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광선의 책은 역시 흥미로웠다.






<빛속으로>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네요."
"그렇죠."
"사실 선생님한테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요."
"물론 나는 조선인입니다."
기분 탓인지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 P20

<빛속으로>

"예를 들어 내가 조선인이라고 하면, 저런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기분 속에는 애정 이외에 나쁜 의미의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다른 감정이 앞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그런 식으로 나를 불렀을 뿐이에요. - P22

<빛속으로>

자기 어머니 병문안을 오면서 남의 눈을 피하거나,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오히려 소년의 그런 모습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 P58

<빛속으로>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내 손에 자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웃옷을 내던지고 달려 내려갔다. 나도 문득 구원받은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쓰러질 듯 타다닥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 P68

<천마>

"나는 이제 조선어 창작은 질렸습니다. 조선어 따위 똥이나 처먹으라고 하세요. 그건 멸망의 부적이니까요." 그는 지난밤 모임을 떠올리며 되는대로 허세를 부렸다. "나는 도쿄 문단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도쿄의 친구들도 모두 그러기를 열심히 권하고 있죠." - P82

<천마>

사실 그는 허울 좋은 애국주의의 미명 아래 숨어 조선어로 쓰는 것은 어리석고, 언어 그 자체의 존재조차 정치적인 무언의 반역이라고 헐뜯는 자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P90

<천마>

이제 와서 보니 모든것이 자신을 슬프게 할 씨앗이 아니었던가 - P110

<천마>

일본인을 만났을 때는 일종의 비굴함으로 조선인의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도 일본인과 동급이라고 믿는 그였다. 드디어 현룡은 불같은 열정으로 타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나는 이런 구제할 길 없는 민족성을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네. 다나카, 이보게 자네, 내 기분을 알겠나?" - P120

<풀이 깊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옛 스승은 슬픈 듯 멈추어 서서 중얼거렸다. - P166

<풀이 깊다>

방화는 쫓겨 들어가는 그들이 이 세상에 퍼붓는 일종의 저주일까? 군청에서는 자기 관할 내에서 만큼은 화전민들을 살게 할 수 없다며 사방에서 화전민을 쫓아내기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산속 깊이, 산속 깊이. - P17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2-16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2021년 서재 달인 되셨삼 333
추카 해유 ^ㅎ^

새파랑 2021-12-16 14:56   좋아요 0 | URL
이야 ㅋ 저에게 이런일이~!! 감사합니다 ^^
스콧님도 축하드려요 😆
 


˝나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 속에는 아마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논리적인 생각이다.˝


<그로칼랭>은 ˝로맹가리˝와 ˝에밀아자르˝가 동일 인물인지 몰랐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속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그로칼랭은 ‘열렬한 포옹‘ 이라는 뜻이다.)


도시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쿠쟁˝, 그에게 사람은 어렵고 사랑은 더 어렵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 맴돌고, 공상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용기내어 말을 건네고, 마음을 고백해 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건 냉소와 거절 뿐이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단뱀 ˝그로칼랭˝. 아무 조건없이 ˝쿠쟁˝을 좋아해주는 ˝그로칼랭˝과 함께 있을때에만 그는 행복을 느낀다.

[사람은 온전히 자기 입장이 될 수는 없다. 이미 자기 입장에 있을 뿐더러, 곧 불안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방법을 통해 다른 이의 입장이 될 수는 있다.]  P.98



그러나 자신의 전부인 ˝그로칼랭˝을 동물원에 보내고 난 후 그는 큰 상실감을 느낀다. 결국 ˝그로칼랭˝에 점점 동화되면서 그의 정신분열은 극대화된다. 외로운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절대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기묘하고 유쾌하며, 예측불가능한 ˝쿠쟁˝과 ˝그로칼랭˝의 행동은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이 오히려 ˝쿠쟁˝과 같은 사람이 가지는 외로움의 선명함을 더해준다. 왜 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걸까?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내용은 더없이 독창적인 <그로칼랭>, 나는 이 작품을 읽고나서 ˝로맹 가리˝는 문학의 천재라는 생각을 했다.



