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지음 / 바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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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 코너로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엔 인문 신간, 그 다음엔 사회 신간, 그리고 철학과 종교를 돌아 마지막으로 한의학, 대략 이런 순서지요. 한의사인데 거꾸로 됐나요?^^   

강남 영풍 시 코너에서 엊그제 이 시집을 보았습니다. 그 동안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제 눈에 이제서야 들어온 것일 테지요. 사실 특히나 시집은 시절인연이 확실히 있는 모양입니다. 남들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뒤늦게 살 떨려 하는 게 시에서는 그닥 허물이 안 되는 듯하니 말입니다. 

2.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받은 느낌은, 마치 운전 한 몇 년 하면 자신이 운전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운전하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극적으로 말하면 남의 시가 아닌 내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 것처럼, 어떤 일치감에 실려 흐르듯 읽었다고나 할까....... 아니 좀 더 팽창시킨다면, 팽창시켜서 사실은 좀 더 정확한 표현인데, 하염없이 읽었다는 게 맞습니다.  

보통 남의 시를 읽으면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스르륵 열리는 경우는 거의 없고, 좀 두드리면 안으로 활짝 열리면서 주인장이 웃음을 띠며 맞아주거나, 드물게는 와락 달려들 듯 밖으로 열리며 꿰뚫고 들어오지요. 그런데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의 경우는 그냥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거나, 아예 문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십 편을 그렇게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 이 시인이 나와 같은 묶이의 사람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답으로 떠올랐습니다. 모국어를 통해 드러내는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 또는 자세가 같은 게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수많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턴가 저는 스스로 식물성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식물적 생명감각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식물에 대한 감수성, 친연성이 남다릅니다. 가령 한의원 개원할 때 축하용으로 받은 난을 비롯한 여러 식물들, 대개 일 년 이내에 죽지요. 제 경우는 오년 지난 아직도 살아 있는 난이 있습니다. 단순히 관리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식물적이어서 제 곁의 식물들과 함께 생명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식물적 생명력의 본령은 "받아들임"입니다. 한 번 뿌리내린 곳에서 그 생을 마쳐야 하므로 삶의 온갖 조건, 이른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동물은 조건을 박차고 옮겨 가면 그만입니다. 식물은 그럴 수 없지요.  

시집의 제목이 된 시에서 시인은 그 "받아들임"의 흐름을 참으로 물처럼 유장하게 풀어냅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 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채워넣고 

떠나라.

 

밑줄 그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시가 됩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말고 다른 것을 넣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핵심 내용인 그 부분을 제외했습니다. 가령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의 마지막 네 행, 

 

....... 

마음속에  한 여자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이 처절한 사실도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섭섭함 버리고 생각해보고, 중얼거려보고, 사랑하고, 길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텅 빈 수숫대처럼 온 몸에 바람소릴 채워 넣고 떠나야 합니다. 물론 수숫대는 바람소릴 채울 뿐 떠나진 못하지요. 사람이기에, 사람한테니까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 떠남은 바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의 절정 아니던가요. 

3. 식물의 생명력은 이렇듯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받아들임"은 속성상 가림이 없습니다. 겨울도 받아들여야 하고 여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가림 없이 받아들이면 그 생명은 모순으로 차고 넘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정확하고도 풍요롭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모순의 공존, 저 도저한 역설의 삶으로 나아가는 자재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씁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기다릴수록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다시 기다림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것. 인생의 비대칭적 대칭.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무애(無碍). 시인은 마침내 식물적 생명감각을 완성합니다. "받아들임"이 공중제비 돌아 "꿰뚫음"과 만나는 뫼비우스 공간, 바로 그 푸른 지평선을 열어제친 것이지요.  

