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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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면 내가 먼저 떠올리는 말은 “가슴에 못 박는다.”다. 내가 남의 가슴에 못 박은 적도 있을 테고, 남한테 못 박힌 적도 있을 테다. 사는 동안 이렇게 서로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이유, 그렇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가슴에 못 박는 일 가운데 가장 빈번하고 신랄한 것은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단다. 가족은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라는 따스함 맞은편에 바로 이런 뼈아픈 진실이 있는 거다.

 

내 삶의 경험에서도 그러하다. 내 가슴에 가장 깊은 못을 박아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들)와 아버지다. 물론 그 분들이 작정하고 특별한 언행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늘 하던 대로 한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더욱 섬쩍지근하다.

 

엄동설한 깊은 밤, 아버지가 아홉 살짜리 나를 계모 눈앞에서 발가벗겨 내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아버지가 그리 행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 표정과 언어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헤어진 지 30년 만에 벼락처럼 다시 만난 어머니가 나를 보자 던진 첫 마디 말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아느냐?”였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어머니가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 한다. 어머니 표정과 언어 또한 너무도 심상했다.

 

부모가 가슴에 박아 넣은 못들은 한 동안 격심한 통증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염증을 유발해 신열에 뜨게 만들었다. 분노와 원망이 마음의 병을 확대재생산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라면 이 무슨 횡액이랴.

 

내가 지아비가 되고 아비가 되는 삶의 여울을 따라 내 상처와 병은 씻기고 바래지고 정화되어 갔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요법이나 교설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인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일상적 공감과 수긍 덕분이었다.

 

어쩌겠는가. 상처 없는 사람이란 없는 것이다. 가슴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는 상처들 앞에서 나는 종종 기꺼이 가슴을 열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못이 없는 집이란 없는 것이다. 수직의 벽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며 자라고 있는 못들 앞에서 나는 종종 즐겁게 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가끔 알게 될 때가 있다. 상처가 오롯이 상처로 깊어지면 상처에서 꽃이 피기도 한다는 것을. 못의 뿌리가 닿는 자리들이 간질거리며 무엇인가 자꾸 피워내고 있다는 것을. 상처 난 살갗에 새살이 돋을 때처럼,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겨울나무 가지 끝처럼,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어떤 그리운 느낌이 못의 뿌리로부터 대지로 번져나가는 것을.

 

인간은 희한하게도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깊은 인격으로 나아간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상처가 그리움을 번지게 한다. 병이 성숙을 이끈다. 병이 자유를 열어간다. 그러기 위해 “그 황홀한 통증의 뿌리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자기 무게의 수십 배가 넘는 사물들의 무게를 지탱한다.

 

못들은 힘이 세다.”(이상 인용 70쪽) 상처들은, 병들은 힘이 세다. 나는 그 힘으로 오늘 나를 살아낸다. 나는 그 힘으로 오늘 나를 찾는 환우를 함께 살아낸다. 그러니 어찌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한다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어찌 이 삶을  황홀하다 아니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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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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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빛 중에서 어둠에 배타적이지 않고 어둠을 껴안으면서 스스로 영롱해지는 것은 유일하게 촛불이다....... 촛불은 동화된다. 강렬한 빛으로 어둠을 제압하려 하지 않는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55쪽)


어둠을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표현과 마주했을 때, 내가 먼저 떠올린 건 사실, 유년시절의 호롱불이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호롱불은 최대한 빛을 내려 한다기보다 최소한, 그러니까 어둠이 열어주는 틈새까지만 발맘발맘 다가가는 순박한 빛이었다. 그러기에 호롱불 아래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코끝에 어둠 요정이 달라붙곤 했던 것이다.


호롱불은 자신의 빛이 어둠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는 듯하다. 하기는 그 모순이라는 게 인간의 생각이고 개념이지 호롱불에게야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아니랴. 그러니 호롱불은 자신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친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 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랑 바느질하는 엄마들이랑 모두 멀찌감치 보내 어둠을 막아서도록 했을 것이다.


