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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평점 :
N23086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누가 물어보지는 않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을 꼽아달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사양>을 선택하겠다. 뭐 대부분이 좋긴하지만. <인간실격>은 너무 유명해서 좀 그렇다. <만년>은 좋긴 한데 단편집인데다 초기작이어서 좀 꺼려지고, <달려라 메로스>는 10퍼센트 아쉽다. <쓰가루>는 30퍼센트 아쉽다...
<사양>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 책만큼 절망을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러질 지언정 꺾이지 않는, 절망속에서도 혁명과 사랑을 꿈꾸는 ‘다자이 오사무‘의 의지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 삶이 그러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P.54
<사양>의 주인공은 누나인 ‘가즈코‘ 이고, 서브 주인공은 남동생 ‘나오지‘ 라고 할 수 있지만, 책을 다 읽고나면 두 사람은 개별적인 캐릭터가 아닌,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자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P.95
몰락한 귀족 집안을 홀로 이끈 어머니는 결국 가난한 삶속에서 결핵으로 죽지만 마지막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아들 ‘나오지‘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약과 술에 의존하며, 결국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의 자살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과거를 청산하려는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혁명과 사랑을 완수하기 위한 희생자로 말이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P.109
딸인 ‘가즈코‘는 사랑하는 두사람의 상실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며, 혁명과 사랑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비록 지금은 ‘사양‘이지만 가즈코의 미래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귀족, 결혼, 관습, 도덕 이런 것들은 ‘가즈코‘에겐 그저 ‘사양‘일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