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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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리카 왕비 부부 이야기 끝에 붓다의 게송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기꺼운 것은 없도다.

그토록 소중한 것 남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이

남 해하지 않으리.”(28쪽)


이 게송은 프리모 레비의 시 <게달레 대장>의 후렴 연과 조우한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는 현자(랍비) 전승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이 부분은 유대 전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현자 힐렐의 어록을 변용한 것이다. 힐렐의 세 문장은 이렇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는가?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한다면 내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인간의 삶을 요약하면 사실, 딱 이뿐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자기 삶이니 자기가 살아내야만 한다. 이 사실은 내게 그런 만큼 남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삶도 꼭 그만큼 소중히 한다.


붓다의 게송은 나중에 한자어로 이렇게 압축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렇다. 바로 대승불교가 그리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힐렐의 세 의문문은 나중에 단 하나의 명령문으로 압축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 바로 예수가 그리 하였다. 힐렐의 가르침이 유대민족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두 말은 정확히 그 뜻이 같다. 물론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 모두 이 말을 사실상 곡해함으로써 사회적 실천 문제에서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는 것 또한 같다. 자기 위상과 사명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타(利他), 이웃사랑의 망상에 빠져 자기 사랑, 자기 신뢰를 등한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기만은 물론 사회 전체를 기만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라. 지금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무엇인가? 두 종교의 교인- 각기 주장하는 대로 통계를 낸 숫자-을 합하면 대한민국 국민 숫자를 넘어선다. 이타(利他),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으로 차고 넘치는 이 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닌가.


그러면 어찌 하여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자리(自利)”와 “네 몸과 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치명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만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건너뛰고 어설프게 큰 수레의 자비와 십자가의 영성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색(色)을 모른 채 공(空)을, 에로스를 모른 채 아가페를 뇌까렸기 때문이다.


갈 데 없는 과대망상이다. 과대망상은 결국 관념의 장난일 뿐이다. 이 관념의 장난이 은폐한 물적 현실은 어떠한가. 승려가 호텔방에서 포커를 치고, 목사가 알바 고용해 불법선거운동을 한다. 해탈과 돈 사이, 천국과 권력 사이, 과연 무엇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지금, 불자와 기독자는 김선우의 이 담담한, 그러나 준열한 말을 영혼에 새기라.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며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한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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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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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이 불러 일으키는 향수는 흔히 세상의 어미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는데, 아마도 '둥긂'과 '먹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 밥 먹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풍경은 지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아름답고 또 조금은 슬픈 듯해 보이는 풍경이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쪽)

 

읽고 또 읽어도 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프리모 레비 한 대목이 포개져 온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아우슈비츠 마지막 끼니를 먹이는 유태인 어머니와 한사코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김선우의 어머니는 영원히 같은 어머니다.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임의 어머니.......

 

김선우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 사랑과 그리움을 달여내어 저 탱맑은 김선우 문학을 이루었으리라. 이 점에서도 김선우는 신께서 편애한 생명임에 틀림없다. 내게 숟가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홉 살 어느 날 아침, 계모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숟가락 모를 세워 머리통을 찍었던 일이다. 그 다음부터 '내가 대체 밥을 얼마나 많이 먹나' 숟가락질 수를 세는 습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기쁜 눈물 번지게 하는 김선우의 숟가락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수북수북 담아 떠먹이는 오목한 힘이 되었다. 슬픈 눈물 번지게 하는 내 숟가락은, 아마도 내게 의학적 치유력을 다독다독 부추기 볼록한 힘이 되었을 터이다. 이 볼록한 힘은 매 순간마다 내 슬픔을 일깨운다. 슬픔이 일깨워져야 내게 마음을 맡긴 사람의픔에 공감할 수 있겠에 신은 내게 숟가락의 볼록한 진실을 보이신 모양이다.

 

김선우가 신의 편애를 받았다는 말은 오목한 쪽 진실이니 어찌 보면 볼록한 쪽 진실에선 내가 편애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피장파장인가. 아니, 매우 치명적인 한 부분에서 여전히 김선우는 편애 받은 거다. 김선우의 숟가락은 삶을 '놀이'로 오목히 떠먹였다. 그게 문학의 찬란한 결이 되었다. 내 숟가락은 내 삶에서 '놀이'를 볼록히 앗아갔다. 지나친 진지함 '놀이'를 대신했다. 나는 그렇게 의학에 귀의다.  

