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들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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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16

나는 꿈을 자주 꾼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느정도 기억이 나지만 몇시간만 지나면 꿈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실제 있었던 일은 인상깊었던 일이라면 몇일이 지나도 기억이 나지만, 인상싶었던 꿈은 바로 휘발되어버린다. 왜그런걸까? 원래 인간의 기억이란 그렇게 만들어진걸까? 아니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걸까?


<꿈>은 카프카의 꿈과 관련된 글을 모은 작품이다. 일기에 썼든,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든, 그가 꾼 꿈에 대한 모든 기록이 이 책안에 담겨있다. 처음에는 단편집인지 알았는데 단편집도 아니었다. 꿈에 대한 잡문이라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너무 교활한가요? 그렇다고 나에게 반감을 갖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오직 꿈에서만 음침하니까요.] P.89.



카프카는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렇게 꿈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런데 이 꿈에 대한 기록이 대단히 기괴하면서도 평범하다. 특별한 이야기도 없고 정제되어 있지도 않고,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 내가 꾸는 꿈이랑 그렇게 차이도 없다.(응?) 그래서 더 진실로 다가온다. 사실 꿈을 현실처럼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지 않을까?

[꿈과 같은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운명이자 의미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변적인 사건이 되었다. 삶은 무서울 정도로 위축되었고, 점점 더 계속해서 위축되어간다. 그 어떤 일에서도 이처럼 큰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P.29.



누군가의 꿈을 엿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나도 오늘부터 꿈을 꾸면 다음날 기록이라도 남겨봐야 겠다. 요즘 악몽을 자주 꾸긴 하지만...

[창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나는 산산이 조각난 생각의 파편 속에서, 15분 동안 끊임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면 열차들이 나타났지요. 열차는 선로에 누운 내 몸 위로 한 대 한 대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목과 다리의 절단된 상처를 점점 더 크고 깊게 벌려 놓았습니다.] P.64




Ps. 해설을 보고 알게된 건데, 카프카의 작품은 자고 일어나보니 어? 뭐지?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이 많다. <변신>, <소송>이 대표적이다. 사실 난 이 두 작품만 제대로 읽어봤는데, 돌이켜보니 두 작품 모두 꿈인것처럼 느껴졌었다. 뭐 인생이 어차피 꿈의 일부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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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5 2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다 솔직하게 털어놓기에는 좀 민망할텐데요? 위대한 작가쯤 되면 그것도 가능한가 봐요. 저는 꿈이 너무 유치찬란해서 그거 얘기하면 좀 없어보인달까?
아 정말 우아한 제 이미지를 와르르 무너지게 할거 같아 적나라하게 얘기할 수가 없어요. ㅎㅎ
오늘은 새파랑님 악몽 꾸지 마시고 편안한 밤 되세요.

얄라알라 2022-09-26 00:39   좋아요 4 | URL
그럴수록 궁금해집니다. ㅎㅎ 바람돌이님. 도대체 어떤 꿈이기에, 와르르...^^?

새파랑 2022-09-26 06:03   좋아요 3 | URL
제 꿈은 악몽이라기 보다는 개꿈 같아요 ㅋ 이 글 쓰고 바로 잤는데 꿈에서 바둑을 두는 꿈을 꿨지만...일어난지 10분밖에 안지났는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ㅋ

바람돌이님 우아한 이미지셨군요 ^^

바람돌이 2022-09-26 08:21   좋아요 4 | URL
얄라님 저는 그렇게 어딜 가야하는 꿈을 자주 꿔요. 그냥 집이라든가 직장이라든가.... 근데 거기까지 가는데 방해물이 너무 많아서 못가. 그래서 막 기어가는데 다리는 안 움직이고, 상한 악의 무리들 나타나고.... 하여튼 더 얘기하면 저 너무 유치한거 뽀롱나요. ㅠㅠ
새파랑님 저 우아한 이미지인거 모르셨단 말인가요? 앞으로 좀 더 틸 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청아 2022-09-26 10:59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꿈이야기 저는 흥미진진한데요?^^*

새파랑 2022-09-26 11:50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아주 우아하실거 같아요 ^^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무슨 여행기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9-25 23: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꿈을 거의 꾸지 않네요.
좋은 꿈 꾸세요~~

