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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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오작동이다. 비유컨대 현실이 어떤 그물망 같은 것이라면, 그 그물망의 어딘가가 찢어질 때 그 망의 틈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 혹은 찢어짐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실재다.·······실재의 미학과 실재의 정치학을 분별해야 한다·······실재에 대한 집요한 미학적 추구가 어떤 매개도 없이 실재의 정치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괴함과 섬뜩함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기괴함(grotesquerie)이 낯선 것들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라면 섬뜩함(uncanniness)은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효과다. 현실적인 것의 내부로 잠입해 들어가 그것과 뒤섞여 종내에는 현실적인 것의 내부에서 그것을 찢고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기괴함은 섬뜩함으로 도약하고, 실재의 미학은 실재의 정치학과 결합한다.(671-672쪽)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섬뜩함이 일상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로서 섬뜩함은 적어도 우리사회에서는 현실의 그물망이 찢어질 때 나타나는 실재가 아닙니다. 현실의 그물망 자체가 섬뜩함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최근 보도에 따르면 전문 직종 종사자 가운데 성직자의 성범죄율이 압도적 1위라 합니다. 성직자는 영적 권위로서 우리에게 낯익은 존재입니다. 어느 날 그가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습니다. 이 절대적으로 낯선 순간, 즉각 영적 권위에 대한 외경을 버리고, “손 치워, 이 새끼야!” 날카롭게 소리칠 수 있는 여성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영적 권위와 비윤리적 범죄 사이 그 어떤 이음새도 없는 모순이 찰나적으로 생성될 때 모든 사람은 아득한 무서움과 진저리칠 끔찍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섬뜩함입니다. 이 섬뜩함에 터한 초현실적 권위가 일상으로 군림하는 사회의 이름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입니다.

 

현실을 찢고 나오는 오작동, 그러니까 ‘어긋냄’으로써 추구해야 할 실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악의 실재가 현실을 식민화한 상태입니다. 국권상실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통치 집단은 기탄없어지고(無忌憚-중용 제2장), 피치 집단은 노예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 집단은 대놓고 권위를 사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피치 집단은 그를 받아들여 내면화했다는 것입니다. 피치 집단의 내면화는 섬뜩함을 섬뜩함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숭배하며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정신장애 상태입니다. 선의 부재라는 속임수를 쓰던 악이 실재로서 전면으로 나와 거침없이 살인과 수탈을 자행해도 마냥 순종하고 찬양합니다. 세속화한 신비주의 정치종교의 맹신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처한 피치 집단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현실의 그물망을 찢는 물리적 방식이 아니고 오염 또는 중독 상태를 정화하는 화학적 방식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해결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정치제도나 정권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인문적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인문적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을 찾기 위한 대장정에 지금 당장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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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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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659쪽)

 

이른바 ‘연민정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인기 절정의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끝났습니다. 전체 서사에서도 세부적 미학에서도 그리 탁월한 작품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나름 전문가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성공적 측면이 있는가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 또한 악을 잘못, 적어도 서투르게 다룸으로써 악의 실상을 은폐한 전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결국 ‘근본 있는’ 부잣집 혈통의 의로운 인물(들)이 ‘근본 없는’ 천한 것(들)의 욕망에서 비롯한 악을 응징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부동의 주제를 관철시킨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제 판단의 기본적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이 드라마가 연민정과 장보리의 성격을 뒤바꾸어놓았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어찌 결말지었을까요?

 

목양견이 양 무리를 모으고 모는 이치가 있다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양들의 본능을 이용하여 하나의 점처럼 양 무리를 모으는 것collecting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답니다. 그 뒤에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몰아가는 것driving입니다. 인간이라고 다를 까닭은 없습니다. 이미 익히 겪어온 바 아니던가요?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 대상은 죽음입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을 위협하면 인간은 공동체의 헤게모니블록이 주입하고자 하는 주류적 메시지의 중심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습니다. 존일숭미·반공·개신교신앙으로 무장하고 권력과 돈과 정보를 독점한 집단에 속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진실·정의·공존은 이미 가치의 땅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인 집단은 반성 없이 타자를 파괴하면서 직진합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옳으며 선하며 아름답다고 확신합니다. 변방에 선 상실자들은 시기하고, 넘보고, 떼쓰는 그저 근본 없는 쌍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대한 구슬려 써먹다가 종당 죽여 없앨 존재들일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 되자’ 말합니다. 뒤로는 ‘너는 나와 다르다’며 밀어냅니다.

 

환유를 은유로 속여 욕망 추구의 영속성을 보장 받기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가 바로 ‘국가’입니다. 전능한 로봇 말입니다. 자신들이 입력한 것만 투명한 진실이니 나머지는 모두 어두운 음모와 유언비어로 몰고 잡아들이고 급기야 숨통을 끊습니다. 우리가 최근 반 년 동안 몸서리치게 겪어온 국가란 혹시 이런 국가 아니었을까요. 기괴한 느낌으로 묻습니다.

