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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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번과 마녀>에서 캘리번이란 영국의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인물이다. 캘리번은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식민지 개척을 하던 영국의 당시 시대와 상당히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저자는 대표적인 여성학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노동운동가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의 착취와 폭력이 최종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공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단순히 여성에게만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사회적 박탈감이 남녀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남녀문제는 단순 남녀만의 성적인 문제, 즉 섹슈얼리티 내지 젠더적인 요소만 아니라 하나의 계급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 텍스트를 충실히 활용하기도 하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노동자는 각종 노동과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그 노동자의 아내와 딸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부르주아의 놀이(창부)가 되는 시대상을 고발한다. 하지만 실비아처럼 구체적으로 여성의 지위적인 측면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남녀평등에 대한 계기는 프랑스혁명 시기에 거론되었지만, 혁명의 주도권은 남성에 있었고,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고, 마르크스는 남녀문제를 단순히 성에 대한 부분보단 단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갈등으로 그렸다. 하지만 너무 계급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남녀문제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클로저라는 공공의 재산을 어느 특정세력이 독차지하는 현상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에선 16세기 초에 강렬한 농민의 몰락을 적고, 농민들은 도시로 가게 되어 빈곤층이 되고, 그 문제에 왕국의 처방은 거리의 거지에 대한 무한적으로 노동착취를 할 수 있게 하는 점, 그래도 거지생활을 하면 고문과 처벌하고, 최종적으로 교수형에 처한다. 마녀사냥의 시작 시점은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농지에 대한 인클로저에서 보고 있으며, 이것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광란으로 일어난 마녀사냥과 연결되는 것이다. 광적인 마녀사냥은 아마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잔혹하고 어리석고 무서운 역사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 창궐이 유령처럼 지나가자, 인구의 감퇴, 봉건기사단의 몰락, 농지의 황폐화, 그리고 농경산업에서 무역중심의 상공업으로 변경된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은 사실 탐험이 목적이 아니라 무역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그 무역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가속화한다. 농경사회는 봉건영주의 권한이 유지되었다면,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은 모든 것을 왕의 권한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경제에서 주화와 화폐의 관리는 결국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한다.

 

이런 문제는 상부계급과 달리 하부계급에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세금의 공납에 대한 갈등도 있겠지만, 농지의 몰수, 대규모집단 농장, 그리고 공업의 분업화는 인력을 감축하게 된 것이다. 인력의 감축으로 제일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생명은 소중하나,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우리 인간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명이 나오는 여성, 즉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는 일이다. 유아살해는 인류문명에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죄악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혹은 그것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인류의 영속은 바로 어머니의 신체로부터이나, 바로 저 신체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억압하는 것이 마녀사냥하고 이어진다. 아이를 죽이는 여자는 국가에서 처음에 일반적인 형벌에서 교수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구의 축소는 바로 무역정책을 군사작전과 연결하던 시기에 군사력을 모우는 것에 큰 방해거리다. 대외적으로 파견되는 군인들은 자국민으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갈 곳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식민지를 개척하고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린다.


노예는 재산이고, 금전적 부담이 없으므로 기존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된다. 가령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임금에 대한 갈등으로 서로 대립하게 한 방법도 있었다. 사회적 불만을 구조적인 방법이 아니라 단지 그 분노를 받아줄 대상을 억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일반 민중은 어리석었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에서 관념적인 판단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자본주의 가속화는 이런 부조리를 더 키우고, 모순을 더 골 깊이 만들어버린다. 마녀사냥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를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그 구조의 상부가 하부의 토대를 붕괴하는 것과 같다. 이 책에서 여성 중에 특히 노인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한 것으로 나오는데, 우선 노인여성들은 노인남성보다 수명이 길고 민간치료사로서 활동했으며, 특히 출산 시에 산부인과 의사 겸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민간에서 노인여성의 활동력은 국가지배자 입장에서 거슬리는 존재였다. 15세기에 농민반란과 봉기가 거칠게 일어난 시기다.

 

노인여성들은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민간생활의 지혜를 알고 있었기에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에서 그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많은 노인여성들이 빈곤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원한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런 노인들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우선, 그들이 알고 있는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토지몰수와 공유지 독식으로 노인여성의 살림을 어렵게 했다. 그녀들은 이웃과 친구에게 의탁하여 생활을 영위했으나, 그것도 부족하면 구호기관에 빈민대장에 올리지만, 그것조차 무너졌다. 기독교 내 신교혁명 이후 그들의 가난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 태만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뭉치고, 같이 연합하고, 이런저런 일을 돕지만, 의술을 시술했다는 이유로 반국가적인 죄인으로 몰려 사형 당한다. 기술의 발전, 특히 의학은 기존 민간치료사와 산부인의 대리자를 노인여성에서 지식인 남성으로 교대한다. 해부학의 발전, 과학의 발달, 그리고 기계론적인 철학은 인간의 자연성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정에서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고, 이성을 중시하며, 그 이성이란 단어는 오히려 야만에 가까운 편집증에 이르게 된다. 마녀사냥이 데카르트, 베이컨, 라이프니츠 전후로 더 심각해진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어 보였다.


