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철학의 선구적 사상가 원효 살림지식총서 327
김원명 지음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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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 100쪽도 되지 않는 소책자입니다. 당최 여기서 무슨 큰 지식이나 정보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연구자들에게서 뭐 더 나올 것도 없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원효 사상이 우리 상고시대 정치철학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 이거 봐라! 하고 집어든 것입니다. 

2. 저자는 원효철학의 추측적 기원이라는 장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이 어렵고, 불교계는 아예 무관심이긴 하나,  당대의 역사의식과 문제의식 속에서 추측적 기원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승불교적 전통을 신라에서 원효가 고유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꽃피울 수 있는 한국 고유의 지혜 전통 속에 원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혜공이나 대안, 혜숙과 같은 인물들은 바로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였다. 원효의 후반기는 이들과의 교유 영향이 컸다......."(27쪽) 

사실 원효 당시 상황을 보면 토착사상을 불교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대당 유학승 집단을 중심으로 한 왕실 주변의 주류 기득권 세력과 원효를 위시한 "토속적 벌거숭이 승려"들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한승원의 소설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전자의 근거지는 황룡사요, 후자의 근거지는 바로 분황사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바, 원효의 법호가 바로 분황이라는  사실에 터 잡는다면 이런 추정적 정황이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원효가 당(唐) 유학을 두 번 시도했다가 결국은 그 뜻을 접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른바 자주불교의 웅대한 나래를 펼쳐 나아간 것은 명백히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일대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삶 그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생명 감각과 이치 직관으로 외부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상들을 걸러내고 넘어서는 작업은 그 자체로 외래 사상을 자신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삼고 있는 세력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장 요소를 이 책의 저자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군조선의 의사결정 전통인 대감굿, 화백(和白)에서 원효사상의 토착적 근거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라 화백회의가 여기서 온 것이고, 그렇다면 왜 다른 승려들, 특히 왕실비호 세력인 정치 승려 집단의 사상은 여기에서 발원했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집니다. 누구보다 화백회의 한가운데서 놀았던 자들인데 왜 그들은 당나라에서 수입한 외래품 불교를 가감없이 숭상했을까요? 

원효사상의 젖줄을 단순하게 이런 식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경주 김씨 세습으로 굳어진 이후 신라 왕조의 아이덴티티를 냉철하게 살펴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김씨 신라는 그 기원이 김일제라는 흉노족 수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흉노 일족을 거느리고 한(漢)의 건국을 도왔던 자입니다.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자기 세력을 이끌고 한반도 동남부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바로 김알지입니다.  

김씨 신라는 이렇듯 동이족의 단군조선과는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씨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이런 반(反), 적어도 비(非) 동이적 아이덴티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런 진실을 안다면 통일신라 라는 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왕씨 고려는 동이적 아이덴티티를 지닌 집단이 건국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신라계 귀족들이 고려사회를 실질적으로 접수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에 대한 굴종 자세를 보면 신라적 아이덴티티가 부활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씨 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집단의 아이덴티티는 김부식의 그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들이 결국 이씨 조선을 일본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 이른바 주류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 정권의 아이덴티티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원효 사상이 동이족의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이것을 순진하게 바로 신라와 연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신라 내부의 정치경제학적 긴장과 모순을 날카롭게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불연속성에 주의하면서 원효사상의 위치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효를 반민족적 매판사상가, 반민중적 국론통일주의자로 몰아버리게 됩니다. 

원효의 일심화쟁(一心和諍)은 결코 북한을 무력으로 쳐서 하든, 붕괴를 기다려서 하든, 흡수통일하는 논거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배집단이 입만 열면 떠드는 국론통일의 수호신으로 원효를 들먹이면 안 됩니다.  원효의 통불교는 제식훈련 하는 군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은 원효를 왜곡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곡한 원효는 의상과 다름 없습니다. 의상은 왕실불교 수호자입니다. 김씨 신라의 아이덴티티에 입각한 화엄세계를 꿈꾼 자입니다. 그는 토속적인 벌거숭이 승려들과 전혀 관계 없는 자입니다. 원효를 이런 의상과 한 무덤에 끌어 묻으려 하는 자들이 의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저자의 전망은 이 함정을 어느 만큼 피해갑니다.  

