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계획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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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현대문학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채 읽지 못한 작품이 있었다니 와우~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은 청년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스포츠 미스터리로 제목으로는 그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펼쳐진 내용은 놀랍다. 1994년에 발표된 작품을 이번에 새롭게 리모델링 해서 출간한 모양인데, 전혀 고루하지 않으니 그것도 놀라운 일이다.

동계 스포츠의 꽃’이라 불리는 스키점프를 소재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과 승리를 향한 광기를 그렸다. 스포츠와 과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놀라운 트릭과 반전을 선사하는 한편, ‘인간성과 맞바꾼 승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패배보다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조인鳥人’이라 불리는 스물두 살의 천재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 아키라가 합숙 훈련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며칠 뒤 경찰에 익명으로 날아든 한 통의 밀고장. ‘범인은 스키점프팀의 미네기시 코치다. 즉시 체포하시오.’ 미네기시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지만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고, 동료 선수와 스태프 모두는 충격에 빠진다.

살해 동기와 결정적 물증을 찾지 못해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네기시는 자신을 지목한 밀고자를 알아내기 위해서 유치장에서 혼자만의 추리를 시작하고 이렇게 다방면에서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에 따라 니레이 살인 사건 이면에 숨겨져 있던 끔찍한 ‘계획’이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나기에 이른다.

그저 황망한 코로나 시대에 역행(?)까지는 아니여도 코로나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삶을 즐기려는 생각으로 마스크도 꼭 착용하고, 백신도 철저히 맞고 방역도 열시미 하면서 만남도 꾸준히, 여행도 즐기며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나에게 용기를 붇돋으는 박수를 보낸다~~

2022.3.17. (목) 두뽀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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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ㅡ 마지막 민족해방전쟁 - P239

미군은 통킹만 사건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 P243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마지막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44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 P244

베트남의 마지막 봉건국가였던 응우옌(Nguyen, 院) 왕조는 조선과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무너졌다. - P246

레닌과 마오쩌둥을 빼고는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을 서술할 수 없듯이, 베트남전쟁은 호찌민 없이는 이야기할 수없다. - P247

‘응우옌아이쿠옥‘이 안남 지방 공무원의 아들 응우옌꿍(Nguyên Sinh Cung)으로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가 되어 30년 뒤 프랑스 군대에 궤멸적 패배를 안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P248

프랑스사회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공개 장소에 나온 1945년 8월까지 160여 개의 가명과 필명을 쓰면서 ‘26년간 지하활동‘을 했다. - P249

각계각층의 민족주의세력을 모은 베트남독립동맹(이하 베트민)을 결성한 1941년 5월부터는 다른 이름을 버리고 ‘호찌민‘ 하나만 썼다. - P250

‘프랑스·일본 제국주의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민족의 독립이 공산당과 노동자·농민의 당파적 · 계급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 P251

그는 베트남이 자유로운 독립국가로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했으며, 프랑스가 베트남을 대표해 승인한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가 누리던 모든 특권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 P252

베트민은 총파업을 결의하고 사이공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 P253

베트민은 1953년 공세로 전환했으며 1954년 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적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겼다. - P254

제네바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 최강 미군과의 싸움이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 P255

자유세계의 국가들이 차례차례 쓰러진다는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 - P256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 P258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 이라 - P259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의 침략에서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 P260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 P261

바오다이 왕부터 마지막 독재자 응우옌반티에우(NguyênVan Thiêu)에 이르기까지 남베트남 권력자는 모두 외세의 앞잡이였다. - P262

점령지 청년을 강제징집한 행위는 배가 고프다고 폭탄을 삼킨 것과 같았다. - P263

대통령이 되면 소련을 방문하겠다는 선거공약으로 ‘데탕트‘를 예고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내전이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 P265

펜타곤 페이퍼 - P266

로버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 - P267

‘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냉정하게 남베트남을 버렸다. - P268

라오스와 캄보디아 산악의 ‘호찌민루트‘를 타고 은밀히 남하한 북베트남의 15만 병력은 전면전을개시했다. - P269

베트남의 사회주의혁명은 프랑스·일본·미국 군대와 싸운 백년의 전쟁이었고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 P270

캄보디아공산당 크메르 루주(Khmer Rouge)는 1970년 쿠데타로 시아누크 국왕을 몰아낸 론 놀(Lon Nol)의 군사정부와 싸웠다. - P271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 P272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9
맬컴 엑스
ㅡ 검은 프로메테우스 - P275