 

하여 나는 놀이를 잘 모른다.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의 감각이 발달하지 못 한 거다. 북콘서트와 강연 자리에서 김선우를 비교적 가까이 본 바, 그는 타고난 놀이 감각을 지녔다. 그의 목소리, 웃음, 몸짓, 그리고 마음짓 모두에 놀이 감각이 다글다글 굴러다닌다. 내가 오직 그런 김선우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말이 '탱맑음(膨淸)'이다. 아마도 신은 내 것 모두를 거두어 그에게 주셨을 거다.^^

 

이제, 신과 대좌해야겠다. 내 의학과 치유에 놀이 감각을 되심어달라고 담판 지을 요량이다. 여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노는 의학, 노는 치유를 위해 신나게 놀아 봐야 하지 않겠나. 김선우의 응원을 기다린다. ㅍ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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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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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것은 시다


김선우는 내가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 두어 자락을 잘 알고, 아는 만큼 절대 공감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하여, 나는 그를 ‘천하시인’이라 부른다. 적어도 내겐 그의 시가, 시심(詩心)이 천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천하를 담고 있는 그가 천 날을 궁굴려 빚어낸 「물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내게 소설이 아니고 시다. 그의 팽청(膨淸)한 목소리로 낭송하는 언어들에 귀 기울이면 이 시는 남모를 아름다운 환시를 공감각으로 전해준다. 


내가 본 크낙한 환시는 이 시의 비대칭적 대칭구조(unsymmetrical symmetry)다. 즉, 제2부와 제3부 사이를 경계삼아 꺾어 마주 붙이면 쪼개지면서도 포개지는 대칭성이 나타난다. 그 안은 물론 아리잠직한 환시, 즉 교차대구(chiasmus)의 직조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즉, A-B-C-C'-B'-A' 구조다. 김선우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이렇게 정교한 구조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직관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그리 했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천하시인이니까.......^^


사실, 이런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내 개인적인 ‘환’시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롤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일부와 에필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사릿날>의 일부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그리고 프롤로그의 속 제목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과 에필로그의 속 제목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나는 이 구조를 떠올렸고 그 눈으로 전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안목에서 그렇고 아니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김선우의 독자로서 그의 미학에 좀 더 내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뭐, 그게 단순 ‘환’시든, 오류든 괘념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야기 결결을 되작거리며 읽는 맛을 깊이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 이 아니 행운인가. 감성으로 휘청거리며 읽는 일도 좋지만 지성으로 곧추 앉아 읽는 일도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 내 모습을 아내가 보다가 갸웃한다. “지금 고시공부 해요?” ㅍㅎㅎ



1. [A: A'] 프롤로그: 에필로그


프롤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에필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금이 간 뼈를 보름처럼 구부리고

파도를 밀며 끌며 오는 사랑아

죽음보다 질긴 사랑이 있어

우리가 낳은 혼례의 어린 몸들 깊으니

일곱 잠째의 밀물이 이번 생엔 없는 것이어도

다음 생의 첫 잠으로 올 것을 아네


나는 「물의 연인들」을 읽기 전 이 두 시로 「물의 연인들」을 다 읽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좋았던 시공과 다음 생 첫 잠으로 오는 인연 사이에 줄을 이으면 거기 모든 생명, 모든 죽음, 모든 주체, 모든 조건이 깃발로 걸릴 터이므로.


그러나 천하시인 김선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프롤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 끊어짐과 멈춤의 사연을 휘몰고 온다. 비록 농염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찬 에피소드가 넘실거리지만 그 넘실거림은 견결한 유령, 그 죽음의 금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에필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 이어짐과 흐름으로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264쪽)을 전해준다. 비록 물의 딸 수린의 다비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지만 프롤로그를 한 바퀴 뒤집어 이어붙임으로써 뫼비우스의 띠, 그 생명의 영원한 순환 길을 연다.



