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죄다

 

임상시험은 의사들을 꾀어, 약효가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좋고 저렴한 기존 약 대신 값비싼 신약을 처방하게 만드는 데 이용된다. 그중 최악은 이미 기존 약으로 잘 치료되고 있는 환자 약을 바꾸도록 설계하는 경우다. 의사들은 약을 바꾸는 환자 수에 따라 돈을 받기 때문에 임상적 판단이 흐려진다.(295)

 

2012영국의학저널에 실린 논문 한 편에,·······진실성이 의심스러운 연속적 연구에 거의 36만 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모집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대부분 연구가 중진국이나 저소득 국가에서 실시됐다. 이 국가들의 환자는 더 비싼 ()을 구매할 여유가 없는데도 말이다.·······의사들은 리베이트로 볼 수 있는 돈을 받았다. 가장 빈곤한 환자들이 비용 부담을 지는 동안 다른 모든 이들이 이득을 보았다. 이런 예를 두고, 제약회사와 의사 간 윤리적 동반자 관계라고 할 텐가? 신물 나는 소리다.(297)

 

아우 줄 것은 없어도 도둑 줄 것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수탈당할 것은 있다는 말이다. 가난뱅이 호주머니를 털기 위한 온갖 수탈을 시행령 정치로 밀어붙이는 이 특권층 부역자 정권을 보면 무슨 이야긴지 실감할 수 있다.

 

왜 가난한 사람 것을 수탈할까? 많이 가진 부자 등을 치는 게 더 쉽지 않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그 부자가 결국은 수탈자 본인일 텐데 자신을 뜯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탈자는 피 수탈자 가난뱅이들을 죽이고 나서도 뜯어먹는다. 거대병원 장례식장 풍경이 전형적인 예다. 우리가 백색의료에 중독되어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삶의 전당이 왜 죽음의 전당을 차려 놓고 돈벌이에 이용하나? 하기야 백색의료 전방위적 정체성에 비추어보면 당연하다.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수탈을 시작하니 말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무슨 의도에서 꺼낸 말인 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백색의료 시대 한복판에서 이 말은 본디 의도대로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 가난은 불편을 넘어선다. 가난은 죄다. 가난 때문에 더 많이, 더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삶을 어찌 죄라 하지 않을 수 있나.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다. 피수탈자니까 죄인이다. 나만 그런가. 내 가족도 그렇다. 내 가족만 그런가. 수탈당하는 줄도 모르고, 아니 알고도 기꺼이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가난뱅이가 다 죄인이다.

 

죄인들이여. 스스로에게 사죄하고 싶은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백색화학합성물질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라. 의사가 미는약인지 알아보시라. 확인하면 쓰레기통에 버리시라. 그 순간 죄에서 벗어난다. 죄에서 벗어나면 가난에서 놓여난다. 가난은 돈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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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약물요법은 존속살해다

 

환자들 대부분은 여러 종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는다. 노인 환자들은 특히 그렇다.·······이 약들은 모두 인지장애, 착란, 낙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노인들에게는 꽤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증상이다. 그리고 대개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은 그런 증상을 고령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치매 또는 파킨슨병 같은 질환 징후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의사가 약 처방을 중단하면 환자 중 다수는 분명히 몇 살쯤 젊어져서, 균형을 잡지 못해 사용하던 바퀴 달린 보행 보조기를 치워버리고 다시 활동적인 모습으로 돌아간다.”(235)

 

<8. 약 유행병이 창궐하고 있다>에서 이미 70대 노인쯤 되면 양약 서너 가지는 기본으로 복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욕심이 있다. 이는 모름지기 이들 세대가 지나온 식민지, 전쟁, 독재 세월에서 겪은 곤경·가난과 맞물린다. 밥 많이 먹으라는 말이 축원이었던 시절이 여전히 그들 가슴 속에는 살아 있다. 더욱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자랑까지 있다. 한 보따리 약은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훈장으로 반짝인다. 왜 아니겠나. 공감한다. 공감한다고 해서 공갈범 희생양이 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이런저런 양약 치료 받으며 전전하다가 경로당에서 침 한번 맞아보라는 소리 듣고 찾아온 노인들에게 일일이 물어 양약을 확인한다. 양의들은 한약 암만 봐도 모르지만 나는 양약을 잘 안다. 내가 유식해서가 아니다. 약학정보원이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과다중복처방을 받고 있다. 이를 피터 C. 괴체는 다중약물요법이라 하는데, 내가 과다’ ‘중복이라 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같은 질병에 같은 기전을 지닌 약물을, 심하면 서너 가지까지 겹쳐 처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상세히 말해준 다음, 양의한테 가서 항의하지 말고 힘들어 그러니 줄여 달라고 하라, 초군초군 일러준다.