새파랑 2022-09-26 06:05   좋아요 3 | URL
꿈을 안꾸시는군요 ㅋ 전 꿈을 꾸는 날이 더 많은데 ㅎㅎ 키가 크려고 그런걸까요? 😅

페넬로페 2022-09-25 23: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소설집이 아니라 카프카 자신의 꿈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것이군요.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저도 한 번씩 악몽을 꿔요. 그럴땐 힘들더라고요^^

얄라알라 2022-09-26 00:40   좋아요 5 | URL
저도 새파랑님 설명 아니었다면
추상으로서 꿈에 대한 소설인가...그랬을 거예요^^

이 책 읽어내려면 두뇌회전 핑핑...해야할 것 같아요. 자기가 꾼 꿈도 어려운데, 위대한 작가가 꾼 꿈이라면 더욱

새파랑 2022-09-26 06:06   좋아요 4 | URL
이 책 좀 황당하면서도 나름 재미있습니다. 꿈도 카프카적인 느낌? 뭔가 약간 지적입니다 ㅋ

프레이야 2022-09-26 0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을 시작으로 상상력을 덧입힌 이야기인가 봅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우리의 꿈을 기록해 두면 재미있겠습니다. 적나라하기도 우습기도 하겠네요. 요즘은 눈 뜨면 꿈을 기억 못할 때가 많아요.

새파랑 2022-09-26 06:08   좋아요 3 | URL
전 꿈을 자주 꾸는데 일어나면 글을 쓸 정도로는 기억이 안나더라구요 ㅜㅜ 오늘부터 한번 기록해볼까 했는데 첫날부터 포기입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2-09-26 09: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꿈을 꿀텐데 요즘은 예전처럼 꿈이 잘 기억이 안납니다. 흐리멍텅하고 심지어 누가 나왔는지도 기억이 안나요ㅠㅠ 늙어가는건가~ㅋㅋㅋ
꿈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꿈 이야기라서 더 보편성을 지닐 것 같기도 하네요.

새파랑 2022-09-26 10:12   좋아요 3 | URL
나이가 들면 꿈이 잘 기억이 안나는걸까요? 가끔 방금전에 뭘 하려고 한것도 생각이 안나긴 하더라구요 ㅋ 왠지 슬프네요 ㅜㅜ

청아 2022-09-26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송> 읽다만 상태지만 저도 꿈같다고 느꼈어요ㅎㅎ
꿈을 기억하느냐 마느냐 깨기전에 본인이 결정한다는 설도 있더군요
새파랑님 꿈이야기도 궁금해요^^*

새파랑 2022-09-26 11:51   좋아요 3 | URL
저도 소송 읽으면서 뭔가 꿈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어요 ㅋ 소송 아주 재미있습니다 ㅋ 결말도 예술입니다~!! 언젠가 기억에 남는 꿈을 결정하면 한번 써보겠습니다~!!

독서괭 2022-09-26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꿈 많이 꿉니다! 역시 금방 휘발되지만요 ㅎㅎ
내가 꾸는 꿈이랑 그렇게 차이도 없다, 고 말씀하시니 읽어보면 꿈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09-26 12:54   좋아요 3 | URL
독서괭님은 이 책 읽으시면 뭐야 이거? 할수도 있습니다 ㅋㅋ

scott 2022-09-26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 책 읽으셨으니

하루키옹의
카프카
재독을 향행 ~@@@@@@

새파랑 2022-09-26 12:53   좋아요 3 | URL
앗 ㅋ 알겠습니다 카프카가 카프카를 부르는군요 ^^

alummii 2022-09-26 1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작품들은 읽다보면 항상 악몽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예 <꿈>이라는 작품도 있었군요! 배수아님 역이라 더 읽고싶어요 ~ 저도 꿈 기록 중인데 ㅎㅎㅎ 카프카님과 월매나 비교가 될지 😂 꼭 읽어보겠슴당 장바구니 고고

