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P8
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 P12
1. 아내는, 돈, 나 몰래 무슨 돈이 필요했느냐니까, 하고 - P13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혹시 하지도 않은 잘못이 들춰내져 심란한 상황이 생길까봐 마음을 졸이는 거야, 하고 대답했다. - P14
당당한 주장처럼 내지른 그 말들은 실은 하소연에 가까웠다. - P14
"뜬금없이 웬 돈 이야기야?" 나는 이번에도 까닭 없이 곤두서는 신경을 애써 잠재우며 아내의 진의를 헤아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 P15
내 말이 어이없다는 듯 아내는, 어머님께 드린 돈 말고, 어머님으로부터 가져온 돈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 P16
"그러니까 어머니가 내게 돈을 꿔줬다고 했다는 거야? 당신 몰래? 허참, 도대체 언제 얼마를?" - P17
나는 이상하지 않은데 당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돈이 내가 모르는 돈이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고 있을 거라고 당신이 믿기 때문이겠지. - P18
2. 우리가 다음 날 아침 어머니를 뵈러 간 것은 그 일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일정은 예정돼있었다. - P19
형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P20
어머니에게 형을 연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전화기 앞에서 자주 물러났다. - P21
나는 어머니의 큰 글씨 성경책이 놓인 독서용 테이블 앞에 앉아봤다. - P23
오랜만에 만났으면서도 별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각자 다른 공간에서 딴 일을 하다 돌아가는 우리를 아내는 이상한 형제라고 했지만 젊을 때부터 그렇게 지내온 우리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 P24
형은 자주 웃었지만 한 번도 환하게 웃지는 않았다. 그래서 웃는 형은 늘 쓸쓸했다. - P25
식사 준비를 마친 아내가 점심상을 차려놓았는데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목욕탕에 갔다면 벌써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 P26
"아, 그러시구나. 근데 날을 잘못 잡아서 오셨네." - P28
나는 별일 없으니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어머니가 마지막주 토요일에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집을 비운 것을 별일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내쫓지 못했다. - P29
단지 날짜를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0
"돈이 필요하시면……." 어머니는 내 말을 자르고 곧바로, 노인이 돈 쓸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 P31
내가,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 근데 형 이름을 불렀어, 나한테,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P33
3. 어머니가 형의 목소리를 내 목소리로 착각하긴 했지만, 내 목소리를 형의 목소리로 착각한 적은 없다. - P33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어머니가 내 목소리는 확실히 알아듣는데 형의 목소리는 그러지 못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 P34
내 속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생각들을 말로 옮길 수는 없었다. - P35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내가 형에게 돌아갈 몫을 부당하게 차지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자신을 외면하지 못했다. - P36
그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의 아픔에 주목할 뿐, 주목하느라,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는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 P36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없었고, 말하지 못했고, 이제는 영원히 말할 수 없게 돼버렸다. - P36
형의 그 ‘면목 없다‘는 말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아마 형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 P37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던 창세기의인물 야곱이 느꼈을 마음의 짐에 대해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 P37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녀는 이 문제를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향으로 전환하려 했다. - P39
가령 나는 아무리 하기싫어도 하도록 주어진 일은 하는 편이지만 형은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 - P39
내가 행정공무원이 되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호봉을 높여가는 동안 형은 연극과 문학에 빠져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 P40
나는 때때로 나와 다른 형의 그런 기질을 부러워했다. - P40
내 어쭙잖은 이른바 ‘출세‘가 실은 삶에 대한 의욕과 사랑의 결여, 즉 태만의 결과며, 따라서 전혀 칭찬받을 일이 아닌데도 칭찬을 늘어놓는 것은 형만이 아니라 삶을 망신 주는 것이고, 내 마음까지 할퀸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 P41
"되도록 빨리 어머님을 뵈야 할 것 같아.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연세가 있으시니....… 걱정이 되네." - P43
그 애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 아니, 그 애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그런 말을 할 애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걸 어떻게 하냐. - P44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혼자 계시면 안 될 것 같지 않아? 하는 아내의 물음이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 P46
어머니의 화초와 종교가 상실감과 슬픔을 너끈히 이기게 할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P47
나는 사랑의 대상인 야곱이 져야 했을 마음의 짐에 대해서는 제법 깊이 생각하면서 그 사랑의 주체인 리브가가 져야 했을 마음의 짐에 대해서는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47
나는 잠깐 비틀거렸고, 그 짧은 순간에 내가 할 역할을 선택했다. - P48
지난번에 내가 말한 거요. 조건이 괜찮은 카페가 싸게 나왔다는 거, 그거 이번 주에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 P49
44년간 한국문학의 정통성을 이어온 이상문학상
심사 과정의 공정성과 대상 수상작 · 우수작의 구분에 관계없이 탁월한 작품성으로 한국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 이상문학상 작품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