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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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술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과 결합하면 소진되는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이어서 늘 충족의 유예 상태 속에서 존재를 추동하는 욕망의 기술이고, 그 덕분에 지금 여기 ‘나’의 결핍을 ‘객관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기술이니까 말이다.(568쪽)

 

 

 

 

그리움은 끼쳐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에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이 배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추억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낙엽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입니다.

 

그리움은 어제의 불씨를 빌어 오늘의 애태움을 피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오늘이 어제를 찾아가 내일을 함께 여는 일입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더해서 채우는 부요의 나날이 아닙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밝혀서 바르게 하는 진실의 나날입니다.

 

그리움 없이는 오늘 광화문 위에 하늘도 없습니다.

그리움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단 하나의 극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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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구성한 존재다

인간이니까, 는 없다

인간이려면, 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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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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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외면하지 않지만 그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564쪽)

 

상처를 외면하고 쓰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 시 아닌 시를 읽고 치유로 나아간다 말하는 경우 또한 치유가 아닙니다.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 쓰는 시는 어떠할까요? 더 깊은 시로서 더 깊은 치유의 지도地圖가 될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더 아파하고 더 절망한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덜 아프고 덜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말을 조금 바꾸어보겠습니다. 그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로 파고든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별 것 아닌 상처 때문에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의 진실은 객관적 사실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 둘 잃은 상처는 하나 잃은 상처의 두 배입니까. 둘 잃은 부모에게는 아이가 더 있고 하나 잃은 부모에게는 그 아이가 외동아이였다면 어떤가요. 상처의 더 깊은 곳, 더 깊은 상처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시가 되어 나올 상처라면 상처의 깊고 얕음은 따질 일 아닙니다. 그 상처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옴팡진 진실입니다. 설혹 더 깊은 상처가 더 깊은 깨달음 주어 위대한 삶으로 인도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누구에게 그 길을 권할 안목과 자격이 있을까요.

 

인간의 인간다움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깊은 곳은 당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붓다와 예수의 삶은 깊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지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도 팔 벌려 유민이네를 껴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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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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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미지가 최초로 발화(發火)하는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낯선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이미지들은 낯선 가운데 그 안에 상처를 머금고 있는 것이어서, 그 상처가 독자의 상처를 건드려 점화되는 순간 그 이미지는 폭발한다. 폭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낯선 것이었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뼈아프게 낯익은 어떤 것으로 변한다.·······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이다.(563쪽)

 

번역1-시적 이미지의 점點적 찌르기는 시인의 punctum에서 비롯합니다. punctum은 마치 미분방정식의 특이점 같은 것이므로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것일수록 서정적입니다. 서정적일수록 선연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인간의 보편적 숙명입니다. 상처라는 숙명의 보편성이 studium으로서 독자한테 면面적 접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접속하는 찰나 가장 아픈 한 점을 찌르고 들어갑니다. 독자의 봉인된 상처에 구멍, 그러니까 punctum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뼈아픈 낯익음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번역2-시적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낯설다는 것은 난해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고-인용자)·······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367쪽)입니다. 결국 낯설음의 요체는 광활함과 경이로움입니다. 무의식 속에 접어 넣었던 상처를 펴서 드넓게 하고 그래서 새로이 펼쳐지는 진실 때문에 낯선 것입니다. 이미지가 낯설면 낯설수록 상처를 도저하게 드러내므로 아프면 아플수록 상처는 높은 진동수로 공명합니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역해-내가 아플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세상에서 내 아픔 같은 아픔이 다시 있으랴. 내 아픔을 아는 이 그 누구랴. 남이 아프다 할 때 두 가지 생각 속에 갇힙니다. 다들 그러고 사니까 징징댈 필요 없다. 네 아픔 내가 다 이해한다. 협소함과 진부함 때문에 자기 아픔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 밖으로 나가서 맑은 마음으로 보면 적어도 나만큼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아니 나보다 더 아파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사람도 보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청운동에 안산에 팽목항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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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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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하다’와 ‘고통 받다’는 다르다. 전자는 윤리적 능력이고 후자는 감각적 자질이다.(562쪽)

 

이 땅의 역사에서 한창 실천을 화두 삼을 때 유행하던 서구 어법 가운데 doing philosophy나 doing theology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강단에 서서 떠들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의 무력함을 넘어서려는 사회적 각성이 빚어낸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으로 인간에게 영속하는 화두가 아닐까 합니다.

 

고통하다’를 그런 동명사적인 어법으로 바꾸면 doing pain이 될 것입니다. 한 사회의 본질은 가장 아픈, 그러니까 어두운 곳입니다. 2014. 4. 16 이후 우리사회의 본질은 단연코 세월호 학살의 아픔이 서리고 흐르는 곳입니다. 이 아픔을 자기 삶과 일치시키는 윤리적 능력이 갖추어질 때만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입니다.

 

 

고통 받다’는 그 아픔을 느끼고 감응하는 생명적 각성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윤리적 능력에 감각적 자질이 연대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또 하나의 질곡일 것입니다. 아픔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아픔을 생생히 느껴야 아픔이 건네는 내밀한 진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 소통이 없는 아픔은 고행 또는 학대일 따름입니다.

 

아픔은 인간 생명의 숙명입니다. 아픔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가치의 바다, 의미의 땅이 있습니다. 거기 이르기 위해 인간의 지성·의지적 깨달음과 감성적 느낌이 둘이면서도 쪼개지지 않고, 하나이면서도 포개지지 않는 경계사건의 맥락을 만들어야 전인적 실천의 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어느 때보다 간절히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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