 

넘어져서 타박상이나 염좌를 일으켜 오는 노인에게는 특히나 신경을 쓴다. 약 때문에 넘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대부분 미심쩍어한다. 넘어지면 사망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할 때야 비로소 눈이 동그래진다. 넘어져서 대퇴부 골절이 일어나는 경우 절반가량이 1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통계를 들이밀어야 할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 본인도 가족도 양의사도 무슨 증상이 생기면 거기 맞추어 약을 추가로 먹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아는 자는 알아도 모르는 자는 몰라서 노인을 소리 없이 학대하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노인은 여성, 아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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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는 빅브라더다

 

  우리가 약 유해성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임상의는 심각한 유해 반응을 당국에 보고하게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1% 정도만 보고가 이루어진다고 추정된다. 의사들은 바쁜데다, 유해 반응이 약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무시해버리곤 하는데,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유해 반응을 보고한 의사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제약회사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환자에 대해, 그리고 환자가 복용하는 다른 약 등에 대해 온갖 질문을 하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약 위해성에 진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피해자 제외하고 말이다.(217-218)

  약을 안전하게 처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약 정보를 임상의가 알아낼 수 없으므로, 당연히 의사들은 의학적 오류를 많이 범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규제당국이 약을 하나하나 별개로 볼 뿐, 의사들이 자기가 사용하는 약들에 관한 모든 경고를 다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데 있다. 규제당국에 중요한 사실은 이뿐이다: 우리 잘못 아님. 우리는 경고했음.(233)

 

의사에게 신약을 설명·소개하는 제약회사 신약 정보 담당 영업 사원을 detail man이라 한다. 악마는 detail에 있다는 말과 미묘하게 어울린다. detail을 놓칠 수밖에 없는 임상의 조건과 이를 악용하는 제약회사와 규제당국 detail은 비대칭 대칭을 이룬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은 악마 짓도 이렇게 야비하게 한다. 의사는 돈에 낚여 자의 반 타의 반 저들 악마 짓에 부역한다. 그 틈에서 환자가 죽어간다.

 

이 틈은 환자 이외 사람들에게는 벽이나 다름없다. 환자에게는 무섭도록 큰 허방이다. 왜냐하면 의사를 신뢰한 결과 빠져드는 사망 공간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망 순간까지 환자들은 의사, 그러니까 제약회사, 그러니까 규제당국이 악마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살인자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살해당하는 일보다 더 참담한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병으로 죽는 사람이 겪는 이중고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이 한통속이라는 사실 내막은 단순한 부패동맹을 넘어선다. 자본이 권력을 먹어 권력을 사적 형태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러다가는 기업이 정부를 통째로 사는 일이 벌어질 터이다. ‘사실상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 경우 삼성이 권력의 일정 부분을 매수한 측면을 두고 삼성 장학금이라 표현한다. 공동체 전체가 거대 기업 독점 망에 걸리는 일이 꼭 상상만은 아니다.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의사가 처방하는 약으로 인간 정신을 지배한다면 의외로 상상은 간단하게 현실이 된다. 사실상 SSRIADHD 약은 이미 이런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양극성장애에 일단 포획되면 한평생 저들 백색 화학합성물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광경을 가까이서 목격한 바 있다. 앞으로 속수무책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꾸 떠드는 거다. 부디 이 소식이 널리 퍼져가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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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제국 권력, 부패 제약회사, 그리고 종말

 

한 설문조사에서 FDA 소속 과학자 중 70%FDA가 허가한 제품의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194)

  제약회사들은 정권에도 손을 뻗어 부정부패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제약회사들의 로비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심하다. 제약회사들은 또 정치 후원금도 두둑하게 낸다. 후원금은 대부분 공화당으로 간다.·······1994년에는 공화당에서 그나마 FDA마저 아예 해체하고 제약회사들의 자체 규제를 허용하려고도 했다!(202)

  미국 대법원은 FDA가 허가한 의료기기로 피해를 본 환자는 제조사를 고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207)

 

이쯤 되면 제약회사가 제국 권력을 부패로 물들이는지, 부패한 제국 권력이 제약회사 비즈니스 모델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혼돈 상태다. 물론 역사적으로야 제국주의가 제약회사를 낳았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인과관계가 뒤엉키고, 어떤 부분에서는 심지어 역전하기도 한다. 오늘날 제국 USA가 다다른 패권적 금융제국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가리는 일이 전혀 의미 없다. 문제가 너무 심각해 판단 아닌 결단을 요구하는 카이로스 선상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카이로스 표지는 대멸종, 그러니까 인류에 관한 한, 지구 종말이다.

