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옆모습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북포레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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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44

한동안 사강의 작품을 안읽었다.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읽기도 해서 그럴수도 있지만, 분명히 아직 안읽은 작품들이 있긴 했는데도 손이 안갔다. 돌이켜보니 소재가 좀 비슷해서 식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막장 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계속 보다보면 좀 물리는 느낌 같은거랄까?


그래도 사강은 사강이었다. 오랜만에 읽은 사강의 <잃어버린 옆모습>은 너무 좋았다. 사강의 캐틱터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조제'가 나오는 작품으로 <한달 후 일년 후>, <신기한 구름>과 함께 '조제 3부작' 이라고 한다. 조제가 나온다니 내용이야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지만 읽어보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좋았다.


'앨런'이라는 미국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온 '조제'는 남편의 집착 때문에 힘들어 하고 어느 누구와 편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른다. 결국 남편에게 감금되기까지 한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같이 사는 걸까?)

[둘째는 그를 피해 떠나는 것,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내가 사랑했던 모습으로 떠올렸고,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유일한 것임을 알고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잃게 되었다.] P.21



그런 그녀를 구원해주기 위해 돈많고 쿨해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 '줄리우스'가 나타나고, 그는 그녀를 '앨런'으로부터 빼낸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안보이는(아주 중요!) 곳에서 돕는다. 그녀가 싼값에 집을 얻고, 괜찮은 직장을 얻고, 싼값에 옷을 빌릴(?) 수 있도록 한다. 주위사람들은 모두 '조제'가 '줄리우스'의 정부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가 그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걸로 아는데...

문제는 '조제'가 이걸 모른다는거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단순한 호의로 생각한다는 거였다. 분명히 '줄리우스'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게 확실한데, 그녀만 모른다. 아니, 모른체 하는거 같다. '조제'는 '줄리우스'에게 결코 사랑을 느끼진 않는다. 그러면서 그의 호의적인 지원은 다 받아들인다. 보고싶은 것만 보려하는 '조제'.

["당신 지루해요?" 줄리우스가 물었다.
"아뇨. 왜요? 이 나라는 무척 아름답고, 난 아무것도 하지않고 지내는게 참 좋아요."
"당신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줄곧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에겐 끔찍한 일일거예요."
줄리우스가 말했다. "그게 왜요?" 내가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더 이상 지루하지 않으니까요."] P.138



그러던 와중에 '조제'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루이'라는 '조제'의 친한 친구의 동생으로, 시골에서 수의사로 근무하는 남자였다. '줄리우스'는 이런 '조제'의 일탈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런일이 처음이 아니다..) 여전히 그냥 바라보면서 그녀에 대한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나에게 하룻밤의 남자였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보다는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았고, 나에게 그는 불타는 육체, 누워 있는 옆모습, 새벽의 실루엣이었다. 나에게 그는 열기, 세 개의 시선, 한 개의 무게, 네 개의 문장이었다.] P.178



'조제'는 뒤늦게 자신의 성공과 안정적인 생활이 자신의 능력이나 운이 아닌, '줄리우스'가 모두 꾸민거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조제'는 자신이 그의 정면을 본적이 없음을, 언제나 그의 옆모습만을 봤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예전에 전 남편에게 당했던 잔인한 아픔을 '줄리우스'에게 그대로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지독히도 평행이고 지독히도 낯선 서로의 인생 속을 지나갔다. 우리는 오직 옆모습으로만 서로를 보았고, 결코 서로 사랑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소유하기만을 꿈꾸었고, 나는 그에게서 달아나기만을 꿈꾸었다. 그게 전부였다. ] P.233



일반적인 소설이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조제'가 '줄리우스'의 사랑을 깨닫고 그와 함께 해피엔딩을 하겠지만 사강의 소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사강'은 '줄리우스'를 그냥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인 '루이'랑 함께 떠난다. 이기적인 '조제'가 나쁜 걸까, 순진하게 믿었던 '줄리우스'가 바보같은 걸까?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역시 사강은 사강이었다. 도덕적인 옳고 그름, 사람에 대한 믿음과 배신은 뒤로하더라도 참 재미있는 작품, 그리고 잔인한 작품었다. 오늘도 사람보다 잔인한게 있을까? 사랑보다 잔인한게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조제'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처음부터 '줄리우스'의 앞모습을 안보려고 했던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관계에 있어서 무관심은 정말 최고의 으뜸패인가 보다.

[더 오래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무관심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를 소름 끼치게 했다. 나는 무관심이 조커임을, 열애 관계에서 으뜸패임을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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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16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파랑님의 사강 최애작이 궁금해요!!

새파랑 2023-07-16 15:23   좋아요 1 | URL
저도 읽은지 오래되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기작들이 좋았었습니다~!

