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장애를 자가면역질환이라 했더니 질문하는 이가 드물지 않기에 큰 맥락에서 다시 논의한다.

 

우울장애는 기분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에 가 닿는 질병이다.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심하다, 슬픔이 일상을 계속해서 뒤흔든다, 사는 게 재미없다, 뭐 이런 표현은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현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 흥미, 가치, 의미, 목적, 계획 따위가 죄다 부질없어지는, 그래서 몸도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무기력해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심신증후군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우울장애란 전천후 자기부정 증후군이다.

 

자기부정이 다름 아닌 자가면역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자기부정은 타인 긍정을 수반한다. 자기를 죽인 시공에 타인을 채워 넣음으로써 자타 동화(同化)를 꾀한다. 우울장애 또 다른 이름은 그러니까 동화 증후군인 셈이다. 이는 흔히 우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동화 증후군은 이화(異化) 증후군의 희생양이자 그 비대칭 대칭이다.

 

이화 증후군은 이화 문명을 낳은 질병이자 이화 문명이 낳은 질병이다. 이화 증후군은 스티브 테일러가 말한바, ‘사하라시아지역에서 기원전 4천 년경 일어난 인도-유럽어족·셈족 자아 폭발, 그러니까 타락과 사회·역사적으로 결부된다. 이 자아 폭발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적이나 수탈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화 병리다. 이 병에 걸린 집단은 자아 정체성 인식·유지에 민감하고, 논리 일관성에 집착하므로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할 경우, 공격성을 드러낸다. 자기기만, 인지 부조화, 확증편향, 조증, 신체망상, 사이코패스, 정신 분열 같은 일련의 분열 스펙트럼 병리를 지닌다. 흔히 좌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이 병리 위에 세워진 통치체제가 다름 아닌 제국주의다.

 

이화 증후군에 걸린 자들이 제국주의 지배집단이 되는 일은 필연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을 보면 이내 수긍할 수 있다. 이화 증후군에 걸린 특권층 부역 집단이 만들어내는 수탈·살해체제에 속절없이 당한 피지배자가 동화 증후군을 앓는 일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자가면역질환으로서 우울장애를 포함한 동화 증후군이 일어나는 변방, 바로 그 자리가 동화혁명의 출발점이다. 동화혁명은 자기부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 아프고 슬픈 각성에서 비롯한 연대로 이화 문명, 이화 정치경제학에 저항한다. 저항은 아픈 생명 피눈물 값이다. 피눈물로 내 경계를 허물어 남을 맞아들이는 내림굿이 녹색 면역 혁명이다; 민주주의 혁명이다; 바리데기 혁명이다.

 

바리데기가 앓는 자가면역질환이 우울장애다. 바리데기가 알아차린 자기부정이 혁명을 추동하는 고통 조건이다. 바리데기들이 더불어 엮어갈 팡이실이로 여는 세상이 제국을 넘어선 녹색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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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 개념은 그 정확성과 무관하게 오늘날 삼척동자도 입에 올리는 쉽고 흔한 말이다. 가령 면역력이 약해서 병에 걸렸다는 말을 누구나 한다. 면역력이 약하다는 말은 당연히 외부 조건을 비-자기, 그러니까 적으로 인식해서 격퇴하는 힘이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민한 면역반응을 보이는 알레르기질환 경우도 본질적으로는 면역력이 약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균형 상실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는 이른바 자가면역에서 일어난다. 자기를 적으로 인식하여 공격하는 현상을 면역 과잉으로 이해하면 당연히 그 치료는 면역 억제로 방향을 잡는다. 실제로 제국주의 백색의학 치료는 그 시스템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이종의학인 제국주의 백색의학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 과연 타당한가? 면역 억제 끝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짓을 치료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할까? 물론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달리 쓸 방법은 없다.