4. 그 경계적 성취는 제게 이런 문학적 풍경화를 건네줍니다. 김재진은 정호승과 마종기의 경계다! 정호승은 수직으로 솟구치고 마종기는 수평에서 떠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김재진은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길어도 대부분 연 구분이 없습니다. '설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진의 생명감각이 그런 것이지요. 길어져도, 심지어 통속적으로 반복해도,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반대로 선문답 같이 칼에 베이듯 툭! 떨어지는 말도 's라인'을 그리지 않습니다. 산문과 운문이 서로 누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제가 하염없이 읽어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일은 그의 산문을 읽어보아야겠군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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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스 웨이 - 넬슨 만델라의 삶, 사랑, 용기에 대한 15개의 길
리처드 스텐절 지음, 박영록 옮김, 넬슨 만델라 서문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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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가 누구한테 소개 받았다며 사다 달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다 읽은 뒤 별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독서 흐름에 약간의 공백이 생겨 그 틈을 메우려고 우연히 집어들었습니다. 

목차를 일별하다가 열 네번째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짐작하면서 거기부터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인전이든 회고록이든 남 이야기 잘 안 읽는 제 습관에서 보면 비교적 신속한 결단(!)이었습니다.   

2. 그러나 정작 큰 울림을 느낀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용기를 다룬 제1장 내용과 이미지를 다룬 제5장입니다. 제게는 이 두 장이 한 흐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용감한 척하면 용감해진다."는 말과 "겉모습은 실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같은 내용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제1장에서 만델라가 "두려운 게 없다고 해서 용기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진의를 모른 채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려움 없는 상태는 그냥 미분화된 감정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미분화된 감정 차원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용기는 마음에 두려움을 지닌 상태에서 몸으로 그 두려움을 떨쳐내는 결단을 요구하는 무엇입니다. "누군가는 용감한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말이 근거가 됩니다. 그 필요를 알아차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용기라는 사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결국 용기는  누군가 지니고 있는 덕목으로서 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찰나찰나 결단을 통해 발휘되는  동사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용감한 척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위선을 떠는 행위가 아니고, 애써 결단을 내리는, 그래서, 분화된, 이성과 의지까지 알아차리는 '고급한 감정' 차원의 행위입니다.  

바로 이런 행위, 즉 "겉모습"이 두려움을 밀어내는 용기의 역동적 "실체"를 구성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진실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깨닫고 습관으로 만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말들의 연결이 전혀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저는 개인적으로 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자신의 상처와 punctum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의 슬픔과 요구, 심지어 공격까지 품어 들이는 흡수의 감수성이 지나치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흡수의 마음은 용기보다는 관용을 요구합니다. 용기는 강인함, 단단함에 방점이 찍히고 관용은 너그러움, 부드러움에 방점이 찍힙니다.  

용기는 관통하는 힘입니다. 바로 이 "관통"이 제 삶의 긴절한 화두가 되기 시작한 최근의 흐름에서 이 책은 조금 더 구체적인, 한 걸음 더 나아간 도움을  제게 주고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끌어내고 품어 들이는 만큼이나 나의 고통을 드러내고 꿰뚫어 나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낄 때, 대체 어찌 하면 그리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고뇌하게  되지요. 

만델라의 길에 이정표가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관통력 있는 척하라!" 

또는, 

"관통력 있는 겉모습을 갖추라!" 

4. 일단 이것만으로도 제게 이 책은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그밖에도, 게임은 길다, 사랑은 차이를 만든다, 자기 자신만의 텃밭을 가꿔라, 이 부분도 좋았습니다. 누구든 자기 자신만의 상처와 punctum이 있을 테니 그런 채로 이 책 앞에 서면 맞춤한 울림을 맛볼 수 있겠지요.  

5. 사족. 왜 문학동네가 이 책에 <만델라스 웨이>라는 한글 이름을 달았을까, 궁금하네요. 번역자의 뜻일 수도 있긴 하지만. Mandela's Way를 영어로 읽을 수 없는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없는 바에야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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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길 부처다 - 이언진 평전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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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보았을 땐 그냥 지나쳤습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라는 제목 때문이라기보다 이언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이었을 터. 아마도, 넌 또 누구냐, 뭐 이런  습관적 반응이었을 겁니다. 개나 소나 끌어다가 스타 만드는 풍조에 넌덜머리 난 무지렁이의 냉소적 반응이랄까, 아무튼. 