슬픔이여 안녕ㅡ어떤미소ㅡ한달후일년후 이렇게 셋? ㅋ

패배의 신호도 좋았습니다 ^^

2023-07-1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3-07-16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에서만 나옴직한 스토리네요.
역시 사강다운 발상이예요.
이런 일상이나 사랑은 사강의 자전적인 부분도 들어간 것일까요! ㅎㅎ

새파랑 2023-07-16 19:58   좋아요 1 | URL
네 그런거 같아요. 자전적 이야기~! 돈많은 아저씨 보다는 젊은 또래가 좋다는? ㅋ 조제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 보다는 대등한 사람이 좋다고 말할수도 있는데,

저는 줄리우스가 좀 불쌍했습니다 ㅜㅜ
 

이유없이 좋은 것들이 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줄 수 있다는건, 받는 사람의 경우에는 행복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주는 사람은 확실히 행복하다. 하루키는 나에게 있어서 무조건적인 애정 대상자이다.


독서슬럼프에다가 바쁘다는 핑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만의 치트키인 하루키의 작품을 연달아 두편 읽었다. 어라? 근데 모두 처음 읽은 작품이었다.



N23042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장편 > 단편 > 에세이 순으로 좋아한다. 어떤분들은 에세이를 더 좋아하기도 하던데 난 확실히 하루키의 장편이 좋다. 그래서 하루키의 장편은 다 읽었는데 에세이는 아직 안읽은 작품이 몇개 남아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반면 더이상 새롭게 읽을 작품이 없는 소세키랑 도스토예프스키는... 재독해야겠다...


하루키 에세이 세트 중 두번째로 읽은 작품이 이 책이다. 왜 이책을 골랐냐 하면 바로 책의 제목 때문이었다. 저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왜 F심 연필과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을 연관시킨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아직도 모르겠다. 누가 아는 사람 없나요?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평소에 어떤 연필을 사용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늘 F심 연필을 사용하니까 ˝F를 쓰는데요˝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이 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늘 생각하는 건데,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P.90


이 책에는 이런 비슷한 류의  쿨한 에세이들이 아주 많이 실려있다. 책을 읽다보면 나까지 쿨해짐을 느낀다. 뭔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나 감동은 없지만 정말 재미있다. 재미는 100퍼센트 보장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하루키가 추천하길래 <장 크리스토프>를 일단 구매했다 ㅎㅎ <고요한 돈 강>  읽고 나서 읽어봐야 겠다.

[십대 시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장 크리스토프』『전쟁과 평화』『고요한 돈강』을 세 번씩 읽었던 것이 정말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책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좋았던지라, 『죄와 벌』 같은 작품은 페이지가 너무 적어 성에 안 찬다고 생각 했을 정도였다. 그 시절에 비하면 - 나이를 먹어 책 한 권을 찬 찬히 읽게 되었다는 변화도 있지만- 독서량이 오분의 일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P.153




N23043 <도쿄 기담집>

하루키의 번뜩이는 상상력이 빛나는 다섯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에 우연히 겹쳐서 결국 어느 곳엔가 다다르게 된다는 이야기인 <우연한 여행자>,

하나레이 만에서 서핑을 하다가 상어에 물려 한쪽 다리를 잃고 죽은 아들과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하나레이만을 찾는 어머니의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인 <하나레이 만>,

(댄스 댄스 댄스가 연상되는..) 24층과 26층사이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연상되는...) 남자가 일생동안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여자는 평생 3명이라는 아버지의 예언(저주?)에 묶여서 제한된 만남밖어 할 수 없었던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인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말하는 원숭이, 이름을 훔쳐가는 원숭이, 그러고 보니 나도 가끔 이름을 까먹는데 누가 내 이름표를 훔쳐간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했던 이 책의 대표작인 <시나가와 원숭이>까지


하루키가 써내려간 다섯편의 이야기가 모두 기묘하고 흥미롭다. 요즘같은 장마철에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집이라 생각한다. 교훈 또는 감동을 준다거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찾는 분들은 별로라고 하겠지만, 책을 읽고 나서 꼭 뭔가 남는게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Ps. 책은 저번주에 다 읽었는데 이제서야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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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7-16 13: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시리즈 디자인이 예쁘게 나왔네요ㅎㅎ
도쿄 기담집은 여름 날에 읽기 딱 좋을 것 같은데 도서관에 있나 찾아놔야겠어요!

새파랑 2023-07-16 13:35   좋아요 2 | URL
요 에세이집 완전 소장각입니다~!! 알록달록하니 엄청 예쁩니다~!!

잠자냥 2023-07-16 14:27   좋아요 2 | URL
전 예전 버전으로 다 있는데 이것도 예쁘네요!

