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 읽었을때보다 훨씬 좋다. 깊이가 다르다. 직업의식과 정의,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한때 열일곱 명의 직원을 거느렸턴 사람이다. 그리고 이곳 달링턴 홀에서 스물여 명의 직원이 일했던 것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런 집을 네 명의 직원으로, 다시 말해 가장 최소한의 인원으로 굴릴 방안을 짜보라니 생각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 P16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만 물론 나도 옛날 방식을 지나치게 많이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각에서 목격되듯 단지 전통 그 자체를 위해 전통에 매달리는 식의 집착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P16

결국 내가 최근들어 겪었던 모든 난제들의 중심에 바로 이 인력 부족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볼수록 점점 더 명백해지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 집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될만한,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프로 정신을 갖춘 켄턴 양이야말로 달링턴 홀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인력 관리안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는 점이었다. - P20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7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힘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배분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취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 P71

영국의 풍경이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것과 같은 최고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최고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같은 이치다. 그런 이들과 마주치면 내가 지금 위대함을 면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니까 말이다. - P73

그러나 정말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달링턴 나리께서 내 눈과 귀를 우려하여 무언가를 숨기려 하신 적은 결코 없었다. 모 인사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향해 경계의 눈길을 던질라치면 나리께서 "아, 괜찮습니다. 스티븐스 앞에서는 무슨 얘기든 해도 돼요, 내가 보증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경우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 P118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된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 P174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의 저녁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뿐 아니라 그전에 내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던 그날 저녁에 만약 내가 약간 달리 반응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P268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신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 P312

"하지만 어르신이 걱정되지도 않소? 당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분이라고 방금 전에 그랬잖소. 그분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오? 최소한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영국 총리와 독일 대사가 당신 상전의 주선으로 저렇듯 심야에 밀회를 나누고 있는데 궁금증도 생기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제 직분에 어긋나는 겁니다, 도런님." - P340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애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적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 P364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P364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디고 자책헤 본들 무엇이나오겠는가?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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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재미있는 작품. 쉴새없는 수다와 도박판 속에서도 교훈을 준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돈을 따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는 오늘 판돈을 절반씩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고집했고, 내게 80프리드리흐스도어를 주면서 감으로 이런 조건으로 계속 도박을 해나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절반의 돈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도박을 할 수 없는 것은, 내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십중팔구 돈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녀가 돈 때문에 그와 결혼하려 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뻔뻔스럽게 드러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의라곤 찾아불 수도 없고 격식을 차리려고 하지도 않았단 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에 관해서는 더 여처구니 없고 추악한 것이, 어명게 쉴새 없이 전보를 보내면서 죽었나? 죽었어? 하고 물어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예?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

그리고 오늘 남작의 불평을 끝까지 들어 주고 또 그의 이해타산에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장군님께서는 스스로 이 모든 일에 휘말려 들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전 늦어도 내일 이른 아침 안으로 남작님에게 직접 요구하겠습니다. 문제를 일으긴 상대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마치 자격이 없거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에 버린 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상대한 이유에 대해 정식으로 설명해 줄지 것을 요구하겠다는 말입니다.

드 그리외는 모든 프랑스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득이 생긴다거나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쾌활하고 친절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싶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분해지는 것이다. 프랑스인이 천성적으로 다정한 경우는 보기 드물다. 언제나 명령에 따르듯이
그리고 계산 속에서 다정하게 구는 것이다.

하지만 이할머니는 우리 모두보다, 그리고 호텔보다도 더 오래 버티겠어! 아 이런,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우리 장군은 이제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제 그녀는 호텔을 온통 뒤집어 놓고 말 것이다!

뭐가 어떻게야? 기차를 타고 왔지. 철도는 왜 있겠어? 너희들은 내가 뒈져 버리고 유산을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난 자네가 이곳에서 전보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이곳에서 전보를 보내려면 돈이 꽤 들텐데, 자네 그 돈을 대느라고 고생했겠구먼, 어쨌든 내가 부리나케 달려왔잖은가, 여기 이렇게 말이야.

뽈리나! 내게 한 시간만 줘요 여기서 한 시간만 기다려요. 그러면 돌아오겠습니다! 이건..이건 꼭 해야만 돼요! 곧 알게 될 테니, 여기 있어요, 여기 있으란 말입니다!

그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뽈리나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안떠올렸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다. 그 당시에 나는 내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은행권들을 긁어 모으고 움켜쥐는 기쁨, 뭐랄까 도저히 어떻게할 수 없는 기쁨 같은 것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빨간색이 열 번이나 나오고 나면 또다시 빨간색에 걸려고 결심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련한 노름꾼들이라면 빨간색의 반대인 검은색에는 걸지않을 것이다. 노련한 노름꾼은 그것이 <우연의 변덕>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오고 나면 열일곱 번째에는, 예들 들어 열여섯번 발간색이 틀림없이 검은색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풋내기들은 검은색에 우르르 몰려들어 돈을 두배 세배로 올려 걸지만, 결국참패를 당하고 만다.