Ps.  지금까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작품은 총 다섯편을 읽었는데(생각보다 얼마 안읽었다) 다 좋았고 작품마다 색깔이 뚜렷함을 느꼈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 : 그로칼랭
가장 감동적인 작품 : 자기만의 생
가장 좋아하는 작품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1-12-15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에 인천에 갔다가 로맹 가리
의 <그로 칼랭>을 데리고 왔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구요.
나름 제가 전작하는 작가라 애정 뿜뿜!~

새파랑 2021-12-15 11:53   좋아요 3 | URL
재독이시군요~! 레삭매냐의 전작 작가라니 왠지 제가 뿌듯하네요. <그로칼랭> 왠지 B급 감성도 느껴지면서도 재미있더라구요 ^^

청아 2021-12-15 12: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벌써 5권이나 읽으셨군요! 그로칼랭이 ‘열렬한 포옹‘의 의미라니 로멘틱했는데 비단뱀!!ㅋㅋㅋ로맹가리의 재치는 정말 놀랍네요. 발췌문도 👍

새파랑 2021-12-15 12:13   좋아요 3 | URL
이 책의 주인공인 ˝쿠쟁˝이 비단뱀을 안고 자요 ^^ 책을 정신없이 읽는다고 밑줄도 별로 못그었어요 ㅋ 갠적으로는 유쾌한 책이었습니다~!

미미님 집에 로맹가리 모든 작품이 있을거 같아요 ㅋ

청아 2021-12-15 12:20   좋아요 3 | URL
거의 다 있어요ㅋㅋㅋ✌

페넬로페 2021-12-15 13: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첫 구절!
제가 죽어도 생각지도 못한 의미입니다.
전율!
그래서 저는 죽을때까지 책을 읽고 배워야하나봐요~~
독창적이고 유쾌한 이 작품,
꼭 읽어야겠어요^^

새파랑 2021-12-15 14:19   좋아요 4 | URL
리뷰를 잘 써보려고 했는데 점심시간에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좀 짧게 썼어요 ^^ 문장들이 다 감탄이 나오고 정말 독특합니다~!!

프레이야 2021-12-15 14: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이제 로맹 가리인가요.
완전 응원합니다. 그로칼랭은 읽지 않은 작품인데 가장 독창적이고 유쾌하다고 하시니 어여 영접해야겠어요ㅎㅎ 바로 주문했어요 중고로.

새파랑 2021-12-15 14:20   좋아요 5 | URL
요새 로맹 가리, 필립 로스, 에밀 졸라, 소세키, 사강 책을 한권씩 돌아가면서 읽고 있어요 ^^ 완전 유쾌합니다 ㅋ <자기앞의 생> 유머버젼 이에요~!!

독서괭 2021-12-15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자기앞의 생에도 꽤 유머러스한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훨씬 유쾌하다니 읽어보고 싶네요! 새들은 페루~는 예전에 있었는데 어디갔나..😨

새파랑 2021-12-15 16:28   좋아요 4 | URL
이 책은 읽다가 중간에 이게 뭐야? 이러실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 웃긴데 좀 엽기적인? ㅎㅎ 약간 안맞는 부분도 있을거에요~!!

coolcat329 2021-12-15 14: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꾸준히 돌아가며 전작읽기 도전하시는 모습 정말 멋집니다. 로맹 가리 페루 하나도 기억안나는데 이것도 다시 읽어야겠어요. ㅠ

새파랑 2021-12-15 16:29   좋아요 2 | URL
차라리 한 작가 책만 몰아서 읽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페루는 그 분위가가 너무 좋았어요~!!

mini74 2021-12-15 15: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의 선명함. 이 문장이 마음에 콕 와닿습니다 ㅎㅎ 가장 독창적이라니 !! 전 자기만의 생과 페루만 읽었어요. 그로칼랭 기억해두지요. 1월에 보자 그로칼랭 ㅎㅎㅎ