".......화쟁을 국민총화와 남북통일 원리라 해석한 것이 주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라면 2000년대의 오늘날은 남북의 조화로운 공존의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원효의 논리로 볼 때, 둘이라 하기에 우리는 한 민족이자 한 나라다. 또 하나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상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마음에 기초해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면서 궁극적으로는 한 마음의 본원의 바다에 돌아가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승리하는 방식은 아니다......."(85쪽)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선문답식 나가는 말 때문에 다시 멍해지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은 잡은 것 같습니다. 

3. 저자에 따르면 <판비량론>을 포함한 다수의 원효 저작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심지어 인도에까지 전해지고 번역되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무려 천 년 이전의 일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원효의 그 엄청난 저작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 김부식과 같은 무리들이 일부러 폐기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원효를 거의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변죽만 울리는 떠듦으로 시간을 또 다시 잃고 있습니다. 
불자들 조차 '영혼의 은사' 원효는 모른 채 혜능을 읊조리고, 초기불교를 주려끼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덴티티를 지닌 사람들일까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무치는 마음으로 21세기의 원효를 기다립니다. 아니 각자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원효이기를 간절히 빕니다. 

4. 책 자체는 skimming 하듯 읽고 치워도 크게 실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 책에서 암시 받은 문제의식이 묵직하게 자리 잡아서인지 책을 자꾸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뭐 더 읽을 일은 아닌 것이 그 미련이란 게 결국 원효가 던지는 질문 때문일 테니까요. 오늘 여기 원효가 섰다면 과연 뭐라 했을까? 어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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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엽서 2012-05-1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라 김씨왕조가 남하한 흉노계통이라는 것은 어떤 사료에 근거한 학설인지 궁금합니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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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책을 두 달에 걸쳐 읽었습니다. 까닭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제 사유의 결이 비-화학적(?)(!)이기 때문이지요. 아, 이건, 뭐, 주기율표 암기, 기억, 화학적 지식,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리모 레비가 한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글을 썼던,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348쪽), 그리고 "자연주의자의 호기심"(348쪽)을 제가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이게 그와 저 사이를 가르는 금이었습니다. 

"저는 특이할 정도로 정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것 같아요."(348쪽)  

그렇습니다. 사실, 정확히 14년 후에는 제가 레비 스트로스 최후의 나이를 맞습니다. 물론 제 삶 그 자체를 그와 비교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허나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비교할 수도, 비교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찰나적 시간에서나, 사소한 일상의 공간에서나, 프리모 레비는,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그 투명한 눈으로 저를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 특히, 본디 인문사회학도였던 제가 낯설어 하면서 더듬거리고, 때로는 건성건성 지나가는 길목마다 그가 손목을 슬며시 잡아주었던 것이겠지요. 아르곤은, 아마, 다섯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세 문단을 못가 삼베 바지에 방귀 빠지듯 집중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격찬을 했더군요. 민망해서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 다섯 번 째만에 겨우, 나름대로 실존적 독서의 줄긋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도저한 비-화학적 감수성(?)(!)! 

결국 이 책의 깊숙한 읽기는  바나듐, 탄소 부분이 견인해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던 일인데, 작가의 연표를 세밀하게 살펴 그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로 끌어당기는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독서가 어느 정도 농익었습니다. 아, 물론 아직, 여러 번 더 읽을 생각입니다만! 

