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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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런 책이 나와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이런 책을 내준 「문학동네」가 고맙다. 고마워서 낙망하는 심정의 실재를 해량할 테니 이에 관해 길게 주절대지 않겠다.

 

1. 이 책의 이름이 「눈먼 자들의 국가」인 게 다행이다. 불행이다.

 

2. 「문학동네」특집도 어깨를 추어올리고 얼굴을 묻어가며 읽었고 「눈먼 자들의 국가」에 실린 다른 글들도 안경을 벗고 마른 침을 삼켜가며 읽었다. 읽어 나아가면서 어깨는 내려왔고 얼굴은 들어 올려졌다. 안경은 다시 눈앞에 자리 잡았고 침은 더 이상 마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읽는다. 또 다시 읽는다. 지금도 읽기를 반복하면서 이 글을 더듬더듬 쓴다. 왜 이러나. 여러 번 읽는다고 해서 그 곡절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부 작은 내용을 빼고는 모든 글들이 한 방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은 이미 기울어진 길을 따라 “안 돼! 안 돼!” 하면서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런 방향이다. 그러니까 여기 정치의 이름으로 자행된 제노사이드 앞에서 묘비명 이야기를 최선 다해 하자, 뭐 그런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3. 물론 「문학동네」가 합의한 사회정치적 견해가 느슨하게나마 있을 것이다. 거기에 터하여 원고 청탁을 했을 테다. 물론 「문학동네」동네 인사들이 저마다 지닌 상처의 상황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터하여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을 테다. 모든 정황을 감안하고서도 의아해마지 않는 것은 왜 열두 편의 글들이 일제히 어떤 지점에서 멈추어 서느냐, 하는 점이다. 정치집단의 공식 입장도 아니고, 제도언론의 보도·논평도 아니건만, 날카롭든 날렵하든 엄중하든 둔중하든 진실의 불투명성 속으로 단도직입하는 섬뜩한 미학적 윤리적 기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두어 사람의 글, 두어 부분에서 톡 쏘는 맛을 낼 뿐. 심지어 어떤 글들은 마지막에 너무나 당연한 몇 마디 하기 위해 장황한 서구 레퍼런스를 방패막이 삼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글들은 동어반복으로 일관한다. ‘공공公共의 상상력’이 이렇게까지 결딴난 사회인가. 참담하다.

 

4. 처음에는 열두 편의 글 하나하나 정성스레 덧손질 해 볼 요량이었다. 그만둔다. 무명의 변방 의자醫者로서 두어 마디만 말하려 한다.

 

열두 편의 글을 관류하는 개념 둘은 무능과 부재다. 이는 사고가 사건으로 전화되었다는 대전제 아래 형성된 개념이다. 만일 처음부터 사건이었다면 무능은 전능이며, 부재는 편재다. ‘공공公共의 상상력’은 이 쟁점을 유언비어로 유기해서는 안 된다.

 

사적 소회는 치지도외하고라도 공적 분석을 가한 사람들에게서조차 역사의 문제를 곡진·결곡하게 거론한 경우가 거의 없다. 공시적synchronic 프레임만큼, 아니 보다 더, 잔혹하며 집요한 악의 에너지는 통시적diachronic 내러티브에서 나온다.

 

0. 우리는 모두 명확하고도 모호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 모순된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고 어떻게 극복할지 묻는 질문은 대체 무슨 질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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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요, 차마

못하겠어요

 

겨우

이건가요

<눈먼 자들의 국가>

 

어른

그것도,

깨어 있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이

 

꼴랑, 이 정도란 말인가요,

그게 당신들의 시이며 소설이며 평론이며,  

그리고 인문학이고 사회학이었나요

 

유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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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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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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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우                                 

공동체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는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염치廉恥를 모르는 사람들로 변해가는

것                                 

 니                                  다.

통치 집단은 앞장서서 파렴치의

을 엽니다. 그 마름들은 광신적으로 확대재생산합니다.

대                               다                               

사                               람                                

은 속수무책으로 순응합니다. 파렴치는 인간으로서

말아야 할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일어나는 인격의 궤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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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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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실패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맞다. 피 끓는 증오도 애타는 동경도 없는 삶이다. 그런 삶에 그 무슨 성공과 실패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을 모른다.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나의 문학은 너무 편안하다.(720쪽)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오해의 일종이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성복이 한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뒤집습니다.

 

“우리의 안도安堵는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 가운데 세계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해는 이해의 일종이다.”

 

모든 생각이 틀리고(皆非) 모든 생각이 맞습니다(皆是). ‘틀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맞는 것이고, ‘맞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틀린 것입니다. ‘모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아는 것이고, ‘안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인간을 다 알겠습니까. 어느 누가 인간을 다 모르겠습니까. 모순이 공존하는 이 진실은 인연의 결 다름에 있습니다. 내가 내 인연에 곡진하게 마음을 포개면 다만 나를 알 뿐입니다. 남의 인연은 원천적으로 접속 불가능합니다. 접속 불가능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로, 미상불 그저 귀 기울이기로 할 때 전체 진실을 향해 가는 끝없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700쪽 훨씬 넘는 방대한 ‘말하기’인 「몰락의 에티카」 마지막 글의 부제가 김소진에 대해 ‘말하지 않기’입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김소진을 기린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편안한 문학의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실패로서 인간은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같은 존재(718쪽)이며,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718쪽)입니다. 이런 존재에 대한 무지를 안은 채 어찌 이런 존재에 대한 옹호로서 문학을 말하는 문학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는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몰락의 에티카」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밥풀떼기’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명명에는 점 하나의 무지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밥풀‘때’기라고 해야 할 것을 밥풀‘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무지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비록 낮잡아 부르기는 것이기는 해도) 위관계급 장교로 명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정확히 여기에 가 닿습니다.

