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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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수를 찾아 떠나다-“.......거대한 유리산이 바리공주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웠다. 공포가 몰려오자 옥함 속에서 울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울음소리란 걸 깨닫자 외면하고 싶었다. 바리공주가 손으로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으나 아기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귀를 막았던 손으로 바리공주가 유리벽을 두드리며 아기와 함께 울었다.......숨을 고른 후 눈을 질끈 감은 바리공주가 갓난아기가 울고 있는 유리벽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101-102쪽)

 

고난의 여정, 그 첫 번째 난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리산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유리산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비밀을 드러내어 알게 함으로써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바리의 공포는 버림받음에서 왔습니다. 갓난아기의 우주인 엄마가 사라진 시공에 찾아오는 검푸른 공포, 바로 그것입니다. 공포 뒤에 들이닥치는 눈물과 그 눈물에 대한 기억이 너무 아파서 바리는 한사코 외면하고, 부인하려 발버둥 칩니다. 그럴수록 아픔은 점점 더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옵니다. 급기야 바리의 영혼은 그 아픔에 꿰뚫립니다. 바리는 그 찰나 모든 아픔을 통째로 받아들입니다. 바리는 아픔을 품어 안고 함께 웁니다. 극진한 애도입니다. 마침내 바리는 공포, 그 두려움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아 나아갑니다.

 

김선우가 정신치료 과정을 공부하고 이 과정을 풀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질문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이치상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음의 병이 치유된다는 진실을 유심히 톺아보면 그만입니다. 특정한 해석·평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상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나아가지 않으면 치유란 없다는 진실이 간단명료한 내러티브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아픔을 겪을 때 흔히 생각하는 방법은 피하기입니다.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없다고 간주하는 것, 합리화하는 것 등 모두가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피하기입니다. 이런 방법은 사소한 버릇에서부터 세련된 긍정주의 전략까지 모두 허망한 거짓입니다. 아픈 것은 실제로 아픈 것이고, 있는 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에서 내 팔 뻗어 잡을 수 있는 곳, 내 발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을 홀딱 벗은 눈으로 마주볼 때만이 아픔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의 자세이며, 바리의 삶입니다.

 

꾸르릉, 쩡! 날카로운 소리와 둔중한 소리가 함께 울리며 유리산이 산산조각 난다는 느낌과 함께 바리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떨어졌다. 유리산을 뚫고 나오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쾌청한 하늘과 너른 풀밭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버려졌던 여자아지. 아니야. 나는 강한 바리다........나는 나를 믿으면 돼. 나는 나를 사랑하면 돼.......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야.......바리공주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102-103쪽)

 

유리산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거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끝이 아닙니다. 건강한 삶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참된 건강인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영성의 사람이며 열반의 사람입니다. 바리가 인도하는 길은 다름 아닌 영성과 열반의 길입니다.

 

사회 전체가 아픕니다. 혼자 행복하기 위해 은폐와 조작, 그리고 무시로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권력의 민낯을 보면서, 오늘 여기 우리 모두가 바리로서 살아야만 하는 날 선 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야 한다, 아가. 살라고 태어난 목숨이다.”(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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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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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대화에

말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말과 말 사이다.

 

대화에는

말보다

말과 말 사이가 더 많다.

 

말과 말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말은 대화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오랫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대화/상담 치료를 함께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따스하고 정확한 치료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낫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본디 실체적 힘이 없습니다. 말이 끝난 자리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틈, 곧 침묵 속에서 아픈 사람 스스로 말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섬으로써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상담자의 핵심적 임무는 아픈 사람이 자발적으로 병 앞에 서도록 허공을 열어놓는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말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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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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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왕가의 일이온데, 지금 불나국 백성들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더이다. 그 원인이 아버님의 병환 때문이라 하니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위해 아버님의 쾌유를 도모하겠나이다.”

침착하고도 당당한 바리공주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려 퍼지는 동안 대신들이 엎드려 감읍하였다.

바리공주가 오구대왕 앞으로 세 발자국 더 나아가며 말했다.