1960년 로마올림픽 권투 금메달을 땄던 ‘국민영웅 캐시어스 클레이‘는 ‘반역자 무하마드 알리‘가 되어 챔피언 타이틀과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 P279

알리는 백인 노예소유주가 조상에게 준 본래 성씨를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을 쓰면서 징집을 거부했다. - P280

백인 노예소유주가 지어준 본래의 성(姓) ‘리틀‘을 버리고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담은 미지수 X를 성으로 썼다. - P282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1775년 미국의 13개주 모두에서 노예제는 합법이었으며, 흑인 노예는 70만 명으로전체 인구의 18% 정도였다. - P283

1865년 연방의회는 ‘노예 또는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한 비자발적 예속 상태‘를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를 의결해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 P284

남북전쟁에서 돌아온 백인들이 ‘KKK‘를 비롯한 폭력조직을 만들어 잔혹한테러를 저질렀다. - P285

‘짐 크로 법(Jim Crow Laws)‘ - P286

흑인에게 좋은 일을 한 백인은 ‘굳이 말하자면 딱 두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 P287

몽고메리 보이콧 - P290

킹 목사가 말했다. 적에게 사랑을 베풀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합시다! - P291

마셜 프래디 지음, 정초능 옮김, 『마틴 루터 킹』, 푸른숲, 2004, 35~65쪽, 킹 목사의 자서전에는 젊은 시절의 사상 편력과 지적 성장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이 평전을 참고했다. - P292

킹 목사는 흑인민권운동의 절정이었던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대행진‘에서 ‘인생연설‘을 했다. - P293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 이라고 비난했다. - P295

맬컴은 ‘분리(separation)‘는 ‘격리 (segregation)‘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 P296

맬컴과 킹 목사는 단 한 번 만났다. - P298

맬컴은 킹 목사가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과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인정했다. - P299

미국 인종문제의 책임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 에게 있다. - P302

맬컴은 말했다.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서로 도우며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 백인에게 생계를 의존하거나 구걸하지 말자."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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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ㅡ 모든 악의 연대 - P173

바이마르 공화국 - P177

무명 화가 히틀러는 ‘비엔나 스타일‘로 알려진 도심의 크고화려한 건축물과 전시관을 순례하며 예술을 향한 열정을 키웠지만 스스로 어둡고 추잡하다고 말한 ‘하층민의 세계‘에서 처절한 가난과 고독을 맛봤다. - P178

공화국이라는 국호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 독일제국에서 황제(Kaiser)만 삭제한 ‘독일국(Das Deutsche Reich)‘을 채택했다. - P179

1919년 1월, 베르사유조약에 반대하는 바이에른의 몇몇 민족주의자가 ‘독일노동자당‘을 창립했다. - P180

당명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azi)‘ 으로 바꾸고 왕당파가 주도한 바이에른 주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 P181

‘비어홀 폭동‘ 재판에 나온 서른다섯 살의 히틀러는 반대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33년 총리직에 오른 뒤에는 역사 그 자체가 됐다. - P183

하이델베르크대학 박사로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나치당의 신전 책임자가 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미디어를 조작해 ‘히틀러 신화‘를 창조 - P184

바이에른주의 조그만 단체였던 나치당이 선거에서 이기고 헌법 규정을 이용해 공화국을 해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P186

히틀러는 민주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경제 상황에 대한 절망을 틈타 ‘새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한 망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 P187

거의 모든 투표 참가자가 찬성표를 던졌고, 히틀러는 총리(Reichskanzler) 겸 총통(Führer)‘이 됐다. - P188

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해서 만든 모든 일자리를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 P189

선사시대 게르만족이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는 죽음의 표식이 됐다. - P190

세계는 추축국과 연합국(Allied Powers)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 P191

4월 28일 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불러놓고 괴벨스를 증인으로 세워 에바 브라운과 혼인했다. - P192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오후 자살했다. - P193

민족 집단 하나를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수백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사례는 나치밖에 없다. - P194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종교의식을 가리키는데,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을 수립한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했다. - P194

히틀러도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다른 민족의 체내에사는 기생충‘으로 규정했다. - P196

괴벨스가 기획하고 실행한 그 만행은 너무나 많은 건물의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해서 ‘유리의 밤(Kristalnacht)‘이라 한다. - P194

