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보뱅. 종교적인 글도 그가 쓰면 예술이 된다.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 문장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 우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 모습을 놓치기 일쑤니까. - P12

아이와 천사는 아시시에서 멀어져 갔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개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세 발자국 뒤에서. - P20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4

우린 이런저런 도시에서 이런저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가정에 산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사실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얼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노래하는 그곳이다. - P58

그는 가슴이 뜨겁고 두 뺨이 상기된 채 그곳을 나온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곳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계시는 집을 찾았으니까. ‘지 극히 낮으신 분‘이 어디에 거하는지 이제 그는 알고 있 다. 세속의 빛이 가까스로 닿는 곳, 삶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삶은 꾸밈없는 원시적 생명에 불과하며, 단순한 경이요 조촐한 기적이다. - P73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을 이야기한 다. 그러느라 쉬어 버린 그들의 목소리엔 야수의 우울함이 감돈다. 반면 프란체스코는 하느님을 상대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통해 - 오로지 자신의 삶을 시간 속에 지탱함으로써 풀어놓는 음, 그 순수한 음이 먼 하느님의 귀에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가늘고 희미한 음이다. 이 음을 덮어 버리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 P101

남자와 여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성이 아닌 자리의 차이이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를 지키는 자며,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두려움 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는 다. 여자는 어떤 자리에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는 사랑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사랑 속으로 이 차이는 매순간 극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절망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 P124

여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느끼며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일지언정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멜랑콜리에 젖고, 무사태평으로 환히 빛나는 어떤 얼굴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그 순간 그는 빛을 감지하기 시작하며 하느님의 일부를 엿 본다. 남자가 여자들의 진영과 하느님의 웃음에 가 닿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한 번의 동작으로 족하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지는 아이들처럼, 단 한 번의 동작이면 된다. 넘어지거나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잊은 동작. 이렇게 남자는 과거가 가해 오는 진 지함의 부담을 등한시하면서 자기 자신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이런 남자는 이제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 P124

그리스도만큼 여자들을 향해 얼굴을 돌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 하나를 보려고 얼굴을 돌리듯, 여정을 계속할 힘과 의욕을 얻기 위해 강물 위로 몸을 숙이듯 말이다. 성서 속엔 새들만큼이나 많은 여 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여자들이 있 다. 여자들은 하느님을 낳아, 그가 자라고 뛰어놀고 죽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미친 듯한 사랑의 단순한 몸 짓으로 그를 부활시킨다. 산과 병동의 후텁지근한 방에서든 선사시대의 동굴 속에서든, 태초부터 취해 온 똑같은 몸짓이다. - P125

그가 그녀보다 먼저 죽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은 처음 시작되는 순간, 첫 전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시간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파괴하니까. 전과 후의 구별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자들의 영원한 오늘이 지속될 뿐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뿐이다. - P129

누군가 프란체스코의 말들을 얇은 책 속에 모아 두었다. 진짜 가난한 사람의 말을 담은 책이다. 아름다울 것도 없는 편지들, 우아하지도 않은 기도 너무 자주 빨고 기운, 가난한 사람의 닳은 옷 같다. 성서에서 빌려와 짜 맞춘 것들. 여기에 시편 한 편, 저기에 또 한 편,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도하기, 허공이 우리의 말을 씻어 내도록 허공에 대고 말하기, 라는 의도한 바가 달성 된다. 너를 사랑해. 하느님을 향해 쏘아진 이 말은 불화 살처럼 어둠을 뚫고 들어가선 미처 과녁에 닿기 전에 꺼지고 만다. 너를 사랑해. 이것이 그가 하려는 말 전부이다. 거기서 어떤 독창적인 책, 작가의 책이 탄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으니까. 사랑은 작가의 발명품이 아니니까 - P138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말의 공 ‘너를 사랑해‘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 공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 간다.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 P139

그렇긴 해도 그에겐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가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그렇게 조금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랑에선 진전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지점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완전한 신뢰와 무사태평을 특징으로 하는 아이의 마음, 영혼의 방치가 있을 뿐. 나이는 합산을 하고, 경험은 축적을 하며, 이성은 무언가를 구축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축적 하지도 구축하지도 않는다. - P139

어린아이의 마음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태초에서 다시 출발해 사랑의 첫발을 떼어 놓는다. 이성적인 사람은 축적되고, 쌓이고, 구축된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런 합산의 결과물인 사람과는 반대된다. 그는 자신 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공을 갖고 노는 바보, 혹은 자신의 하느님 에게 이야기하는 성인이다. 동시에 둘 다거나. - P140

당신들은 자신들의 사막 같은 영혼 속에서 완벽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완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둘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P147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니까요.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입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일도 그 실천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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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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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86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누가 물어보지는 않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을 꼽아달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사양>을 선택하겠다. 뭐 대부분이 좋긴하지만. <인간실격>은 너무 유명해서 좀 그렇다. <만년>은 좋긴 한데 단편집인데다 초기작이어서 좀 꺼려지고, <달려라 메로스>는 10퍼센트 아쉽다. <쓰가루>는 30퍼센트 아쉽다...



