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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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o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내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느닷없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게 들이닥쳤다. 언제나 의식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내가 찾아내기를 바라왔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권두시로 올린 저 시의 ‘불확실한 시간’이란 표현은 조금 피상적인 번역으로 보입니다. 물론 uncertain에 ‘불확실한’이란 뜻이 있지만 문맥을 바르게 짚으면 ‘불확정인’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묘사한 바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말합니다. 정해진 때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때에 수시로 엄습해오는 극심한 통증agony의 재현, 그러니까 기억의 재-점화를 의미합니다.

 

임상에서는 이런 경우 트라우마가 마음에 ‘길을 냈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기차가 자동적으로 달려가도록 되어 있는 레일처럼 아픈 상처의 사건은 마음에 회로를 개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떤 요인이 작용하면 기억의, 통증의 기차는 기적조차 울릴 틈 없이 태고의 에피소드를 향해 돌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지금도 앓고 있는 사람은 벼락 같이 이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아침나절에 일어난 일을 점심나절에 기억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럼에도! 프리모 레비의 저작에는 이런 정서적 상황을 직접 드러내어 말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만일 격심한 통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아니 들어주지도 않는·······상대방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10쪽) 독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통증이 격심할수록 그의 문장은 냉정해지고, 냉정할수록 명징해집니다. 하여 섬뜩한 이야기ghostly tale일 수밖에 없습니다.

 

섬뜩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치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을 덜어내고 정색하며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통증을 거세하고 말하기까지 각고의 시간을 지나면서 심장은 다만 불타는 burn 것이 아니라 불타 없어지는burn out 것입니다. 참혹한 소진燒盡의 미학. 이는 극한의 통증을 지닌 자들의 숙명, 아니 천명天命입니다. 천명은 당위가 아닙니다. 당위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자유가 찾아 듭니다. 자유는 생사를 가로지릅니다. 용무생사用無生死.

 

우리 모두는 두 눈 똑바로 뜬 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고통에 찬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통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소리 높여 외칠수록 가해지는 경멸은 더 야비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이려면, 사람다운 사람이고자 하면, 극한의 통증을, 그 천명을 끌어안고 심장에서 타는 불을 소진되는 그 날까지 극진히 보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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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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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이 책을 남긴 까닭은 단지 타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남을 설득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증언을 사람들을 향해 외쳐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그는 과학자 같은 솜씨로 깊은 절망의 양상을 해부하여 자기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이 경우 ‘진실’이라 부르는 수밖에 없다.)를 위해 이 책을 남긴 것이다.(279쪽)

 

“아빠는 왜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요?”

 

세상을 읽는 방식이나 사회적 실천에서도, 생업인 한의사 노릇에서도 ‘주류’적이지 않은 모습을 나름 주의 깊게 지켜봐왔을 뿐만 아니라 중학생 시절 아비 손을 잡고 촛불집회에 여러 차례 나갔던 스무 살짜리 딸이 묻습니다. 제게 이 질문은 두 방향에서 들려옵니다. 육십 나이에 이른 아비가 더는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리는 한편, 아이 아닌 어른으로서 아비의 삶이 지닌 곡절을 극진한 마음으로 들어보겠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아비의 인생관과 사회관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왔는지 간결하게 설명해준 다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때 매판행위를 한 자들과 일제에 부역하여 독립군을 포함한 동족에 총부리를 겨누던 자들의 후손이 권력을 쥐고 그 조상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오늘, 항일의병장의 후손인 아빠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니?”

 

개인의 인생이 가업은 아닙니다. 조상의 삶이 곧 후손의 의무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매판세력은 백여 년 전 조선의 멸망에서 오늘의 세월호사건에 이르기까지 온갖 불의를 정의로 전복시켜가며 국가의 이름으로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이치만을 따지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다움을 굳건히 지키는 일일까요? 인간으로서, 조국·독립·민족·정의·자유·평등·윤리·공존 등의 개념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무엇은 계승하고 무엇과는 단절할 것인가, 판단하고 그에 따라 평생을 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다만 “생물학적 생명”일 뿐이라 단언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도둑질을 하건 사기를 치건, 나 하나, 그 연장선에 있는 일차집단만 잘 살면 그뿐인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인간의 인간인 소이의 전부라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리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그러니까 악귀나 다름없는 짐승일 뿐입니다. 진화가 어느 순간부터 윤리의 역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사태를 응시하며 프리모 레비는 한 글자 한 글자 뼈에 새겨 넣듯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써내려갔을 것입니다. 그 프리모 레비 영혼이 팽목항 부두에 앉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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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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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관심은 거대한 억압기구의 각 층위에서 어쩔 수 없이 죄에 가담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체제 자체의 범죄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갈라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압기구의 범죄에 의해 가담자나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메커니즘에 주의를 기울였다.(278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2013년도에 출제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운동의 핵심이 대학생이었음에도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정치에 참견하느냐?’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하니 하물며 고등학생에게 이 무슨 망발일 것입니까.