1965년 가을 서울에 올라온 강원도 산골아이가 가장 놀란 것은 낮의 자동차, 밤의 전깃불이었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이 두 물질은 해끔하고 쌀쌀맞은 서울아이들보다 한 발 먼저 산골아이의 기를 꺾어 버렸다. 운전 경력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동차 운전과 주차를 잘 못한다. 하다못해 전자기기 시그널의 작은 빛조차 꼼꼼히 단속하지 않으면 지금도 그는 잠들지 못한다. 운전이야 않으면 그만이지만 불면증, 참 야속한 거다.


산골아이가 호롱불 대신 도시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촛불이었다. 개집보다는 넓지만 결코 사람 운신할 공간이 못 되는 비좁은 다락방에 올라가 촛불을 켜고 보스락거리다가 별스럽단 소리 들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전이 자주 되던 시절, 그 때마다 켤 수밖에 없었던 촛불의 아늑함은 마치 산골 집 호롱불 느낌과 같았다. 정전을 핑계로 숙제 멈추고 빛과 어둠의 가장자리에 고즈넉이 눕는 시간은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었다.


촛불은 무욕하다. 몽상과 기도와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양식을 만드는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자신을 태우면서 마침내 무소유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촛불 밑에선 누구나 시인이 된다.”(60쪽)


물론 그 시절, 그 촛불에서 무욕의 체취나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향(魂香)을 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어수룩한 인생경영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욕, 무소유인 상태가 되었을 뿐이니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가 촛불에서 정결한 혼을 본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어찌 보면 매우 뜻밖이랄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촛불집회, 거기였다.


나는 그 촛불 속에서 무욕의 바다를 보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그 신령한 불을 보았다. 즐거운 몽상, 간절한 기도, 해맑은 응시를 보았다. 중학생인 내 딸에게, 그 아이 손잡은 내게, 물대포 맞으며 “온수!”를 연호하는 시민에게 무슨 탐욕이 있었을 것인가. 수많은 날들 거대하게 너울거리던 촛불, 그것은 다만 촛불이 아니었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촛불이 피워낸 꽃이다. 캔들 플라워다!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데 촛불을 드는 행위만큼 배타적이지 않고 상대를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권력자는 빨갱이 운운하며 배후를 밝히라고 호통 쳤다지만 나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으로 딸아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내 부끄러움은 필경 김선우의 그것, “.......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는 그 부끄러움과 본질상 같을 터이다.


무욕한, 마음이 가난한, 촛불 아래서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발걸음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김선우「캔들 플라워」368쪽)다. 그 걸음걸이 자체가 몽상이며 기도며 응시다. 즐겁고도 간절하며, 간절하면서도 해맑은 놀이가 아니면 모순을 흔쾌히 받아 안아 세상 바꾸는 꽃으로 피워낼 다른 무엇이 있으랴. 촛불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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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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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많아질수록, 아름다운 것들이 쉽게 유린되는 것을 너무 많이 경험한 나이가 될수록 꽃을 꺾지 못한다. 꽃을 만지는 행위 하나에서도 윤리적 자아가 발동하게 된다는 것은 혹여 세계와 나의 타락의 방증은 아닐는지.”(43-44쪽)


읽다가 문득 멈추어 한참을 가슴으로 흘려보낸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나중까지 우는 숙명을 지닌 존재가 시인이라면 김선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숙명이 아닌가. 김선우의 탱맑은 눈물 감각으로 말하자면 “타락” 이외에 다른 언어가 없으리라.


나는 醫者로서 김선우의 두 번째 문장을 이런 의학 버전으로 바꾼다.


꽃을 만지는 행위 하나에서도 치유적 자아가 발동하게 된다는 것은 혹여 세계와 나의 아픔의 방증은 아닐는지.