새파랑 2022-09-26 17:28   좋아요 2 | URL
와우 꿈을 기록하시는군요~!! 카프카와 동급 이십니다~!! 저도 카프카 작품에서 비슷한걸 느꼈었는데 ㅋ 그래서 더 신비하게 다가옵니다 ^^

mini74 2022-09-26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달리도 잠자리에 수첩과 연필을 꼭 놔두고 잤다고 하더라고요. 깨어나는 즉시 꿈을 그리기위해. 꿈을 그리는 것과 꿈을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꿈을 잊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새파랑님 행복한 꿈 꾸세요 꿈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행복한 기분은 오래오래 남기를 ㅎㅎ 저는 먹는 꿈은 잘 기억합니다. ~~

새파랑 2022-09-26 19:13   좋아요 1 | URL
전 행복한 꿈은 정말 기억하고 싶습니다 ㅜㅜ 근데 그게 잘 안되네요 ㅋ 점점 안되는거 같습니다 ㅎㅎ 전 먹는 꿈은 꾼적이 없는거 같은데 ^^

레삭매냐 2022-09-27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카일 맥라클란 주연의
<소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소설과 느낌이 많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새파랑 2022-09-27 17:13   좋아요 2 | URL
소송이 영화도 있군요~! 카프카가 어렵긴 한데 소설 소송은 재미있더라구요ㅋ 뭔가 말이 안되는거 같으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ㅋ

희선 2022-09-28 0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꿈이란 소설이 아닌 그야말로 꿈을 쓴 거군요 꿈은 적다보면 더 잘 기억난다고도 하던데... 저는 잘 때 꿈 기억해야지 하면 좀 기억하고 그러지 않으면 거의 잊어버려요 한번 깼을 때는 생각나는데 다시 자면 잊어버리는... 보르헤스는 꿈을 소설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희선

새파랑 2022-09-28 07:39   좋아요 1 | URL
보르헤스가 궁금해지네요 ~! 기록 잘하는 희선님도 꿈을 글로 쓰시면 좋을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10-04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네요.

새파랑 2022-10-04 13:03   좋아요 2 | URL
오늘부터 카프카의 <성>을 읽으려고 챙겨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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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5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필사 오랫만에 보는거 같아요. ^^

새파랑 2022-09-26 05:59   좋아요 1 | URL
몰아서 써서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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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초가 되는 작품. 잃시찾 만큼 좋다. 질투의 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알렉시의 눈에는 이전과 똑같이 미남인 삼촌에게 장엄함까지 더해지면서 한층 더 완벽해 보였다.‘그렇다, 장엄했고, 더 이상 온전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절망에는 불안과 공포가 조금 섞여 있었다. - P15

원래 발다사르의 눈이 슬프다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조차 위로를 갈구하듯 슬픈 눈이라는, 그래도 고통을 느끼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렉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발다사르가 용감하게 대화에 서 추방시킨 슬픔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눈 속에 피난처를 마련한 것 같았고, 발다사르라는 사람 안에서 핼쑥해진 두 뺨과 그 눈만이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 P17

삼촌을 만나러 오면서 예상한 것,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죽음을 앞두고 저속한 삶의 현실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온 사람이 영웅적 의지를 발휘해서 지어 보이는 미소, 슬프고도 다정한 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초연한 미소였다. - P20

하지만 이제 알렉시는 만일 장 갈레아스가 다시 놀린다면 삼촌이 예전처럼 화를 낼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죽음을 앞두고도 저렇게 쾌활하고 여전히 극장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거나 특별히 용기를 낸 것은 아님을, 저렇게 죽음 가까이 다가가도 삼촌은 오직 삶만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P20

그들은 입맞춤의 향기와 애무의 기억 속에 떠다니는 쾌락에 다시 도취되어, 자신들의 침몰하는 영혼을 보게 할 잔인한 두 눈을 감아 버린 채로 서로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들은 비탄에 젖은 자기들의 영혼을 보고 싶지 않았고... - P24

"알렉시, 두 번째 말과 마차를 같이 주마." 발다사르의 말에 알렉시는 삼촌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한테 마차를 줄 기회가 없을 것 같구나." 알렉시는 그것이 더없이 슬픈 생각임을 알았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알렉시의 마음속에는 이미 깊은 슬픔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27

무엇보다 그들은 발다사르가 삶과 이별 중인 육체의 마지막 삐거덕거림을 듣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다정한 애무로 그 소리를 막아 내기를 최소한 부드럽게 만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 P28