2. [B: B'] 제1부 유령의 시간: 제4부 흐르는 사람들


유경은 생애에 가중 소중한 두 사람, 엄마와 연인을 모두 잃고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38쪽)다.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38쪽) 유령은 아무리 달려도 갇힌 존재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끊어진 존재다. 아무리 흘러가도 멈춘 존재다. 유령의 시간, 그 봉인된 성에서 유경은 자신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살아 있”(38쪽)을 뿐이다. 이 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도와주세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요. 수린이 죽어가요.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모두 죽어가요. 제발 와주세요.”(36쪽)


운명의 전조”(36쪽)인 편지 한 통에 이끌려 유경은 와이강으로 간다. 와이강도 유령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와이강의 딸 열다섯 살 수린이 죽어간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아니 그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수린의 어린 연인 열일곱 살 해울이 죽임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유경이 절규한다.


저 애를 좀 도와줘. 제발. 요나스!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227쪽)


그러나 보라, 이 유령이 저 유령과 다름을. 갇힘을 깨고 유령이 달린다. 끊어짐을 부수고 유령이 손을 내민다. 멈춤을 무너뜨리고 유령이 흘러간다. 이 유령은 流령이고 저 유령은 幽령이다. 죽어가는 “수린에게서 물소리가 난다....... 강물의 본래 모습은 흐르는 것이지. 막혀 있는 것들은 썩는다....... 기억에 갇혀버리면 유령이 되지. 기억도 흘러야 한다. 나는 이제 흘러야 한다.......”(257쪽) 그렇다. 흘러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흘러서 살아야 한다.


고요의 터널을 빠져나오며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조용 지저귀듯이 흘러나와 와이산과 와이강의 곳곳으로 스며들며 번져가는 물소리 속에서 유경이 말한다.


그렇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258쪽)



3. [C: C'] 제2부 가면을 쓴 달: 제3부 붉은 물 자국


살고 싶은데 살아지지 않는다. 사람이고 싶은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유령의 조건이다. 유령인 유경의 조건은 엄마 한지숙의 자살, 그보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연인의 황망한 죽음이다. 행복과 사랑의 관건이던 두 사람을 잃고 “푸르스름”(67쪽)한 “가면을 쓴 것 같은 달”(85쪽)에 홀려 피에로는 떠돌고만 있다. “달로도 지구로도 돌아가지 못한다.”(84쪽)


살기 위해서, 유경이 아프고 또 아프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과거를 비추는, 유령의 후광인 푸르스름한 달이 아닌, 현재를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인 붉은 강물이다. 지저귀는 기계들로 파헤쳐져 와이강이 흘리는 피, 그 “붉은 물 자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토막 나고 파헤쳐지고 적출되는 와이강이 유경의 머릿속에서 유린, 구타, 강간, 폭행, 모멸, 증오, 살인 같은 단어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있다. 악몽 속에서 유경을 움켜잡은 억센 손아귀가 유경을 끌고 다니며 패대기치듯이, 무서운 말들이 서로 엉킨 채 피 흘리기 시작한다. 엄마를 짓밟으며 그 남자가 퍼붓던 온갖 더럽고 잔인한 말들이, 왜 이 강변에서, 왜 또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악령들처럼 달라붙는지. 공포가 밀려든다.”(129쪽)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 저 새끼. 그런 자기 마음이 무서워 유경은 오줌을 지린다.”(84쪽)


급기야


흰 유령이 또 하나 쓰러지는 것 같은데, 오줌을 지린 것처럼 유경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84쪽)


그렇다. 이 비인간적 도발에 대한 적의, 즉 살의야말로 인간생명에 대한 결곡한 자세다. 그 결곡함은 날카로운 공포가 된다. 공포는 살아 있는 것의 축축하고 질펀한 몸 반응, 즉 아랫도리 젖음으로 나타난다. 아랫도리 젖음은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이다, 눈물이다.


유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오기 시작한다.


꿈꾸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필요한 건 꿈이 아니라 행동이에요. 복수할 거예요.


그리고 유경의 몸이 발끝부터 떨려오기 시작한다. 별안간 해울이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경은 예감할 수 있었다.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 예감의 순간으로 오래 유랑한 바람이, 한 물방울이, 마침내 당도하고 있다는 것을.”(170쪽)


마침내


그리고....... 유경이 본다.


엽서의 맨 하단에 적힌 그의 이름.......


요나스 노드스트롬.


.......


“연우”


그랬다. 너였다. 이연우. 요나스 노드스트롬. 이리 와 봐. 요나스, 요나스, 요나스!

.......