계몽주의 발달은 합리주의 과학철학에서 나오나, 그 자들이 오히려 비과학적인 방법을 유도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마녀사냥만이 아니라 동물의 감정이 없다고 여기는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고, 피지배계급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무작위적 착취를 인정하게 된다. 마녀사냥에서 이런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제와 관리, 그리고 억압과 탄압은 피지배계급 내의 대립관계를 만들고, 여성에 대한 철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하면 프랑스대혁명 시기 혁명의 운동에서 여성이 상당히 강력했으며, 어떤 헛소문(마리 앙투와네트가 외국에 도피하다 실패하여 궁에 갇히는데, 그녀가 상당히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지낸다는 이야기)을 들은 시장의 아낙네들은 왕비와 근위병이 있는 궁으로 쳐들어왔다.


약 2만 명에 가까운 시장 아낙네들은 생선조리용 칼을 들고 공격하여, 길을 가로막은 근위병을 목을 자르고 궁 안까지 돌격한다. 게다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의 시작점은 역시 여성들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경제가 침체된 러시아에서 다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2월 혁명이 발발되고, 그 운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은 젊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 있던 주부들이었다. 혁명의 시작에서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자신의 생명만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과격해지는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이 실감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출산만이 아니라 양육에 관여하므로 만약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 회사 등 인간의 눈과 눈이 겹치는 곳에 사회성 내지 단체생활의 이름 아래 사람을 조작하고 개조한다. 감옥의 역사인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 시스템 자체가 마녀사냥의 연계성이란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감시와 처벌 시스템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전략하게 되고, 과학적 인간은 중세시대 인간처럼 인간이란 신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노동시간의 길이나 착취강도, 식량배급조차도 척도화 되고, 인간은 인간을 해방이 아니라 더 억압하고 옭아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주의 관계로서 파악하는 것은 마녀사냥은 16~17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서로 공동체 생활을 추구했지만, 서구사회는 이것을 반대했다.


자발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저항세력이 이어지고, 특히 현대사회처럼 아파트 같은 경우, 공간적으로 인간을 수용소에 집어넣는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개인의지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계약이 되는 시점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을 분리하여 서로를 이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적으로 두는 것이다. 자기소유애가 강한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타인의 절망은 나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은 타인에게 그저 쇼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마녀사냥과 이어진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녀사냥은 누구나 마녀심판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마녀로 내몰려 죽을 수 있다. 예전처럼 생물학적인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대신에 사회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누군가 하나의 이슈로서 사회적 지탄과 비난이 지속되면 그 대상과 가족들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그 지목당한 대상자가 죄를 지었다면 모르나, 오히려 부당한 일에 처하여 사회적 모순에 반발하다 더욱 더 억압당하는 일들이 넘치는 현실이다. 이 글을 적는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마녀 재판관이자 마녀사냥의 희생양 후보자란 사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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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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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이란 책을 읽으면서 마녀는 옛날 중세이후 혹은 르네상스 시대 전후까지 존재한 자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만들어지는 존재다. <마녀 프레임>이란 제목처럼 마녀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녀는 단순히 선천적으로 하늘을 날고 인간을 유혹하는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화형이 처해지는 시대에 우린 왜 그들이 그런 비참한 운명에 쓰러질 수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볼테르의 기록처럼 1780년대까지 마녀사냥은 존재했고, 당시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는 마녀사냥에 대한 무지한 폭력에 큰 비난을 날린 것을 알 수 있다. 마녀는 실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존재해야만 했던 자들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일단 마녀사냥 기원은 십자군 원정 실패와 페스트 창궐 이후 유럽의 암울하고 비관적인 사태는 당대 권력자인 왕권과 교회에 대해 심한 의문과 반발을 일으켰다. 국가가 그 당시 농노나 장인에 대해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제대로 살기가 어려웠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서 이단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단의 존재가 도시 한복판에서 나올 리가 없다. 그들은 자연이나 농촌 같이 외부 쪽에서 등장했다. 특히 중세의 겨울과 백년전쟁 전후에 마녀에 대한 환상은 국가와 교회의 지배 권력이 약해지면서 그 책임을 자신들의 체계가 아니라 다른 희생양을 처단하는 것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그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권력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란 폭력의 합법성이다. 그 합법성을 찾는 방법은 자기들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다.

 

 

특히 반국가, 반봉건, 반교회적 세력에 대한 처단 혹은 그런 대상이 아니더라도 본보기를 위해서라면 군중을 하나로 단결하기보단 그들을 각자 의심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모두 권력에 의지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가혹한 마녀사냥에서 처음에 교수형으로 끝날 형벌이 참수, 능지처참, 화형 등 각종 끔찍한 사형 그리고 고문방법이 동원되었다. 지금이야 마녀가 있다고 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마녀를 찾아 처단하는 마녀심판(사냥)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마녀라는 이름을 가진 마녀희생자들은 사라졌지만, 그 마녀 대신 새로운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단지 그들은 마녀가 아니라 다른 올가미에 엮어 새로운 희생자들이 되어야 했다. 이택광 교수가 <마녀 프레임>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마녀의 역사보단 마녀로 몰아가는 사회다.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그것은 결국 현실 사회에 큰 모순이 새로운 변화와 흐름에 역행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구시대적 발상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란 과학적 지식이 배제된 신화화된 사회로 이어지고, 이미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사회적 분란자 내지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계속 그들을 적으로 몰고 간다. 이런 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책임소재를 지배계급의 문제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거나 또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반대세력까지 끌어당긴다.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최근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군사독재정권과 한국전쟁에 큰 피해를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세력은 시파인 남인들을 모두 천주교도로 몰아 유배 내지 처형시켰다.