새파랑 2021-12-15 16:30   좋아요 4 | URL
외로움의 선명함은 제가 창작(?)한 말입니다 ㅋ 그런데 어딘가에 이런 말을 쓴 책이 있겠죠? 이책 미니님 스타일일듯 ^^

희선 2021-12-16 0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야기 본 적 있어요 그로칼랭 뜻은 이번에 알았네요 사람과 사람은 어렵기는 하죠 동물은 사람과 다르기도 하고, 그게 비단뱀이라니... 그렇게라도 덜 쓸쓸했다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은데 동물원에 보내고 쿠쟁이 이상해지는군요


희선

새파랑 2021-12-16 06:39   좋아요 3 | URL
2미터가 넘는 비단뱀하고 같이 살고, 그걸 가지고 밖에 돌아다니고 하는 설정이 너무 유쾌했어요. 사람보다 더 마음을 주는 비단뱀이라니 ^^

고양이라디오 2021-12-17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기 앞의 생>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로맹 가리씨 작품을 더 만나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17 10:55   좋아요 1 | URL
<자기앞의 생>은 정말 명작인거 같아요. 로맹가리는 글 잘쓰시는분~!!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세요 ^^
 

이 작품을 읽으면서 ˝로맹 가리˝를 떠올릴 수 없었다. ˝에밀 아자르˝ 그 자체. 완전 새로운 느낌이었다.

실제로 체험하고 직접 관찰한 것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으니까요. 이 주제는 그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절대로 글을 꾸미려 하지 마세요. - P35

나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 속에는 아마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논리적인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는. - P37

희망을 품지 않으면 확실히 죽도록 무서울 일도 없다. 희망과 공포는 늘 붙어 다닌다. - P57

아는 이를 죽이는 것이 언제나 더 힘든 법이지요. 전쟁 중에 군종신부였기 때문에 잘 알아요. 가까운 곳보다 누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죽이는 것이 훨씬 쉽지요. 전투기 조종사들은 폭격할 때 죄책감을 덜 느낍니다. 아주 높은 곳에서 보니까요. - P84

사람은 온전히 자기 입장이 될 수는 없다. 이미 자기 입장에 있을 뿐더러, 곧 불안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방법을 통해 다른 이의 입장이 될 수는 있다. - P98

사랑은 서로 왕래하고 연애편지를 주고받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어요. 사랑은 아마도 인간이 응답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대화일 겁니다. - P140

여러분, 자기 일로 애태우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남의 일로 애태우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쪽이 덜 괴롭습니다. 각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고독입니다. 자기 생각은 그만두세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살기 위해 안고 있는 온갖 어려움을 생각해보면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동지 의식이 있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 P154

나는 더이상 그로칼랭이고 싶지 않았다. 그로말랭이 되어 변화하고 싶었다. - P3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기억해야 한다. 기억할 때마다 아플지라도. 한번 기억속에서 사라지면 영원히 잊혀지기 때문에.


무엇으로부터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을까?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외부와의 접촉도 없이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경하˝, 그녀는 유서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날 과거에 같이 일했던 친한 친구인 ˝인선˝으로부터 한통의 문자를 받는다.

˝경하야, 지금 와줄 수 있어?˝


노환인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팔년 전 서울에서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간 ˝인선˝ 하지만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제주도가 아닌 봉합수술 전문병원 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영상제작 일을 하던 ˝인선˝이었지만, 제주도로 돌아가서는 목공방에서 일을 하던 그녀였기에, ˝경하˝는 ˝인선˝이 일을 하다가 다쳤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인선˝을 만난 ˝경하˝는 그녀가 작업을 하다가 검지와 중지가 잘려서 봉합된 것을 보게 되고, 봉합된 손가락의 신경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삼분에 한번씩 상처를 내어 소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신경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뭐, 썩는 거지. 수술한 위쪽 마디가
-------------------------  P.40. 