“대왕이시여. 듣자니 정사가 바로잡혀야 백성의 삶이 평안해진다 하니, 소녀, 생명수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소녀가 생명수를 구해 와 아버님을 살린다면, 아버님의 목숨은 불나국 백성들에게 빚진 것이오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소서.””(98쪽)

 

11년 전 <바리공주>가 생명수 구하러 가는 이유는 이른바 효의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궁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과 나라의 피폐해진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에 불이 이는 경험을 했지만 이를 삶의 결단으로 동기화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자신의 결단이 지니는 대승大乘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딸로서 아버지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인 아버지가 병들어 정사를 바로 살피지 못해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하여 생명수로써 구해지는 왕의 목숨은 백성들에게 빚진 것임을 명토 박고 있습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좀 더 깊은 통찰, 좀 더 섬세한 공감, 좀 더 광대한 자비심으로 세상을 보듬습니다. 세상을 보듬는 힘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바리공주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의 고통 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또한 부끄러웠다.”(95쪽)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감수성은 수미산을 나와 불나국 현실을 보는 순간 단박에 법과 도덕의 껍질을 꿰뚫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타인의 고통에 극진히 참여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결국 인간 존재란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타인과 더불어 성립한다는 도저한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들이닥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고통이 크다 해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너무 편안히 살았구나.”(93쪽)라는 부끄러움밖에 고백할 말이 없다는 진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탱맑은 감수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리 자신이 버려진 존재로서 두려움, 깊은 슬픔, 그리고 절망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바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치유의 길임을 배웠습니다.

 

버려졌기 때문에 바리는 자신을 더욱 사랑했다. 한 번 버려졌으니 절대로 두 번은 버려지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더욱 사랑해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지극한 사랑은 바리를 그렇게 키웠다.”(95쪽)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힘이 옹골차고 튼튼하지 못하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 이르지 못합니다. 흔히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켜 “자기 사랑이 지나치다.”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착각은 부끄러움의 감수성을 갉아먹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착은 그 자체로 질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대개 사회 최상위에 포진합니다. 권력, 자본, 종교를 쥐고 앉아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병들게 합니다. 질병을 가치로 둔갑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추종하게 합니다. 죽기 살기로 추종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절대 다수는 결국 절대 신앙구조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속는 줄도, 착취당하는 줄도 모른 채 고통에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통째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백성들은 조정으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95쪽)

 

 

통째로 버려지다니, 아, 이 소름 돋는 일치감! 오늘 우리는 이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을 통째로 버리는 조정이 그 강퍅함을 더해가는 나날을 견디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병을 고치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생명수를 구하러 고난의 길을 떠나는 바리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리의 희생으로 질병에서 놓여나는 지배자가 과연 백성에 빚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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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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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날 전통종교 사상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간결한 소개말 뒤에 대여섯 줄로 요약된 줄거리가 붙은 이야기 하나를, 그야말로 ‘우연히’ 만났습니다. 처음 본 내용에 대뜸 사로잡힌 이후 제 삶과 사유는 그 이야기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사십 년에 걸친 작업 끝에 빚어낸 제 인문한의학의 원효 패러다임도 따지고 보면 제 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그 이야기를 역사의 맥락으로 이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 리. 공. 주. 다름 아닌 그 바리공주가 제 인생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바리공주 이야기에 매료되고 나서도 꽤 오랜 기간 동안 그 이야기의 세세한 갈피들을 알지 못 한 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제 나이 마흔이 다 된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태어난 것입니다.

 

아내가 출산휴가 끝내고 회사에 복귀한 뒤 저는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 기간 내내 아기가 잠들기 전에 반드시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바리공주였습니다. 나중에 고마운 ‘이모’께 아기 양육을 맡긴 뒤에도 제가 재울 때는 언제나 바리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전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 내용이 너무나 짧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행운은 바로 이 문제에서 찾아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상상으로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리 한 것입니다. 아기가 잠들고 나서도 얼마 동안은 소곤거리듯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를 이어나아가려면 제법 긴 줄거리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특별히 사전에 골똘히 생각하고 구성해두었다가 말해주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로 만들고 그것을 기억해놓았다가 다시 살을 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기를 잠재우는 데 매우 적절한 분량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기도 퍽 그 이야기를 즐거워하며 들었습니다.