내가 풀이나 나무의 꽃, 잎, 열매, 대궁, 껍질, 뿌리를 직접 약으로 쓰는 한의사가 된 것은 김선우가 시인이 된 것과, 아마도, 같은 숙명일 것이다.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생명감각을 일깨운 것은 거의 모두가 그런 풀이며 나무였다.


서울이란 초거대 도시로 스며들어 살아온 지 오십 년이지만 지금도 감도는 오감의 기억이 여전하다. 넓은 잎 사이 바람결에 반짝이며 얼굴을 내밀던 동그란 호박은 어린 내게 경이로움 자체였다. 연두와 초록을 오가는 호박 특유의 색감에 대한 설렘은 특히나 생생하다.


그뿐인가. 잿빛 채 걷히지 않은 봄 들판 걷다 보면 홀연히 쏘옥 고개를 내미는 할미꽃, 엄마 얼굴 같이 동그란 해당화 고운 향기, 장독대 맵짜한 냄새와 어울려 빛나던 자두나무 높은 곳의 선홍 자두, 끝 부분 세모 접어 잠자리채 만들던 쑥 대궁의 그 쌉쌀한 향기.......


이상하리만큼 내 관심과 감각 모두에서 풀과 나무들은 향 맑은 자극제다. 급기야 나는 내 자신이 풀과 나무의 본질을 지닌 사람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다. 풀과 나무가 내게는 동물보다 훨씬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식물은 태어난 그 자리에서 일생 동안 모순된 조건을 견디며 살아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침습해오는 동물의 공격을 감당해내야 한다. 소리치거나 몸으로 저항하지 않으니 그 고통을 인정받을 수조차 없다. 이들은 사람으로 치면 우울증 앓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풀과 나무를 대하는 근본 자세는 우울증 앓는 사람을 대하는 그것과 같다. 내가 우울증 앓는 사람을 대하는 근본 자세는 내가 나를 대하는 그것과 같다. 내가 나를 대하는 근본방식은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내 상처에 대한 치유, 바로 그것이다.


한의원 열면 주위에서 많은 풀과 나무를 선물한다. 대개 방치되다가 일 년 전후해서 죽기 마련이다. 내 경우는 다르다. 오래 산다. 내가 내 환우들을 치유하면서 읽어내는 “자기 존재 전부로 다만 아름다워진”(43쪽) 모습을 그 풀과 나무에게서도 읽어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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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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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될 일 아니라며 말렸지만, 나는 의자가 피워낸 ‘꽃’ 덕분에 국민 드라마 <허준>이 한의대 커트라인을 천정부지 끌어 올렸던 2000년, 사십대 중반 나이로 한의대에 합격했다. 그 누구보다 나는 내 자신한테서 인생 최고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축하 인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한의학의 시공간이 내가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질긴 우울증을 앓아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스스로 우울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치료는 동시에 깊고 넓은 공부가 되었다. 한의학은 물론 서구 정신의학의 교과서적 지식이 알지 못하는 우울증의 세계를 탐색하면서 새로운 진단, 치료 패러다임을 빚어갔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장애가 아니고 생명과 삶에 대한 자세에 생긴 치명적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독자적인 상담 이론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울증의 본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모멸과 부정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코 자기 자신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른 존재, 즉 유령들이 바글거린다. 그러므로 그 바글거림은 결국 텅 빈 무엇이다. 하여 우울증을 치료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김선우의 의자가 빛을 쏘는 순간이다.


