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생각해내고, 사소한 것에까지 몰두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주저하게 되고 소심하게 되어서 어떤 일을 할 때 겁이 많아지게 된다.˝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초기에 쓴 23편의 단편들이 수록된 책이다. 내가 생각하는 체호프 단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뭔가 갑작스러우면서도 여운이 남는 결말‘인데, 그의 초기작은 이러한 특징에 추가하여 유머와 연민이 문장 속에 녹아있다.
이 책에 실린 23편의 작품 대부분이 좋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깊고 밑줄도 많이 그은 작품은 <베로츠카>와 <적들> 이었다.
1. <베로츠카>
민음사에서 출판된 <체호프 단편선>에도 수록되어 있는 단편으로, <체호프 단편선>을 읽을 때에도 이 작품이 좋았었는데, 다른 책에서 다시 만나도 역시 좋았다. 그때와 똑같이 비슷한 포인트에서 밑줄을 그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써보면, ˝오그뇨프˝ 라는 남성이 통계연감을 만들기 위해 N군으로 장기간의 출장을 가게 되고, N군 지방의회 의장인 ˝쿠즈네초프˝ 집을 매일 방문한다. ˝오그노프˝는 의장과 가족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고, 그곳에서의 추억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큰 인상을 받는다.
특히 그는 의장의 딸인 ˝베로츠카(베라)˝에게 호감을 갖는데, N군을 떠나는 날 그는 의장의 집에 방문하여 인사를 하고 오는 길에 ˝베라˝의 배웅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둘이 함께 길을 걸으면서 그는 그곳에서의 추억을 그녀와 이야기한다.
[˝십 년 후에 만나서 옛날 일을 한번 회상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을 느끼면서 살고 있고, 이 현재는 우리 삶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죠. 그러나 십 년 후에 만날 때에는 우리는 이미 이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는 지금의 날짜도, 달도, 심지어 연도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도 아마 많이 변하실 거고요. 당신도 변하실테죠?˝] P.45
이제 배웅의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는데, 갑자기 ˝베라˝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한다. 그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는 고백을 듣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변한것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난 후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드는 도도함을 던져버린 그녀는 왠지 키도 더 작아 보였고 더 평범해 보였고 더 침울한 얼굴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P.49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한 그는 그녀의 사랑을 정중히 거부한다. 이후 그는 그녀가 집으로 가는 걸 배웅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혼자서 집으로 간다. 돌아가는 길에 느꼈을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후 그는 한밤중에 다시 아쉬움을 느끼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 방의 창문만을 바라보고 다시 돌아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확신하게 되었고,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도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가까운 사람에게 혹독하고 부당한 고통을 주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연출했던 것이다.] P.54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한 것은 왜그랬던 걸까? 사랑까지는 아닌 단지 호감이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져서인 걸까?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베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앞으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하고 친숙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베라와 함께 젊은 날의 한 부분이 사라져 버렸고, 그가 그처럼 헛되이 날려버린 그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54
2. <적들>
방금 의사인 ˝키릴로프˝의 여섯살 난 아들이 죽었다. 아들이 누워 있는 방에서 느껴지는 것은 비통함 보다는 인간의 슬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키릴로프˝는 미세한 떨림으로만 아내가 살아있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보긴˝이란 남자가 집으로 찾아오고, 남자의 아내가 죽을것처럼 아프니 자기 집으로 진료를 와달라고 요청한다. 방금 자식을 잃은 슬픔과 아내를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에 ˝키릴로프˝는 방문진료를 거부한다. 하지만 ˝아보긴˝은 죽어가는 아내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저에게 당신의 의지를 강제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가시면 되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죠. 그렇지만 저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감정에 호소하는 겁니다. 젊은 여자가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방금 당신 아들이 죽었다고 말씀하셨죠?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나의 공포감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P.86
결국 슬픔과 걱정을 뒤로 하고 의사 ˝키릴로프˝는 ˝아보긴˝의 아내를 진료하기 위해 그와 같이 가게 된다. 이동하면서 느꼈을 그의 슬픔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말이란 아무리 화려하고 깊이가 있어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사람에게만 효력을 발할 뿐, 행복이나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도 하고, 장례식 때 낭독되는 열정적이며 애정어린 조사는 단지 제3자에게만 감동을 줄 뿐, 죽은 사람의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아무 반응도 얻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P.87
하지만 ˝아보긴˝의 집에 도착해보니 그의 아내는 없었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남편을 속이고 ˝아보긴˝이 없는 틈을 타 달아난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남편 ˝아보긴˝은 분노를 느끼지만, ˝키릴로프˝는 이보다 더한 분노를 느낀다. 타인의 사랑싸움에 희생된 그의 슬픔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훗날 그는 아들의 죽음을 떠올릴때 이때의 불쾌한 경험도 같이 떠올리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의사는 자신의 아내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 안드레이도 아닌 아보긴과 방금 전에 머물렀던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불공평했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는 돌아오는 내내 아보긴과 그의 아내, 파프친스키, 그리고 장밋빛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향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비난했고, 증오했고, 가슴에 통증이 생길 정도로 경멸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P.102
[시간이 지나면 키릴로프의 슬픔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불공평하고 부적합한 이러한 신념은 의사가 무덤에 갈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P.102
역시 ˝체호프˝는 ˝체호프˝였다. 순간의 찰나를 독자가 실제 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능력과 그 순간에 인물들이 느꼈을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체호프˝가 당연 최고인 것 같다. 위에서 소개한 두편의 단편 외에도 인상적인 작품이 많으니 체호프의 초기작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계기로 다시한번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살아남을 느꼈다. 역시 땅은 넓고 봐야 한다.
끝으로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체호프˝에 대한 ˝막심 고리키˝의 말이 인상적이어서 소개해본다.
《체호프는 속물성이라는 어두운 바다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암울한 농담과도 같은지 열어 보였다. 유머러스한 단어와 문장들 너머로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어야만 한다.》
Ps 1. 지금까지 읽은 ˝체호프˝의 책이 총 5권인데 역시나 안좋은 작품이 없었다. 전부다 100점 인데 굳이 순위를 매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2. 지루한 이야기 (창비)
3. 벚꽃동산 (열린책들 / 희곡)
4. 사랑에 관하여 (팽귄)
5. 처음 소개되누 체호프 단편소설 (인디북)
혹시나 내가 놓치고 안읽은 ˝체호프˝의 작품이 있을수도 있으니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다 찾아 읽어봐야 겠다.
Ps 2. 이 글을 보신 분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