2. 일단, 저는 이 책을 프리모 레비의 아이덴티티, 그리고 죽음의 빛으로 관통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필립 로스와 나눈 이야기에서 그가 한 표현대로라면 이런 시도는 이 책에 대한 정서와 기억을 "흑백"(351쪽)으로 단순화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용서를 구하면서라도 이리 하는 까닭은, 제가 그런 context에서, 그런 punctum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3. 이책의 해설을 쓴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관해 한 말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말하면서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듐  이야기와 맞물려 있지요. 저는, 처음엔, 이 부분에서 저 아우슈비츠(정확히는 부나)의 뮐러 이야기가 등장할 줄 모른 채 읽다가,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부터 책 전체가 순식간에 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느낌은 단순화를 넘어 모독이자 오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 프리모 레비의 삶과 문학의 핵심 일단이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한, 제 느낌이 마냥 엉뚱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322-323쪽)   

그리고,   

".......나는 인간이 모두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그처럼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세상이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은 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비현실적이다. 현실 세상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은 무장한 이들의 길을 닦아야 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아니모든 인간이 대답해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무방비로 있는다는 게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323쪽) 

이 대목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의 의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추정은 서경식의 통찰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록 뮐러가 완벽한 적도 아니고 적의 대표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 상징으로, 프리모 레비가 마주해야 할 적은 뮐러일 수밖에 없는데, 그가, 만나기로 약속한 8일 후, 느닷없이,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프리모 레비의 냉엄하고도 옹골찬 이 생각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저한 절연의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그 문학적 문장의 교본인 실험보고서 문체로 간결하게 마무리합니다.  

"8일 후 나는 뮐러 부인으로부터 로타르 뮐러 박사가 60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324쪽) 

과연 그 답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생략되어 있는지....... 내가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이는데 그는 어땠을까,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이로부터 2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므로 섣부른 인과관계로 얽어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363쪽, 연보에 인용된 글)  

그렇다면, 자살에 대한 그의 웅숭깊은 이해는 20년이란 세월, 아니 전 생애를 견디며 정련되어 실천적 직면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결정"이라 했다는 사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덮었던 책을 다시 열어, 마지막 이야기, 탄소를 천천히 읽기 시작합니다. 앞에 어디선가 탄소 이야기를 마지막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떠올리며....... 급기야, 맨 마지막. 제 눈에는 이 "마침표"란 말이 책의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로 보였지만, 제 가슴에는 결코 그렇게 와 박히지 않았습니다! 

4. 첫 번째  아르곤 이야기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속한 디아스포라 유대교(인) 집단의 모순적이고 경계적인 아이덴티티를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이것은 이교도들(곧 구윔) 사이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의 비참한 유배 생활과 그들의 성스러운 소명 사이의 모순이다.......유대 민족은 흩어진 후 오랜 세월 동안 슬픔 속에서 그러한 모순을 살아 왔다......."(16쪽)  

한편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중심으로 다른 한편은 ".......큰 강처럼 흐르는 삶의 대열 변두리로......."(8쪽) 자리매김 되는 집단적, 역사적 모순이 프리 모레비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 숙명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숙명이 아우슈비츠로 그를 이끌었고, 그 아우슈비츠가 그의 문학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의 끝은....... 

5. 이 모순은 아연 이야기에서 좀 더 밀도 높은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말씀드린 바,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일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51-52쪽)  

이 부분입니다. 단순히 모순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 즉 "화학반응을 일으키는"(54쪽) 불순물이며, 소금과 겨자입니다. 모순은 여기서부터 역설로 나아가는 역동적 뒤섞임이 됩니다. 이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내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데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54쪽) 

홀연히 함민복의 절창 <꽃>이 떠오릅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 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6. 탄소 이야기로 아이덴티티를 철저하게 완성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탄소는 독특한 원소다. 그다지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고 안정된 긴 사슬 속에 스스로 들어가 결속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그리고 땅 위의 삶(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에서는 바로 그 긴 사슬이 필요하다. 그래서 탄소는 생명체의 중요한 원소다......."(329쪽)  