두세 번 지나다가 표지에 그려진 부처 인상이 운주사의 저 naïve한 그것과 흡사하단 느낌, 아, 물론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그 때문에 책을 펴 들어 보았습니다. 책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진부한 '간 보기'에서 몇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끌더군요. 중인이다, 박지원이 傳을 썼는데 최악이다, 이단적 또는 혁명적이다, 성속을 가로지른다....... 내면에서 슬며시 팔꿈치 하나 나와 옆구리를 찌르더군요.  

2. 조선 영조 연간 태어나고 요절한 역관 이언진은 시대를 앞서간, 그래서 그 시대와 불화한 천재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 그의 면모를 정리합니다. 

새로운 진리 구성 - 송시열이 구축한 사대적이고 매판적인 주자(朱子)주의가 초일극집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인간 평등을 주장했으며, 유불도의 공존을 통한 진리의 복수성을 인정했으며, 옛것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오늘의 가치를 창달하고자 했으며, 사서삼경 이외의 텍스트에도 진리성이 있음을 천명했고, 인간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새로운 주체 형성 - 양반만이 주체였던 시대에 그는 중인임도 주체임을 선언했으며, 도시 서민과 중인의 삶터인 호동(衚衕)을 자기 공간으로 삼았으며, 자기존중을 기한 항장(骯髒)한 주체였으며, 저항적 주체였으며, 성속을 가로지르는 주체였습니다.   

물론 그가 지닌 한계도 있습니다. 저자가 지적한 것은 인간평등에서 남녀평등이 빠져 있다는 점(하지만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평가가 썩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조선사회 전체를 더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3. 한 사람의 사상과 그에 다른 실천이 전천후적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붓다나, 예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상과 실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그래서 비판하고, 심지어 비난하고 말자는 의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상과 실천을 오늘 우리의 자산으로 받고, 한계 너머의 것을 향도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언진을 읽을 때, 그의 삶과 사유, 그리고 실천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의 자리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상황과 요청의 빛을 따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가 자신의 진리 인식, 또는 사상을 대부분 시로 표현한 사실부터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이언진을 옹호하면서 숱한 종교경전이 시로 되어 있으며, 높은 선지식(禪知識)이나 거유(巨儒)들도  종종 시로써 그 깨달음을 나타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예에서 간과하고 있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전은 고대적 문헌전승이 구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문 형태를 띤 것이지 의도적으로 시 형식을 빌린 것은 아니라는 게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종교 경전, 선승이나 유자의 시가 깊은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언진의 사상처럼 저항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구약성서 시편에, 이황의 시조에 무슨 저항의식이 들어 있다는 것인가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로써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언진의 차별적 사상을 표현하기에 시라는 형식이 과연 적합한가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의 사상이 당대 주류 주자학에 터 잡은 수구, 또는 보수적인 것이라면 특별히 문제삼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는 이언진과 흡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나라 유학파 엘리트 승려들이 왕실을 끼고 사상계를 장악하여 초일극구조를 확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주류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진골 출신의 의상이었습니다. 그 의상과 대척점에 선 원효는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이하) 계열 사람이었습니다. 원효는 당을 통해 수입된 불교사상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자주불교의 날카롭고도 웅혼한 나래를 펼쳐 갔습니다. 의상의 사상은 화엄일승법계도 7언 30구 210자 시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사상은 최소 80부 150여 권, 최대 102부 303 권으로 된 방대한 산문 저작입니다. 대부분 소(疏), 즉 자세한 풀이의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상의 시와 원효의 소(疏)는 어떤 결정적 차이를 지닐까요? 의상의 시는 고도한 직관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압축된 큰 덩어리입니다. 원효의 소(疏)는 낱낱이 풀어 놓아 이해할 수 있게 한 작은 이야기의 네트워크입니다. 전자는 엘리트의 기득권을 지키는 신화적 암호입니다. 후자는 다수 민중을 어루만지는 역사적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의상은 의상에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원효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을, 저자를 포함한 오늘날 우리 거의 모두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언진도 몰랐을 것입니다. 알았다면 그는 시를 내려놓았을 겁니다. 

