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자연 - 동물행동학자가 쓴
히다카 토시타카 지음, 전혜원 옮김, 이미화 그림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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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물행동학, 자연과 생물이라는 분야에 맞물러 그 범위가 무척 넓은 학문이다. 그렇지만 이 동물행동학자가 연구하는 것은 과거 곤충학자 파브르가 연구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보고 동물행동학자는 정말 연구한 분야가 많다고 생각된다. 이 책중에서도 무척 흥미로운 연구가 있는데, 바로 보디가드를 부르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음 이 제목을 보았을 때에는 도대체 식물이 어떻게 보디가드를 부르지? 하고 골똘히 생각했다.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식물이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내 머릿속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식물이 자신을 금방 죽일 수 있는 거미 진드기가 자신에게 찾아온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화학물질을 뿜어서 그 진드기를 죽이거나 아니면 다른 거미 진드기의 천적을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식물이 택한 방법은 거미 진드기가 올 때마다 칠레이리응애, 곧 육식성 진드기를 부르는 것이다. 이 육식성 진드기는 식물이 내뿜는 비명 물질에 반응해 와서 거미 진드기에 주둥이를 박고 쪽쪽 빨아먹는다는 것이다. 이 때 거미 진드기가 한 식물을 대상으로 식사 중이라면 다른 식물도 이 물질을 발산해 미리 거미 진드기의 침략에 대비한다. 이러한 식물과 동물의 또 다른 싸움의 예가 있다. 바로 고비와 젠바이하비치(잎을 먹고 사는 잎벌의 종류중 하나)의 싸움이라 한다.

고비는 한번에 6~7장의 잎을 피워낸다. 그렇지만 젠바이하비치가 잎 하나에 수많은 알을 낳으면 그 유충이 나와서 고비 잎을 전부 쓸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잎이 다 사라질 경우 고비는 계속해서 잎을 피워낸다. 그리고 젠바이하비치는 커서 계속 알을 낳고 식물과 곤충은 계속 싸운다. 하지만 식물이 이기는 경우도 있다. 매미가 싱싱한 나뭇가지에 알을 나을경우 나무는 진을 뿜어 알을 죽여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매미는 진을 뿜어내지 못하는 시든 가지를 찾아 알을 낳는다고 한다. 조용한 그들 사이에서도 은밀한 싸움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해 내려면 얼마나 인내심과 관찰력이 필요한 것일까? 고비 잎이 다 먹히고 그 잎이 다시 자라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오래걸릴 것이다. 하지만 인내끝에 실험에 성공한 동물행동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진실을 알려준다. 과연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일은 무척 흥미로워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사실들이 숨겨져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우리 집에 동물행동학에 관한 두꺼운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책도 꼭 한번 읽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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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이야기 2 - 봉상왕부터 보장왕까지 박영규 선생님의 우리 역사 깊이 읽기 2
박영규 지음, 이은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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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기상을 높인 광개토왕. 드디어 등장한 그는 젊은 나이에 백제와 싸워서 크게 이겨 고국원왕, 고국양왕의 복수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힌 그는 고구려의 기상을 높였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강대국이라 불리는 이유는 광개토왕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를 보았을 때에도 그 크기를 봐서도 광개토태왕의 기상이 얼마나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국강상에 묻혀 있으며 땅의 경계를 넓혀 평안을 가져다준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광개토왕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의 아들 장수왕도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바로 이때로 광개토왕의 아들답게 영토를 넓히고 백성을 생각하는 뛰어난 정치를 펼쳤던 그는 광개토왕만큼 위대한 왕이다. 나는 그래서 장수왕과 광개토왕을 무척 존경한다.

문자명왕은 나제 연합군에 의하여 크나큰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백제의 계속된 공격으로 나라가 큰 손실을 입었으나 단 한번의 승리로 백제가 꼼짝못하게 되자 문자명왕은 안심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힘쓸 수가 있었다. 전쟁이나 재해가 없을 경우에는 문자명왕과 같은 태평성대를 쉽게 이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놀랬다. 그렇지만 결국 보장왕에 이르러서는고구려가 망하게 되니 슬펐다.