여기서 스스로 들어가 결속된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삽입"(331쪽)과 같은 의미의 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용해"(331쪽)로까지 이어집니다. 용해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용해된다는 것은 변화할 운명을 타고난(거의 '변화를 원하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실체의 의무이자 특권이다......."(331쪽) 

여기까지 가면 탄소는 단순히 어떤 결속된, 삽입된 요소를 넘어서, 그 대상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탄소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다.......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신경세포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세포의 일부분인 또 다른 탄소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 세포는 뇌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뇌, 글을 쓰고 있는 의 뇌다. 문제가 된 세포, 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문제의 원자는, 아무도 묘사하지 않았던 엄청나게 섬세한 놀이인 내 글쓰기에 속해 있다. 지금 이 순간 미궁처럼 복잡한 줄거리를 벗어나 내 손으로 하여금 종이 위의 어떤 여정을 따라 달려가며 기호들의 소용돌이를 그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세포다: 위로, 아래로, 두 차원의 에너지 사이로 이중 도약을 한 이 세포는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336-337쪽) 

스스로 삽입되고 용해된 탄소는 프리모 레비의 생명이자 삶이 되어 이 책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탄소는 어디든지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됩니다. 

"탄소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특수한 조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특수한 게 아니다."(326쪽) 

이것은 ".......위대한 인류를 대표하......나 익명의 존재들로 남겨질 뿐"(367-368쪽, 연보에서 인용된 글)인 프리모 레비 자신과 같은 숙련공들의 숙명과 일치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탄소와 문학과 그의 생명을 이렇게 연결합니다. 

".......나는 바로 이 탄소에게 해묵은 빚이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진 것이다. 최초로 내가 품은 문학적 꿈은 생명의 원소인 탄소에 있었다. 내 목숨이 별 가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끊임없이 꾸었던 꿈. 그러니까 나는 탄소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326-327쪽) 

저는 이 대목이야말로 프리모 레비의 모든 것이 담긴 절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탄소로 살았고, 그 탄소를 말했고, 그 탄소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불현듯 떠오르는  <중용> 한 구절이 있습니다.  

"君子之道 費而隱.(군자지도 비이은)." 

보통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로 이해하지만 저는 이를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지만(어디에서나 활동하지만)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로 읽습니다. 군자의 생각, 군자의 말, 군자의 삶은 보편적 이치와 생명력이 되어 편재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군자의 중용이 바로 저 프리모 레비의 탄소입니다. 그러므로 프리모 레비의 탄소적 "마침표"(!)는 그의 이치와 생명력을 우리 모두에게 "삽입"되고 "용해"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삶은 문학을 거쳐, 문학을 넘어, 마침내 보편성과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탄소가 그의 아이덴티티며 죽음의 의미입니다. 하여 그의 아이덴티티는 우리 모두의 아이덴티티를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핏속에 스며들어 따스한 생명으로 되태어납니다.  

7. <표>를 관통한다는 것이 썩 어울리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리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생각을 마무리하려 하자니, 다시 바나듐 이야기의 한 구절이 비수처럼 폐부를 찔러 옵니다. 

"침묵하는 다수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전략은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는 것,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것이(었)(괄호-필자)다."(320쪽) 

과연 그렇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는 지배집단의 참 모습에 대해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고,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길을 닦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들이 결코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의 탄소 프리모 레비는 "날마다 죽습니다." 어허, 哀哉 哀哉, 또 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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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 유년의 상처를 끌어안는 치유의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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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절창이 이 책 전체를 압축해줍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포도주에 따른 물 

다시 따라내진 못하리.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없어라. 

마지막 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197쪽)  

이렇게 다시 읽어 봅니다.  

일어났다면 일어난 거다. 

이미 내 삶이 되어버린 상처 

다시 베어낼 수 없으리. 

허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파멸의 격한 호흡은  

창조의 연한 숨결로 살아나리니.  

