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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이야기 ㅣ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평점 :
인생의 정점에 올라간 사람이 이제 내려올 일만 남았을때, 인생의 끝이 점점 보이기 시작할때, 어떤 기분이 들까?
단편의 황제인 체호프의 단편집 <지루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지금까지 체호프의 작품은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 딱 1권 읽어 보았는데 정말 좋았었다.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지 계속 생각했는데, 주말에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수록된 세작품을 살펴보니 모두 읽어보지는 않아서 바로 구매했다. 이게 바로 책과의 운명적인 만남인가 했다.
이 책에는 <지루한 이야기>, <검은 옷의 수도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세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특색있고 너무 좋았다. 왜 체호프, 체호프 하는지 완전 공감이 갔다.
<지루한 이야기>
의과대학 교수인 "니꼴라이"는 직업적인 면에서 모든 걸 성취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도 있다. 하지만 이 남자 삶에 있어서 불행해 보이고 모든것에 불만이 많아 보이며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왜?
사랑스러운 가족은 그의 명성보다는 경제적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이제는 그를 감정적으로 소외 시킨다. 게다가 그 역시 가족에게 실망을 느끼고 가족으로터 소외받는 길을 택한다. 또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짜증을 느끼며, 만사에 무관심을 느끼게 된다. 왜?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아파트에서 끌어낸다.] 57페이지
그 이유는, 인생의 정점에 있었던 "니꼴라이"는 이제 내려올 일만 남은 인생이 되었고, 그저 삶의 피날레만을 망치지 않기 위해 기다려야만 하였으며, 게다가 자신의 건강상태를 봤을 때 남아있는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인생의 모든 걸 이루었지만, 60여년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인생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지루한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 처한 1인칭 주인공 "니꼴라이"의 삶의 결말 부분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제 지루함만 느껴야 하는 인생이 되었기에 단편의 제목이 '지루한 이야기' 인 것 같다. 책의 내용은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다만 인생의 피날레를 기다리는 인생이 지루할 뿐이다.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조차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도 나중에는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삶의 피날레 순간이 다가오면 인생에 대한 답을 얻을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살아 나가야 할 뿐.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무거운 작품.
<검은 옷의 수도사>
혹시 살면서 헛것을 본 적이 있나요? 이 단편은 주인공인 박사 "꼬브린"이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고, 이 때문에 '검은 옷의 수도사'를 보게 되는 정신질환을 갖게 되고, 결국 비참힌 결말을 맞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후견인의 딸인 "따냐"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에 우연히 들었던 것 같은 전설인 '검은 수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따냐"에게 갑자기 이야기 하게 되고, 이후 이상하게도 그의 눈앞에 '검은 수도사'가 계속 나타나며 그는 '검은 수도사'를 전설이 아닌 사실로 믿게 된다. 그리고 '검은 수도사'는 어느 순간 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환멸하게 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은 행복의 댓가로 삶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했다.] 163페이지
그의 정신질환은 점점 심해지게 되고, 점점 예민해지고 과격해지게 되며 자신을 환자 취급하는 장인어른과 "따냐"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점점 키워가게 된다. 결국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나고 "따냐"는 그를 증오하게 되며, 그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갑작스럽게 환영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급박하게 전개되며 왜 그가 갑자기 정신질환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망상에 빠진 사람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증오의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묘사와 정신질환에 따른 불행한 인새의 표현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왜 미쳐야만 했던걸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내가 생각하는 가장 체호프 적인 작품으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란 어떤건지, 왜 어떤 감정은 그렇게 쉽게 변하면서 어떤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지에 대한 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가정이 있음에도 바람기가 가득한 남자 "구로프"는 러시아의 휴양지인 '얄따'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안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그는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안나"는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휴양지인 "얄따"에 방문한 것이었고, 이곳에서 근 역시 "구로프"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하지만 휴양지에서의 밀애는 오래 가지 못하고 그들의 만남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한달만에 끝난다.
그러나 "구로프"가 지금까지 만난 여인들과 다르게 순수함을 가지고 있던 "안나"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고, 이러한 이유로 "구로프"는 기존에 만났던 여인들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디에 있든 무엇을 보든 "안나"를 떠올리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안나는 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어디든 그를 쫓아다녔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살아 숨쉬는 듯 보였는데, 그 모습은 실제의 그녀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젊고 더 다정했다.
그녀는 저녁마다 책장에서, 벽난로에서, 방구석에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의 숨소리와 옷자락이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리에서는 여자들을 눈길로 뒤쫓으며 혹시라도 그녀와 닮은 여인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185페이지
결국 그는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가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 역시 애정없는 결혼생활에 계속 지쳐 있었고, 그녀를 찾아온 "구로프"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그 결말은 알 수 없지만 그 둘의 사랑은 금방 끝나지는 않겠지만 위험하고 어려운 사랑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그는 조금만 더 견디면 해결책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분명하게 깨달았다. 종착지까지는 아직도 멀었으며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은 이제 방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198페이지
단순하게 보면 불륜이야기지만 체호프는 어떻게 그와 그녀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너무 공감이 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두번 읽었다.
세 단편 모두 나에게는 감탄을 주는 작품이었다. 어떤 작품은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어떤 작품은 자기애에 대한 과도한 망상에 대해, 어떤 작품은 과도한 감정에 휩쓸린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지루한 이야기> 단편집은 읽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제목만 지루한 이야기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들. 체호프의 단편은 많은 감정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