 

 

당시 천주교가 성행한 이유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식인(특히 양반계층)들의 관심이 있었으나, 현실 정치에서 발견되는 모순에서 천주교의 확대가 널리 퍼진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 시대에는 새로운 문물이 유교국가 조선에 큰 혼란을 줄까봐 쇄국정책을 일삼고, 최후에 세계열광의 욕망 아래 집어 삼켜져버린다. 지금 우리사회에 부익부 빈익빈 역시 사회적 갈등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기에 경제적 불평등을 제기하는 순간 반국가 세력으로 지목하게 만들고, 언론의 공정치 못한 정보는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중세유럽처럼 사람의 사지를 찢거나 혹은 불을 태우지 않지만, 대신 육체적 죽음보단 사회적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회적 약자의 몰락과 비참한 현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현실을 비웃거나 또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우월의식까지 느낀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과학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점이나 오히려 미신적 망상에 의해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녀사냥 효과를 인쇄술의 발달로 보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마녀의 해머>라는 책이 널리 보급되어 과학적인 마녀식별방법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당시에 하나의 과학이라 해도 그 역시 미신적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이다. 이런 비과학성이 과학성으로 인정받고, 그것이 다양한 계층에 정보로 이어진다. 문자문화의 보급에서 책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면, 현대의 마녀사냥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미디어라는 영상매체는 스펙타클로서 현실에 반영된다. 범죄를 공모한 것도 아니나, 마치 그렇게 언론(독재기관에 사주를 받은)에서 조작하여 억울하게 죽거나 고문당한 많았다. 많은 군중들은 미디어로 통해 그들이 마치 세상의 암 덩어리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최근 21세기 경우 인터넷의 보급과 정보화시대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에 개인정보 신상이 노출되어 곤혹을 치루는 사람들이 있다면, 극우사이트에는 각종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비인간적인 욕설들이 퍼져가고 있다.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던 마녀사냥은 거의 끝났을지는 모르나, 아직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계속 희생당하는 것은 여전한 비극적 현실이다. 마녀는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성의 판단과 연민의 감정을 상실하여 광기가 넘친 교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거기서 마녀는 마녀로 지목되어 벌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그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광신도들이다. 전투적 메시아주의는 그런 무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마치 순교자인양 영웅주의 행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폭력적 광기는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심한 광기의 세계로 가고 있다. 정신병원을 만든 이유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자가 있어서 마치 정신병원에 밖에 있는 자들이 정신병이 없다고 여긴다고 보나,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정신병원(精神病院)이 아니라 정신병국((精神病國)을 만드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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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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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사극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는 시기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유재란까지 하여 벌써 40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까지 임진왜란이 겪은 상처는 한국의 전 지역에 남겨져 있다. 부산 기장에 가면 왜성이 있고, 그밖에 많은 곳에 왜성이 외로운 담벼락이 되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급박한 상황에서 벌여진 전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하면 떠오른 사람이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그는 조선 북경지역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군 장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수군에 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유성룡하고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순신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이에 반해 국내 정치상황과 외교, 경제 상황은 아마 서애 유성룡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적정할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파를 이어받은 동인계 정치인이다. 당시 정치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동인은 후에 북인과 남인,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흐름에서 훈구학파가 초기 조선의 권력을 차지한 시점에서 사림학파가 조정에 나오고, 훈구에게 억압당한 사림의 유림들이 이제는 서로 아전투구하는 상황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무릇 어떻게 하면 적을 제대로 쳐서 멀리 바다 밖으로 내쫓는 것에 대해 궁리하는 게 옳지만,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은 그런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사익에 따른다는 점에서 역사는 항상 다른 인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거론한 것처럼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징비록>을 보면 가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것은 일본 해적들이 국내 백성들과 결탁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국과 사신왕래를 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이다. 선조시대에 매우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으나, 이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임금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이 나서 종묘사직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전쟁이 끝난 후에 개인적 이익에 신하를 질투하는 한심함은 단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만이 아닐 것이다.


 

 

이후 등장할 인조나 정조 승하 이후 순조 역시 그러하다. 대한제국이 봉건시대의 국가 즉 왕과 귀족계급에 해당되는 사대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도 역시 그런 위와 같은 전례가 존재한다. <징비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그런 치욕적이고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며 후세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하는 점이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악몽, 그리고 그 시기에 있었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기록의 위한 서적이 아니라 후세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적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이다.