2.  어린 시절에 감당 못할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통해 세상을 읽습니다. 그것을 저자는 "신념체계"라고 부릅니다. 좀 딱딱하고 거창한 느낌을 주는 표현인데, 아마도 한 번 그 틀에 사로잡히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뜻을 드러낸 어법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바에 제 생각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인간정신은, 도식적으로 말해, 감정, 이성, 의지의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특히 만  7세 이전에는 이성과 의지가 아직 생성,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 3세 이전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러므로 이 무렵 입는 정신의 상처는 바로 감정의 상처가 되고 감정의 상처는 존재 전체의 상처가 됩니다. 말하자면 감정이 정신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대변함으로써 과잉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저는 격정(激情)이라 부릅니다. 격정의 에너지는 이렇게 증폭되어 나중에 생성, 발달되는 이성과 의지를 일거에 제압하기 때문에 한 번 일으켜지면 성찰, 제어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진실은 한 방향으로길을 내고 고착되기 마련이지요. 

뇌 생리학자들은 생애 최초의 경험, 기억, 그리고 감정이 뇌신경에 새로운 회로를 설정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궤도를 내는 셈이지요. 바로 그 궤도로, 차후 고통들은 자동 연결되어 내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뇌 생리학으로 설명하든 정신 현상학으로 설명하든 결과는 하나입니다. "신념 체계"라고 표현하리 만큼 강박적으로 굳어지는 경향성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견결한 이 경향성도 운명은 아니다, 그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신념 체계"의 강고함에 틈을 내는 길, 즉 받아들이고, 이의를 제기하고, 관점을 바꾸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설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저자의 설명 방식이 여전히 서구적 형식논리 구도 안에서 진행되지만 적어도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진실을 찾아서는 사유는 붓다보다 더 포괄적이고 깊은 가르침을 주는 예가 없으므로 그런 감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 붓다는 관점을 바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극단을 버리고 中道를 가라고 말합니다. 그  中道가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중도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관점을 다른 관점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진실의 전체, 즉 대칭성/양면성를 한꺼번에 보고 자신이 치우쳐 있는 현실을 깨달아 유연하고 자유롭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는 서구의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에 터 잡은 형식논리 수준에서는 불가해한 사유입니다. 이런 미흡함이 있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길을 찾아갑니다. 

3. 인상적인 부분, 첫째 대목은 여깁니다.  

".......받아들이다는 말은 라틴어 '카페레(capere)'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가지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있다. 즉, 주어진 것은 가진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진 어린 시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202쪽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것을 고백하기라 표현하고 영어로 owning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스럽고 비틀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기 삶의 일부로,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고통을 겪는 본인이나 치료자나 고통스런 과거를 삶에서 도려내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바닥에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치고 올라가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게 치료이며 그럴 때 올라선 상태만이 자신의 삶이고 그 이전 바닥은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저는 정호승의 시 <성배>를 떠올립니다. 

친구여 

아직도 성배를 찾아  

떠나고 있는가 

우리가 인사동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그 잔을 기억하는가 

그 막사발에 담아 마시던 

피와 눈물을 기억하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마신 잔은 

다 성배였다

4. 인상적인 부분, 그 둘째 대목은 어린 자아를 1-2세, 3-11세, 그 이후 10대로 나누어 다룬 것입니다. 각 기간마다 특징적인 정서 상태를 제시하고 거기에 맞는  아이의 반응을 그대로 체험함으로써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보살피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내면아이를 위해 좋은 아버지나 좋은 어머니가 되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러라도 한 번 해보라. 의식적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라."(281쪽) 

1-2세 때는 분리불안이 심하고, 위기에 처하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밝히고 거기에 맞추어 어르고 달래주어야 하다고 합니다. 향긋한 비누로 목욕을 하거나 마사지하는 것, 동화 테이프를 듣는 것,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포근함을 느끼는 것 등응 제시합니다.