저자는 이언진의  시를 미학적 실천이라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 또한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를 통해 그 실천 양식을 드러낸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 규정과 맞물린 문제인데, 그가 주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신이 양반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지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양반과 다름없는, 아니 양반보다 뛰어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표지였던 셈입니다. 그 자체로도 물론 치열한 저항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중인, 상민, 노비들과  같은 존재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도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시로써 자신과 저 민중들을 동일시하는 생각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양반에 대한 태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공유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문시를 통해 양반과는 저항적 일치가, 중인 이하와는 일치적 분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주체의 공간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드러내줍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주체의 공간화라는 표현은 이언진의 주체적, 진보적 태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그 사명을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이언진이 그 민중들과 연대하지 못했다는, 다시 말하면 저항의 사회동원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공간에 그들과 함께 있었으되 다만 그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혁명하는 생명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서삼경 대신 수호전을 경전으로 삼아도, 아무리 흑선풍 이규를 염원해도, 이언진의 열망은  한문시의 상징 공간에서 숨이 막혀버리고 맙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종교적 수행이었습니다. 특유의 자존감 어린 표현이긴 하지만 스스로 부처라고 여길 정도였다니 상당히 결곡한 영성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또한 저자는 성속을 가로지른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때의 聖도 그 때의 俗도 매우 실존적이고 소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 만큼 살았다면 아마도 영종조 연간에 걸쳐서 살았을 것이고, 그 때, 이른바 중흥기 조선에서 혁명을 꿈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언진은 각혈하는 저항 시인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인은 시로써 혁명한다고 두둔하기에 그의 시는 날카로운 천재성에 비해  일렁이는 선동성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부처는 사회적 가치와 욕망을 내면화하는, 그래서 탈사회, 즉 출세간으로 귀결되는 수직 영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로지르기는 산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4. 이언진은 이언진인 이언진입니다. 그는 일단 그로서만 보아주어야 합니다. 여태 제가 말씀드린 바는 이 이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를 오늘에 되살리려면 오늘의 관점과 요청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언진의 재발견은 오히려 이언진을 넘어서야  빛나는 것입니다. 저항의 방식은 일률적일 수 없고 우열도 없으며 심미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 공감 백만 제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언진을 떠올릴 때 원효도 함께 떠오르는 것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언진의 불꽃 같은 삶,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유행위와 글쓰기 행위, 존재와 글쓰기의 구경(究竟)적 통일, 분잡과 고통 속에서도 고매함과 성스러움을 향한 갈구의 끊을 놓지 않은 것 등(도)-괄호 처리 필자-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아니 다시 강조한 이 말에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저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구든 이 이치를 떠날 수 없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제 위상과 너무 먼, 저 아득한 누구에겐가 저를 투영하고, 오늘 밤, 절연의 괴리감과 더불어 이 글 쓴 것을 후회하며 자책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은,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기를 계속합니다. 역사와 그 속의 사람, 오늘은 이언진을 통해 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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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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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Keep Going인데 왜 번역자는 '그래도'를 덧붙였을까? 사실 이 의문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저자가 북미대륙 원주민 전통의 사유 세계에 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 의문은 든든한 근거를 지니게 됩니다. 영어로 된 것을 읽어 보지 못해서 책 본문 어딘가에 '그래도'란 표현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그들의 정신 속에는 '그래도'가 없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문제 때문에 이 글을 썼습니다. 

'그래도'란 말을 구태여 넣은 까닭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까닭에 수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갈 수 없을 만큼, 또는 그러기 싫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임을 전제하고 있는 어법이거든요. 그리고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시 전제합니다. 결국 고통 자체와 고통에 대한 부정적 판단의 이중 장벽 때문에 사실은 계속 가라고 할 수 없음에도 가라고 한다는 뜻에서, '그래도' 가라고 한 것이지요. 누구든 이런 맥락에 선뜻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늙은 매'를 화자로 해서 펼쳐지는 저자의 사유 지평은 인생사, 아니 세계 전체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알아차리는 것에 근본적으로 터 잡고 있습니다. 이 양면성 또는 대칭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구체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한 가치가 결코 완전 분리된 무엇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고 환희만 좇으려 해도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됩니다.  이치로 보아 그렇게 해도 결국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고통 자체를 환희로 받아들이는 고행주의나 매저키즘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희는 완전히 쪼개진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포개진 하나도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그래도'란  수식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어서 저자의 사유를 현저하게 비틀거나, 적어도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번개처럼 우리에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접속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빙고! 리듬까지 맞추자면 "그러니"도 좋겠지요. '그래도'가 고통과 환희의 불연속성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면  "그러므로"는 양자의 연속성에 방점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치상 연속성은 불연속성을 포함(包含 아닌 包涵)하기 때문에 훨씬 더 궁극적인 관계지음입니다.  

