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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8월
평점 :
N23087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
<지극히 낮으신>을 읽고나면 저연스럽게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검색할 수 밖에 없다. 1181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그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란치스코처럼 헌신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성인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4
보뱅은 이 작품에서, 성경의 한 구절과 그의 삶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믿음과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경의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당신은 이 문장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처음 읽을때는 그냥 그런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었을때는 확실히 '개'가 눈에 들어온다. '개' 라고? 보뱅 처럼 나도 아이와 천사를 따라가는 '개'가 그려졌다. 때로는 앞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옆에서 나란히 걷기도 하고, 뒤에서서 앞서가는 아이와 천사를 보며 멍멍 짓는 '개'의 모습. 아무 댓가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라가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자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이 문장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 우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 모습을 놓치기 일쑤니까. ] P.12
'보뱅'이 그린 '프란체스코'의 모습은 마냥 성스롭지는 않다, 일반적인 남자의 모습이다, 단지 남들보다 더 자신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이 크고 남들보다 더 순수하고 연민을 느낄 뿐이다. 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가는 걸까?
[그렇긴 해도 그에겐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가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그렇게 조금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랑에선 진전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지점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완전한 신뢰와 무사태평을 특징으로 하는 아이의 마음, 영혼의 방치가 있을 뿐. 나이는 합산을 하고, 경험은 축적을 하며, 이성은 무언가를 구축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축적 하지도 구축하지도 않는다. ] P.139
이제 어느정도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삶은 힘들다. 그리고 아직도 모르겠다. 삶의 의미가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책도 이렇게 계속 읽어야 하는건지...(눈이 나빠지면 어떻해 해야하지?) <지극히 낮으신>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답을 독자에게 준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사랑하라고, 실천하라고.
[당신들은 자신들의 사막 같은 영혼 속에서 완벽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완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둘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P.147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니까요.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입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일도 그 실천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P.148
보뱅의 글은 언제나 따뜻하다. 그래서 좋다.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은 잠시 뿐이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순수해질 수 있어서 좋다. 마음의 정화가 필요한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말의 공 '너를 사랑해'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 공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 간다.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