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같은 소설에 딱 맞는 작품. 아침부터 우울해졌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죽음을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 P36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환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P39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집고 누위 있있다. 여름이 지나고는 나비들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어디서 버터왔던 것일까? - P50

물과 물이 만니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ㅡ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 P58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 P70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P97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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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가장 좋았다.

카밀루는 진심으로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수 없었다. 히타는 마치 뱀처럼 그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그를 온통 감싸고, 그의 육신이 경련을 일으켜 파열하게 만들고, 그의 입에는 독을 떨어뜨렸다. 그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그녀에게 압도당했다. 고뇌와 공포, 회한과 욕망, 그 모든 것이 뒤섞여 그를 어쩌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면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고, 승리는 황홀했다. 양심의 가책이여, 안녕! - P13

평범한 사람과 천재의 생생한 이미지! 한 사람은 눈물과 그리움을 지니고 현재를 응시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오로라의 광채를 지니고 미래를 바리본다. - P98

하지만 실상 불행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풍요로움에서 총족함으로, 충족함에서 평범함으로, 평범함에서 가난으로 그리고 가난에서 아주 빈곤함으로 점진적으로 다가섰다. 그가 거리 끝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모자를 벗어 땅바닥까지 내려 인사하던 사람들이 5년이 지난 지금은 아주 친근하게 그의 어깨를 치거나 코를 가볍게 튕기면서 그를 멍청이 바보라고 놀려대었다. 그래도 코스타는 언제나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 P105

나는 과학과 아무 관련이 없소. 하지만 우리가 정적이라고 추정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쳤다는 이유로 격리되고 감금된다면, 그 박사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 P127

셋째, 이러한 조사와 통계적 사실로부터 정한 이론은 기존의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기능이 불균형한 사람들을 정상적인 표본으로 여겨야 하며 오히려 그러한 균형이 지속되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 병리학적 가설 사례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 P157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는 행복하고 슬퍼서, 아니 론도기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음 행동은, 스스로 카자베르지 병원에 수용되는 것이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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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반 부닌. 너무 좋다. 처음 읽는 작품들이 많아서 더 좋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노인의 시체는 신세계의 해안에 있는 집으로, 무덤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주일간 수많은 모욕과 인간들의 무관심 속에 항구의 창고에서 다른 창고로 옮겨다닌 시체는 마침내 바로 얼마전까지 구세계로 가는 그를 퍽이나 융숭하게 대접했던 그 유명한 배에 다시 타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산 자들에게서 감추어졌다. 타르를 칠한 관 속에 넣어져 캄캄한 선창 깊이 내려보내졌다. - P36

"가장 큰 희극이 뭔지 알아?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설득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거지. 바로 그게 문제야, 창. 그렇지만 삶이란 얼마나 멋진가. 정말 멋져!" - P51

그렇게 창의 낮과 밤은 단조롭게 흐른다. 세상은 마치 기선처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부주의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물속 암초에 전속력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어느 겨울 아침 잠에서 깬 창은 방안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고요에 놀란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장의 침대로 뛰어든다. 그리고 창백하게 굳은 열굴에 눈이 빈쯤 열려있고 고개는 뒤로 떨군 채 이동도 없이 누워 있는 선장을 본다. 그 눈을 본 창은 그의 다리를 쳐서 넘어뜨렸거나 거리를 달리던 자동차에 치인 것처럼 절망적인 울음소리를 낸다. - P60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집요하게 미타를 원하고 갈구하던 카타가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런 카타와 전혀 닮지 않은 평범한 원래의 카타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미타가 지금과 같은 느낌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 P245

무언가가 그녀를 그에게서 떨어지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미타는 교장에 대헤 편안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교장 말고도 또다른 관심사들이 카타의 마음을 차지한 것 같았다. 누가? 무엇이? 미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카타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모든 사람에 대해 질투심을 느꼈는데, 특히 그녀가 그몰래 무언가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고 상상하며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그가 느끼기에는 뭔가 불가항력적인 힘이 카타를 그에게서 먼 어딘가로, 혹은생각만 해도 끔찍한 어떤 것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P246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는 거죠? 당신 생각에 내 모든 것이 그렇게 천박하다면 말이에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해요?"

