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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2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N24022
˝당신의 눈을 어디서 꼭 본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에요. 나는 한 번도 여기 온 적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꿈속에서...˝
100% ‘선‘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내면은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선‘한 사람에게도 ‘악‘하거나 나약한 내면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다만 이성이나 제도들이 이를 표출하지 못하도록 할 뿐.
반대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악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악‘을 행할 때에도 내면 어딘가에는 반성과 후회라는 ‘선‘한 요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악인을 교화할 수 있다면, 그들은 ‘악‘의 행동을 멈출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00% ‘선‘으로만 이루어진 구원자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구원자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라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00% ‘선‘으로 이루어진 사람인 ‘므이쉬킨‘ 공작이다. 작품 초반에 그는 가족 하나 없고, 간질 발작 때문에 어린시절에 스위스로 요양을 떠나 있다가 이제 기차를 타고 고향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거짓말은 하지 않고, 언제나 진실과 진심만을 말하는 ‘므이쉬킨‘을 사람들은 ‘백치‘라고 부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므이쉬킨‘은 100% ‘악‘으로 이루어진 사람인 ‘로고진‘을 만나게 된다. 불한당이었던 ‘로고진‘은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졸부였고, 사랑에 대한 야망과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로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백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여인인 ‘나스타시야‘ 였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므이쉬킨‘과 ‘로고진‘은 단 한번의 대화로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페테르부르크 기차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이후 앞에서 이야기한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나스타시야‘가 등장한다.어린시절 지배계층의 횡포로 인해 부모를 잃은 그녀는 고아로 자라게 되고, ‘토츠키‘라는 거부가 그녀를 키우게 되는데, 그녀는 어린시절에 ‘토츠키‘로부터 유린당하고 그의 정부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너무나 똑똑하고 똑부러진 그녀는 성장하면서 아름답고 강한 여인으로 크게 되고, 더이상 ‘토츠키‘의 정부가 아닌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협박하고 괴롭힌다.
‘토츠키‘는 자신의 위신과 안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였던 그녀를 ‘가냐‘라는 인물과 정략켤혼 시키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가냐‘는 자신의 출세와 지참금이라는 경제적 보상을 위해서 그녀와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선 말이다.
그리고 ‘가냐‘의 집에서 앞에서 언급한 네 사람, ‘므이쉬킨‘, ‘로고진‘, ‘나스타시야‘, ‘가냐‘ 가 처음으로 함께 만나게 된다. ‘므이쉬킨‘은 한 눈에 ‘나스타시야‘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알아보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응?),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그녀를 구원하려고 한다. ‘나스타시야‘ 역시 그를 알아본다, 그의 선함을 알아본다. 그와 함께 한다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느낀다. 더이상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괴롭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마음속에 품는다.
하지만 그녀는 100% ‘선‘인 ‘므이쉬킨‘ 대신 100% ‘악‘인 ‘로고진‘을 일단 택한다. 당연히 정략결혼의 대상자였던 ‘가냐‘에게는 모욕을 준다...그녀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대신 왜 절망을 택했을까? 아마 그건 자신이 ‘므이쉬킨‘을 선택한다면 자신 때문에 ‘므이쉬킨‘이 타락할 거라고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미 타락한 자신은 이제 구원받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해서 인지도 모른다.
구원받을 수 있었지만 구원받는 걸 포기한 ‘나스타시야‘, 그녀는 ‘로고진‘과 함께 떠나지만 아직 선한 내면이 남아있었던 그녀는 ‘로고진‘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도망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선‘과 ‘악‘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스타시야‘는 자신의 이상향인 ‘므이시킨‘이 ‘아글리야‘라는 자신과는 달리 순결한 여인과 결혼할 수 있도록 물밑작업(?)을 한다. 그렇게 해서 ‘므이시킨‘과 ‘아글리야‘는 가까워 지긴 하는데... ‘나스타시야‘는 자기가 물밑작업을 해놓고선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질투를 한다. 이것 또한 사랑과 질투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처럼 말이다.
과연 ‘나스타시야‘는 ‘선‘(므이쉬킨)을 택할까? 아님 ‘악‘(로고진)을 택할까? 변덕과 변덕을 거듭하는 ‘나스타시야‘를 보면 좀 속이 터지긴 하지만, 원래 인간의 마음이라는게 변덕과 모순 덩어리 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도 된다. 결말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절대 ‘악‘인 ‘로고진‘은 이런 변덕스러운 그녀를 과연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줄까 있을까?
그리고 절대 ‘선‘인 ‘므이쉬킨‘이 ‘나스타시야‘에게 느끼는 감정은 연만밀까, 사랑일까?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이 가능하긴 한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주인공인 ‘므이쉬킨‘이 백치로 불렸다는 점과, 이 작품의 제목이 <백치>라는 점에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양쪽의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내면을 이처럼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 ‘선‘한 사람의 영향력이 주변을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구원할 수는 없다, 구원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추가1)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백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수다스럽고, 개성도 매우 강하며, 여성들(특히 부인들)의 입김은 완전 쎄고, 어떻게 보면 다 정신이상자 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추가2) 예전에 처음 읽었을때는(열린책들 버젼) 이해하기도 힘들고 잘 안읽혔는데, 이번에 재독하니(문학동네 버젼) 확실히 예전보다 이해도 잘 되고 훨씬 잘 읽혔다. 역시 좋은 작품은 재독해야 한다는걸 새삼 느꼈다.
추가3)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 표지 뒷면에 나온 것처럼 이 책의 1부 이야기 전개는 정말 대단하다. 등장인물 이름만 햇갈리지 않고 1부를 집중해서 읽는다면 2~4부는 술술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