어느 날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못해 영영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이름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름부터 차례로 지워나가 마침내는 유경 자신의 이름까지 지워지려 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이름이다. 연우의 엽서 위로 유경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붉은 눈물 한 방울.


그토록 찾고 싶어 한 이름을 손에 쥐고 유경은....... 가만히 쓰러진다.”(171-172쪽)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경의 유령이고, 그 유령의 시간이다.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령의 조건인 가면을 쓴 푸르스름한 달이다. 이제 유경의 그 붉은 눈물 한 방울은 수린이 토해 낸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해울의 젖은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이 붉은 생명 감각은 문득 이런 각성의 순간을 낳고야 만다.


그 때 유경은 처음으로 자신이 와이강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걸 깨닫는다.”(219쪽)


다!



0. 이것은 물이다


아마도 천 날 동안 김선우는 오감, 아니 제육감(第六感)까지 모두 일깨워 물과 마주하였을 것이다. 물의 모습을 보고, 물의 살갗을 만지고, 물의 냄새를 맡고, 물의 목소리를 듣고, 물의 맛을 마시고, 또한 설명할 길 없는 물의 기운을 느끼고....... 동시에 그 물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인, 무경계의 세계에서 노닐었을 것이다. 하여 자신이 물이고 물이 자신인 경지에 이르고야 펜을 일. 단.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옵니다. 수많은 다른 모습들로.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 그렇게 우리는 오고 갑니다.”(261쪽)


이렇게 김선우는 수린이 되고 해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요나스가 되고, 끝내 와이강이 된다. 이렇게 김선우는 내가 된다. 물론 또 이렇게 나는 김선우가 되고 와이강이 된다. 김선우는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사랑을 고민한다. 나는 의자(醫者)로서 의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치유를 고민한다. 특정 부류 인간의 무지, 탐욕, 폭력으로 강이, 물이 살해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의학을 세우고 치유를 펼쳐야 할까. 이미 파헤쳐졌고, 여전히 파헤쳐지고 있으며, 그 상태에 갇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에게, 물에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147쪽) 무엇을, 어찌 해야 할까.


소심한 소시민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 실. 상. 없다. 파괴는 너무 크고 눈물은 너무 붉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문득 김선우의 또 다른 유경, 저 「캔들 플라워」의 지오를 떠올려본다.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캔들 플라워」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 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되 깨워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 비대칭의 대칭이 부끄러운 마음을 되찾은 지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나, 오늘, 지오의 부끄러움으로 가만히 누워, 죽음 한가운데서 생명의 기척을 열어가는 저 강, 저 물의 마음으로 흘러가보리라. 와이강 편지에서 유경이 들은 연우의 목소리, 그 두 마디 말의 순서를 바꾸어 오늘과 내일의 강이, 물이 만나는 곳에 놓아두리라.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기쁘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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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물의 연인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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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를 살아가는 醫者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의학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한계를 껴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고민을 담아 간결하게 21세기 의학론을 세 번에 나누어 썼습니다. 그 마지막 글이 하필 김선우의<물의 연인들>로 시작하여 끝을 맺었기에 여기에 실었습니다. 이 글 앞의 두 편 글은 http://bari_che.blog.me/에 실려 있습니다.

 

 

 

 