그리고 ˝인선˝은 ˝경하˝에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탁을 한다. 지금 바로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에 방문하여 키우고 있는 앵무새를 돌봐달라고, 오늘 가지 않는다면 앵무새는 죽을 거라고. 그녀의 진지한 부탁에 ˝경하˝는 알겠다고 하고, 그녀의 바람대로 자신의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운이 좋구나,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 비행기편으로 섬으로 들어왔고, 인선의 마을로 데려다줄 마지막 지선버스에 방금 올라탔다. 비행기에서 들었던 연인들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P.120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제주도는 폭설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마비에 가까운 지경이었고, ˝인선˝의 집은 산중턱에 위치한 오지였다.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동네 인근까지 가지만, 목적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하˝는 그녀의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미끌어져 없어지게 되고, 의식을 잃게 된다. 이후 꺠어난 그녀는 눈덮인 풍경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는 모르는 이유 때문인지 세계가 약간 바뀐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눈과 추위와의 사투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그녀의 사고현장을 보게 되고,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뒷뜰에  앵무새를 묻어주고, 방으로 돌아와서 얼은 몸을 녹이려고 한다. 그러면서 ˝인선˝이 촬영했던 영화를 떠올리고, 그녀가 작업하고 있던 백그루가 넘는 통나무를 본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이 들어오지 않는 단전이 발생한다. 창문이 덩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한을 견뎌 나가는 ˝경하˝, 그녀 역시 ˝인선˝과 마찬가지로 생과 사의 경계에 있게 된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P.172



오후 네시에 깨어난 ˝경하˝는 열이 내려있고, 평소의 아픔이 사라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묻었던 앵무새가 살아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 놀라운건 공방으로 가보니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있는 것이었다. 이건 꿈일까? 환상일까? 사후 세계일까? 아니면 현실? 그러거 보니 언제부터가 현실이었는지 햇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선˝은 ˝경하˝에게 그동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자신이 어머니가 경험한 이야기를, 어머니와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과 고통에 대해 들려준다. ‘제주도 4.3 사건‘의 진실에 대해.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반공주의와 이데올로기라는 광기에 의해 무고한 제주도 주민들이 학살된 그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였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진상을 밝히기 위한 삶을 살았었고,  딸인 ˝인선˝ 역시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의지를 이어받는다. 도대체 이 사건에는 어떤 아픔이 있었던 걸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내가 읽은 한강 작가님의 첫 작품이다. 예전에 작가님 작품의 리뷰를 읽었을 때도 (심리적인) 아픔이 느껴진다는 평을 많이 봤었는데, 직접 읽어보니 완전 공감했다. 특히 ˝인선˝의 두 손가락이 절단된 과정과 이를 접합하기 위한 치료 과정이 너무 섬세하게 묘사되어서 마치 내 손가락이 다친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내가 얼마전에 손을 다쳤었다...


제주도 4.3 사건을 다루고 있고, 등장 인물들이 한결같이 침울하다보니 작품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이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역사적 아픔‘의 비극성을 극대화 하는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평행세계와 같은 약간 비현실적인 설정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설정이 작가님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양한 비유가 등장하는데 이런걸 찾는 것도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요소였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  P.44



이 책 덕분에 제주 4.3 사건도 찾아보게 되고,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역사적 비극을 다시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이 있기에 우리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작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1-12-14 09: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주 4.3사건에 대해 확실히 잘 모르기에 저도 이 소설에 관심이 많아요.
한강의 이 소설에 그 역사적 사실이 많이 표현되어 있나요? 아님 이미지와 느낌으로 전달하는건지 궁금해요~~

새파랑 2021-12-14 10:44   좋아요 4 | URL
이 책이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가 리뷰에 쓴 대부분은 1부 내용이고, 2부 내용에는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작가님의 이야기 입니다. 읽으면서 좀 마음이 아팠어요 ㅜㅜ

프레이야 2021-12-14 09: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름날 제주 4.3 평화공원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 코스로 들렀어요. 제주 가시면 한번 가보시길 권해 드려요. 꼭! 건물 안은 물론 바깥으로도 주욱 둘러보시길요.