당신의 생각이 마음에 듭니다. 당신의 말씀 속에서 전 과거의 현명하고 열광적이고 또 냉소적인 친구를 발견말 수 있어요. 그렇게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인뿐이지요. 무릇 인간이란 아주 훌룡한 친구기 자신 앞에서 모육당하는 것을 볼
좋아하게 마련이랍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정이란
것도 바로 그 굴육감을 바탕으로해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예로부터의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낙심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전 정말 기쁩니다. 어디 말씀해 보세요, 도박을 그만두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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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3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에서 책을 선정할 일 있을 때 노름꾼을 추천해야 겠습니다.^^

새파랑 2025-03-03 22:56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 중단편중에 재미는 확실히 있습니다~!! 도박하면 왜 안되는지 교훈을 잘 보여줍니다 ㅋ
 

리커버판 다시 구매하고 재독했는데, 다시 읽어도 좋다.




상대가 자기가 만든 물건을, 그리고 자기가 상대가 만든 물건을 사적인 보물로 삼는 일이 어떻게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36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몸서리처지는 것을 애써 억누른 체 혹시 우리 중 하나가 우발적으로 자기 몸에 닿을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루스의 말이 옳았다. 마담은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미를 겁내는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겁내고 있었다. - P69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같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애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섬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 P146

이윽고 그녀는 외설스러운 자세를 취한 모형을 책상위에 올려 둔 채 갑자기 몸을 돌리고는 우리가 성교하는 대상에게 얼마나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병에 걸릴까 봐서가 아니라 성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감정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 P150

근원자 이론의 이면에 있는 기본 개념은 단순한 것으로 별다른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각자가 일반인에게서 복제된 개체인 만큼 바깥세상에는 우리의 근원자가 살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밖, 즉 시내나 쇼핑센터, 휴게소 같은 곳에 나가면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 자기나 친구들의 근원임직한 사람들, 곧 ‘근원자‘를 찾아보곤 했다. - P243

절대로, 결단코 그 여자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근원자가 될 리가 없어요. 생각해 봐요. 그 여자가 도대체 왜 그런 걸 하려 들겠어요? 우리 모두 사실을 알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사실을 회피하고 있는거예요. 우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복제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복제된 것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 P290

‘그래, 이제 우리가 이걸 하고 있군. 이렇게 돼서 기뻐. 하지만 이렇게 늦게야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안타까워.‘ - P408

"왜냐하면 작품이란 그걸 만든 이의 내적 자아를 드러내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너희의 작품이 너희의 영혼‘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 P432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신경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작은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실상이었단다. - P448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 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 P482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치로 돌아가 기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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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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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18

"더이상 세상의 일들을 집착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보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읽은 김연수작가님의 작품은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과연 그럴까 라는 의심반 기대반으로 선택한 다음 작품은 단편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였다. 표지가 좀 별로여서 이번에는 기대를 좀 내려놨으놔...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도대체 이렇게 좋은 단편만 모아놓을 수 있는게 가능한건가?


단편들은 모두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쓸쓸함과 우울함이 가득하며,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게 가능하긴 한걸까? 기록이라는게 진실을 다 담을 수 있는 걸까? 삶에 있어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이 단편집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한 개인의 진실이란 깊은 밤, 집자리에 누워 아무도 몰래 끼적이는 비망록에나 겨우 씌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비망록이 씌어지는 곳은 그 사람의 마음속이니 사랑하고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옆에 누운 사람의 비망록을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P.284(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


이 단편집은 겨울에 딱 맞는 책이다. 봄에 읽는건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단편들이 좋았지만 그중 몇개만 골라본다면...




1.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그녀에 대해 말해야겠다."


제목을 보고 하루키가 떠올랐다면 내가 이상한걸까? 그런데 작품을 읽으면서도 왠지 하루키 느낌이 났다. 작가님한테는 죄송하지만...


배경은 런던, 세희와 나(네즈미)는 동거중이었고, 어느날 세희의 동생 세영이 영국으로 온다. 칠년만에 만난 자매는 지나온 세월 만큼이나 어색하다. 동생 세영은 한국에서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심한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 어떤건지 알고 싶어서 동생 세영은 나(네즈미)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세희는 나(네즈미)와 헤어지기로 한다. 왜 동생 세영은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걸 궁금해 했던걸까?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동생 세영은 나(네즈미)에게 이런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떠난다.

"우린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야."


한국으로 돌아간 동생 세영은 자실을 하고, 세희는 이 소식을 나(네즈미)에게 알린다. 세희는 동생 세영이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서 자살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네즈미)는 그게 원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게 어디까지 가능한걸까?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무모한 열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의 대상이 된다는 건 확실히 부러운 일이었다. 어쩌던 그때 나는 그녀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P.49






2. <뿌넝숴>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비 이야기라면 어떨까? 가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서는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빗줄기 말이지."