 

이 막다른 골목은 논리적 필연이다. 면역 또한 이종 면역 일극 구조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면역학자 아보 도루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면역은 본디 자가면역이었다. 생명체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면서 새로운, 그러니까 이종 면역으로 진화했다는 말이다. 이 변화는 비가역적이지 않다. 생명 유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옛 면역, 그러니까 자가면역 체계가 귀환한다. 이 옛 면역은 주로 소화기관, 소화기관에서 진화한 간, 외분비선, 생식기관 주위에 포진한다. 이 상황을 사실로 전제하고 진화 역사 집장태로 해석하면, 면역은 이종과 동종 사이 비대칭 대칭구조가 된다. 난치성 자가면역질환에 걸린 몸은 모순이 공존하는 상태에 놓인다는 말이다. 이 상태를 제국주의 백색의학 방식으로 풀어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형식논리에 터 한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쌍방향 치료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 상황을 돌파할 오직 한 길은 쌍방향 치료다. 쌍방향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의학이 바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면역은 형식논리를 넘어선다. 이율배반을 품는 전체 진실에 터 한다. 녹색 면역 빛으로 보면 악성종양도 전혀 달리 해석하고 치료해야 한다. 아직은 아무도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혈관운동신경성비염도 본질에서 자가면역질환이라 할 수 있다. 더더구나 도리질을 치겠지만 나는 우울장애 또한 자가면역질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홀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적적하나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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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요시토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포유류 가운데 청각 우위 뇌를 지녔다고 한다. 듣는 인간(homo auditus)이라는 뜻이다. 말하는 인간(homo narrans)과 비대칭 대칭을 이루고 있는 진실이다. 들어 소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한 말인들 무슨 소용이랴. 언어 진화 자체도 구강을 포함한 발성 기관에서만 비롯하지는 않았다. 자기 말을 정확히 듣는 청각 기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듣기 사건은 말하기 사건에 선행한다. 아기는 엄마에게서 들려오는 모()어를 듣고 그때로 따라 함으로써 말 세계에 들어선다. 듣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이런 순서는 비단 생애 초기에만 통하는 이치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은 먼저 듣고 나중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남은 복수고, 나는 단수다. 나는 남 속에 있다.

 

인간이 말을 발달시켜온 까닭도 남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말하기 자체 능력에서 판가름 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젬병이다. 남들이 잘 알아듣도록 말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부터 잘 들어야 한다. 듣는 능력 뛰어난 사람이 말 못 하는 법은 없다. 말은 귀 사건이다.

 

청각은 기능 너머 자세다. 청각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일은 개인 건강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소통과 공존을 향한 열린 자세 표지다. 제국주의 백색 문명은 청각에서 자세를 삭제했다. 제국주의 백색 학문과 문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 포르노를 쏟아낸다. 제국주의 백색 음악은 8hz 지구 조화 장과 불화하는 나치 괴벨스 440hz를 연주한다. 제국주의 백색 청각은 소통 아닌 소비만을 향해 속절없이 열린다.

 

약탈적 소비를 향해 열린 청각은 막무가내 확증 편향으로 진실 문을 닫는다. 듣고자 하는 바만 듣는다. 그리 들은 바만 진리라 우긴다. 우기는 바를 우월 증표로 삼는다. 증표 받고 떡고물 떨어뜨려 주는 제국주의 백색 언어 부역 세력이 1500년 동안 떠들어 온 나라가 여기 있다.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고 백성이 기어이 그 수괴 멱을 딴 나라가 여기 있다. 그렇게 되찾은 자주를 다시 특권층 부역자에게 되돌려준 나라가 여기 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나는 오늘 가만히 반제국주의 녹색 귀를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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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한다는 일기예보를 보자 숲에서 비에 홀딱 젖던 기억이 마치 어떤 음식에 물리면 입맛이 뚝 떨어지듯 갑자기 낯선 느낌으로 다가와 야생 숲으로 가려던 뜻은 일단 접는다. 느지막이 출발해 지지난 주 경로를 따라간다. 교보에서 리베카 솔닛을 하나 더 담고 도심 나무 순례에 나선다.