 

관념적 조작은 무구한 ‘있음’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한 것이다.(718쪽)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락의 에티카」가 하는 반성과 유보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기로 하고 읽는 김소진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7년 뒤인 2014년 「몰락의 에티카」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한정되어 있으니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제한되어 있다. 그때·······이야기가 아니면 그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없다.·······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김소진을 읽으면 실패로서 인간이 지니는 슬픔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공부야말로 “한낱 비평의 수사학에 불과한”(720쪽) 말로 실패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편안’하게 말하지 않는 길을 여는 수행일 것입니다. 김소진은 실패를 실패 아니게 하는 ‘선택’, 그 당위의 세계를 열어젖힘으로써 ‘매료’에 담긴 ‘편안’을 들추어내어 염치를 자극합니다. 이제 「몰락의 에티카」초심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 같은 존재,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을 옹호하는 문학을 통해 김소진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뀝니다. 그리고 질문하게 합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매료된 자는 이 흔들림과 질문에 감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감응하면 편안 그 너머로 가야 합니다. 문학도 바뀌고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지금-여기로 돌아옵니다. 「몰락의 에티카」의 말하지 않기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이 말하기로 도약해야 합니다.

 

 

요컨대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2014년 4월 16일은 「몰락의 에티카」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사흘 뒤 빈 무덤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몰락의 에티카」에 대한 처음의 신뢰를 지키고 싶습니다. 더불어 그렇게 신뢰하는 제 자신과 제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도 지키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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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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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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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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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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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0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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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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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기실 욕망의 긍정이란 싸우는 자의 윤리가 아닌가.(708쪽)

 

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질문이 옹골차게 성립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뜨겁게 불타야 합니다. 자기 삶이 활활 불타는 것이 아니면 타인에게 뜨거움이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에게조차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것이 되고 맙니다.

 

오래 전 애제자 한 녀석이 술좌석에서 정색하고 제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자신의 삶에 냉소적인 분이십니다.”

 

방향이 슬쩍 빗나간 베기였지만 입은 자상刺傷은 매우 깊었습니다. 저는 그 뒤 줄곧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너는 너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 때마다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너는 네 인생의 장작개비이기보다는 남의 인생의 부지깽이였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히 임하지 못하고 남의 삶을 기웃거리는 알량한 오지랖으로 60년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회한이 엄습해올 때마다 가슴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연기의 뿌리 부분에 입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의 삶에 극진한 마음, 글쎄 명상이라면 명상이고 기도라면 기도인 것을 가만가만 올려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한 순간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를 빌면서 후욱후욱 조심스레 불어넣는 것입니다. 성직의 길을 버린 지 실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진정으로 광활함the Spaciousness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느린, 늘인 삶입니다. 새로운 이 시작은 전과 전혀 다른 시작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다시 새로운 뜨거움을 일으켜 남은 생을 가차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차 없는 삶은 필경 싸움이 될 터입니다. 이 싸움은 치료를 포함하면서 치료를 넘어선 인문운동, 아니 “인문전쟁”이 될 것입니다. 제 목숨의 인연에서 만나는 욕망의 실재를 인정한 터 위에 타자의 욕망과 마주하며 어떻게 해야 건강한, 그러니까 건전하지 않은 싸움을 싸울 수 있는지 찰나마다 곡진·결곡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이것이 싸우는 자의 윤리이며 스피노자가 찬미한 것이라면 그 또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근본적으로 삶을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태아기부터 청소년기 까지 일방적으로 부모의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공격력은커녕 수비력조차 갖출 겨를이 없었습니다. 노다지 당하는 것이 단 하나의 생존전략이었습니다. 십대 끄트머리에 홀연히 찾아든 대칭성의 사유 틀 덕분에 성인기의 삶은 어느 정도 관통과 흡수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생애 초기에 입은 트라우마 때문에 관통보다는 흡수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거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스한 시선으로 지키면서 열정을 다해 달리는 데 서투릅니다. 정당한 분노를 유지하면서 전략적으로 싸움을 이끌어가는 힘이 약합니다.

 

제 삶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제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진실 말입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공격과 수탈을 자행하는 거대하게 기울어진 싸움판이 바로 우리사회입니다. 매판행위로 돈과 힘을 거머쥔 자들이 삿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도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찾고 의로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저들에 맞서는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진실하고 의로운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이 어떻게 진실하고 의로울 수 있을까요?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념passio을 자비慈라는 능동적 정서affectus로 전화해냄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 싸움은 기쁨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슬픔을 담금질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생떼 같은 새끼를 잃은 슬픔에 감응하는 힘으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싸워서 우울증에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바야흐로 남의 인생 불 뒤적거리는 부지깽이 너머 장작개비로서 제 인생을 훨훨 태울 때가 왔습니다. 제 주위로 의로움의 열기와 진실함의 온기를 번지게 하는, 사람다움의 밝은 기운을 퍼지게 하는 삶을 시작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여기는 겨울 사막이 막 끝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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