요컨대 뭔가 '임팩트' 있게 하기 위해 덧붙임 말을 넣으려 했다면 "그러므로"가 나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러므로 계속 가라"는 표현은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나 주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이런 책을 왜 보겠습니까. 어차피 이런 책이 필요한 사람은 깊은 고통 속에 빠져 있거나, 뭔가 일이 안 풀려 힘을 잃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 상황 자체 속에 답이 있다, 즉 고통을 통해 환희를 깨닫고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데는 "그러므로"야말로 기품 있는 '임팩트'가 아닐까요?   

 '그래도' 계속 가라, 이는 이른바 긍정주의, 즉 '고통은 없다 치고' 가라 하는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나마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세계의 전체적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도저한 진실, 더 나아가 '그래도'와 "그러므로"를 분별하되 분리하지 않는 따스한 진실을 향해 옛 생각 거적을 훌렁 벗어 던지고 한 번 가보시지요. 홀가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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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폭사회 -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1. 우선 표지 그림이 제 살갗을 날카롭게 찢어놓습니다. 섬뜩하달 수도 있겠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이없달 수도 있겠고....... 비둘기로 보이는 새 한 마리에게, 얼핏 보면 총을 겨눈 것 같지만, 실은 총이 아니라 눈을 겨눈 것 같은....... 아무튼 책의 내용을 짐작하도록 이끄는 그림임에 틀림없습니다. 

2. 저자의 인생행로가 고스란히 투영된 관점, 내용을 지닌 책입니다. 심리학을 떠났다가 심리학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진보적 사회운동 경험이 무르녹은 것이지요. 하여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거의 모든 심리학 책들이 자연인으로서 개인을 화두로 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풍조는 심리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 전반의 주류적 사유 프레임이지요. 이렇게 보면 결국 심리 문제의 해결 또한 그렇게 자연적 개별화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일정 부분 맞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부분은 오류입니다. 언제나 열린 지평을 지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저자는 IMF 경제위기라는 특정 사건을 논의의 기점으로 삼습니다. 엄청난 사회적 트라우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곡절이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IMF 경제위기를 야기시킨 사회체제와 전략,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절망적 한계, 이후 펼쳐진 우리사회의 추악한 면면들은 어찌 보면 IMF 경제위기라는 상징을 만들어내기 위한 앞뒤 조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사회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외피 안에 발톱을 숨긴 헤게모니 블록의 탐욕 기제가 작동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쩌다 실수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이는 음모론의 제기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요즘 들어 저들이 대놓고 도적질하는 꼴을 보면 명약관화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자는 헤게모니 블록의 이런 전략이 만들어낸, 불안을 증폭시키는 심리 코드 아홉 개를 제시합니다.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 이것은 아마도 어떤 연역적 틀이나 패턴을 전제한 연구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삶이 일구어지는 구체적 현실과 정황에서  일일이 찾아낸 것일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박하고 거침없는, 일부러 다듬지 않은 거친, 가령 속어적 표현까지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구어체적 언변으로  우리사회의 어둠을 거의 총망라하여 까밝히고 있읍니다.  기존의 주류 심리학 책들과 전혀 다른, 역동적이고 대승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4.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두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점진적 자살 문제. 임상의 실제에서 미처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그래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던 부분이었습니다.  

둘째,  저자는 미래의 주체들이 형성하는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또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오래 전부터 궁굴려 온 화두입니다. 때마침 저는 그 화두를 깨치기 위해 제 인생행로를 바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제 삶의 모습이 드러날지 자못 궁금합니다.  

5.  21세기 첫 10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사회에 속한 나를 고요히, 그러나 곡진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한 권의 책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심리학자들에게 던진 고언(苦言)에 동의 백만 제곱하고 아무쪼록 저자가 바라는 일이 현실로 일어나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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