 

인사동길을 따라 율곡로 방향으로 올라가 길을 건너면 서쪽이 송현동이다. 최근 공원으로 돌아온 그곳은 오랫동안 위압적인 돌담으로 막아 놓은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나는 일본대사관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나 실은 미국대사관 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점령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4회 서울 도시건축비엔날레가 설치 미술 하늘소()라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 가까운 일대는 물론 멀리 백악산과 인왕산을 트인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을 표상하는 경복궁과 청와대를 한 눈길에 두니 새삼스레 오늘 오욕 한가운데 있는 내 삶이 통렬하게 다가든다.


 


소격동을 거쳐 화동을 가로지르고 마침내 원서동 창덕궁 서쪽 담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걷는다. 나무 순례길 반환점인 돈화문 옆 5백 세 은행나무께로 간다. 어르신 나무에 대한 예의를 내팽개친 관리 흔적이 갈수록 역력해진다. 속죄제를 소리 없이 지내고 땡볕을 피해 가며 관훈동 단골 국시 집으로 향한다.

 

국시 집에 앉아 한참을 망설인다. 어디로 갈까? 홀연 서오릉이 떠오른다. 고교 몇 학년 땐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서오릉으로 소풍 갔던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그 시절 갈 데라고는 궁, , 절이 전부였으니 특별한 경험이 뭐 있었겠나. 흙먼지 이는 길을 지루하게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왔다는 기억 말고는 없다.

 

잠시 서오릉을 검색했다. 서오릉에는 숙종과 그 비빈이 묻혔다. 특이하게도 경종을 낳았으나 나중에 폐서인이 된 장희빈은 서오릉에 묻혔고 영조를 낳은 최숙빈은 소령원이라는 다른 곳에 묻혔다. 소령원은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TV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자못 의아스러운 풍경이다.


 

장희빈이 그토록 사악했는지, 최숙빈이 그렇게 어질었는지, 물론 실체적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최숙빈 장지를 찾는 과정에서 숙종이 보인 반응은 사뭇 냉정했다. 장희빈과 최숙빈은 각각 남인과 서인 아바타로서 영욕을 함께 했다는 사실 외에 사적 진실은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나는 그 침묵하는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여러 버전으로 들어온 서사들-사실 정사 기록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다-을 있는 대로 놔둔 채 나 또한 침묵한다. 능에서 눈으로 보는 풍경만 담고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희빈 장옥정이 묻힌 대빈묘 앞에 망연히 서서 한참이나 시간을 쌓아둔다. 그냥



죽은 존재와 소통하는 일은 생명 팡이실이 본성이다. 그러나 죽은 존재가 품은 진실을 산 존재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관건은 진실 여하를 뒤지는 일보다 밝힐 진실 따위는 없다, 또는 진실은 이미 밝혀졌다, 또는 진실을 다 안다고 단정하는 자가 무슨 서사를 쓰는가다. 그 서사에 진실이 접혀 있다.

 

어제 서이초교 교사 추모제가 있었다. 징계 공포를 무릅쓰고 5만이 모였다. 진실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모호하다. 부역 정권 수장과 교육 당국이 지금 던져대는 bullshit 접힌 면에 드러나 있지만 숨긴 상태다. 권력에 내용을 묻느니 진실이 가리키는 쪽으로 행진하는 일이 도리어 역사를 사는 자세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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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각, 그 여러 겹 아우라

 

인류 역사상 맛()이란 말에 가장 웅혼한 미학을 부여한 사람은 단연 원효다. 원효 사상 결정판인 금강삼매경은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요약된다. 일미(一味)는 일심(一心)을 실천적·감각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일심은 장엄 전경을 향해 가는 삶 내용, 방향, 동기, 가치, 효력 모두를 포괄한다. 이 모두를 소소한 존재·사건에서 소소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일미라고 표현했다. 일미라는 표현으로 일심 사상이 거대 관념론에 빠지는 길을 원천 차단했다. 요컨대 가장 광활하면서도 가장 소소한 영성, 그 비대칭 대칭을 맛, 그러니까 미각에 담은 묘미가 일미에 있다. 일미는 다미(多味)로 팡이실이다.