지금까지 백제사, 신라사, 고구려사를 보면서 각 나라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신라사를 볼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나쁘게 보이고, 백제사를 볼 때는 고구려와 신라가 나쁘게 보이고, 또 고구려사를 볼 때는 신라와 백제가 나쁘게 보였다. 그렇지만 역시 고구려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가 가장 슬프다. 연개소문에 의한 허수아비일 뿐이었던 보장왕은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였고,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에 그의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함으로써 결국엔 고구려가 망하였다. 고구려와 신라 모두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망했으니,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없다면 고구려가 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없어졌기에 고려, 조선이 생겨나고 현재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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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이야기 1 - 동명성왕부터 서천왕까지 박영규 선생님의 우리 역사 깊이 읽기 1
박영규 지음, 이은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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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광개토대왕, 장수왕등 우리에게 친근한 이름들 모두가 바로 고구려의 왕이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가 아시아 최고 강대국일 수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고구려의 첫 시작은 바로 동명성왕이다. 유화부인과 해모수의 아들로써 하백의 손자이자 천자의 손자였다고 불리우는 그, 주몽은 그 이름대로 활을 무척 잘 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부여의 왕자들이 살해하려는 일에서부터 벗어나고, 졸본에서 나라를 일으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서는 다섯부족을 통해 나라를 이루고 졸본부여란 이름에서 고구려로 바뀌게 된다. 고구려란 말의 어원은 본래 불리는 구려국에서 나온 것이다. 이 구려국에서 높다는 뜻의 고자를 붙여 고구려란 이름을 가지게 된다. 구려란 이름은 아무 의미없이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고구려란 이름에서는 강직한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 때부터 이어진 고구려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명왕은 의심이 무척 많았기에 자신의 아들 두 명을 죽게 하였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왕이된 대무신왕은 그만큼 매우 뛰어났다. 무휼은 여섯살 적에도 매우 영리하였기에 부여에서 협박하러 온 사신에게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충고까지 하였다. 여섯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그런 용감하고 대담한 말을 한다는 것은 무휼태가 곧 대무신왕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대무신왕은 커서 고구려를 매우 부강하게 만들었다. 유리왕은 비록 부여에게 굴복하였으나 대무신왕은 고구려를 매우 강하게 키워나갔다. 고구려의 위상은 이때부터 떨쳐진 것일 것이다. 하지만 민중왕은 매우 힘든 여생을 보냈다. 태자 해우가 어려 대신 왕이 된 민중왕은 고구려에 마침 큰 재해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4년 동안 힘든 일만 보냈던 민중왕은 결국 사망하였다. 그 다음 모본왕은 나라를 크게 키울 생각을 하였으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신하가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역사적 사건을 지나온 고구려는 벌써 역사의 반절을 지나왔다. 하지만 아직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앞으로도 그 고구려의 수많은 왕들의 이야기를 구경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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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자: 최상철
날짜: 2006.10,22.일요일
날씨: 구름/비
같이 간 사람: 아버지, 어머니, 나




 
이번에 가게 된 박물관은 바로 역사 박물관. 농업 박물관 근처인데 최근에 인기인 주몽으로 인해 고구려에 관한 전시를 전부 해 놓았다. 마침 10월 22일부터 무료 관람이 가능하기에 공짜로 볼 수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지하철처럼 입장권을 찍어야 돌아다닐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기기를 정지했는지 찍지 않고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번에 역사박물관이 주제삼은 것은 바로 고구려의 벽화고분이다. 고분은 무덤을 지칭하는데, 벽화가 그려진 무덤을 말한다. 현재 존재하는 벽화고분은 107기다.
현재 남한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중국에는 31기가 있으며 북한에는 76기가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벽화고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이유는 이러하다. 668년 평양성 함락이후 고구려의 흔적은 모두 훼손되어 버려지기 시작하고, 벽화 고분들은 모두가 불탈 때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의 역사가 담긴 증언이다.

고구려의 처음은 예맥계를 중심으로 여러 종족이 힘을 합쳐 꾸려나간 나라였다. 이러한 사회나 국가의 상시적인 과제는 정치, 사회, 문화적 구심력의 확보와 유지였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고구려인으로서의 국가의식이 강조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고구려 문화 창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분벽화는 문화적측면에서 고구려 사회가 어떤 흐름을 보였는지를 확인시켜 주며, 고구려인이라는 의식형성의 바탕을 제공한 고구려 고유 문화의 창출과정을 알게 해 준다. 현재 있는 107기의 고분중에 그림이 비교적 정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40기 뿐이지만, 그 그림만으로도

고구려의 사생활을 알 수 있다. 예로는 무덤 주인의 얼굴과 함께 입는 옷과 집안의 특징등이 나타난다.

다양한 무덤의 소개



▲ 안악3호분 널방 동쪽 회랑 동벽(대행력 중열 중앙).  ⓒ 


안악 3호고분(위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재령평야 북편 구릉의 서편에 자리 잡고 있는 흙무지(흙이 모여서 쌓인 더미)돌방무덤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전에는 하총으로 불렸다. 북한측은 한때 미천왕무덤으로 부르다가 현재는 고국원왕릉으로 표기한다. 일부에서는 동수묘로 부른다.

어머니도 잠깐 말씀을 들은적 있었는데, 북한이 무덤을 발굴후에 약간의 충격으로 석회가 떨어져 그림이 보전되어 있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많이 뒤떨어졌기때문에 무덤이 잘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실제인지는 모르지만, 무덤에다가 보호랍시고 돌문을 떼어내고 새문을 붙인것을 보면 그런것 같기도 하다.