새파랑 2023-07-16 15:24   좋아요 1 | URL
이건 소장용입니다 ㅋ 페이지 페이지 넘길때 조심해어 읽었습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3-07-16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유없이 좋은 게 분명히 있어요.
이번주에 새파랑님 좋아하는 두 작가의 작품을 연속으로 읽으신 거네요!
저는 하나레이 만, 영화가 좋아 도쿄 기담집 읽었지만 지금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ㅋㅋ

새파랑 2023-07-16 20:00   좋아요 3 | URL
하나레이만이 영화도 있다고 어디서 본거 같습니다 ㅋ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작이 아닌거 같긴 합니다 ㅋ 저는 그냥 좋았습니다 ^^

scott 2023-07-16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옹 지금 미쿡 체류중 ㅋㅋ
인생은 하루키 옹처럼 ^^

새파랑 2023-07-17 11:32   좋아요 1 | URL
하루키옹은 만수무강 하셔서 세계 최고령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2023-07-17 0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은 게 있고 이번에 만나서 좋으시겠습니다 많이 읽어서 읽을 게 없는 작가군요 그런 작가가 한사람이 아니네요 하루키 소설이 빨리 한국에 나와야 할 텐데...


희선

새파랑 2023-07-17 11:33   좋아요 2 | URL
저도 신작 발매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제가 읽지 않은게 있다니 하루키옹도 많이 쓰신거 같아요~!!

고양이라디오 2023-07-19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오늘 <도쿄기담집> 다 읽었습니다. 새파랑님의 리뷰가 보여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ㅎ

1000% 공감가는 리뷰입니다^^

새파랑 2023-07-19 22:34   좋아요 1 | URL
오ㅋ 또 읽으셨군요~! 제가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는지 후회됩니다 ㅋ 역시 하루키는 다 좋습니다~!!
 

역시 슈사쿠~!! 하느님은 따로 있는게 아는다. 주위에 있다.

"어떻게 한 방에 날리느냐, 이거야. 처음 한 방이 중요하거든."
"아까부터 한 방, 한 방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되죠?" 처음 대하는 여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말은 이해되었지만, 나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다.
"멍청하군. 멍청해."
그는 말을 이었다.
"얘기를 해. 여자가 잊어버리지 않을 이야기. 똥 이야기든 뭐든 상관없어. 잊어버리지 않을 이야기를 하는 거야." - P24

이것이 내가 그녀를 알게 된 동기였다. 머지않아 내가 버린 그녀를 만나게 된 최초의 계기이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 있어 우연이 아닌 인연이 있을 까? 인생에는 원래부터 우연이라는 것이 작용한다. 앞으로 기나긴 일생을 함께 할 부부도 처음에는 우연히 백화점 식당의 옆자리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하찮은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로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였다는 것을 알기 위해, 나는 오늘까지의 기나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 P29

그날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기억하기는 힘들다. 정말로 사랑한 여인이었다면 최초의 데이트 때 손가락을 스친 일, 행복해 하는 여자의 웃는 얼굴까지 평생동안 마음에 새겨져 있겠지만, 그 여자는 내게 있어 우발적인 충동으로 만난 상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불량하게 말하면, ‘꼬셔서, 범하고, 그렇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전철이 지나간 밤의 플랫폼에서 차가운 바람에 나뒹구는 빈 담뱃갑처럼 버린 한 여자였다. - P31

그날 버린 그 여자
지금쯤 어디에 살고 있을까?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이따금 가슴이 아파오네
그날 버린 그 여자 - P76

‘책임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 그리고 나의 십자가는 그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그 마지막 말의 의미를 미츠는 잘 몰랐다. 그러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아이 입가에 벌겋게 부어오른 부스럼이 그녀의 가슴을 죄어왔다. 누군가가 불행한 것은 슬프다. 세상의 누군 가가 괴로워하는 것은 슬프다. 그녀로서는 그 부스럼이 점점 견딜 수 없었다. - P107

그때, 나는 왠지 상당히 오래 전에 초라한 시래기죽을 먹으면서 나가시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포도 시렁에 손을 뻗어 포도를 따고 있는 처녀들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런 처녀들과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애절한 감정과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이 가슴에서 솟구쳤다. 그것은 애절한 감정과는 달리 훨씬 타산적이고 교활한 감정이었다. - P121

여자는 애써 미츠의 심정을 내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색을 하고 대들수록 나의 마음은 완강해졌는데, 미츠가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 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짐이 지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 내리는 날, 먼저쪽만 맑게 갠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듯한 감각으로 미츠를 떠올렸다. - P144

"당신, 정말로 냉정하군요." - P144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지금도 그때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이상할 뿐이다.