21세기 의학론: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다



나는 시인 김선우를 ‘천하시인(天下詩人)’이라 부릅니다. 그의 시(詩)가, 시심(詩心)이 내겐 천하이기 때문입니다. 그 천하시인 김선우가 최근 소설, ‘엄밀히는’ 소설-시 하나를 냈습니다, <물의 연인들>. 이 소설-시는 인간과 강(물(방울))이 이어져 있다는 도저한 미세 생명감각을 시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강(물(방울))이 죽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김선우가 자신의 충격, 즉 생명의 아픔과 슬픔, 그 상처(trauma)를, 그리고 어찌 할 것인가, 아니 어찌 할 수밖에 없나, 하는 고뇌를 살갑고도 깊게 가늘고도 넓게 펼쳐낸 영혼의 “타투”인 작품입니다. 김선우는 아파서 글을 썼고, 씀으로써 아픔을 견뎌냈습니다. 이 글은 필자(筆者)인 김선우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나는 그 글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김선우의 아픔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글은 의자(醫者)인 나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아니!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 그리고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합니다. 나는 김선우의 문학에 실려 물방울(!)에게 다다가고 물방울(!)이 됩니다. 마침내 물방울(!)입니다. 물방울(!), 바로 이것이 나의 21세기 의학론의 마지막 화두입니다. 물방울(!)로 대표되는, 인간을 둘러싼, 엄밀히는 품은, 인간의 존재 조건인 자연을 향하여 열린 의학이야말로 인간이 빚어내야 할 마지막 의학이라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궁굴려 내 삶이 되게 하고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는, 그 참다운 깨침. 그 깨침을 얻으려면 의학은 인간의 눈으로, 인간만을 들여다보는 울타리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종(種)적 배타성,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지금 인간이 맞닥뜨리고 있는 파멸 상황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바로 저 4대강사업처럼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침습, 파괴, 수탈한 행위와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인간 위한답시고 자연을 괴롭힌 것이 도리어 인간 파멸이라는 최후 질병을 몰고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정녕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연에 행한 침습, 파괴, 수탈을 멈추어야 합니다. 자연을 치유해야 합니다. 아니 자연이 스스로 치유해 나아가는 데 겸손하게 시중들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의학적 관점과 자세의 설 자리입니다. 인간 생명의 조건인 자연의 시선으로 질병과 치유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 새로운, 최후의 의학이 가능합니다. 이 최후의 의학은 문명의 산물인 의학에서 문명을 비판하는 의학으로 차원을 높인, 의학의 의학, 곧 메타의학입니다. 메타의학의 감수성으로 서면, 김선우가 말한바, “목숨 가진 것들은 모두 눈물 냄새를 풍긴다.......”는 진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눈물 냄새를 맡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김선우가 수없이 떠올린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이란 말을 가슴에 품어 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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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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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해 가을 뼈아픈 사정으로 한의원 문을 닫고 낭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그 결과물 하나가 <안녕, 우울증>으로 나왔지요. 청소년 우울증에 관한 책 <파란 마음 멍든 마음> 원고는 어느 기자 손에 맡겨져 출판가를 떠돌고 있습니다.  전국을 흐르며 강연했습니다. 전공노, 인권활동가대회, 국가인권위원회, 여성센터, 복지관....... 그 와중에 제자 하나가 제게 아이팟을 건네면서 트위터를 권했습니다. 더듬더듬 시작한 트위터가 제게 새로운 행로를 열어주었습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글은 배우 김여진의 것이었지요. 강정마을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 활동가와 연락이 닿아 침을 싸들고 강정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하는 길거리 한의사 질은 평택 쌍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 심리치유 현장, 쌍차 노동자들의 영도 한중 행 소금꽃 천리길, 명동 마리, 경향신문사 13층의 송경동 시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트위터 140자 글쓰기에 흠뻑 취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자연스럽게 긴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제2선으로 물러섰지요. 처음에는 어떤 상실로 다가와 트위터를 꺼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타임라인 행간을 살피면 유장한 글이 읽히고, 내가 쓴 140자 글의 결을 따라가면 긴 호흡의 글이 쓰여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적절한 속도와  열심으로 트위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초, 희망 버스 대변인 이창근 씨가 기획한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 <희망 부스>의 `라디오 한의사`란 꼭지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제 시간 바로 앞에 김선우 시인이 출연했고, 거기서 만나 저자 친필 사인을 담은 <캔들 플라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 저는 이미 김선우의 팬이었습니다. 물론 시인 김선우지요. 그러다가 그의 <바리공주>를 읽고 소설가 김선우의 팬도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캔들 플라워>를 읽으면서 詩氣 물씬 풍기는 산문을 음미합니다. 함께 읽어보시렵니까?^^

 

`캔들 플라워`란 제목이 지시하듯 이 소설은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해서 일어난 촛불집회 또는 촛불문화제를 주된 서사 광장으로 택한 것입니다. 물론 촛불의 정치학은 꽃의 미학과 결합함으로써 투쟁과 놀이, 역사성과 영성의 대칭을 가로질러 갑니다. 이런 의미 교차는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아니 자신을 일정 정도 반영한 것일 테지요.

 

이 땅의 사회 역사에 대하여 연속과 불연속의 경계를 이루는 identity를 지닌 존재, 지오(GEO)라는 아이 또한 이런 가로지르기를 상징합니다. 밖에서 온 제3자이면서도 이 땅의 사람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깊은 감수성으로 진실의 고갱이를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그 아이는, 그러나, 여기에 매몰되지 않는 `레인보우의 아이`고, 인간에 침륜되지 않는 `자연의 아이`입니다. 