 

▲ 쌍영총 널방 북벽 중앙(무덤주인 부부).  ⓒ


 




 

▲ 덕흥리벽화분 앞방 서벽 상단(유주 13군 태수의 일부).  ⓒ

 




 

▲ 덕흥리 벽화분앞방 동벽(대행렬).  ⓒ

 



 

▲ 덕흥리벽화분 앞방 북벽 서쪽(무덤주인).  ⓒ  

덕흥리벽화분(위치: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유주 자사의 무덤. '유주의 13태수'그림과 '우와 직녀'그림등의 벽화가 있는 곳.

안내원에게 들었는데, '견우와 직녀'그림에서 성성이란 동물이 나온다. 그 성성이는 무척 잔꾀가 많고 달리기가 빠르다. 그리고 술을 매우 좋아하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 성성이를 잡아먹으려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성이를 먹으면 매우 달리기가 빨라지기에, 군사들이 싸울때 달리기가 빠르면 여러모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약점 삼아 성성이가 자주 다니는 곳에 술을 매우 큰 통으로 올려둔다. 그리고 그 주위를 짚신으로 꼬아서 둥글게 한 후에 줄을 잡아당기면 넘어지는 덫을 만든다. 성성이는 그 술을 보고 그 덫을 만든사람의 이름과 조상까지 들먹이며 욕을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많아 많은 친구를 데려와서 술을 마시는데, 술에 취한 성성이들은 근처에 있는 짚신을 신는다. 그럼 미리 잠입하고 있던 사람이 줄을 끌어당기면 성성이는 저절로 잡히는 것이다.

 




▲ 호남리사신총 널방 남벽(주작).  ⓒ  

호남리사신총(평양시 삼석구역 성문리) 맨처음 사신에 관한 벽화가 그려진 무덤. 백호, 청룡, 주작, 현무인데 수호신들은 처음 지킨 터라 아직 자기의 임무를몰라 청룡과 백호는 입구 반대쪽을 바라보고, 현무와 뱀은 서로 바라보아야 정상인데 싸웠는지서로 나몰라라 하고있다. 또한 그림까지 신비스럽지 않다. 청룡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척목과 외뿔이며 과장된 눈썹도 있지 않다. 맨처음 나타난 수호신은 역시 신입이라 의무 파악을 못한다.
이 때는 아직 오 방위 가운데인 황룡이 나타나기 전이다.(수호신의 위치- 우백호, 좌청룡, 남주작, 북현무) 

강서대묘(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드디어 수호신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때. 뱀은 현무와 진짜 사랑하는지 신비스럽게 감싸고 있다. 5개의 그림중에 가장 인기있는 그림이 바로 현무이다. 그 뒤에는 주작 두 마리 서있는데, 입에는 하얀 열매를 물고 있다. 그 열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강서중묘에서. 청룡은 목뒤에 척목을 갖추었고, 뿔도 가지고 있으며 입에서는 불꽃을 내뿜고 있다. 입구까지 정상적으로 바라보니 진정한 청룡의 모습. 백호는 비록 청룡과 모습은 비슷하지만 청룡과 다른점이 여러모로 있어서 어느정도 구별할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왕의 시신이 있는 관 바로 천장에는 가운데를 나타내는 황룡이 있다.

우리나라의 오방위에서 남쪽은 빨간색,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하얀색, 북쪽은 검은색, 가운데는 노란색으로 표기한다.

 



 
▲ 강서대묘 널방 북벽(현무).  ⓒ 
 



 

▲ 강서대묘 널방 서벽(주작).  ⓒ 
 

강서중묘(남표시 강서구역 삼묘리)



 
▲ 강서중묘 널방 동벽(청룡).  ⓒ 
 



 

▲ 강서중묘 널방 남벽 서쪽(주작).  ⓒ


이 벽화에서는 오직 주작만 제외하고는 모두 신비스러움이 없어졌다. 청룡은 용맹한 얼굴이 바뀌었고, 네 다리로 바닥을 디디는 듯한 모습. 백호는 잘 모르겠지만, 현무는 화벽이 떨어져 그런지 원래그런건지 모르게 이상한 모습을 하고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주작이 입에 물고있는 열매는 바로 사당이란 것으로, 어느 새든지 그 열매가 없으면 약수가 건너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 적혀있는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안됬는데, 여기 적혀있는 내용들의 이야기를 해주니 박물관 견학이 한층 더 재미있어 졌었다. 두 차례에 거쳐 이야기를 들었는데, 몇몇 이야기는 내용이 기억 안나지만 좋은 내용이 매우 많이 기억난다. 이번에 역사 박물관 간것이 잘 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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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이야기 3 - 문무왕부터 경순왕까지, 북 오디세이 박영규 선생님의 우리 역사 깊이 읽기 10
박영규 지음, 이용규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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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을 거쳐 문무왕때 드디어 삼한 통일, 당나라의 침략을 이겨내고서 빌해와 맞붙은 남북국 시대에 돌입한다. 56대 경순왕까지 이르른 신라의 역사는 무척 긴 듯 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수많은 왕들이 힘쎈 신하들에게 눌려 지내었고, 명이 짧은 왕 또한 많았다. 특히 효성왕의 경우에는 영종 세력을 통하여 왕권 회복을 시도하지만 영종이 유배를 가므로써 결국에는 실패했다. 신하가 이렇게 세력이 강해진다면 왕위 쟁탈전도 심각해 질 것이고, 제대로 된 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왕권이 신하의 권력보다 강하지 못한다면  정치는 실패라 할 수가 있겠다.