 

‘근본 있는’ 인간 장보리는 시종일관 의로움과 선함을 유지해서 행복을 되찾고, ‘근본 없는’ 인간 연민정은 끝내 삿됨과 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파멸하고 만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지난 반 년 동안 세월호 사건의 고통과 이렇게 동거해온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마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이 바로 그, 그 숫자란 말인가요? 섬뜩한 느낌이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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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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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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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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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욕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다. 욕망은 개체보다 크다. 내가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나의 주인이다.·······욕망은 반성을 모르고 후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최종적인 목적어가 없는 동사다.·······내가 원하는 그것을 너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욕망의 서사를 대체로 비극으로 만든다. 애착은 불안을, 불안은 집착을, 집착은 파괴를 부를 것이다.(653-654쪽)

욕망(핏물)을 충실히 탐구하지 않은 사랑(눈물)은 힘 있는 자들의 거드름이거나 위선이기 쉽다.·······욕망은 가까운 곳에서 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랑은 먼 곳에서 단 하나의 얼굴로 빛나고 있다.(665쪽)

 

대한민국은 드라마공화국입니다. 드라마가 하루를 열고 드라마가 하루를 닫습니다. 드라마가 입시경쟁률을 뒤흔들고 드라마가 특정 개념에 대한 사회통념을 바꿉니다. 드라마 속 인물과 현실 배우를 일치시켜 환호하고 욕하는 풍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이 드라마 대부분은 선악의 대결을 극단적으로, 그러니까 ‘막장’으로 끌고 가 시청자를 움직임으로써 시청률과 광고수입을 연동시킵니다. 선악 대결이 돈을 ‘대박’으로 물어오려면 해피엔딩이라는 미끼가 있어야 합니다. ‘연민정’은 파멸하고 ‘장보리’가 끝내 이기고야마는 행복한 결말을 전제해야 ‘연민정’의 악행을 재미지게 즐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함정입니다.

 

해피엔딩의 함정에 빠진 대중은 몇 가지 착각에 중독됩니다. 우선, 자기 속의 악을 은폐하고 스스로 의롭다 여깁니다. 그 다음,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의로움에 참여했다고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현실도 해피엔딩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착각에 인정할만한 요소가 들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통찰해보면 실로 엄청난 왜곡을 깔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흔히, 그래서 치명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악인을 보면서 현실에는 저런 악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드라마 속 의로운 주인공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대개 자신과 일치시켜서 생각합니다.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드라마 속 악한보다 훨씬 더 사특한 존재들은 득실거리고 의로운 주인공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 전에 다 쓰러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을 수도 없고 주인공이 되는 일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서사성과 논리성 무시한 채,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악행을 하던 악인이 어이없이 ‘용서당하고’ 화해의 일원으로 포용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지켜보면서 대중은 악을 제대로 다루는 감각을 상실합니다. 악의 실재를 가볍게, 우습게 여기도록 세뇌됩니다. 악에 대해 일으키는 공분의 힘은 국론분열, 종북, 무임승차, 떼쓰기, 유언비어, 시체장사, 국가모독 등 숱한 이름의 악으로 도리어 매도당합니다. 결국 의도했든 아니든 드라마왕국의 작가와 감독들은 현실인식의 전도현상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선악의 진실을 뒤집어 이해하고 있는 동안 헤게모니블록은 자신들의 욕망을 무한 증폭시키는 일에 몰두합니다. 욕망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악의 문제를 처리해주는 공신들이 있으므로 일이 마냥 쉽습니다.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도 온갖 설정과 의미부여로 ‘사랑’이라 인증해주니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노사이드에서 민영화까지 천 개의 얼굴을 한 거대한 욕망이 눈앞에서 자신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늘 높이 뜬 빛나는 ‘하나’에 눈 팔려 있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악을 낳으면서 작동하는지 충실히 탐구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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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허구한 날

마음 아픈 사람

마주하는데

당신은 아프지 않느냐

예, 아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사느냐

아픔이 아픔을, 진짜배기로 만나면, 그

뭐랄까, 어이 어이

힘이 나요

그래서 살지요

치료란

그런 겁니다

같이 아파서 나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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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8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8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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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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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고도를 기다리며」 1막)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잠든 밤에’ 누군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그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눈물이다. 다만 그들은 ‘당신’과 달리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자리에 운 나쁘게 서 있을 뿐이다.·······‘눈물을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윤리감각이다.(642쪽)

 

사무엘 베케트의 말이 사실임을 조건으로 한 저 해석, 그러니까 누군가 눈물 흘릴 때 그 눈물은 세상의 눈물이고 그 세상의 눈물은 운 나쁜 사람이 짊어진 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우리는 곤혹스럽게도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 구조 속으로 동시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개인의 눈물이 사회의 눈물,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공적인 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저 여성학적 선언과 공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갈라 침으로써 돈을 상위 1%에 집중하는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이자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말입니다.

 

다른 하나, 눈물 흘리는 사람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뿐, 그러니까 눈물 흘리고 거두는 차이가 정녕 운의 문제일 따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운을 다른 어떤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눈물 흘리는 자리에 선 것이 그 개인의 책임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세상 자체 또는 세상에 속한 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까지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허무를 부르는 음울한 노래입니다.

 

뜻밖에 여기서 하나의 윤리감각이 솟아오릅니다. 눈물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 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는 것입니다. 이 윤리감각의 터전은 무엇일까요? 운에서 의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허무에서 당위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함께 우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아서 당위를 끌어내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학에 기대보아도 철학에 기대보아도 사회이론에 기대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하찮은 논리뿐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냥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642쪽) 그리 한다고 왠지 ‘모를’ 소리 하는 것이 고작 아닐까요. 하기는 윤리감각이든 생명감각이든 ‘감각’이란 것이 본디 그렇게 배어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못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명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이후, 그대가 그 감각 때문에 자꾸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몸이 끌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알아차림에 터하여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대답이 가능한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불가능성은 차치하고 우리사회가 그 동안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제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 16일에 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질문하는 일입니다.

 

“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길을 선택하려,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앞선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었던 연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질문할 줄 몰랐으므로 공적인 눈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꼭 그만큼 공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가 새끼들 목숨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엎드린 채 넘어간다면 바로 그 다음 표적은 우리 목숨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는 거두면서 타인에게 세상의 눈물을 흘리도록 강제하는 자가 누군가? 그는 무엇으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더 이상 그 강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어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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