3-11세 때는 독립심과 자기 존중감이 문제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거절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배운다든지, 청소년 영화를 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10대 때는 감정의 혼란 상태가 격심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일기 쓰기, 즐겨 듣던 팝 음악 듣기, 철학적 고민을 담은 책 읽기 등을 제시합니다. 

사실 내용 자체가 그닥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내면아이 이론/임상서를 보면 훨씬 더 자세히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책을 처음 든 사람이 정작 어른의 시각에서 , 그럼 나의 내면아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래주나, 생각했을 때 막막해지는 공백을 메워줌으로써 평범한 내용은 오히려 고마움의 대상이 됩니다.  

5. 마지막으로, 아쉬운 부분, 한 가지. 

전체 내용이 개인적인 한계에 갇혀있다는 점.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면아이 돌보기 문제는 물론 용서 문제도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적, 사회정치적 지평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오늘날 더욱 중요한 화두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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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R.뿔리간들라 지음, 이지수 옮김 / 민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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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불교와 상관 없이 대칭성의 사유 양식을 탐색하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원효에 도달한 특이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과정의 절정 어름에 초기불교를 만났습니다. 원효로서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혀 대할 수 없었겠지만 초기불교 사상이 원효의 품을 벗어난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진.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초기불교 쟁점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비록 제가 불교적 접근으로 원효를 만나 게 아니지만, 하여 그것을 불교사상이라 이름하지 않지만, 원효가 스스로 젖줄을 댄 샘이 붓다가 맞다면 , 붓다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흡수하는 일은 더없이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reference의 결을 좇으며 초기불교의 속살로 다가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접했던 여러 가지 담론들이 어떤 공통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초기불교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이 불교라는 정체성 안에서만, 특히 초기불교 가르침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게 붓다의 본디 가르침 맞아?, 그러면 그것으로 끝!, 이런 식이라는 느낌입니다. 非佛說이면 불교와는 상관 없다, 이런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 기준이 매우 逐字的입니다. 같은 뜻이라도 다른 용어를 쓰면 물리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요. 행간을 보지 못하는....... 

 

하여 저는 붓다를 불교 경전과 그 주석서를 통해 이해하는 한편 붓다를 둘러싼 조건,  synchronic한 지평과 diachronic한 맥락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 지혜가 맞지만 붓다 또한 한 인간입니다. 그에겐 그의 삶의 정황이 있습니다. 문화가 있습니다.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리고 한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붓다라고 해도 그의 가르침은 백과사전도 아니고 완벽한 논리에 터 잡은 철학 교과서도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印度的 사유라는 커다란 조건을 탐색해 볼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 가운데 R. 뿔리간들라의 <인도철학>을 손에 들었습니다.  

 

이 책은 오해 받고 폄훼되는 인도철학의 정수를 compact하게 석명한다는 취지를 담은 듯합니다. 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따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따의 일치를 말합니다. 저자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게 하는 구성이며 내용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큰 흐름에 주의하려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적 사유의 전체적 지평과 맥락에서 붓다는 무엇인가? 이걸 물으려고 읽은 것입니다. 읽은 뒤 제 생각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2. 거칠게 말하면.......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有的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無的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苦.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도 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苦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함입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 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대승이라 떠들던 너희가 불교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식의 책임론은 답이 아닙니다.

 