'뿌넝숴'의 뜻은 '말할 수 없다'라는 중국 말이다. 우리는 현실을 어느정도까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다시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세상 가장 작은 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우는 사람들로, 세상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가는 또 져버리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 봄이 왔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오르겠는가 말이야.] P.77


이 단편은 6.25.전쟁에 참가했던 중국의 노병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전쟁속에서 노병은 한쪽 다리를 잃고 손가락을 잃지만 조선인 구호대에 의해 살아남는다. 그녀의 피를 수혈받아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전쟁사에는 단지 숫자로만 죽음이 기록되지만 그게 전부일수는 없고 진실일 수는 없다. 책에 씌어진 이야기보다는 몸으로 겪은 이야기가 진실이다.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 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내가 전쟁이란 삶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P.69






3.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는 이렇게 썼다."

시작부터 '왕오천축국전'이 나온다. 2인칭 시점을 가장한 전지적 시점의 작품인 <다시 한달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주인공인 너(?)는 방에 틀어박혀서 집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집에 있는 책을 다 읽자 드디어 방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는 곧장 도서관에 가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는 기세를 보인다. 그의 그런 행위는 책속에서 여자친구가 자살한 원인을 찾기 위해, 위안을 받기 위해서였다. 왜 그녀는 유서에서 그에 대한 언급도 없이 그렇게 자살했을까? 언급되지 않은건 은밀한 존재였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둘중 하나일텐데...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P.139 (유서내용)


도서관의 책을 읽던 중 그는 여자친구가 죽기전에 읽었던 마지막 책인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그 책을 가져온다. 이후 아홉달 동안 그와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소설을 쓴다. 그는 '왕오천축국전'이나 '등반일지' 처럼 일어났던 일들을, 인과관계에 맞는 것들을 소설로 써간다. 하지만 소설을 써내려 갈수록 소설 속 여자친구의 삶 속에서 그가 점점 지워진다는 걸 알게된다. 여자친구와 소통하지 못했던 부분은 글로 쓸 수 없었기에, 그가 모르는 달의 이면이 많았기에...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단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P.141


이후 그는 1988년 한국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들어가고, '왕오천축국전'에 등장하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여자친구가 자살한 이유를, 그에게 남긴 유서의 의미를 찾을수 있었을까? 아마 그와 함께 한 검은 그림자가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니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P.177



위의 세편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 역시 매우 좋았다. 여기 실린 작품들을 쓰기 위해서 김연수 작가님이 관련 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다양한 책들을 읽었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위대한 작가가 아니구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조금만 다른게 바라본다면 이렇게도 이야기를 쓸 수 있는구나 라는 감탄을 했다. 김연수 작가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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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겨울 얼마 안 남았는데요. 김연수 작가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안 읽었네요. 새파랑님이 이토록 열렬하게 얘기하시는데다 좋아하는 작가니 읽어야 하는데... 내년 겨울에 읽을까요? ^^

새파랑 2025-02-25 22:39   좋아요 1 | URL
아직 겨울입니다 ㅋ 너무 추워요 ㅡㅡ 한라산을 보니까 아직 정상에는 눈이 쌓여있더라구요~!!!

페넬로페 2025-02-26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이 책 조금 읽다가 슬그머니 내려 놓았는데, 새파랑님께서 좋다고 하시니 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겨울에 읽어야겠네요.

이상하게 저는 이 맘때, 꽃샘 추위때가 많이 춥더라고요.

새파랑 2025-02-26 07:37   좋아요 1 | URL
김연수 작가님이 의외로 문장을 어렵게 쓰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에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게 나름 매력 포인트이지만 ㅋㅋ 아마 다시 읽으면 좋으실 겁니다~!!!

그레이스 2025-02-26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비슷한 데가 있나봐요
김연수 작가랑 하루끼 작가!
전에도 새파랑님이 그런 얘기 하신 기억이...!

새파랑 2025-02-26 16:52   좋아요 1 | URL
하루키옹 초반 4부작의 주인공 이름이 네즈미(쥐) 여가지고 그런 느낌이 더 들었습니다 ㅋ 두분다 문체가 멋집니다~!
 
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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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17 요즘 인기기 많다는 정대건 작가의 작품. 이야기가 재미있고 가독성도 좋아서 2시간 안에 다 읽었다.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다만 다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함이 남았다. 초반부의 강렬함에 비해 이어지는 이야기도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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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5-03-06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이유로 지난 겨울에 한국 갔을때 읽었는데, 흠아....중간쯤 읽다 말았습니다. ㅋ

새파랑 2025-03-06 11:16   좋아요 0 | URL
han님 오랜만입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