 

"...튄다, 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엔 튀면서도 오랫동안 몸에 밴 숨결처럼 자연스러운 게 있었다. 은빛 솜털날개처럼를 단 꽃씨가 드넓은 수평 속에 스미듯이.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속도감은 버린 꽃씨의 유영처럼." (14쪽)

 

지오의 "...출현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14쪽) 그렇다면 소설 전체가 이 소녀 때문에 일어난 일렁임의 기록일 것입니다. 그 일렁임은 "발칙한 것" (14쪽)이고, 발칙한 것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14쪽)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발칙하게` 말하건대 소설은 이 14쪽에서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우리의 지오가 한국에 처음 닿은 인연은 희영. IMF로 거덜난 중산층, 그 소심함의 전형인 여자사람입니다. 매우 `적절한 확률`의 만남 아닌가요?^^ 이 만남에서 시작하여 연우, 수아, 민기, 숙자씨, 보리(사과), 홍노인, 그리고 이지훈...의 만남으로 번져갑니다. 각각 다른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이 촛불광장으로 나아와 `일렁임`으로 서로 부비고 엮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소소한 개인 에피소드와 거대한 정치 담론을 넘나들며 뒤엉킵니다. 무거운 판이지만 경쾌하게, 진지한 화두지만 즐겁게, 내재적 역사지만 초월의 표표함으로 너울너울 흘러갑니다. 이제 마흔 갓넘은 이 작가가 영특하게도 세계의 진실, 즉 비대칭적 대칭을 간파하고 있는 듯합니다. 초일극집중구조로 파멸을 향해 치딛고 있는 이 문명과 이 문명의 삼류 상속자들의 무지막지한 질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은 `발칙한 것`이어서 믿을 만합니다. 비대칭적 대칭의 논리와 속살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느냐, 와는 상관 없이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뒤집어, 일상의 관념 맞은편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아이, 지오가 작가의 분신이라 하면 매우 유치한 수준의 독서로 평가될 것임에 틀림없지만,  한꺼번에든 찰나의 시차를 두고든 작가의 눈은 대칭성 확보의 길을 좇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슬픔은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의 선물이래..." (119쪽)    

 

얼핏 들으면 기쁨에 방점이 찍힌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기쁨이 되고 싶은 인생에 슬픔이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기쁨이 되고 싶은 소망도 헛 것이고, 인생 자체에 기쁨이란 도대체 성립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함이 더 진의에 부합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슬픔을 선물이라 함으로써 슬픔자체의 대칭성까지 끌어안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 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 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이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듯 인간의 인간다운 면모는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데 있습니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초일극집중구조에 틈을 내는 진실의 감각이니까요. 이 말랑말랑하고  향 맑은 감각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볼 수 있기에 캐나다와 한국, 레인보우와 아현동, 자연과 문명, 개인과 사회, 축제와 시위, 섹스와 촛불, 가족과 연인, 욕망과 대의, 놀이와 정치.......그 사이에 가로놓인 통속한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유자재의 가로지르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오라는 '순수물질'이 주위와 소통하는 신비한(!) 힘은 그 순수물질이 상식과는 달리 '역설물질', 즉 모순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본디 역설순수의 존재는 더욱 빛나고 아직 그 이치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는 각자의 속도 인연을 따라 변해갑니다. 현실에서, 희망에서....... 지오의 생부, 이지훈, 이 시대 가장 절망적인 존재도 어깨를 떨어뜨리고 주춤주춤 지오의 결을 따라갑니다.   

 

소설이 가리키는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오 아이들이 촛불을 들게 만든 정권은 더욱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촛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설픈, 오히려 부작용을 낳은 껄끄러운 무엇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역사감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의 걸음걸이. 그 느낌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 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 (368쪽) 

 

지오의 걸음걸이는 이미 거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도 엄연히 시작되었습니다. 현실과 현실 '조금 위쪽' 사이, 그 역동무쌍의 경계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꽃 향기를 따라 지오 아이들은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알몸이면 더 좋겠지. 한국의 우리 모두! 그렇게 놀아주길 바라." (368쪽)

 

그대도 그렇게 노세요. 그렇게 바라세요.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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