만일 그 문제에 답변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로 소승이 맞습니다. 소승이 맞다면 초기불교는 애당초 붓다의 가르침을 구어 전승에서 시작하여 빠알리어 문자로 독점한 크샤트리아 중심의 장로(테라) 집단의 독선적 종교가 맞습니다. 어떤 이들은 초기불교를 테라와다 불교라 하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이지만 테라와다 불교는 그대로 소승불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테라와다 불교는 재가불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측근에서 가르침을 간수하고 전승시킨 기득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이상 빠알리어 경전을 강조하면 할수록, 아비담마를 중시하면 할수록 초기불교는 엘리트 불교, 주지주의적 이성 불교, 유명론적 개별자 불교로 남을 가능성은 짙어질 것입니다.  이 위험성은 명백하게 붓다와 반대 방향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엄중한 베다 정통성을 거부하고 평등한 생명의 닙바나 공동체를 지향한 것이 붓다의 길이거늘 오늘의 그 제자들은 서로 자신이 붓다의 진정한 계승자라 하면서 스승의 길을 거스르고 있지 않은가, 준렬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대승불교는 적어도 나가르주나 이후 천년 이상 베다적 가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침공과 맞물리면서  안타깝게도 인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를 단순화하여 힌두교에 흡수 당해 사라졌다는 식으로 몰아버리면 안 됩니다. 그 과정에서 대승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그 연장선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온 대승불교를 두고 나가르주나는 허무주의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습합되었다, 심지어 대승경전은 非佛說이다.......이리 말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인식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붓다의 원음과 다른 용어, 생각을 구사했다 하더라도 이는 논의의 진행과 사유의 심화 과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사유가 전개된 논쟁적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난 텍스트만 보고 쉽게 말하는 것은 피상적인 태도입니다. 옳든 그르든 힌두교는 인도의 무의식입니다. 인도 땅 한복판에서 힌두 무의식을 100% 떨어내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불교에 적용되었다고 해서, 가령 너희가 알고 있는 관음보살은 사실상 힌두신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만일 초기불교가 정말 100% 순수 불교라면 그 환경이 대승불교처럼 정통파 사상체계와 항시 맞대고 싸워야 하는 절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뭐가 순수불교냐 이런 게 아닙니다. 순수불교라면 뭘 해야 하느냐 이런 겁니다.  붓다의 본디 가르침을 알면 그걸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정녕 초기불교가 붓다의 본디 가르침이 맞다면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나라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말해야만 합니다.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거기서 불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도 초기불교가 왕성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생각을 대강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책을 살펴보니 불교철학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저자 자신이 빠알리어 경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공백이나 불균형이 있을 수 있겠다, 싶더군요.  하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만으로도 필요한 통찰을 주기엔 넉넉하다고 봅니다.

  

3. P. 리꾀르는 사유 진화의 단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1차 소박성(la 1ère naïveté)->비판(la critique)->제2차 소박성(la 2nde naïveté). 저는 이것을 그대로 제1차 초기불교->대승불교->제2차 초기불교로 대치해 보았습니다. 제1차 초기불교는 물론 역사적 초기불교입니다. 말 그대로 소박 불교입니다. 원형 복원, 불가능이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승불교라는 비판의 단계, 즉 부정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스리랑카 불교일 수 없습니다. 스리랑카 불교에는 원효가 없습니다. 제2차 초기불교는 비판, 즉 대승불교를 안고 가야 합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게 도저한 현실입니다. 무엇을 비판했는지 다시 직면하면서 통과해야 합니다.  

 

겉 모습이 같다고 해서 제1차 소박성과 제2차 소박성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제2차 소박성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한 차원  높아진 긍정, 즉  無碍自在한 선택과 양립의 비결정성, 고졸한 기품입니다. 동그라미 한 개와 선 몇 개로 사람을 그리는 네 살 짜리 꼬마와 장욱진이 다르듯.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불교 지성과 대중의 진지한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됩니다. 저는 두 가지 정도를 우선 먼저 간절하게 기대해 봅니다.   

 

 (1) 문헌비평 - 불경도 문헌입니다. 시대 상황과 사람의 의도에 따른 수정, 가필, 오류의 가능성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따라서 문헌 비평은 필수입니다. 