독일 보수 세력과 군부·지주 대자본가들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예찬했고, 독일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몰랐거나 모른 체하며 히틀러를 지지했다.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 P198

제1차 세계대전이 ‘제국의 무덤‘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무덤‘ 이었다. - P198

독일 국민은 왜 사이비 과학과 인종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지지했는가? - P201

독일 국민은 비정상 상태를 끝내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적극 지지하거나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P201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그런 상태를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고 했다. - P202

하버드대학 교수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쓴『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 책 - P203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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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ㅡ 눈물 마르지 않는 참극의 땅 - P205

비밀정보기관모사드(Mossad)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한 무장단체 간부를 스무 명 넘게 암살했다. - P209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 또는 ‘이스라엘 문제‘ 의 기원을 모르고는 중동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 P210

종교와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중부 내륙에 있고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는 중부 해안에 있다. - P213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운동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테오도오 헤르츨처럼 열렬한 지지자를 불러 모은 사람은 없었다. - P214

헤르츨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시온주의자들은 2천 년 전 조상들이 떠났던 땅 팔레스타인을 후보지로 선택했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백성·천국·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 P214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ㅡPicot)가 초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이크스ㅡ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 P216

타인 대표는 없었다.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반면 나치가 동유럽 수용소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참상을 확인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전투적인 태도로 국가 건설 계획을 밀고 나갔다. - P217

시온주의 무장 세력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로 알려진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었다. - P218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 건국을 ‘문명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 P220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 P221

중동전쟁과 PLO - P222

‘아슈케나짐 (Ashkenazim)‘ 
‘세파르딤 (Sephardim)‘
‘팔라샤(Falasha)‘ - P223

10월 29일 모셰 다얀(Moshe Dayan) 장군의 전차부대를 앞세운 이스라엘 육군이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공군은 운하 입구 도시를 공습했다. - P224

제3차 중동전쟁 - P225

제4차 중동전쟁 - P226

 ‘원유 무기화‘ 정책은 세계경제를 혼돈에 빠뜨렸다. - P227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결의 3236조를 채택하고 PLO를 옵서버 단체‘로 받아들였다. - P229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종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Khomeini) - P229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명분도 없이 침략했다가 ‘걸프전쟁‘에서 참패했지만 아랍 민중의 영웅이 됐다. - P231

제1차 인티파다 때 가자 지구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직한 ‘하마스(Hamas)‘였다. - P232

아라파트는 베냐민 네타냐후 (Benjamiin Netanyathm)와 에후드 바라크 (Ehud Barak) 등 라빈 총리의 후임자들과 끈질기게 협상하면서 자치정부를 운영했다. - P234

팔레스타인은 고대의 선지자가 말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수백만 팔레스타인 민중의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이자 살상 무기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세계의 화약고일 뿐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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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ㅡ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신화 - P131

여덟 번째 통일 영웅 - P135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홍군 - P135

노동자·농민·지식인 민족부르주아지 대표가 모인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선출했다. - P136

최초의 ‘아시아적 전제국가‘를 세운 인물은 기원전 202년 항우를 꺾고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이었다. - P137

민권·민족·민생을 강조한 ‘삼민주의‘를 내세워 전제정치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 국민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 - P138

장제스는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해 군벌시대를 끝내고 난징에 새 정부를 세웠다. 그것을 ‘국민정부‘ 라고한다. - P140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말이 전국대회였지 소련이 주도한 공산주의국제연합(코민테른) 참관인 둘을 빼면 참석자가 열둘밖에 되지 않았고 당원은 53명에 불과했다. - P141

장제스를 불신하고 국공합작에 반대한 마오쩌둥은 후난성에서 조직한 농민조합과 광부, 국민당 반란군을 규합해 자기 방식의 투쟁을 시작했다. - P142

주더는 쓰촨성 출신이지만 1912년 제2국민혁명 때 윈난성 신식 군대에서 활약해 공안국 장관이 됐다. - P143

편의상 징강산 일대의 소비에트를 장시 소비에트‘, 공산당 군대를 ‘홍군‘, 국민정부군과 군벌과 민단 등 장제스가 지휘한 병력을 ‘백군(白軍)‘이라 하자. - P144

홍군은 전투를 치를 때마다 무기를 노획하고 병력을 늘렸을 뿐 아니라 ‘중화소비에트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하고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 P145