 

 

<정비록>은 생각보다 개인적 감정이 매우 배제된 상태에서 저술한 도서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시기에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적힌 글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난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아 홀로 우는 유성룡, 그 모습을 보는 군관과 지역주민 역시 따라 운다. 백성들이 배고픔과 질병에 힘겨워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또 다시 유성룡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국가정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녹을 먹는 자라면 유성룡의 눈물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보겠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체통과 체면이란 이름으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부류다. 예기치 못한 전쟁, 계속되는 패전과 후퇴, 죽어가는 백성들, 부자와 부부가 서로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서 전쟁은 인륜을 파괴할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예비식량이나 무기가 없는 백성이다. 백성을 버리고 가는 국가지도자만큼 못난 인물이 없다.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어리석음과 질투에 대해 논하기란 한숨만 나올 정도지만, <징비록>에선 선조에 대한 원망과 오류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신하들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일본에 간 김성일이 본 왜정 상황이 적절치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일이란 장군이 용맹만 믿고 지략이 부족해 왜적에게 패배한 일들도 기술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들의 판단력과 용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바로 지략과 상황판단이다.


 

척후병을 제대로 두지 않고, 소문으로 왜적이 온다고 하여 그 소문을 낸 사람들을 참하는 문무대신을 보면서 한심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고, 중국에서 파견된 진린 장군도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서 장군으로 천거한 서애 유성룡 역시 그러지 아니하겠냐마는, 이순신은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나, 밑에 있는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인품과 그릇이 있었다.


 

 

가장 최측근의 장수부터 밑에 있는 장졸까지 전쟁에 대한 정보와 상황판단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린 임진왜란에 이순신에 대한 업적을 아직까지 기리며, 현재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하고, 매년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영웅심을 대해 찬양하여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흥행하더라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징비록>에서 유성룡 역시 친구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우선 그가 갑옷을 진중에서 벗지 않는 점,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점, 주변 지형지세 그리고 수군에서 해류와 바람의 형태를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원균 장군은 왜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오만에 수군을 출동했으나, 먼 곳에서 노를 젓고 온 병사들이 체력이 떨어져 결국 왜국의 책략 앞에 무너졌다. 전쟁의 승패에서 전술과 전략은 장수나 참모들이 세우나, 정작 적을 치는 당사자는 군졸이었다. 군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신의 계급에 도취된 고위직의 한심함이 결국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점이다.


 

 

<징비록>이 400년 이상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 당장 그런 구시대의 무기로 싸우지 않고, 군사편제 역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은 국가적으로 외교를 맺고, 민간적 차원에서 왕래가 매우 활발한 이웃국가다. 심각한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왔다고 하여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본을 하든지 혹은 그 외의 국가를 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정보력과 지도층의 능력이었다. 사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풍신수길이 이미 열도를 통일한 상태이고, 겉으로 완성된 것이었으나, 전쟁 이후의 군사들은 매우 사나운 점을 조선이 간파하지 못했다.


 

 

왜구가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해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간첩들이 왜적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로 국내 내정은 엉망이었다. 선조시대 많은 문신들이 있으나 역시 내정에 문제가 있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서울경기를 제외한 타 지역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과 외적들의 침입에 두려워했고, 그들이 국가를 배신하여 적에게 붙는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그렇다. 전쟁이 나더라도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성을 지키는 수장들이 모두 도망쳐서 그렇다.

 

 

성에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 모로 불편하고,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식량부족과 질병에 고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단력 부족이란 점이다. 그래서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활약이 그만큼 두드러진 이유 역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임금 중심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인물보단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과 무신사대부들의 공로가 제일 큰데, 등급은 2번째 내지 3번째다.

 

 

 

관료정치의 한계성, 관료들의 그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장병들과 의병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 모습 역시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내가 복무할 때 생각한 점은 지휘관의 지휘란 전장에서 병사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잃을 경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장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수많은 생명을 담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장병이 전장에서 무너지면 성과 도시가 침범당하고 수많은 양민들이 도륙을 당한다.


 

 

아직까지 교토에서 있는 코무덤은 일본 왜적이 조선 양민들을 도륙하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보낸 것을 모아진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그 근본을 잊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다면 비극은 다시 국민에게 전가된다. <징비록>에서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나, 그 근본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피난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한국의 조상신인 단군왕검, 기자, 동명성왕에게 제를 올리는 모습에 과연 그 조상신들은 이런 생각으로 국가를 세우고 했을까?


 

 

<징비록>에서 서설부분에 번역자의 말에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서애 유성룡은 동인이나, 추후에 남인으로 이어지며, 남인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사설을 만든 이익에 남긴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유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 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에 불과했으니, 유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만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아아 슬픈 일이다.”라고 한다.