그러나 그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의 긴장된 힘으로 인해 점차 늘어만 가는 요구 때문에 그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질투했고, 질투로 인한 같등이 커질수록 그의 사랑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욱더 커져가는 듯했다. - P250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사랑이라 불리는 것인가, 아니면 정열이라 불리는 것인가? 그녀의 외투 단추를 끄르고 천국처럼 매혹적인 가슴에 입을 맞출 때, 그 가슴이 영혼을 뒤흔들 만큼 순종적이고 순진무구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 열려 있을 때 그를 거의 기절할 정도로 죽음 직전의 황홀경으로 이끄는 것은 카타의 영혼인가 아니면 육체인가?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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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9, N25040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 한국문학의 천재였던 이상의 삶을, 현재 한국문학의 천재인 김연수가 재구성한 작품이 <꾿빠이, 이상> 이다. 특이하게도 이 책의 주인공은 이상이 맞지만 이상이 살았던 시대는 단지 소재일뿐, 이상 사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다 가상의 이야기이냐? 그건 아니고 왠지 사실인듯한 이야기를 다룬다.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진짜냐 가짜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믿느냐 안맏느냐가 문제일 뿐.


<데드마스크>, <잃어버린 꽃>, <새> 세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연관없어 보이지만 김연수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상의 작품집과 오감도를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의 작품집은 너무 어려웠다. 잘 읽히지도 않고 내용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도 읽은 <날개>와 <봉별기> 외에는 쉽게 읽히지 않았고, 그나마 중편인 <12월 12일>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오감도는 내 이해 범위 밖이었다... 그럼에도 이상이 천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꾿빠이, 이상>을 쓰기 위해 김연수 작가님이 정말 고생하셨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김연수 작가님 입문용으로는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상을 좋아하거나  아직 김연수 작가님의 안읽은 작품을 찾는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하고 싶다.




추가) 리뷰를 대충 쓴 대신 마무리는 김연수 작가님 책탑으로~!!


다 좋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해보자면,

장편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단편집 :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입문용 :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이고,


아직 안읽은 김연수 작가님 소설은 <7번국도>, <스무살> 두편 남아있다. 전작읽기 도전은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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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30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 도전, 을 응원합니다!!!

새파랑 2025-05-01 07:55   좋아요 0 | URL
넵 감사합니다~! 얼마 안남았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5-04-30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탑 멋져요~
이상하게도 저는 아직 김연수를 못 읽어봤네요
정말 이상하게도^^ㅋㅋ
몇권 있는데...

새파랑 2025-05-01 07:56   좋아요 1 | URL
김연수 작가님 저의 최애 작가입니다. 읽으시면 깜짝 놀라실겁니다~!!

페넬로페 2025-04-30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의 작품 읽기와 책탑 멋지네요.
새파랑님께서 추천하신 책만 안 읽은 것 같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5-05-01 08:00   좋아요 1 | URL
앗 ㅋ 저의 추천작을 추천합니다~!! 다 좋긴 하지만~!!!

coolcat329 2025-05-01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새파랑님 진정 김연수 작가의 찐팬이네요. 저는 에세이 한 권만 읽어봤는데 추천작들 읽어볼게요~

새파랑 2025-05-01 11:33   좋아요 0 | URL
저는 김연수 작가님 에세이는 아직 안접했습니다 ㅋ 소설은 장편 단편 다 좋습니다~!!!

다락방 2025-05-09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새파랑 님 책들을 다 어디에 보관하시나요?

새파랑 2025-05-09 09:35   좋아요 0 | URL
옷장(?)에 책탑 그대로 보관합니다 ㅜㅜ 나머지 책들은 박스에다가... 제가 책장을 살 형편이 안되가지고 ㅜㅜ

이작가님처럼 바닥(?)에 쌓아 놓기에는 책이 손상될거 같아서 안합니다 ㅋ
 
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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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38 트루먼 커포티가 10대 때 쓴 단편집. 나는 10대때 뭘 했었나 반성해본다...제목과 표지가 정말좋은데 포함된 단편들도 모두 좋다. 자전적인 느낌이 많이 남. 이제 그의 장편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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