‘항일구국전쟁을 위한 장정‘ - P146

에드거 스노의 기록보다는 홍군 특공대가 마을 주민에게 돈을 주고 구한 배로 강을 건너 북안의 쓰촨성 세관을 점령했다는 『대장정』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정성호 옮김, 범우사, 1999), 274~275쪽의 증언이 더 믿을 만하다. - P147

마오쩌둥ㆍ주더ㆍ린뱌오ㆍ펑더화이 등 홍군 수뇌부 - P148

자오핑두와 루딩교에서 치러진 도강작전은 대장정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 P149

마오쩌둥의 지략과 홍군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국민정부가 그처럼 무능하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 P150

마오쩌둥이 1938년 5월 강연에서 말한 대로 홍군은 군사적 열세를 정치로 극복했다. - P152

쉬하이둥은 ‘어위완소비에트‘를 세웠고 류즈단은 서북 내륙에서 산시(陝西)·간쑤·닝샤(寧夏) 소비에트의 터를 닦았다. - P153

시안(西安)사건 - P153

입법권과 행정권을 하나로 통합하고 공산당이 지휘 감독했다는 점에서 산시성(陝西省) 소비에트는 ‘붉은 중국‘을 키운 인큐베이터였다고 할 수 있다. - P154

병사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웬만큼 이해했으며 자신이 참여한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했다. - P156

민족통일전선전술 - P157

사령관 장쉐량은 총통의 각성을 위해 시안 체류를 요청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국민정부가 모든 정치세력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요청하는 ‘구국의 요구‘ 8개 항을 제시했다. - P158

쑨원의 처제이자 장제스이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 - P160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자 이득을 봤다. - P161

장제스는 소비에트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확고한 권위를 세웠다. - P162

마오쩌둥은 백군의 봉쇄망을 풀어 물자와 인력을 보충하면 항일전쟁과 내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P162

그러나 중국은 광활한 나라였다. 100만 일본군도 점(도시)과 선(철도와 도로)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 P163

‘신4군 사건‘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고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던 신4군 정예 9천 명을 국민정부군 8만 명이 포위 공격해 궤멸한 사건이다. - P164

1949년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 P165

장제스는 대만의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중화민국을 세웠다. 1975년에 죽을때까지 지킨 총통 자리는 아들 장징궈가 물려받았다. - P166

레닌은 혁명조직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공언했지만 마오쩌둥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 P167

스탈린이 ‘사회주의 차르‘가 된 것처럼 마오쩌등도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 P168

인민이 굶어 죽은 대참사가 벌어진 뒤에야 마오쩌둥은 실용주의자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각각 국가 주석과 당서기 직을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 P169

덩샤오핑 이후 권력자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마오쩌둥 때와 같은 개인숭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 P170

빈부격차는 여느 자본주의사회못지않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는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심하다. - P171

그러나 정치체제만큼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설계한 그대로다. - P171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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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ㅡ 아름다운 이상의 무모한 폭주 - P69

핀란드역에서 - P73

레닌의 러시아 귀환 과정과 핀란드역 연설은 『핀란드역까지』(에드먼드 윌슨 지음, 김정민·정승진 옮김, 실천문학사, 1987), 407~425쪽을 참조해 서술했다. - P73

레닌이었다.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iadimir lich Ulyanov)인 그는 ‘2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Nadlezhda Krunskaya)와 함께 스위스 취리히에 있었다. - P74

한 사람의 기질과 의지와 목표의식이 역사에 그토록 크고 깊은 각인을 남긴 경우는 흔치 않다. - P74

데카브리스트(12월) 반란 - P75

알렉산드르 2세
해방자 황제 - P76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허망한 실패로 끝나자 나로드니키는 사회혁명당을 비롯한 여러 징치단체와 비밀결사를만들어 정부 요인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인 것도 그들이었다. - P77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 1월 9일) 일요일 - P78

혁명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가폰 신부가 몰래 귀국해 다시 경찰과 손잡았고 ‘배신자‘를 사회혁명당 당원들이 ‘처단‘ 한 것 - P80

레닌은 차르 정부를 타도하고 세울 정부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또는 절대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했다. - P81