 

 

이순신의 기용은 바로 서애 유성룡이 한 업적 중에 가장 큰 일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여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정치적 업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보고 판단해야할 것이다. 정치권에 보는 인물기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품과 행적이다. 이순신의 행적은 강직하고 침착하며, 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안전을 고려했다. 진린 장군이 올 때 그가 사나운 것을 생각하여 진린과 그 수하에게 극진한 대우를 한 이유 역시 자신의 군사가 주둔한 지역의 백성에게 침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을 보면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계속 참담해진다. <징비록>에서 가장 일을 그르치는 인물이 사적인 이익에 치중하는 인물, 밑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인물, 병사들이 치지고 배고픈데도 진격을 명령하는 인물, 타인의 공을 시기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징비록>을 보면 생각한 점은 이 책에서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마음은 애절함과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이순신이 부각한 점은 1970년대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순신은 일본이 침략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운 분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꼬리 밑에 있던 분이 아니었다. 최근 태극기 계양과 관련된 시사현황을 볼 때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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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에릭 홉스봄이 타계하고 나서 국내 출간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크르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란 명제로서 만들어진 책이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 타계 전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미권 마르크스주의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르크스가 살아생전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초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논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에서 여전히 말하기가 어려운 이름이며, 하다못해 도서를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모임조차 꺼내기 힘든 서적이다. 하지만 국내 유수한 대학교, 하다못해 외국의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의 서적은 꼭 읽어야 하는 인문고전 중에 하나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100대 서적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등장하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이 있었다. 이미 국내 최고의 대학교조차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3%가 반영된 점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가 차지하는 지성의 세계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자본> 전문번역자인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살펴보면 한국은 모더니즘 철학사상을 지나가지 못하고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성이 중심인 학문체계를 가지지 못한 채 바로 오늘 우리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긍정적 가치와 더불어 부정적 가치가 큰 부작용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나치의 존재는 명확한 악이나, 네오나치가 자신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 사상에서 넘어가 반이성적 사고에서 일어난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휴지조차 되지 못할 정의를 외칠 수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온오프라인의 갈등과 심지어 테러행위 역시 이성의 시기를 보내지 못한 부작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 이후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다시 포스트 해야 하는 새로운 가치 아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사상은 볼셰비키혁명으로 통해 성공하는 것 같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그리고 트로츠키의 망명과 암살로 스탈린은 사회주의혁명인 10월 혁명을 이젠 <한낮의 어둠>처럼 철권정치를 실행했다.

 

 

스탈린과 자본주의 충돌은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에릭 홉스봄도 지적하다시피 마르크스와 전혀 관계없는 북한이 아직도 한국과 대치중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붕괴하고 마르크스는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질 운명일까 싶었다. 하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서문에 놀라운 사연이 있었다. 에릭 홉스봄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사상을 자문을 받는 사람들이 늘었고, 마르크스에 대한 서적을 새롭게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들이 문의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마르크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부류가 아니란 점이다.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저술서인 <자본>과 <공산당선언>은 19세기에 저술된 서적이다. 19세기 저술한 서적이 21세기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가 도래한 국제사회에 큰 예언서가 된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는 이제 단순히 국가 내부의 문제를 넘어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최근 대두된 문제는 역시 저출산 문제일 것이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최소 2인 이상 출산되어야 국가가 운영이 되는데 그것이 무리라는 점이다. 국가와 사회적 기능에서 재생산이란 시스템은 매우 중요하다. 재생산적인 기능이 저하될 경우 정치사회적인 기능이 저하된다.

 

 

당장 산업부문과 경제부문의 벽이 무너지지 않지만, 국방인력의 공급부족으로 이어지고, 추후 국가를 부양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서 고령사회로 접어든 국내경제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경제적 문제여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경제적인 문제가 결국 정치사회 더 나아가 외교적인 영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자본주의를 집어삼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봉건영주가 있던 구체제 국가도 아니고,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어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아니다. 자본주의 그 자신이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결국 인간을 잡아먹게 되고, 그 사회는 계속 쇠락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에서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의 사상의 조류를 보면서 딱히 답을 주는 것보다는 답을 스스로 찾아가란 식으로 결론을 낸다. 또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는데 우선 좌파에 대해 논하자면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로 볼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이외에도 다양한 점이고,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역시 모든 것이 마르크스에서 기원된 게 아니라 마르크스로 통해 보여 진다는 점이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는 로베스피에르와 마르크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루소에 대해 딱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자본1>의 주석을 보면 루소의 <경제론> 내용을 인용한다. 「자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 (즉 너희들 수중에 있는 것을 얼마간 나에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노라(장 자크 루소, <경제론>, 제네바, 1760, 페이지 70)"」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도 루소와 특히 자코뱅당 좌파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루소의 사상을 말하면 한국에서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만 알지 루소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자유의 절대성을 강조한 루소 여기에 평등의 절대성을 마르크스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은 자유와 평등 모두 가진 존재다. 우선 자유를 모두 가질 수 있는 평등이 있어야 하고, 루소의 실패한 아들인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골고루 줘야지 그 자유가 유지된다고 한다.

 

 

자유가 없는 나라가 자유가 있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 자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게 옳다는 점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루소의 사상을 신봉한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루소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그대로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말이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도처에 야만적인 무관심, 한편에서는 냉혹한 이기심, 다른 한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 도처에 사회적 전쟁이 널려 있고 모든 이들의 집은 요새이며, 곳곳에 법의 비호 하에 약탈을 일삼은 약탈자들이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런 문구가 있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사회와 법률이 약한 자에게 새로운 멍에를,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주어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또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찬탈로써 취소할 수 없는 권리를 만들어 일부 야심가의 이익을 위해 이후 전 인류를 노동과 예술과 빈곤에 굴복시킨 것이다.”