 

원효 일미와 비교할 바 아니거니와, 우리에게 제법 낯설지 않은 사바랭이 한 네가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라. 네가 무엇인지 말해주겠다.’라는 말을 거론함 직하다. 먹는 음식에서 신분이 드러난다는 취지로 한 말이 번역 과정에서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라고 왜곡되었다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왜곡이랄 일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 그러니까 추구하는 맛을 통해 성향을 짐작하는 일에는 분명한 일리가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하는 말, 사회적 행동보다 훨씬 더 신뢰할만한 정보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각에 착오는 있을지언정 고의적 위선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하마 아득히 잊힌 오래전 일 하나가 떠오른다. 이정현이라는 정상배가 새누리당(현 국힘당) 대표에 선출되자 축하 파티를 열어 상어 지느러미와 송로버섯 먹인 박근혜 미각 학예회다. 얼마 뒤 민중 손에 쫓겨날 줄 모른 채, 제 속살을 함부로 대놓고 드러낸 천박한 미각적 커밍아웃이랄까. 선거 때 재래시장 가서 어묵 쇼했던 이명박도 실은 뒤에서 저희끼리는 뭘 먹는지 역으로 드러내는 짓이니 미각 천박함에서는 도긴개긴이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 기품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돈 있으면 근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같은 급이다. 물론 개 웃기는 얘기지만 저 패거리는 사뭇 진지하다.

 

미각 사유와 실천이 그 사람 상황이나 성향을 결정한다고 하면, 보통 서둘러 무엇을 먹을까 궁리한다. 이 또한 본말전도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자기 미각이 어떻게 형성·지속·왜곡되어왔는지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현실에는 태아 때 어머니 식성에서 시작하여 지구 기후변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층 요인이 개입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어떤 미각, 어떤 음식에 원근·호오 반응을 하게 되었는지 면밀히 살피고 감응하는 치유부터 해야 한다. 미각 쏠림을 조절하고 대칭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음식을 새로 선택하고 교감하는 일이 흐름으로 일어난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단맛에 끌리지 않았다. 도리어 쌉싸래한 맛을 좋아했다. 모유가 나오지 않아 대신 먹은 미음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사시사철 먹은 산나물이 강화 요인이었음 직하다. 양념 맛이 강한 음식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도리어 원재료 맛에 예의를 갖추는 한에서 양념을 쓴 담박한 음식을 좋아한다. 유아가 먹을 수 있도록 미음을 머금었다 흘려보낸 솜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할머니 백김치가 강화 요인이었음 직하다. 이런 미각을 내 삶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과정이 우울증을 깨닫고 치유하는 과정과 겹친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뜨르르한 요리사와 장인들이 시전하는 저 식도락 향연에 나는 전혀 관심 없다. 그렇게 좋은 맛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경지를 포르노라고 부른다. 포르노를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구가하는 미각 아라한이야말로 아우라 극단에서 어슬렁거리는 비렁뱅이다. 미각이 거느리는 아우라 스펙트럼에도 중도와 회향이 있다. 개인적 상처에서 지구 위기를 가로지르는 반제국주의 통찰과 심신 전체를 꿰뚫는 미각 조절은 중후하면서도 경쾌한, 의미심장하면서도 재미 무쌍한 경계 시공을 탄다. 그 경계 시공에서 원효 일미와 내 담담 쌉싸래한 미각은 둘이자 하나가 된다.

 

 

1. 미각은 감각 팡이실이다

 

미각은 음식이 혀에 닿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다만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미각 80% 이상은 냄새다. 촉감 없이 미각은 형성되기 어렵다. 음식 빛깔, 모양, 심지어 그릇 생김새도 미각을 좌우한다. 씹을 때 나는 여러 가지 소리가 미각 한 축이며, 지나친 소음은 미각 형성을 방해한다.

