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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N23054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한때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면, 그런데 미치도록 만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하나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시절이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곳은 상상의 세계일 수도 있고, 꿈의 세계일 수도 있지만, 기억만 있다면 못할것도 없다.
[나나 너나 그전까지는 이렇게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자기 기분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상대를 만났다는 건 실로 기적에 가깝게 느껴진다.] P.20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재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세계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결국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만나게 되는 곳이 현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만난다는 행위 그 자체이다.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생각에, 이 세계에 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P.44
열일곱살의 나는, 열여섯살의 그녀를 만난다. 나는 그녀가 너무 좋다. 그녀의 모든것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녀는 나에게 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에 대한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를 버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도시다. 나는 그녀와 꿈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와 함께 그 도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간다.
[그 도시에 가면 나는 진짜 너를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아마 전부를 내게 줄 것이다. 나는 그 도시에서 너를 갖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그곳에선 너의 마음과 너의 몸이 하나가 되고, 유채기름 램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그런 너를 품에 꼭 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 였다.] P.134
어느날 그녀와의 연락이 끊긴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진다. 현재 세계에서 그녀를 찾을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수는 없었다. 나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가 버렸지만, 결국 그녀와 함께 만든 이야기속 도시로 들어간다. 이건 꿈일까? 진짜일까?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P.15
그리고 그 도시에서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도시에 있던 그녀는 진짜일까? 그림자일까? 어쩜 내가 열일곱살때 현실세계에서 만났던 그녀가 사실은 본체가 아니고 그림자였던건 아닐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국 너를 다시 만났으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하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 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P.448
간절히 원하면 결국 이루어진다. 비록 잠깐일 뿐이라도.
하루키의 신작을 읽는 동안 그의 전작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기본적인 이야기는 <세계의 끝>을 닮았고,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는 <해변의 카프카>가 떠올랐었으며, 고야스씨나 옐로서브마린 캐릭터는 양사나이 느낌이었고, 갑작스러운 상실은 <노르웨이의 숲>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기복제보다는 하루키 월드를 집대성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 다, 그게 전부인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 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그리고 또한 그 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 P.681
오래간만에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련한 기분과 함께 말이다. 대학교 때 하루키 작품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처음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뭔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던 <상실의 시대>,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태엽감는 새>, 그리고 가장 감동했던, 그리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해변의 카프카>까지 그 책을 읽었던 대학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기억만 있다면 못할것도 없는것 같다. 기억만 있다면 나에겐 지금도 예전 행복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 이 책의 '나' 처럼 말이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망설이지말고 이대로 계속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 으니까."] P.75
Ps. 이 작품이 하루키의 마지막 장편은 아닐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