 

더는 그런 잠재우기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어느 날 또 ‘우연히’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바리공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제가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 줄거리가 그 책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었습니다! 온 몸에, 아니 온 영혼에 들이닥친 경이로움이란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음은 물론입니다. 그 날 이후 저는 바리공주가 제 무의식에 깊고 넓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확신은 우리 민중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 천하시인(이라고 제가 일컫는) 김선우는 11년 전에 어른이 읽는 동화로 <바리공주>를 펴낸 바 있습니다. 지난 5월 말께 그 책을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개작하여 냈습니다. 이 작업은 어제 오늘 뚝딱 만들어진 생각의 과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마무리 짓고 있었을 그 무렵의 4월 16일, 탐욕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생떼 같은 아이들 목숨 삼백을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버리는, 그러니까 “바리”는 참혹한 변을 일으켰으니 김선우의 심장이 거기 오래토록 머물렀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김선우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른사람’으로서.......많이 부끄럽습니다.”(209쪽)라고 썼습니다. 저는 더욱 부끄럽습니다. 그 마음으로 <바리공주>와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를 대조해가면서 찬찬히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까지 세심하게 다듬어 고친 김선우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게으른 독자는 그저 크게 달라진 열 곳에나 주의를 기울였을 따름입니다. 이제 그 열 곳의 이야기를 열 번에 나누어 해볼까 합니다.

 

3. 프롤로그-“노을 지는 수미산 서쪽 산봉우리가 분홍 연꽃처럼 층층이 벌어지고 있었다.”(6쪽)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새 책의 서막이 새롭게 열립니다. 여기서 새롭게 그려지는 바리는 열네 살짜리 소녀입니다. “여자라서 버려진 아이가 정말 여자가 된다는”(14쪽) “첫꽃”(14쪽)에 관한 이야기가 프롤로그 전체를 “분홍 연꽃” 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이 이야기 전체의 주제가 개짐 속에 깃든 “첫꽃” 송이처럼 조심스럽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 태어난 것들은 왜 죽는 것일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정말로 하늘나라의 별이 되는 걸까.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목숨이라는 말. 버려진다는 것. 보살핀다는 것.......”(14쪽)

 

아시다시피 바리데기(공주) 설화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에 두루 전해오는 서사무가입니다. 말 그대로 버려진 딸이 자신의 설움과 원한을 품어 녹이고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되살린 뒤 모든 부귀영화를 떠나 삶과 죽음의 어름에서 버림 받은 존재를 보살피는 무조신巫祖神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는 대척점에 서는 민중적 내러티브로서 우리 사회역사공동체 흔히 민족이라 일컫는  고유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인연 닿는 대로 풀어낼 참인데 원효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원효사상은 붓다 어법으로 녹여낸 우리 고유의 사상, 곧 바리데기 사상입니다. 거꾸로 말씀드리면 바리데기 설화에 담긴 사상을 원효가 그 당시 최고급의 보편 담론으로 다시 풀어낸 것이 바로 일심-화쟁-무애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40년에 걸쳐 법학-신학-의학을 구도적으로 공부하면서 찾아낸 진실입니다. 지금 제 의학은 원효사상이자 바리데기사상이자 한사상에 터 잡아 세워져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제가 쓴 <인문과 한의학이 치료로 만나다>가 책으로 나옵니다. 이 책은 인문적 인식 지표로서 원효 이야기가 주를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위주로 책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데기 이야기, 원효 이야기에서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다름 아닌 요석 이야기입니다. 다시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바리공주는 요석공주와 은유 이상의 일치 관계를 지닙니다. 바리공주 전승과 요석공주 이야기는 고갱이 부분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요석공주의 출생에 대한 문제점, 무장승과 원효, 세 자녀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원효와 요석 사이에는 설총 말고도 자녀가 둘 더 있었습니다., 요석의 출가 등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만일 요석의 눈으로 원효를 다시 보면 붓다 어법을 벗어버린 바리데기 어법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석을 국무國巫 또는 그와 유사한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직관합니다. 이런 직관은 교과서적 역사 지평에서 수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거나 상상하지 않습니다. 오직 제 무의식에 살아 숨 쉬는 바리데기 내러티브와 역사적 사건의 어떤 특정한 만남을 떠올릴 때 요석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김선우가 불교신문에 원효 이야기 <세 개의 달>을 연재하고 있을 무렵, 다음에는 요석 이야기를 써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선우는 깜짝 놀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내쳐 바리데기 이야기를 꺼내자 김선우 입에서는 어느덧 “도반”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김선우와 저는 도반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먼저 바리데기 이야기를 냈고 가을께 원효 소설이 마무리되어 나온다고 했으니 기대가 큽니다. 저는 먼저 원효를 책으로 내지만 바리데기 이야기는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김선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저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서둘러 바리데기 사상을 인문학과 의학으로 마주 놓아 쓰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제 글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또 읽기 불편한 논문 같은 글을 불친절한 어투로 써댈 것이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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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

 

 

안현미의 <시간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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