히기 위한 삶을 살았었고, 딸인 ˝인선˝ 역시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의지를 이어받는다. 도대체 이 사건에는 어떤 아픔이 있었던 걸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내가 읽은 한강 작가님의 첫 작품이다. 예전에 작가님 작품의 리뷰를 읽었을 때도 (심리적인) 아픔이 느껴진다는 평을 많이 봤었는데, 직접 읽어보니 완전 공감했다. 특히 ˝인선˝의 두 손가락이 절단된 과정과 이를 접합하기 위한 치료 과정이 너무 섬세하게 묘사되어서 마치 내 손가락이 다친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내가 얼마전에 손을 다쳤었다...
제주도 4.3 사건을 다루고 있고, 등장 인물들이 한결같이 침울하다보니 작품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이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역사적 아픔‘의 비극성을 극대화 하는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평행세계와 같은 약간 비현실적인 설정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설정이 작가님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양한 비유가 등장하는데 이런걸 찾는 것도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요소였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 P.44
이 책 덕분에 제주 4.3 사건도 찾아보게 되고,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역사적 비극을 다시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이 있기에 우리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작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