<사양>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 책만큼 절망을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러질 지언정 꺾이지 않는, 절망속에서도 혁명과 사랑을 꿈꾸는 ‘다자이 오사무‘의 의지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 삶이 그러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P.54



<사양>의 주인공은 누나인 ‘가즈코‘ 이고, 서브 주인공은 남동생 ‘나오지‘ 라고 할 수 있지만, 책을 다 읽고나면 두 사람은 개별적인 캐릭터가 아닌,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자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P.95



몰락한 귀족 집안을 홀로 이끈 어머니는 결국 가난한 삶속에서 결핵으로 죽지만 마지막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아들 ‘나오지‘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약과 술에 의존하며, 결국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의 자살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과거를 청산하려는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혁명과 사랑을 완수하기 위한 희생자로 말이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P.109



딸인 ‘가즈코‘는 사랑하는 두사람의 상실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며, 혁명과 사랑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비록 지금은 ‘사양‘이지만 가즈코의 미래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귀족, 결혼, 관습, 도덕 이런 것들은 ‘가즈코‘에겐 그저 ‘사양‘일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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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2-15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사양>이 최고라고 말하겠어요^^

새파랑 2023-12-15 19:26   좋아요 1 | URL
오 은하수님 역시 책을 잘 아시는분~!! 어제 밤에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3-12-15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양‘의 분위기를 새파랑님께서 찰떡같이 적어 주셨어요.
절망을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이 책의 특이한 분위기도 좋았어요.
약간 이해가 안되기도 했지만요^^

새파랑 2023-12-16 09:02   좋아요 2 | URL
왠지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재독했는데 다시 읽으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더라구요~! 갑자기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M.C ~!!

coolcat329 2023-12-16 0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잘 지내셨죠?
저는 다자아 오사무 책을 한 권도 안 읽어봤어요. 만년은 새파랑님 글 읽고 구입해놨긴 했는데 <사양>을 베스트로 꼽으셨네요. 남매가 작가의 두 자아라니 궁금하네요. 무엇보다 소설이 우아하다니~
무엇에 대한 사양인지도 대충 알겠어요.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주인공이 인상적입니다.

새파랑 2023-12-16 09:04   좋아요 2 | URL
이 좋은걸 아직 안 읽어보셨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인간실격도 그렇지만 사양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소설 느낌이 강합니다 ㅋ 좀 우울해질수도 있습니다....

리뷰보면 <사양> 평이 많이 갈리던데 제발 좋으셨으면 합니다~!!

희선 2023-12-17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게 《사양》이군요 다자이 오사무는 한권밖에 못 읽어봤네요 그거 다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직입니다

새파랑 님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12-18 11:12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 읽으셨겠군요? 사양도 좋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희선님은 좋아하실거 같습니다 ^^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은 단연 <사양>이다.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 P30

"어머니, 전 요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뭘까. 언어도 지혜도 생각도 사회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신앙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 딱 한 가지 있어요. 모르실테죠? 다른 생물들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 이라는 거죠. 어때요?" - P52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 P54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 P76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 P95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 P109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 P128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 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거슬리나?" - P143

나는 언젠가 부인과 손을 맞잡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부인도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꿈에서 깨 어나서도 내 손바닥에 부인의 손가락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것만으로 만족했고, 단념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도덕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반쪽 미치광이 아니 거의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그 서양화가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단념하자고 마음먹고 가슴의 불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닥치는 대로, 심지어 그 화가도 어느 날 밤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로 볼썽사납게 미친 듯이 여러 여자들과 놀아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든 부인의 환상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패. 나는 결국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인 이외 의 다른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아름답다거나 안쓰럽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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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은 오사카의 상류계층이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네 자매와 당시 오사카 지방의 풍속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단순히 풍속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 시대로 옮겨간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대가의 글쓰기는 이런거구나! 하는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자매는 네 자매 이지만, 실제로 함께 생활하고 엮여 있는 건 둘째 사치코, 셋째 유키고, 넷째 다에코 세 자매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그린 세 자매는 모두 매력적이다 (첫째 제외). But 리뷰를 쓰려다가 갑자기 그녀들의 MBTI가 궁금해졌다. 분석해보자면,



1. 세 자매중 유일하게 결혼한 둘째 사치코는 명실상부 이 책의 주인공이 확실하며, 자매들의 구심점이자 내조도 잘하고 자매들도 잘 챙기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한 팔방미인이다. 게다가 마음은 어찌나 착한지 다른 사람이 기분나빠 할까봐 늘 조심하고 걱정에 걱정이며, 타인을 위해 내 한몸 희생쯤은 당연하게 한다. (MBTI 추측 : ESFJ)



2. 반면 셋째 유키코는 사치코와는 다르다. 완전 내성적이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지 않으며 소극적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온 전화도 받지 않는다. 전형적인 오사카 전통 여인의 모습이랄까? 그렇다고 자기 생각이 없지는 않다.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세설>의 부제를 짓는다면 ‘유키코 시집 보내기‘ 이다. 읽으면서 내가 답답해지는 순간도 많았다. 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못하는지...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너무 사랑스럽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MBTI 추측 : INFP)



