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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N22002
˝죄, 사랑, 공포와 같은 단어는 순전히 소리에 불과하다. 죄를 지어본 적도, 사랑해 본 적도, 두려워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가지지 못했고, 그 말을 잊어버릴 때까지 가질 수도 없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일 뿐이다.˝
이름만 들어보았던, 그리고 왠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2022년 두번째 책으로 읽었다. 내가 읽은 작품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인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 총 15명의 화자가 등장하며 59개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디의 입장에서 독백해보자면)
‘나는 이제 생이 얼마 안남아서 침대에 누워 있다. 그런데 가족들은 슬퍼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하거나 딴 생각을 하고 있다. 장례에 쓸 관을 만드는 톱질 소리는 내 귓가에서 계속 맴돌고, 의사는 오지 않으며, 자식들은 각자의 생각과 행동에 몰두하고 있다. 남편은 그저 나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다,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 슬프지 않다. 그저 빨리 죽었으면, 내가 태어난 곳으로 가서 묻히고 싶을 뿐이다.‘
미국 남부의 외딴 농촌 마을에 살고 있는 남편 ˝앤스˝와 부인 ˝애디˝, 둘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가족들의 모습은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가족 같지 않은 가족.
살아 생전에 가족이 사는 곳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곳 ‘제퍼슨‘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긴 어머니 ˝애디˝는 이제 임종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가족 어느 하나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남편인 ˝앤스˝는 아들들에게 일만 시키면서 아내의 죽음을 방관하기만 하고, 첫째 아들 ˝캐시˝는 어머니가 바라보는 앞에서 그녀의 관을 만드는 데에만 몰두한다. 둘째 아들 ˝달˝은 어머니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만의 공상에 빠져 있으며, 셋째 아들 ˝주얼˝은 가족의 일보다는 오직 말(Horse)에 집착한다. 넷째 딸 ˝듀이 델˝은 어머니 옆에서 간병을 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고, 막내아들 ˝바더만˝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리기만 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아버지 ˝앤스˝는 그녀의 임종 직전에 의사를 부르고, 두명의 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마을로 떠나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다. 하지만 무엇때문인지 가족들은 ‘제퍼슨에 묻어 달라‘는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반드시 지키려고 한다. 얼마전까지 내린 폭우로 인해 다리가 끈꼈지만 가족들은 직접 만든 관에 그녀를 실고 마차를 이용하여 먼길을 돌아가면서까지, 강을 무리하게 도하하면서까지 읍내라고 할 수 있는 ‘제퍼슨‘으로 향한다.
하지만 가는 여정은 대단히 험난했고, 가족들은 어머니가 죽은지 열흘이 지난 후에야 ‘제퍼슨‘에 도착하여 어머니 ˝애디˝를 그곳에 묻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족들은 각자가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과 진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아내와 어머니의 부재는 순식간에 잊혀진다. 도대체 어떤 진심과 진실이었기에?
다양한 화자가 등장하고 화자들의 사연들도 다양하여 초반에는 다소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다양한 사연들이 한곳에 수렴하면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힌트를 찾는 재미도 있었다.
어떤 죽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죽음은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아무리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 중요하더라도 잊혀진다는 건 슬픈 일일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P.53
하지만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차라리 잊혀지는 걸 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애디˝ 역시 가족들에게 잊혀지는 걸 원했기 때문에 가족 묘지가 아닌, 고향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긴건 아니었을까? 살아서도, 그리고 죽어서도 마음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애디˝에게 안식처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