진성여왕때는 각 지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결국엔 견훤의 후백제, 양길,기훤 세력등 수많은 세력들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양길 밑에 있다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병력을 거느린 후에 차차 영토를 넓혀간다. 이 때 궁예 밑에 있던 부하 왕건이 장수들의 의견에 결국엔 궁예를 배반하고 후고구려를 고려라 바꾼 후에 견훤과 대립한다.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따뜻하게 대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가차없이 대했던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경애왕은 후백제가 쳐들어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견훤이 세운 경순왕은 고려와 지속된 외교 관계를 가지며 그의 친절함에 감동해 신라를 고려에 바친다.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바친 결정적인 이유는 아들 신검에 의해 산에 갖힌 견훤이 고려로 투항해 왔을 때 적이었던 견훤을 상부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대한 것에 있다. 그 전에는 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온 사람을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것이 바로 삼한 통일의 결정적 이유일 것이다. 신라 왕실은 비록 망했지만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에 이어서는 망해가는 신라를 잘 유지해 왔다고 생각한다.

천년왕조가 끝나는 순간에는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 동안 강국으로써 있었건만, 내란을 이겨내지 못했던 신라가 끝나는 순간이 무척 아쉽다. 한반도 전체를 차지했던 신라가 고려와 후백제에 밀려 구석으로 들어간 지도를 보자면 왠지 신라가 불쌍해 보인다.

삼국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신라. 신라가 그리 긴 세월동안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충직한 신하들과 노력파 왕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경주로 꼭 한번 가서 신라의 옛 숨결을 느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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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이야기 2 - 자비왕부터 태조무열왕까지, 북 오디세이 박영규 선생님의 우리 역사 깊이 읽기 9
박영규 지음, 이용규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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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마을의 왕 혁거세로부터 시작해 차츰 영토를 넓힌 신라. 그런 신라가 드디어 전성기를 맞았던 때는 바로 진흥왕때이다. 진흥왕은 불교를 받들었으며 외교, 무역, 종교, 군사적에서도 모두 큰 발전을 이루고 한반도의 절반정도를 차지하였기에 이야말로 신라의 전성기이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정치에 매우 뛰어난 여자로써 왕위에 오를 당시 7살 밖에 되지 않았던 진흥왕을 대신하여 10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던 지소태후는 외교적으로도 크게 성공하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배운 진흥왕은 똑같이 나라를 위한 정책을 폈으며 신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진지왕의 경우에는 사도태후와 미녀 미실의 권력에 눌려 허수아비 왕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기에 여자만 밝히는 타락한 왕이었다. 그렇기에 왕위에 오른지 3년도 채 완되 사도태후에 의해 쫓겨났다고 한다.

신라사 2권에는 두 여왕이 나온다. 바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비록 지혜로웠으나 수많은 위협에 시달렸던 비운의 왕이었으며,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을 마구 비웃었던 당나라에 기대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뛰어난 정책을 펼쳤으나 신라의 여왕들은 비운의 난세 속에서 왕이 되었다.

태종무열왕. 유일하게 태종과 같은 글자가 붙은 신라 왕이다. 태종 무열왕은 삼한 통일의 기초를 닦아 문무왕때 통일을 이룰수 있도록 했던 왕이다. 태종 무열왕은 그 이름 또한 마음이 들 뿐만 아니라 그가 했던 업적 또한 매우 존경스럽다. 당나라와의 뛰어난 외교전술을 통하여서 나당 연합군을 통해 백제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그 위대했던 백제가 결국엔 신라에게 무너졌으니, 과연 신라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버티고 있는 백제의 장수들과 고구려는 신라에게 남은 시련이었다.

무열왕을 통하여서 삼한통일의 기초를 이룩한 신라. 앞으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직 완전한 삼한통일을 한 것도 아니고, 당나라의 도움을 빌렸기에 신라의 완전한 통일은 아닌 듯 하다. 신라사 3권에서 과연 문무왕이 어떠한 활약을 할 지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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