새파랑 2021-12-14 10:45   좋아요 3 | URL
평화공원이 있군요~!! 제주도를 가본지가 오래되서 😅 제가 제주도를 가게 된다면 꼭 가보겠습니다~!!

2021-12-14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12-14 10:52   좋아요 4 | URL
읽으면 좀 우울해 지실수도 있어요 ^^ 전 흥미롭게 읽었어요~!!

Yeagene 2021-12-14 11:37   좋아요 4 | URL
한강작가 작품이 대체로 어둡고 우울한 것 같아요..그래서 읽기 전에 조금 망설여지더라구요ㅠㅠㅠ

새파랑 2021-12-14 12:05   좋아요 3 | URL
기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기분이 아주 좋으실때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

Yeagene 2021-12-14 12:35   좋아요 3 | URL
ㅎㅎㅎ 진짜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ㅎㅎㅎ

청아 2021-12-14 11:3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앞쪽 이야기 전체가 제주 4.3사건에 대한 은유인가보군요.
<소년이 온다>가 떠올랐어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작별하지 않을 수 있다‘마지막 문장이 울림이있어요!!🥲

새파랑 2021-12-14 11:54   좋아요 5 | URL
역시 리뷰만 봐도 책의 구성을 딱 알아맞추시는 미미님이군요~!
어제 이 책을 읽고 알라딘 우주점에 가서 <소년이 온다>를 찾았는데 없더라구요 😅 평이 좀 갈리긴 하던데 전 좋더라구요~!

모나리자 2021-12-14 15: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근현대 한국에 비극적인 역사가 참 많았어요. 뒤늦게 알려진 사건도 많구요. 어쩌면 소설가는 작품으로 지나간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켜서 바람직한 삶이 되도록 기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채식주의자>만 읽었네요.^^

새파랑 2021-12-14 15:58   좋아요 5 | URL
어제 알라딘 우주점 가니까 <채식주의자>만 열권 넘게 있어서 안샀어요 ㅋ 왠지 인기가 없게 느껴져서요 😅 그리고 전 육식주의자라서 ㅎㅎ 그게 소설가의 임무가 맞는거 같아요. 그래서 상당히 어렵고 부담이지만 ^^

mini74 2021-12-14 17: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4.3. 제주도에서 아기무덤들 보고 넘 슬펐던 ㅠㅠ 새파랑님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 소년이 온다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채식주의자는 전 어려웠어요 ~

새파랑 2021-12-14 17:30   좋아요 2 | URL
제주도에 아기무덤이 있나 보네요 ㅜㅜ 슬픈 역사가 실감나네요..

제가 오늘은 프랑스로 가보겠습니다. 비단뱀 보러 ^^
소년이 온다는 읽어봐야 겠군요~!!

희선 2021-12-15 0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주 4.3 사건도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알려진 듯하더군요 제주도 한 마을 사람이 다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건 잊지 않아야 하는 일이네요 그런 걸 쓰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새파랑 2021-12-15 08:11   좋아요 2 | URL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렇게 잔인했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알게되는것도 의미있는것 같아요. 정말 글을 쓰는게 쉽지 않았을거란 느낌이 들었어요~!!
 

우울함이 그냥 느껴진다.




운이 좋구나,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 비행기편으로 섬으로 들어왔고, 인선의 마을로 데려다줄 마지막 지선버스에 방금 올라탔다. 비행기에서 들었던 연인들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 P120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P138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 P149

제목이 뭐야?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 P191

이야기의 패턴은 거의 같았다. 큰 산 아랫마을의 모든 대문을 두드려 끼니를 청했으나 거절당한 늙은 걸인이 오직 한 여자에게서 밥 한 그릇을 얻는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가 말한다. 내일 동트기 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산을 오르라고, 산을 넘어갈 때까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노인의 말대로 여자가 산중턱에 다다랐을 때 해일이나 폭우가 마을을 삼킨다. 예외 없이 그녀는 뒤돌아본다. 그곳에서 돌이 된다. - P239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 P307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