발다사르를 이따금 잔인한 현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여전히 감각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하지만 이미 카스트루치오를 향해 절대 꺾이지 않을 격정적 사랑에 빠진, 그래서 그가 잊으려고 애쓰는 시라쿠사 공녀, 피아의 냉담한 태도였다 - P30

삶의 무게를 감내하는 습관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 무게를 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삶의 매력이 다시금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다행히도 몸의 기운이 되살아나면서 살고 싶은 욕망도 소생했다. 그는 외출을 했고, 다시 살기 시작했으니,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셈이었다. 한 달 뒤, 전신 마비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이전에 그랬듯이 조금씩 걷기 어려워졌고, 점차, 그가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익숙해지고 돌아볼 여유가 주어질 만큼 서서히, 완전히 걷지 못하게 되었다. - P32

그는 스스로에게 서서히 다가오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아 했었는데, 이렇듯 예고 없이 죽음과 마주해 버린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 가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는 겁에 질려 애원했고, 결국 죽음의 뜻을 꺾었다. - P33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시간의 책 속에 마지막 글자를 쓸 때까지, 슬그머니 지나가는구나. 우리의 모든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비춰 주었다. 얼마 남지않은 촛불이여, 이제 그 불을 꺼라. 이
제 그만 꺼라! 인생이란 기껏해야 방황하는 그림자이고, 무대 위에 주어진 시간 동안 으스대고 탄식하다가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가련한 광대인 것을 인생이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외침과 노여움에 가득 찬,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인 것을."

- 셰익스피어, 맥베스 - P32

아, 언젠가 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면, 혹은 나의 기일이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나의 애정을 기억해 주시오. 그러면 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당신이 오는 길 위에 마법처럼 꽃이 만발할 거요. 죽은 나를 생각해 주시오. 하지만 어쩌겠소! 삶의 열정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입술이 해내지 못한 것을, 죽음과 당신의 엄숙함이 이루어 내길 바랄 수는 없으리! - P38

보통은 사랑이 처음 충족될 때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고백의 욕구가 비올랑트에게는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첫 환멸과 함께 찾아왔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사랑의 아픔을 겪게 되는데,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 P52

오귀스탱은 비올랑트가 사교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 힘이 있었다. 처음엔 허영심이 그 힘을 키워 냈지만, 그다음에는 바로 그 힘이 그녀의 염증, 경멸, 심지어 권태마저 무너트렸다. 그 힘이란 바로 습관이었다. - P61

어머니가 있을 때는 그 존재가 그곳을 가득 채웠고, 사라진 뒤의 부재는 더욱 그러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대의 부재는 사라진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충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 P65

차라리 어머니가 이전에 내가 저지른 다른 죄악을 보았더라면, 그날 거울 속 내 얼굴의 쾌락만은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아니다…… 어머니는 못 봤으리라………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 어머니는 내 모습을 보기 직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어머니는 보지 못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 그런 일을 원하셨을 리 없다. - P82

그의 한나절은 서로 다른 열둘 혹은 열네 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두 시간 혹은 두 시간 반, 그리고 그 두 시간 혹은 두 시간 반을 기다리는 시간, 또 그 두시간 혹은 두 시간 반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 P87

이처럼 그들의 애정은 비밀스럽지 않았기에 더욱 신비로웠다. 누구든 그 애정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애정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이 팔목에 차고 있는 신비한 팔찌, 그 여인을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 이름이 보이지만 알아볼 수는 없는 글자로, 호기심 많은 이들이 보기에 분명 뜻이 있기는 한데 도통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실망스러운 글자로 각인된 팔찌 같았다. - P88

"언젠가 내 마음이 저 여인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느껴지면,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그 마음을 붙잡아 두리라. 변함없이 다정하고, 한결같이 정중하리라. 내 마음속에 다른 사랑이 찾아와서 그녀를 향한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는 날이 오면, 지금 내 육체가 그녀 아닌 곳에서 혼자 맛보는 쾌락을 감추듯이, 조심스럽게 감추리라." - P90