의자에 앉는 순간 우리는 풍경의 중심이 된다. 중심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비어 있는 의자에 누군가 앉는 순간 새로운 중심이 생긴다....... 무언가 담는 순간 의자는 빛나기 시작한다. 중심으로 이동한 의자는 빛나기 시작한다. 중심으로 이동한 의자가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우울은 이미 치료되기 시작한다.”(35쪽)


그렇다. 그래서 김선우 의자는 역설이다. 김선우 의자는 경계여서 중심을 사로잡는다. 김선우 의자는 텅 비어 있어서 충만한 앉음을 호린다. 김선우 의자는, 이렇게, 매혹이다. 김선우의 매혹 의자가 만들어내는, “관능적”(33쪽)인 경계의 틈에서 일으키는, 자유로운, 섹시한 사건들은 실로 웅숭깊은 중심의 치유를 행한다. 우울증 앓는 이가 김선우 매혹의자에 앉으면 명품 인간으로 빛나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나는 오늘도 김선우의 매혹의자에 앉는다. 거기서 우울증을 달여 낸다. 나는 오늘도 김선우의 매혹의자를 비워놓는다. 거기 앉아 우울증 달여 낼 누군가를 기다린다. 자기 자신을, 현실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낭창낭창함으로 변방과 중심을 가로질러 역설을 빚어낼 때, 나와 그 누구는 함께 김선우의 탱맑은 빛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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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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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선우보다 열서너 해 앞, 아마도 그가 태어나 자란 곳 그 너머쯤, 강원도 오대산 줄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시절 그런 산골 마을에 의자 달린 책상을 가진 아이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 방바닥에 엎드려 하거나 밥상을 펴놓고 했다. 조금 나은 형편이면 앉은뱅이책상 있을 정도. 나 또한 그랬고 그렇게 공부하던 기본자세는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한의학 공부하겠다고 수능시험 준비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그리 들어간 까닭은 수학 때문이었다. 스무 해도 훨씬 지나 다시 시작한 고교 과정 수학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백 점 만점에 팔십 점을 못 넘기자 나는 수학책만 열한 권을 싸들고 법대생 시절 사시 준비할 때도 가지 않았던 절로 향했다.


이 무렵엔 다른 과목 다 만점 맞고도 수학 팔십 점 맞으면 한의대를 갈 수 없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 수학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수도승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 수행(!)도 허사. 수능시험과 같은 조건으로 모의시험을 치면 늘 막히던 문제에 다시 막힌다. 막히면 불같이 화가 난다. 화난 채 풀면 점수는 오르지 않는다. 점수가 꼼짝 않고 똬리 튼 현실을 목도할 때 남는 건 절망뿐. 


바로 이즈음, 우연히,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의자 위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1.5배가량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힘든 판에 그토록 체력까지 더 소모해가며 공부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 동안 정들었던(!) 앉은뱅이책상을 떠나 전격,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간이동, 자세이동이 어떤 예측 불가능한 자유를 몰고 온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의자의 받침 면과 다리가 만드는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하기는 어렵다.......”(33쪽) 


.......의자에 앉아 있는 순간의 인체를 생각해보라.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흔히 질서와 지혜를 향해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앉아 있다’는 측면에서 정적이지만, 정적인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전자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34쪽)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의시험을 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후반부 어느 문제에서 막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직으로 화가 솟구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찰나, 굵고 나지막한 한 음성이 들린다. “너, 왜 화를 내는 거냐?”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친다. 재빨리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있을 리 없다. 아, 내면의 소리로구나! 즉각, 연필을 내려놓는다. 가만히 물어본다.


“왜 화가 날까?” 답이 곧 나온다.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가만히 물어본다. “왜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답이 곧 나온다. “내가 지금, 사십 넘긴 나를, 이십 여 년 전 공부 잘 해 이름 날리던 열아홉 살짜리 그 소년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딩동댕! 과거의 어떤 기억, 그 기억으로 고정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경직성, 그게 답이었다.


현실을 현실로 해방하자 자유가 들이닥친다. 자유는 분노를 해체한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그게 변화의 진면목이 아니다. 화가 나지 않자 막혔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다. 정확무비하게 이치를 따른 것이다. 이치를 따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치를 따르는 상태로 변화한 것은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였다. 벌어져 있는 공간은 경계의 틈이다. 경계의 틈에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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