 

종말은 유구한 세월 동안 인류에게 신화였다. 그러나 행정·입법·사법 모두가 저렇듯 속속들이 썩은 돈 놀음 복마전에서 제국주의 지배 전략이 나오는 현실을 보면 종말 이야기가 마냥 신화만은 아님이 틀림없다. 만일 제국이 퍼뜨린 대로 유일·거대·인격신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제국을 심판해 종말이 의로운 실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물론 그럴 리 없다. 그러니 그 대신 인격에 갇히지 않은 불인(不仁) 팡이실이(networking) -그를 가이아라 표현하든 않든-이 제국에 종말을 선물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는 사태를 최소화하려면 소소(小少) 공동체 반제국주의 팡이실이(networking) 운동이 동시다발로 일어나야만 한다.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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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단체가 환자를 단체로 죽인다

 

의약품 상술을 다루면서 환자단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다. 환자단체는 대개 거대 제약회사 자금 후원을 받는다. 그래서 제약회사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185)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실제로는 불평등한 까닭은 이 말이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에서 왔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은 서구 제국주의 유일신교가 만들어낸 가장 큰 거짓말이다. 이치상 불평등한데 평등하다고 했대서 거짓말이 아니다. 평등을 균질로 인식했기에 거짓말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균질화된 인간은 고유한 특성을 박탈당하고 오직 도구적 기회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이때 서구 기독교가 발하는 사랑은 자아를 사로잡은 결핍감을 채우려는 욕망이므로 그 대상은 이웃 인간이 아니라 사랑 자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랜드라는 기독교 기업이 같은 신앙, 균질한 신앙인을 근거로 임금을 착취해 사회 문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문제는 사주만이 아니다.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기꺼이 견딘 노동자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정반대 풍경을 상상하는 밝은 의식은 어두운 무의식에 덮인다. 같은 신앙, 균질한 신앙인이라는 대전제가 타자를 착취한다는 가해의식을 먹어 치운다; 타자에게 학대당한다는 피해의식을 먹어 치운다.

 

소규모 모임이나 사업장에서 서로 가족 호칭으로 부르는 행위도 여기에 해당한다. 유사 가족 의식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뒤에 도사린 늪을 모르지 않으면서 빠져든다. 혼인으로 맺어지는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식 가면 주례한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며느리라 생각 말고 딸이라 여겨라, 사위라 생각 말고 아들이라 여겨라. 그 결과가 대부분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를 수 없는데도 여전히 불패 덕담이다.

 

트인 눈으로 저간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누가 어떻게 상전으로 군림했고 누가 어떻게 종노릇을 해왔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상전 노릇 한 자들은 걸핏하면 조국과 민족을 들먹이며, 하나라고 속삭이며 등골을 빼먹어왔다. 종노릇 한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 살을 베어가며 그 하나를 지키는 일이 도리라고 믿어왔다. 그 잔혹사는 자신감에 눈이 먼 두 인간 패악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나라는 허위의식에서 놓여나야 한다. 피차 다른 그래서 깎듯이 존중해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해야 비로소 하나가 지닌 참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같다고 포개 놓고 착취·살해하는 제국주의 속임수를 깨뜨려야 살 수 있다.

 

어리석기 짝이 없으면서도 자신감에 가득 차 제 공동체 등골을 파먹고 있는 특권층 부역 집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민함으로 무장한 제국 제약회사가 균질화 마케팅을 놓칠 리 없다. 환자단체를 매수, 심지어 설립해서 환자를 단체로 죽이고 있다. 환자단체는 가해의식이 없다. 단체로 죽어 나가는 환자는 피해의식이 없다. 이 무지를 아는 제약회사만이 미소를 머금은 채 돈을 쓸어간다. 바로 그 돈으로 산 독극물이 팔만 뻗으면 바로 손에 집히는 한 우리 모두는 믿으면서 웃으면서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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