 

 

문장의 느낌은 다르나, 기본적으로 엥겔스의 공장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을 본 내용과 루소가 당시 농민과 도시빈민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던 시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는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러시아혁명 당시 많은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프랑스대혁명의 후예로 생각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적 배경에서 자코뱅당 좌파의 사상은 마르크스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 대신 루소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미덕을 가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동력을 프롤레타리아로 보았다.

 

 

처음 마르크스 국제노동운동을 보면 지식인보단 노동자와 직접 상대하면서 이끌어 갔다면, 그가 죽고 엥겔스도 죽은 이후 20세기 초중반에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점이 특징이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끄는 2차 세계대전에선 반파시스트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한 점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처음 과학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파헤친 도서라면 20세기 들어오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학적으로 큰 맥락이 되었고, 그의 사상은 인류학, 역사학, 정치학, 문화사회학 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서적들은 지식인들의 인문고전으로 올라가고, 그의 지식을 고스란히 남은 도서는 21세기에 닥친 위기에 대한 해석이 되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변을 잘 봐야 할 것이다.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물론 좋겠지만, 우리 전체 인구 경제활동에서 그런 곳에 일하는 사람은 100명 중에 하나이다. 대부분 중소기업 직원, 공장노동자, 서비스산업, 소규모 영세상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중에 일부는 높은 임금이나 높은 매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 이상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력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수단을 얻는 자들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라고 한다면, 이제 소부르주아인 상인조차도 프롤레타리아 부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수경제가 불안한 한국에서 자꾸 외국의 수입물에 의존하고, 그 대부분을 대기업(선박이나 항공 운송, 대규모 택배시스템 및 마트시스템)에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면 결국 저렴한 상품에 의해 중소 상인들은 몰락하게 된다. 골목상권이나 혹은 사소한 물품에 대한 시장 갈등은 21세기에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은 전자처럼 높은 임금보단 후자에 처해진 자거나 또는 그런 자와 같이 살아가는 부류라는 점이다. 공정한 시장경제에 대하여 긍정하나, 그 시장경제가 자본력에 의한 독과점이 이루어진다면 국내 경제는 하부로부터 붕괴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듣기 싫은 말 중에 “너도 성공해라 저기 성공한 사람이 있자나?”나 혹은 “로또복권 당첨되면 되지!”라는 말이다. 물론 나 하나 잘 되면 이런 문제로 고민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발을 내빼고 싶은 것이다. 한국사회의 성공신화에 대한 멍청한 열망은 1명이 성공하는데 반해 2~3명 정도 되지 않는다면 납득되겠지만, 1명이 성공해도 99명 이상 성공하지 못하면 분명 그건 말이 안 맞다. 다행히 성공하지 못한 자는 99명이 아니라 9999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스펙을 쌓으려면 매달 150만원이 필요하다는 뉴스를 보았다. 150만원을 매달 쓰지 않아 높은 임금을 받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하는데 불안하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게 좋지 않는가 싶다. 점차 높아져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내수경제는 축소되고, 1980년대 과소비에서 과소소비로 대체되었다. 부동산 가격 증가로 물가는 해마다 올라가는데(이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자기 집값은 오르고, 다른 집값은 내리기만 바란다. 부동산이 오르면 사회간접자본이 열악해지고, 상가의 상품은 비싸게 된다. 10만원 들고 마트에 가면 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집값 고민은 매우 충실하다.

 

 

이런 자신들의 이기심을 찾는 게 똑똑하다고 여기기에 자기 살만 파먹고 있다. 때로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보인 것처럼 그의 분석도 좋지만, 때로는 루소의 사상처럼 인간에게 미덕을 다시 찾는 것도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찾는 것은 거의 무리인 현실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르크스 말대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은 것은 그들을 속박하는 사슬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몸 하나이고, 그들의 미래조차 만들 수 있는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왜 그들이 난폭해지는지 이해하기보단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그 사회에 길들이게 만든다. 당장의 고비는 해결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모순과 부조리는 쌓여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내용을 동의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들게 하는 자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루소의 말이 과격하다고 하여 그를 부정하면 처음부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 질서를 위해서라며 힘을 휘두르는 현실에서 세상이 바뀌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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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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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너무 부족하다 못해 어설프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다른 국가의 축제 내지 기념일을 찾아보면 그들의 국가 내지 민족에 대한 기념적인 행사로 남을 수 있도록 최대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휘한다. 프랑스의 경우 1789714일 처음으로 프랑스 민중들이 봉기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것을 최고로 여기며, 미국의 경우 독립기념일을 최고로 여긴다. 자신들의 국가가 지금의 모습을 생기게 해준 것에 대한 가치다. 그런 반면에 일본은 경우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문화, 혹은 근대 전후로 생긴 문화를 이어져 내려온다. 그들의 축제는 전통문화의 연속적인 향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의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한국의 근대 이전 사회, 즉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시절과 그 이전에 있던 조선이란 이름으로 왕조가 있을 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잔혹한 일제나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이란 시기는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역사에서 그 시대의 흐름이 없었다면 현재 모습이 없다. 한국에서 최고의 도시는 서울이다. 서울이 도읍이 된 시기가 바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개성이 도읍이던 고려에서 한성이 수도이던 서울로 이전한다.