‘이봐. 네가 그날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소리는 속삭였다.
‘그 여자도 다른 삶을, 한층 행복하고 평범한 인생을 보냈을 지도 몰라.‘
‘내 책임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쓴다면 아무도 만날 수 없지 않는가?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래. 때문에 인생이란 것은 복잡한 거야. 하지만 잊어서는 안 돼. 인간은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서는 스쳐지나갈 수 없는 거야.‘ - P178

잘 지냈어요? 얼마전 요시오카 씨가 가게에 왔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어요. 화내지 마세요. 이제는 저를 찾지 마세요. 어쩔 수가 없어요. 전부터 몸이 아팠고…………… - P181

"고통스러운 것은 몸 때문이 아니에요. 2년 동안 여기서 지내면서 깨달은 건데요. 고통스러운 것은 이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뎌내는 거예요." - P231

비.……… 비를 보면 역시 그 시부야의 여관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미츠는 요시오카가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소아마비로 말미암아 오른쪽 팔을 제대로 못 쓰는 요시오카가 자신 때문에 외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가슴이 조여 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여관에 가는것은 싫었지만, 그러나 그의 요구를 거부하는 자신은 요시오카를 더욱 외롭게 하는 못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비가 내렸고, 나른한 모습으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는 중년 여자의 모습이 그 여관의 창에서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 P236

왜 그때 연하장을 보낼 생각이 들었는가? 나 자신이 지금 쥐고 있는 행복에 비해 가와사키에서 만났던 미츠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불쌍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때의 기분으로는 그 여자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이긴 했지만 연민임에 틀림없었다. - P288

그러나 왜 이렇게 허전할까? 지금의 내게는 작지 만 견실한 행복이 있다. 나는 미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행복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왜이렇게 허전할까? 만일 미 츠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일까? 이 허전함은 그 흔적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이 수녀가 믿고 있는 신이란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신은 그러한 흔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걸까? 그런데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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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다. 역시 사강.










다음 날 아침 병원에 가기 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보러 갔다. 고독한 인물들로 가득한 그 우울한 그림들 앞에서 몽상에 잠겨 한 시간을 보 냈다. 특히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서 시간을 끌었다. 그림 속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란히, 그러나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사람들인 채로 정육 면체 모양의 집 앞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거기서 앨런과 내가 했던 공동생활에 대한 암시가, 잔인한 설명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 P126

"당신 지루해요?" 줄리우스가 물었다.
"아뇨. 왜요? 이 나라는 무척 아름답고, 난 아무것도 하지않고 지내는게 참 좋아요."
"당신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줄곧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에겐 끔찍한 일일거예요."
줄리우스가 말했다. "그게 왜요?" 내가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더 이상 지루하지 않으니까요." - P138

그는 나에게 하룻밤의 남자였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보다는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았고, 나에게 그는 불타는 육체, 누워 있는 옆모습, 새벽의 실루엣이었다. 나에게 그는 열기, 세 개의 시선, 한 개의 무게, 네 개의 문장이었다. - P178

우리는 지독히도 평행이고 지독히도 낯선 서로의 인생 속을 지나갔다. 우리는 오직 옆모습으로만 서로를 보았고, 결코 서로 사랑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소유하기만을 꿈꾸었고, 나는 그에게서 달아나기만을 꿈꾸었다. 그게 전부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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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강 소설은 흡입력이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최악의 결별의 특성이다. 단순히 헤어지 는 자체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헤어지는 것. 그토록 행복하다가 그토록 엉클어지고, 그토록 가까워서 서로에 의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다가 정신이 나가고 사나워지고, 사막에서 더 이상 서로 만나지 않을 길을 걷는다. - P18

둘째는 그를 피해 떠나는 것,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내가 사랑했던 모습으로 떠올렸고,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유일한 것임을 알고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잃게 되었다. - P21

"당신을 되찾을 거야. 난 당신과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 고, 당신은 내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거야. 당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을 잊었다고 생각할 때 난 당신의 삶에 다다를 거야. 그리고 모든 걸 망가뜨릴 거야." 앨런이 말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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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11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새파랑님은 사강을 흡입한다.

새파랑 2023-07-11 16:39   좋아요 0 | URL
아 ㅋ 요새 시간이 없어서 짬내서 밑줄긋고 있습니다 ㅎㅎ

페크pek0501 2023-07-13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강 소설 읽었었는데 제목이 슬픔이여 안녕, 이었어요.
알라딘에 기록을 해 놓지 않아 무슨 내용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며...ㅋ

새파랑 2023-07-14 08:27   좋아요 0 | URL
저 이책 다 읽었는데 아직 리뷰를 못쓰고 있습니다 ㅋ
사강 작품은 평타이상은 하는거 같습니다~! 다 재미있어요 ㅋ

맞습니다~! 기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