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디 SNS에 한국인은 우울장애에 취약하다고 썼더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댓글이 올라왔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한국인의 70%는 북방계다. 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시베리아를 통과해 한반도에 정착했다. 시베리아 평원 혹독한 조건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바는 이른바 우뇌 활동, 그러니까 직관이 지닌 비교 우위다. 직관 우뇌는 전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므로 부분에 집중하여 낙관하는 상황을 제어한다. 상황이 불투명할 경우, 최악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비판적 통찰이나 비관적 전망 능력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만일 좋지 않은 상황이 장기화하고, 거기에 적응해온 생활 경험이 유전 근거가 된다면, 내 발언은 의학적 유의미성을 획득한다. 우뇌 활성 우위 장기적 고착은 우울장애에 노출되는 길을 활짝 열어놓는다. 실제 통계로 한국인의 75% 정도가 왼쪽 눈이 작다. 왼쪽 눈이 작다는 사실은 우뇌 우위 증거가 된다.

 

75%, 즉 다수는 좌뇌 패권 사회에서 피지배층을 형성한다; 좌뇌 우위 소수에게 수탈당하는 먹잇감이 된다. 그 수탈 과정과 결과를 개인 차원에서 의학적 진술로 번역한 말이 바로 우울장애다. 녹색 뇌 이야기를 통해 역설한 우뇌 혁명은 이런 정치경제학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혁명이란 용어를 동원한 까닭은 지배 세력이 이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할 리 없으므로 수탈당하는 사람, 그러니까 우울장애를 앓는 생명공동체가 수탈체제, 그러니까 질병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질병 체제를 전복하려면 공동체 구성원이 스스로 일어나 연대해야 한다. 스스로 일어나 연대하려면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각성해야 한다. 각자 다른 소향과 정황을 모두 끌어안은 생명 장()이 있다는 진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각자도생을 선동할 때,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생명공동체의 팡이실이를 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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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사람이 아무리 달라도, 같은 병명이면 같은 약을 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병명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른 소향(素向)과 정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소향은 꾸준히 드러내는 중장기적 경향을 뜻한다. 정황은 그때그때 드러내는 단기적 상태를 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병()이 아무리 같아도, 다른 사람이면 다른 약을 쓴다. 물론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아주 작다.

 

임상 편의에 맞추어 패턴을 가르고 동류로 간주할 수는 있다. 팔강(八綱), 육경(六經), 사상(四象), 형상(形象) 따위를 고안해 다름 가운데 같음을 구성하는 동북아시아 전통 의학이 그 예다.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정밀하게 들어가면 소소한 차이점은 차고 넘친다. 물론 최종적으로 어찌 처방할지는 다시 전체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그 전체적 맥락을 소소한 단 하나 차이가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는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체질이라 일컫는 바를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체질주의자에게 체질은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이제마 사상체질이 대표적인 예다. 일반적으로 그 말은 옳다. 체질에 순응해서 사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체질을 바꾸려 들면 바꿀 수 있는가? 그렇다. 얼마나 바꾸면 체질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체 맥락을 좌우할 수 있는 아주 소소한 단 하나만 바꿔도 된다. 이 소소한 단 하나가 대관절 무엇일까?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완력 의학이다; 구조를 지탱하고 기능을 충실하게 하면 다 된다고 믿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큰 사건·구조만을 가치로 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소식 의학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경로를 따라 아프고 또 낫는지 소상히 알려주면 스스로 길을 찾는다고 믿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사람 소향·정황, 나아가 인생을 바꾸는 계기로 작동하는 각각 작은 소식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치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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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근본적으로 백인·성인·남성의학이다. 맨 앞에 친절한 덧붙임을 하자면 179cm, 90kg이다. 이 기준을 원칙으로 하고 필요하면 기계적으로 고려하는 정도가 유연성 전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차이도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서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USA 제국 기준으로 질병 여부가 결정되고 진단·치료 가이드가 제시될 뿐이다. 비서구 식민지 세계 전통 의학 인정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국민 건강·보건 체계 헤게모니가 록펠러-카네기 재벌이 합작해 만든 미제 백색의학 손에 있는 것은 대부분 같다. 이런 일극 집중구조 의료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사회는 거의 없다. 예컨대 에단 와터스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있는” USA 제국 정신의학 마케팅을 통렬하게 고발했지만, 변방 사람·사회들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변화를 꾀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 적요 속에서 인간 하나하나, 인종,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 가름까지도 정중히 소상히 인지하는 의학을 틈낸다. 그 틈 의학을 우리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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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2 피부이자 제2 뇌로서 인간 생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요성에 비해 우리가 장에 가지는 관심과 지식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다. 장 존재 자체와 기능은 그나마 그런대로 괜찮다 치지만 장 신경은 상식 저 멀리 있다. 더군다나 장내에 거대한 미소 생명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의 신비에 해당한다.

 

100조 개체 미소 생명이 인간 체내에 따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정확히 표현하면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며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인간 뇌와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는 상호 소통하며, 서로에게 정보를 주는 양이 1:9로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가 많다는 사실과 맞닥뜨리면 경이로움은 경악 수준에 도달한다. 경악할만한 이 생태계 주인공을 우리는 아직 장내세균이라고 부른다. 망언이다.

 

장내세균은 유익균과 유해균이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공존한다. 유해균은 없고 유익균만 있으면 좋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둘 비율이 17:3이면 황금비다. 이 균형 파괴가 정신-신경-면역-내분비계 전방위 질병을 부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안·우울장애, 심지어 자폐스펙트럼 같은 정신질환까지 그 영향 아래 있다고 한다.

 

장내세균균형을 깨뜨리는 중요 원인은 단백질과 지방을 많이 함유한, 특히 초가공 식품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좋지 않은 물질은 제국주의 초국적 제약회사가 만들고 백색의사가 처방 약으로 주는 백색 화학합성물질, 특히 항생제다. 항생제는 장내세균을 절멸 수준으로 살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장을 차게 해서, 그러니까 생체진동수를 떨어뜨려서 장내세균총 균형 조건을 열악하게 만든다. 망동이다.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려면 백색 화학합성물질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 무릎 꿇는 광신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색의사가 처방 약으로 죽이는 사람 수가 갱단이 죽이는 사람 수보다 많다. 백색 테러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장부터 구해야 한다. 장을 구하려면 장외 미소 생명 생태계부터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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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곧 얼굴 제국주의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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