또한 오노레는 만일 프랑수아즈가 다른 사랑들을 받아들여서 삶을 서서히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날이 온다면 그녀를 붙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질투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더 점잖고 더 영광스러운 경의를 바칠 수 있을 남자를 직접 골라 줄 수도 있으리라. - P90

프랑수아즈를 다른 여자로,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정신적인 매력만은 교묘하게 맛볼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그녀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는 일은 더 고결하고 훨씬 쉬워 보였다. 너그럽고 부드러운 우정의 말, 각자가 지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의 말들이 나른한 그의 입술 위에서 부드럽게 맴돌았다. - P90

하지만 프랑수아즈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혹은 곁에 있더라도 그녀의 눈 속에 불길이 어른거리는 동안이면 다른 누군가가 오래전에, 어쩌면 어제, 어쩌면 내일, 그 불을 지피는 상상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노레는 다른 여인 곁에서 순전히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기를 반복했고, 그러고 나면 지금껏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프랑수아즈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녀 역시 거짓말을 할지 모른다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자기를 알기 전에 이미 지금 자신을 달아 오르게 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 달려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더 이상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았다 - P94

그러자 자기가 그녀에게 불어넣는 감미로운 열정보다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모든 것을 실제보다 부풀려 상상했으므로, 더 끔찍해보였다. - P94

설사 그녀가 단 한 순간조차 자기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인 적이 없었다는 불가능한 확신을 얻는다 한들, 뷔브르와 함께 문 앞까지 왔던 그날의 알 수 없는 고통은, 그때와 비슷한 고통 혹은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은, 그것이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증명된 이후라 하더라도,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마치 누군가 우리를 죽이려 하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뒤 꿈이었음을 알면서도 공포에 떠는 것과 같고, 다리가 잘린 뒤에도 그 없는 다리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 P95

열 달 전만 해도 영원히 프랑수아즈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그가 그때와 똑같은 힘으로, 그때는 사랑에 죽음이 다가오리라 확신했기에 살아 있게 해 달라고 매달렸지만, 이제는 계속 살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더 이상 프랑수아즈를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그녀를 너무 오래 사랑하지 않게, 영원히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다른 남자의 팔에 안긴 그녀를 상상하는 것뿐이기에, 다른남자의 품에 안긴 그녀를 떠올려도 고통스럽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 모습을 고통 없이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더 이상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P98

오노레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일을 꿈이라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현실이었고, 이제 그의 의지로 조금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 P103

오노레는 이어, 프랑수아즈가 연인을 잃은 슬픔에서 치유 될 시점으로 옮겨 갔다. 그때는 누가 될 것인가? 장차 일어날 일이 분명하지 않다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어나리라는 사실은 그를 미칠 듯한 질투로 몰아넣었다. 살아 있다면 그녀를 막을 수 있을 테지만, 살 수 없으니,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 P108

죽어야 한다면, 죽고 나면 질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이고, 나의 육신이 질투하고 있을 뿐이고,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행복은 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인데, 누가 제일 잘 해낼까? 내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육신을 이기면, 이전에 많이 아프던 때처럼 내가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게 되면, 그래서 더 이상 미친 듯이 육체를 갈망하지 않고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질투하지 않으리라. 그때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리라. - P110

"깔아뭉개진 인간의 삶!" 그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말에 부딪혀서 쓰러지며 "이대로 깔아뭉개지겠구나!" 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또한 그날의 산책이 떠올랐고, 프랑수아즈와의 식사 약속이 떠올랐다. 그렇게 에움길을 돌아서 그의 생각은 또다시 자신의 사랑으로 향했다. - P112

"나를 짓누르던 그것이 나의 사랑이었을까? 만일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내 성격이었을까? 나였을까? 삶이었을까?" 그는 생각을 이어 갔다. "그렇다. 죽어서도 난 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 육신의 욕망, 관능의 욕구, 질투에서는 벗어나리라." - P112

그는 마음속으로 "나의 형제들"이라고 되풀이했고, 자기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프랑수아즈에게 향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머지않아 닫히게 될, 이미 더 이상 울지 않는 그녀의 눈에 연민이 일었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그는 의사보다, 늙은 친척들보다, 하인들보다 프랑수아즈를 더 많이 사랑하거나 다르게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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