 

서울이란 곳이 한성 즉 한양이란 말처럼 한양이 우리의 수도가 된지가 거의 620년이 넘었다. 조선에서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국가로서 살아온 시기를 본다면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은 최후의 왕조국가이면서, 우리가 남긴 문화적 유산을 가진 국가다. 아쉽게도 그나마 조선 이전에 남은 문화적 유산은 고려나 통일신라(보단 후기신라가 맞겠지만) 정도다. 종교가 정치적인 제도로 살아가던 시기에 한국의 종교는 단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샤머니즘에 의해 유지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기까지 불교,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그 안에서 성리학으로 대체된다.

 

성리학이 조선의 학문과 정치사상이 되면서 사회는 오히려 개혁을 추구하기보단 퇴보하기 시작했다. 사농공상이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사대부는 학문의 근본을 세우기보단 그저 성리학 안에서 허례허식만 추구했다. 공자의 유학은 전쟁이 많은 시기, 군자의 정치로서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어려운 국가 내정을 회복하고자 했다. 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라 할 수 있다. 배고픔에 굶주려 옷을 헐벗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군자의 적선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사대부들은 유럽 중세시대에 봉건영주와 같은 위치다. 마을에 향약이나 서당을 열고, 그 마을에 일어난 일을 주관하거나 관리하기도 한다. 물론 관청도 있으나, 마을의 풍속은 그 고을에 사대부들의 인품과 학문적 기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후기로 갈수록 양반들 사이에서 부익부 빈익빈, 특히 당파전쟁과 세도정치로 인해 많은 사대부들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이번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간 지식인에 대한 기록이다.

 

지식인들이 나온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적 가치와 삶의 향기를 찾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것도 우연인지 <서재에 살다>는 내가 최근에 읽어본 서적에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서적이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가족을 제외하자)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한국에서 조선이란 국가의 마지막 르네상스, 그 시기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찾아보고 그분이 귀향살이를 하던 강진군 도암면에 가본 적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던 도암면 귤정처사의 산장인 다산초당은 한국 전통문화로서 혹은 더 나아가 한국인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이른바 다산학단이 생긴 곳이며, 한국의 인문학에서 모든 종점은 다산이었다. <서재에 살다>에서 다산의 지인이 하던 말처럼 열수의 죽음 수 만권의 서고가 무너진 것만이 아니라 조선의 학문과 미래까지 멸망이었다. 그런 그가 머문 곳 인근에 그분의 따님이 시집가서 살던 곳이 있었다. 한국 후기 유학자 중에 이름을 날린 방산 윤정기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방산 윤정기의 가택 이름은 명발당(明發堂)이라 한다. 방산 윤정기는 후사가 없지만, 지금은 방산 윤정기의 먼 일가의 후손이 기거하고 있다. 작년 가을 시골에 가면서 그곳에 가보았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태어나고 살아가던 집에서 걸어가면 10분조차 되지 않았다. 약간의 현대적인 기술이 있지만, 아직도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 점이 있었다. 유학이 중심이던 조선은 확실히 구시대적인 세기다. 하지만 19세기 초반에 움이 트던 실학이란 과연 무시하지 못할 사상과 가치관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이 3사람은 한국의 다도(茶道)문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한국의 차의 성인으로 지금 이 시기의 사람들에게 추앙 받고 있다. 나 역시 대학교 동아리가 다도동아리였기에 다도문화를 배우면서 이 3사람의 이야기를 보았고, 현재 남양주 마재, 여유당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할 때 그가 머문 산장의 주인이면서 제자이던 사람의 후손에게 헌다를 받고 있다. 스승이 귀향하고 서거하면서도 아직도 찾아오는 제자의 후손을 보면서 뭔가 200년이란 시간을 넘어 계속 이어지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라 여겼다.

 

그동안 한국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게다가 근대경제화로 인한 빠른 변화와 방황에서 우리가 원래 천천히 바꾸고 가꾸어야 할 것들을 모조리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저 비극적인 40(을사늑약 포함)3년간의 전쟁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문화에는 외국의 문화를 천천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급작스레 억지로 밀어 넣고, 그것이 우리하고 전혀 다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변화라는 것은 마치 공기가 진공의 공간에 흘려 들어가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의 바람이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양식이 하나의 산들바람이라면 모를까 태풍처럼 몰아치면 남는 게 없다. 우리의 정체성 그게 뭔가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 나츠메 소세키가 근대와 전근대 시대의 문화적 간극에서 고뇌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이라 삶의 미학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에 묻히기 때문이다. <서재에 살다>를 읽는 순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되찾음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잘못된 인식에서 계속 유지된다는 점이다. 군사문화에 길들어진 사회, 사회라는 공간에서 특히 남자들은 군대문화에 익숙해져 이른바 까라면 까라는 게 통용된다.