레닌 그룹은 볼셰비키 (Bolstheviki, 다수파)를 자처하면서 반대파를 멘세비키(Mensheviki, 소수파)라 했다. - P81

포템킨호 반란사건 1905년 6월 - P81

트로츠키는 ‘피의 일요일‘ 직후 망명지에서 돌아와 불같은연설과 빛나는 글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면 레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 P82

러시아를 집어삼킬 듯했던 혁명의 파도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 P83

‘유능한 독재자‘ 스톨리핀은 ‘건전한 독재‘를 했다. - P84

니콜라이 2세는 보통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만큼 나약하고우둔했으며, 자신보다 더 어리석은 독일 출신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휘둘렸다. - P85

시베리아 출신 정교회 수도자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이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P85

서른여섯 살의 엘리트 정치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말했다. "장관들을 체포하고 우체국, 전신전화국, 철도역, 정부 청사를 점령하라!" - P88

선진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러시아 같은 ‘자본주의 세계제제의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다. 그게 법칙이다. - P90

 레닌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을 비롯한 수정주의자‘ 와도 싸웠다. - P91

볼셰비키혁명 - P93

1905년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이끌고 1917년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될 사람, 트로츠키였다. - P93

레닌이 케렌스키를 피해 핀란드로 도망가 있는 동안 볼셰비키를 명실상부한 다수파로 키웠고, 귀족·지주·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가 외국의 지원을 받으며 혁명정부를 공격했을 때는 붉은 군대‘를 지휘해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 P95

제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혁명의 승리를 선포했고 레닌은 ‘노동자 농민의 정부‘ 인민위원장이 됐다. 이 사건을 ‘10월혁명‘ 또는 ‘볼셰비키혁명‘이라고 한다. - P96

볼셰비키혁명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꿨다. - P98

레닌과 볼셰비키는 말과 글로만 존재하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 P99

첫째, 사회혁명은 구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뒤에 일어났다. - P99

둘째, 사회혁명은 구체제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낳았다. - P100

셋째, 사회혁명은 열병과 같아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을정도로 잔혹한 행위를 했다. - P100

그들의 ‘위대한 실험‘은 끔찍하고 허망한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공포정치와 경제의 비효율 - P103

4
대공황
ㅡ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 - P105

뉴욕의 ‘끔찍한 목요일‘ - P109

19세기부터 여러 차례 심각한 불황을 겪었지만 그토록 길고 파멸적이고 세계적인 불황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대공황(大恐院, Great Depression)이라고 한다. - P110

침체(recession)는 가볍고 불황(depression)은 심각하다. 불황이 갑자기 찾아와 모든 경제주체가 공포에 빠지면 공황(panic)이고, 그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위기 (crisis)라고 한다. 대공황은 이례적으로 깊고 길게 이어진 불황이었다. - P111

연방준비은행(FEB)이 1913년에 출범했지만 은행의 연쇄파산을 막을 만한 권한이 없었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자 기업 도산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 P113

대공황은 시장경제의 특성과 결함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인간의 ‘필요(need)‘가 아니라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수요(demand)‘에 응답한다. - P114

만인이 저마다 자기 욕망을 충족하게끔 허용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의 부를 최대로 키워준다고 한 애덤 스미스(Adamn Smith)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 P115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가격변동을 매개로 한 ‘자동 조정 시스템‘이다. - P116

자본주의체제와 주류 경제학은 파산했다. - P120

케인스혁명
루스벨트와 히틀러의 대증요법이 효과를 낸 이유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hard Keynes)가 1936년에 출간한『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설명했다. - P120

언론인과 정치인은 의심했지만 젊은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 P123

거시경제이론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난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과 유럽 국가의 경제정책을 좌우했다. 혁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세상에 영향을 줬다. - P124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소중히 여긴 영국·프랑스 미국은 ‘정부의 보이는 주먹‘으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수정했지만, 후발 산업국인 독일·일본·이탈리아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전체주의 또는 파시즘(fascism)으로 내달렸다. - P125

미국은 대공황 시기에 의미 있는 제도 변화를 이뤘다. 마뜩잖게 여긴 이들은 ‘복지국가‘ 시대가 왔다고 개탄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도 개혁은 사회를 어느 정도 바꿨다. - P127

참혹했던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 속에서 끝났다.
사회주의자들의 희망사항인 자본주의체제 붕괴는 없었다. - P128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나은 대안이 없는‘ 경제체제가 됐다. - P129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 P129

우리의 20세기와 전환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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