3. 막내 다에코는 (당시기준) 현대 여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독립해서 살아가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건 일단 쟁취한다. 그리고 자유연애까지...당시 일본 기준으로는 언니가 시집을 가야 동생이 시집을 갈 수 있었는데, 셋째 언니인 유키코가 시집을 못가다보니 본인도 시집을 못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에코는 뭔가 막(?) 사는 느낌이 들었다. (MBTI 추측 : ISTP)



4. 그래도 <세설>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치코‘의 남편 ‘데이노스케‘일 것이다. 부지런하고, 착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고, 부인에게 충성하고, 사고치는 처제들을 뒷바라지 하는 형부인 ‘데이노스케‘는 진정 보살중의 보살이다. 아마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이 ‘데이노스케‘가 아닐까 싶다. (MBTI 추측 : ENTJ)



이지 않을까 싶다 ㅋㅋ <세설>을 읽어보신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그냥 글 잘쓰는 변태(?) 탐미주의 작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고, 일본 근대문학의 대가라는 평에 딱 맞는 작가였다.



Ps. 이제 더이상 읽고 싶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없어보인다. (유명하거나 괜찮은 작품은 다 읽은듯...) 나중에 종합 페이퍼를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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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12-12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요새 mbti 공부중이십니까ㅋㅋㅋㅋ 꽤 자주 언급하시네요ㅋㅋㅋ

새파랑 2023-12-12 20:02   좋아요 0 | URL
ㅋㅋ mbti의 특성은 잘 몰랐다가 최근에 좀 알아서 했습니다 ㅋㅋ 사실 이해는 못하고 있습니다 ㅡㅡ

잠자냥 2023-12-12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재미있는 페이퍼인데…. 세설 읽은 지 오래인 데다 MBTI 각각의 특성을 잘 몰라서 매치가 안 되는 안타까움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mbti는?! ㅋㅋㅋㅋㅋ 혈액형은 B형일 거 같습니다만 ㅋㅋㅋ

새파랑 2023-12-12 20:03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mbti 공부가 필요합니다~!! 다니자키는 P가 확실합니다 ㅋㅋ

B형은 사이코 아닌가요? ㅋ

페넬로페 2023-12-12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의 mbti 분석, 과연 확실한가?}
이 답을 위해서 꼭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ㅎㅎ
근데 먼저 mbti 공부부터 해야 하나요?

새파랑 2023-12-12 22:53   좋아요 1 | URL
ㅋㅋ 저도 mbti 인터넷에서 대충 봐서 정확하지 않습니다 ㅡㅡ

세설 재미있어요 ^^

cyrus 2023-12-13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INEP로 나왔는데요, 상대방에게 진짜 할 말이 있으면 입 밖에 꺼내기 전에 몇 분 정도 고민해요. 말해야겠다고 결론 내리면 얘기하고요, 아리송하다 싶으면 침묵해요. 저는 나름 사려 깊은 발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답답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

새파랑 2023-12-13 08:19   좋아요 0 | URL
오 INFP ㅋ 시이러스님하고 유키코 성격이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강단이 있는~!! 책 좋아하시는 분들중에 INFP가 많을거 같아요 ㅋ

유부만두 2023-12-13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셋째딸 시집보내기 작전이지만 지루할만 할 때 막내의 사건이 터져줘서 읽었어요. MBTI 오 인물들 보기! 새파랑님의 해석이 참신하네요. ^^

새파랑 2023-12-13 08:21   좋아요 0 | URL
아 ㅋㅋ 진짜 속터집니다. 도대체 유키코 시집은 가는거야? 이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ㅋㅋ

세 자매의 성격이 다 다르니까 너무 웃기더라구요 ~! 그래서 한번 써봤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3-12-14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세설 읽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파랑 2023-12-14 14: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은 재미있게 읽으실거 같습니다~! 순한맛 다니자키 준이치로 입니다 ㅋㅋ
 
세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1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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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85 스케일은 일본판 '카라마죠프가의 자매들' 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처음에는 뭐야 이랬는데 읽어나갈수록 웃음이 나면서 흥미진진 했다. 글 속에 한 시대와 장소를 이토록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작품의 주인공인 사치코와 남편 데이노스케는 진정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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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11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끝까지 보셨군요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카라마조프가의 자매들...


희선

새파랑 2023-12-11 10:16   좋아요 1 | URL
일본 근대 오사카 배경의 대하소설을 읽은 기분이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12-11 16: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판 카라마조프가의 자매들!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며 읽으면 재밌겠어요^^

새파랑 2023-12-11 18:28   좋아요 2 | URL
카라마죠프 형제들은 적대적이지만

세셀의 자매들은 아기자기 하고 사이가 대단히 좋습니다 ㅋㅋ

당시 일본에서 왜 출판 금지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너무 태평한 느낌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