 

미각을 담당하는 특수내장감각신경은 안면신경(7뇌신경: 혀 앞부분 2/3), 설인신경(9뇌신경: 혀 뒷부분 1/3), 미주신경(10뇌신경: 혀 뒷부분 1/3)이다. 세 신경 모두 자율신경 가운데 부교감신경과 관련이 있다. 부교감신경은 한편으로는 위와 장[장신경]과 닿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뇌[중추신경]와 닿아 있다. 당연히 미각은 위·장 현상이며 대뇌 현상이다. 장에도 미각 세포가 있으니 입맛이 없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장 건강 상태도 점검해야 한다. 미각은 몸 전체 현상이다.

 

나아가 미각은 정신 현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먹으면 미각은 둔해진다. 자상하게 설명을 들은 뒤 먹으면 더욱 맛있다. 소울푸드는 참으로 존재한다. 미각은 기억과 그리움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지평이 넓어지면 미각은 형언할 수 없는 무엇으로 번져간다.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을 우리는 광활함(spaciousness)이라 부른다. 광활함에 배어드는 팡이실이 감각이 바로 미각이다. 팡이실이 미각을 통해 신이 창발한다.

 

미각 시공에서는 그러므로 지성소 사건이 일어난다. 지성소 사건을 향락 스캔들로 영락시키는 제국주의 백색 문명 속에서 우리는 녹색 미각을 수탈당하고 있다. 요리 포르노에 중독되어 미각이 거룩한 제의이자 신나는 놀이 사건이라는 진리를 놓치고 있다. 비대칭 대칭 미각을 복원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반제국주의 전선 축이다.

 

 

00. 단식, 미각 혁명으로 가는 길

 

헨미 요(邊見 庸)가 지은 먹는 인간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 부제는 <식과 생의 숭고함에 관하여>. 삶에서 먹는 일이 무엇인가를 되새긴다는 의도일 터. 그러면 먹는 일에서 미각은 무엇인가? 대뜸 이런 질문이 솟아오른다.

 

맛없으면 먹지 않을 텐가?”

 

어떤가? 먹는 일에서 미각이 무엇인지 묻는 데 이 질문은 적확한가? 미각 전체 진실에서 보면,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기능도 지니기 때문에, 꼭 먹는 일을 돕도록 발달한 감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5살 미만 아기들이 한 해 천만 명 넘게 굶어 죽는 지구촌에서 향락적 처먹기로 왁자한 인간들을 향하고 있다면 이 질문은 단도직입에 값한다.

 

물론 기왕 먹을 바에는 맛있는 편이 좋다. 구태여 맛없을 필요까지야 있겠나. 문제는 식욕과 식탐 사이에서 찰나적으로 길을 잃고 마는 인간 현실이다. 70%만 채우는 멧돼지만도 못한 인간 수준에서 맛있음은 곧 타락으로 내려가는 미끄럼틀이다. 한쪽에서는 비만을 병으로 규정하고 치료책을 떠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비만 인기인을 앉혀놓고 먹방’ ‘쿡방해대는 세태가 이를 웅변으로 증명한다. 황홀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맛있는 음식만 흡입해대는 인기인은 처먹교교주다. 맛있음을 부풀리는 온갖 미사여구는 처먹교경전이다. 관음증을 영성으로 공유하는 이 처먹교판에서 미각 인간을 건져낼 길은 무엇인가?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단식을 권한다. 매주 하루, 향락 음식에서 몸을 해방하여 안식을 주는 일이다. ‘처먹교예배를 거절하고 <식과 생의 숭고함에 관하여> 묵상하는 일이다. 식탐에 저항함으로써 타락 이전 미각을 복원하는 일이다. 단식으로 아끼는 식비를 깜냥대로 헤아려 굶어서 죽어가는 아기들에게 건네면 화룡점정. 이 세계 아픈 곳에 기부하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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