 

 (2) 인문사회학적  토대 - 불경만 알겠다고 하는 사람은 불경도 모릅니다. 인간과 사회의 구체적 정황(context)을  읽는 안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빠알리 경전이든 산스끄리트 경전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맞는지, 그렇다면 그게 어떤 구체적 정황에서 나왔는지, 그렇게 나온 가르침이 사물의 보편적 이치에 맞는지, 결국 오늘 여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것들을 묻지 않는 상태의 모든 신뢰와 주장은 '네 살 짜리 꼬마의 그림'이지 '장욱진의 그림'이 아닙니다. 진실을 현실의 발걸음으로 좇아가려는 사람은 늘 이렇게 물어야만 합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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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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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scellany

이 시집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전에 없던 일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정말 처음 있는 일인데, 첫 시에 바로 가슴이 쩡! 하고 소릴 내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어떤 시집과 마주하더라도 처음엔 낯가림 하면서 읽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한참 지나가야 마음이 슬슬 뜨거워지고, 몸도 풀리지요. 한데 이번엔 첫 시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급기야 시 전문을 손전화 문자에 실어 누구에겐가 보내기까지....... 

그리고, 시집 끄트머리에 붙은 시인의 말을 시보다 더 주의깊게 읽은 것도 처음입니다. 그 글을 읽는 제 호흡은 이렇게 마디지어집니다. 

 (1) .......꼭 가야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2)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3)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 

 (4)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    

흠, 60년을 꼬박 살고서야 확신이 서는 운명의 길이라.......그 운명의 길 종착역에서 비로소 시 한 편이 나온다.......그 시는 침묵과 버금한다.......이렇게 사무치는 깨달음 뒤에 쓸 내일의 시란 과연 무엇일까.......  

끝으로,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를 다 읽은 후 느긋한 마음으로 해설을 읽으면서 시 읽는 마음의 studium과  punctum을 살피는 버릇까지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해설을 통해 뭔가 살펴지지 않았다는 게 달랐습니다. 해설하신 분이 독자들의 수준을 배려해서(!) 그리 쓰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해도 시인의 그 짧은 시들에 비해 해설이 너무나 '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2. studium  

정호승을 생각하면 그 맞은 편에 떠오르는 시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마종기. 

정호승의 시는 수직적이고 마종기의 시는 수평적입니다. 정호승의 시는 운문성이 너무나 또렷하고 마종기의 시는 산문성이 지배적입니다. 삶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테고 사람의 차이도 있을 테고....... 물론 내밀한 것까지야 알 수 없지만요.  

마종기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추방 당한 상태로 오랫동안 이국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겪는 회한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에 아무래도 경쾌하게 수직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정도. 그냥 그의 시는  산문 같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면 산문적 삶에서 어떻게 운문적 정서가 나오는가를 대놓고 알려주는 시가 있어, 어쩌다 운문(!)인 시 사이를 이어준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배회, 방황 같기도 하고....... 

 정호승은 탄젠트적 상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낍니다. 그가 넘나들고 구사하는 은유, 그 절정으로서 역설이 너무 날렵해서 저는 'S라인 선문답'이라고 누구에겐가 말했답니다. 그것이, 때로는 통쾌함으로 다가오다가, 때로는 얄미움으로 다가옵니다. 통쾌함은 저의 아둔함에 금을 냅니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지요. 얄미움은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의심은, 가령, 마종기의 삶에서 이런 뒤집음이 나올 수 있을까, 또는, 그의 영성은 너무나 투명한 순물질이 아닐까.......실로, 물색없는 발상인데, 하여, 용서를 양쪽에 다 구해야겠지만, 어째, 가끔, 스님의 주례사가, 문득, 떠오릅니다.^^  

좌든 우든 그럼에도 몸 느낌으로는 분명하게 정호승에 기울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그가 시인이거든요.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결국 흔하디흔한 통속 감각이어서 도리어 안심입니다. 

3. punctum 

이 시집 전체를, 제 삶의 감각에서, 다음 세 편으로 관통해 봅니다. 

 (1) 어제 <뒷모습>을 돌아보며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꺼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2) 오늘 <충분한 불행> 앞에 서성대다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 내일 <봄비>에 깃든다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 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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