 

정치라는 용어가 선두에, 표면에 떠 있지만 이 문제를 찬찬히 뜯어보면 내면에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과 분리된 개인 윤리가 가능한가?’ 라는 철학적 질문이 고갱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체와 개체의 비대칭적 대칭성에 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만 보면 나타나는 알레르기 반응은 그대로 우리사회가 일극으로 쏠려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라는 진실을 숨기고 모든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프로파간다가 일관되게 먹히는 사회라는 이야기입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은 당연히 분할통치술을 씁니다. 흑백 대결로 간결하게 전선을 정리한 뒤 서로 물고 뜯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그중 한편은 자신들의 충견입니다. 검찰·경찰과 같은 공적 집단은 물론 자유총연맹·재향군인회 등 준 공적 집단과 어버이연합·일베·용역 따위의 사적 집단들이 전방위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자들은 반공이라는 독선적·기만적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종북)로 몰아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이 공포·탐욕·무지를 적절히 이용해 자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 범죄에 가담·방조하고 있습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이렇게 작동되는 사이 대부분의 회색 ‘소시민’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천명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따라 나섭니다.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의 소산입니다. 아니,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를 이용해 상위 0.1%의 곳간을 채우는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은 필경 각자도사各自圖死로 귀결될 것입니다. 죽음은 다만 생물학적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다움·양심·도의들의 죽음도 죽음입니다. 이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목하 대한민국이라는 형해화한 공동체의 마지막 숨을 끊으려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국정의 메커니즘 자체가 특정집단의 사익추구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써먹고 필요가 충족될 때 언제든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선원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선장은 36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월호에 탄 아이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209일 동안 완벽히 증거를 인멸한 뒤 ‘위헌’ 운운 잡음 섞어 법 쪼가리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이미 숱한 폭력이 자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최소한으로나마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리려면 메커니즘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알려면 진실을 얻기 위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움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둘째, 탐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제 살 궁리만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셋째,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입니까? 이백 열하루 째, 버려진 넋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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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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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인들에게 해방이 무조건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치욕감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 강제수용소의 수인들이 해방 후에(종종 해방 직후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프리모 레비의 술회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경험한 심연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한 그 자신이 이 책을 남기고 자살해버렸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의 놀라움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276쪽)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인문의학적인 상담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돌연변이’ 한의사입니다. 임상 경험을 통해 제가 이름 붙인 병이 더러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서울대증후군”입니다. 서울대 학부 또는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일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 힘없음, 의욕 없음, 관심사 없음, 즐거움 못 느낌, 지쳤다는 느낌, 쉽게 피곤해짐·······우울장애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학생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습니다.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러니까 외고나 과고에 입학한 직후부터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뜸 이런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서울대(외/과고)씩이나 갔으면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다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는 거 아냐?”

 

대체 왜 이런 생각과 감정에 휘말릴까요? 상식적으로는 성공 뒤에 오는 허탈감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성취 뒤에 이런 증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게 맞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항 정도로 심각하다면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이런 문제와 맞닥뜨린 서울대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명문 사립대 두 곳에 합격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서울대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 감정 상태를 물으니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보라 하니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한없이 머뭇거립니다. 제가 마중물을 조금 부어주었습니다.

 

“무조건 서울대로 가야 해서 그런 것 아닐까?”

 

그가 무릎을 칩니다.