 

이런 시기에 여자들은 오로지 자가만의 이익, 혹은 자식을 위한다고 하나 막상 자신의 자존심만 채우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그런 천박한 현실적 가치관이 한국의 정체성으로 되어 버렸다. 남을 위해 살아가지 못할망정 남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은 세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과 삶의 미학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렇다. 사람들은 자신에 먹고 사는 것이 약간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문화적 욕구를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 욕구의 해소는 그저 대중문화라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남과 나의 자아적 경계구분이 없다.

 

19세기의 지식인들의 서재는 바로 남이 아닌 나만의 공간이 있고, 그 속에는 삶의 미학과 지식인의 가치가 있다. <서재에 살다>는 바로 그런 우리 조상들 중에서 19세기 북학파 중심으로 구성된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흔히 조선의 사대부만이 있는 게 아니다. 서얼 출신도 있었고, 가난에 허덕이는 자들도 많았다. 심지어 세력가에 의해 노염을 사서 먼 곳에 가서 귀양살이를 수 년 동안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재산이 바로 서재였다. 책과 붓, 벼루 그림 그리고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을 말이다.

 

지금 우리의 공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예전에 개마고원 출판사로부터 선물로 책을 받으면서 <나만의 공간>이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만의 공간, 어느 자는 책이고 누구는 옷이고 누구는 음악이며 누구는 다른 무엇인가가 채워져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취미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모습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란 점이다. 우리에겐 바로 그 원동력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본다면 과연 있을까?

 

자신만의 공간이 있기에 상대방과 교감이란 것이 있는 것을 아는가? 부끄러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 나는 TV를 보지 않은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취미로 만화,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과 같은 하위문화를 즐긴다고 하나, 나의 서고에는 각종 철학, 사회학, 인문학 도서들이 꽂혀 있다. 나의 서고엔 결국 철학과 사회학이란 학문적 영역처럼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문명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다. 지식인들의 서재이름을 보면 화려하기보단 오히려 겸손하거나 또는 어려운 자신을 묘사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여유당(與猶堂)이라 한 것처럼 만약 나의 서고를 두고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오타쿠란 별명이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하나, 본래 의미가 상대방의 댁을 부른 말이기에 은댁재(隱宅齋)가 좋을 것 같다. 오덕쿠의 서재 오덕의 서재, 그늘에 가려진 하위문화 공간이 즐길 수 있는 곳은 역시 집이다. 그 집에서 서고라면 은댁재가 내게 맞는 서재인 것 같다. 만화책과 철학책이 공존하는 공간이기에 세상의 유행 따위 잊은지가 옛날이다. 덕분에 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제대로 이어가기 어렵다. 이미 TV와 단절했던 점과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영역을 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한국의 문화, 세계의 문학과 문명, 그리고 예술의 세계까지 말이다. TV를 안 본 후에 내가 더 예술에 대해 더 관심을 두게 된 동기가 예술이란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것으로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남과 다르게 살라고 하듯이 남도 다른 남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세계는 그 시작의 중심이면서 시작이다. 어찌 보면 다양성이 없는 우리의 모습에서 <서재에 살다>의 지식들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와 관계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그들의 재산들은 우리의 우수한 문화재며, 국보와 보물로 남아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라는 그림은 바로 <서재의 살다>에 나온 것처럼 그들만의 삶에서 나타낸 삶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재를 생각하면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서재가 곧 자신의 집이고 방이었다. 서재에서 글을 읽는 선비는 자신만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고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학문의 성취는 무릇 자신의 출세만이 아니라 더 넓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아에 나아간 자, 백성보다 더 괴로운 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괴로워하고, 백성들이 만족하고 나서 만족하라는 말은 인상적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할 때 갈밭마을의 아낙네 사연이 내 마음에서 항상 떠나지 않는다.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에 대한 군포세 대신 소를 끌고 간 관청, 그것에 좌절한 남편은 칼로 자신이 남근을 자른다. 그 피가 흐르는 남근을 잡고 관청에 가는 아낙네지만, 아무리 곡성을 높여도 관청의 벽은 너무 높아 쳐다 볼 수 있다. 19세기의 일들이 200년이 지나 지금도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멀리서 안타까워 비통해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나그네 글방에서 시조를 읊으며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다 저렇게 백성을 위해 고뇌하는 것만이 아니지만, 적어도 서재에 책을 잡던 그들은 허례허식에 빠진 자들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학문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근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란 점이다. 그런 치열한 공간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지식인들의 서재란 결국 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크나큰 재산이란 점이다. 우리의 정체성 과연 우리에게 어디서부터 찾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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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nly 2015-01-1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기에 여자들은 오로지 자가만의 이익,혹은 자식을 위한다고하나 막상 자신의 자존심만 채우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그런 천박한 현실적 가치관이 한국의 정체성으로 되어버렸다? 참 뜬금없고 편협한 한국 정체성에 대한 정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18 23:27   좋아요 0 | URL
님의 그런 시선이 참 답답하네요.
현실의 교육을 보시면 알 겁니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과중한 교육,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극화, 이런 문제로서 바라본 천박한 한국사회라는 것이고, 그러한 흐름이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가속화라는 점이고, 그런 것이 생긴 것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정립되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무슨 의도로 덧글을 남기는지 몰라도, 조금 본인의 생각을 현실적 상황에 전후맥락을 판단하여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여성만 비난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