 

“맞습니다. 언제나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 지속되었거든요.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었죠. 그게 절 숨 막히게 했고, 한없이 공허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에서 그 자신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만든 입시제도, 사회적 분위기, 학교와 부모의 집착 등이 일사불란하게 강요하는 편향된 가치가 그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박탈해버린 것입니다. 입시가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해일처럼 들이닥친 치욕감과 죄책감이 그 생명 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 학생이 이럴진대 하물며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때 그가 그 목숨에 손을 대는 것은 최초이자 최후로 삶에서 스스로의 선택권,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무서운.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가 “자살해버렸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이 본인의 의중을 정확히 전달한 표현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과 맞물린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 지점에서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치 우발적으로, 또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그마저 그렇게, 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분명히 자신이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의 존엄에 대한 인간적 도의를 모를 리 없는 그가, 40년에 걸쳐 결곡하게 증언하는 삶을 살아온 그가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뢰 정도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프리모 레비는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의 실상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으로서 생명이든 마음으로서 생명이든 이미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애도와 헌정은 프리모 레비 이외에 아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최후로 자신의 생명을 저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에게 봉헌奉獻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의 숭고한, 그리고 비장한 삶, 딱 여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사족 붙일 까닭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늘 정부가 공식적으로 세월호 수중수색 종료를 발표했습니다. 아홉 주검은 아마도 영원히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 그들을 위해 프리모 레비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있기나 할까요? 프리모 레비와 유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단원의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에 함께하려 애쓰는 일,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 작든 크든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일·······실제로 소시민으로서는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증언과 봉헌의 삶을 살아낸 프리모 레비가 세월호 사건을 겪은 우리의 공적 양심으로 영원히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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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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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매우 투철한 고찰,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관통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 책은·······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다.(272쪽)

 

프리모 레비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관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의 피해자이자 ‘인간성 파괴’의 희생자인 당사자”(273쪽)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극히 드문 일, 아니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여태껏 이런 글쓰기는 없었던, 그런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관견으로 볼 때 프리모 레비의 삶과 그 이야기는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조차 담지 못한 삶이며 이야기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른 인연을 짓게 마련이지만 거대한 권력집단이 치밀한 기획으로 대량학살, 회자되는 바 6백만 명을 살해한 수용소에서 붓다 공자 그리스도 그 누가 살았으며 팔만대장경 사서삼경 신구약성경 코란 그 무엇이 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까.

 

이것은 심오함이나 방대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이 반드시 인식 주체의 삶의 경험에서만 나오지는 않겠으나 경험에서 나온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붓다 공자 그리스도 무함마드가 만일 프리모 레비와 같은, 아니 (불가능한 가정이니 표현을 바꾸어)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아니, 좀 더 시비조로, 좀 더 진부한, 그러나, 그래서 본질에 육박하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이 그토록 고결하고, 그 분들을 따르는 무리가 지구를 뒤덮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들의 높은 깨달음이 하늘에 닿아 있었는데 어찌하여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우슈비츠 가스실 한복판에서는 어찌하여 저 전능한 신들이, 저 살아 있는 말씀들이 속수무책이었을까요?

 

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님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답은 거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나옵니다. 답은 거기 높은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답은 여기 낮은, 낮디낮은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기필코 사상적 좌표축을, 아래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환희의 높이를 말하지 말고 고통의 깊이를 말해야 합니다. 고결한 깨침에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깊디깊은 고통으로 떨어지지 않고 일상을 보전하는 것에 열반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나라로 들림 받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가스실에서 죽임당해 깊은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종교가, 철학이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과 악의 세력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신군부가 광주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 1980년입니다. 그 이듬해 성철은 돈오돈수의 기치를 높이 듭니다. 달마 이래 최고 선사라 하는 성철이 이룬 돈오돈수가 무고히 죽임당한 광주 시민의 목숨에 대해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대승이란 말입니까? 히틀러의 만행을 보다 못해 그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한 목사가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정녕 대승이 아닐까요?

 

이 땅의 언필칭 대승불교가 ‘참 나’를 찾는다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개신교가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 때, 불의한 권력은 생떼 같은 아이들을 “가만히 있으라.” 윽박질러 맹골수도 깊은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에 대한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니까 ‘참 나’를 찾기 위해, ‘천당’과 ‘지옥’의 사이에 선 존재임을 자각하기 위해 과연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서경식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드리워진 프리모 레비의 감정 상태를 “끝 모를 깊은 절망감”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것으로는 태부족입니다. 거기에 덧붙입니다.

 

“삼킬 듯이 달려드는 공포, 저미는 슬픔, 가뭇없는 허무,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립감, 짓이겨오는 수치심, 아득한 막막함. 이 모든 것들이 엉겨 붙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멸의 정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열반도 구원도 허망한 말장난이며 잡생각일 따름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절멸의 정서에 휘감겨 가라앉은 지, 오늘 209일 째입니다. 209년, 아니 209겁이 지나도 우리는 이 좌표축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인간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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