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나의 고전 읽기 1
손택수 지음, 정약전 원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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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서평 적을 때도 인용한 내용이기도 하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서 처음 등장한 장소가 전남 강진이다. 물론 강진을 가기 위한 여정으로 영암을 지나쳐오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시작은 강진군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강진군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랑생가도 있고, 많은 절과 문화재도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곳은 거기에 다산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목민관과 탐정 중에 하나였고, 19세기 이후부터는 조선만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을 지나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분이다. 바로 유홍준 교수는 한국에서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다산 정약용이라 한다.

 

하다못해 지식인뿐만 아니라 정치인까지 정약용이란 이름을 올리고, 어느 누구의 서재에 다산 정약용의 책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는데, 가끔 어떤 인물의 하는 행동을 본다면 과연 정약용 선생의 책이나 혹은 그에 대한 연구도서 1권 읽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지만, 정약용의 이름은 한국에서 거의 떼어낼 수 없는 역사적 인물이다. 한국의 소개, 한국의 문화, 한국에 대하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각종 인기스타나 스포츠, 문화, 음식물로 도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세계에 나가보면 그들이 진정 진정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이다.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가끔 한국에서 역사의 자부심에 대해 논하는 자들을 이야기를 듣자면 잠도 재우지 않고, 임금도 잘 주지 않거나 적게 주며, 때로는 구타와 폭언으로 삶의 희망을 빼앗아 성장한 감추어 만든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진정 자랑스러운 역사라면 부조리와 모순을 은폐하고 겉모습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숨쉬어온 인간이란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각 개인에게 국민성으로 이어지고,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해왔으며,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랐는지를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치는 사상과 철학과, 문학과 정치, 예술과 종교까지 다양한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방문하여 신해사옥에서 참형을 당한 진사 윤지충에게 시복을 내렸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사촌형제고, 정약용의 형님이 정약종, 정약종의 자녀들은 모두 한국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역사라는 아이러니는 바로 저런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된다. 1800년 정조가 붕어하고, 1801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가 일어나서 정약종은 참수되고,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유배를 떠난다. 조선에서 유배를 받는 사대부들은 대부분 자신의 죄보단 권력의 희생물로서 가능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불운한 종말을 겪기도 한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하는 게 편안 유배생활이라 생각할 줄 모르나, 당초 처음 갔을 때 자신이 기거한 곳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아무도 자신에게 찾아와주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온 것처럼 동네주민들은 두려워했고, 부모님을 존경하는 문화에서 죽은 부모님의 신위를 태우고 부정하는 사람과 연루된 것만으로 본다면 공포 그 자체의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처음에 경상도 장기에 머물다 황서영백서로 국문을 받은 후 강진에 올 때 그의 기분은 참으로 반갑기도 혹은 우울했을 것이다. 강진 옆에 해남이 있어, 어머니의 본가가 해남 연동에 있는 점, 그리고 다산의 매우 가까운 친구 윤서유가 도암면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화가 일어나면 그 지목되는 대상의 가족과 친구, 심지어 문하생까지 잡아들여 치조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일들이 흔했다. 윤서유도 신유옥사와 황서영백서로 관청에 끌려와 문초를 받았으니, 단지 자신의 친구네 또는 아버지의 친구네(윤서유의 아버지 윤광택은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하고 친구다)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했으니, 당시 그 살벌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나마 후에 다산은 자신의 외가의 먼 친척의 산장인 다산초당으로 가서 많은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곳에 다산학단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언제나 마음의 고독이 숨 쉬고 있었다.

 

바로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에 대한 그리움이다. 정약전은 정약용이란 인물에 가려워져 있지만, 정약용의 기록에 보면 자신보다 훨씬 월등하게 능력이 있는지 인물이고, 인품 역시 매우 훌륭하여 형에 대한 감정이 애틋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적에 어느 아무개는 형이 아우보다 낫다고 했으니, 그 아무개가 바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말한 것이다. 정약용은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청백했으나, 그의 뻣뻣한 모습에서 많은 친구와 적을 만들어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인물이라면 존경할만한 조정대신이나, 뇌물과 이권을 노리는 간신배에게 원한의 대상이다. 그가 신유사옥으로 구금될 때 주변 권력자들은 정약용을 사형시키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약전은 정약용만큼 활동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의 형이란 이유만으로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것 같았다. 정약전이 유배지로 가기 위해 포졸과 같이 가면서 헤어지게 되자, 포졸은 정약전을 떠나보내면서 눈물을 흘렸고, 흑산도에 유배 간 정약전을 두고 섬마을 주민들은 서로 정약전을 모시려고 했으며, 정약전 다른 섬에 가려하자 모두가 길을 막고 가지 못하도록 했다. 유배지에 천주학쟁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온 사람에게 마을주민들은 오히려 자신들과 있어달라고 애원한다.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바로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한 곳, 흑산도에 가서 정약전이 머물다 간 삶의 향기, 그리고 남은 마을주민들에서 듣는 정약전을 다시 확인한다.

 

정약전의 신분은 양반에다 집안에서 옥당 즉 임금을 알현할 수 있는 당상관 자리에 계속 올라간 명문가 집안이다. 아무리 죄인처럼 쫓겨나도 신분으로 보자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섬에 들어가는 순간 진정 유학자의 참된 길을 보여준다. 늙은 노파가 병에 들어 앓아누워있자 정성스럽게 병간호를 해주었고, 섬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알려주었다. 어민들의 삶에 대해 깊게 관찰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했고, 바로 이 책은 우리 문화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가 되었다. 정약전은 어민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어 기록했고, 물고기별로 크기, 생김새, 성품, 사용용도를 적었다.

 

의원이 귀하고, 약이 귀한 시절, 병에 걸리면 손도 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므로 어류를 약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많은 해양 관련 글을 남기면서 한국의 해양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남은 부분은 복어에 대한 부분이다. 복어는 맛은 좋으나 독이 많기에 잘못 먹으면 인명이 달리한다. 배고프고 가난한 백성들,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약탈당하고, 주변 못된 양반세도가들에게 노역으로 시달린다. 배고픈데 먹을 게 없어 해안가에서 복어를 잡아먹다가 복어 독에 걸려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이니 주변 어민들에게 얼마나 신기한 존재였을까?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를 저술한 작가는 흑산도에 들어가 박씨 할아버지에게 정약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을에 정약전 선생이 없었다면 글을 몰랐을 것이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조선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어느 한 개인의 불운한 운명이 때로는 그 지역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역사라는 것은 이토록 기구한 것일까?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이 해배되기 전 2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신다. 정약전에 애써서 만든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유배하던 집의 벽창호로 사용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가장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했던 것은 형님이 살던 집에 가서 형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자산어보를 발견하고,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 이청으로 하여금 자산어보를 복원하도록 했다. 만약 그것을 복원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해양학, 해양생물학, 해양문학에 큰 빛을 잃을 뻔했다. 정약전은 엘리트 이상의 지식인이었다. 그 말은 매우 총명하였지만, 인품은 모든 사람들을 품으려했다. 사대부 집안의 일원이 아니라 그 시대 살아가는 어민들의 뜻과 마음을 모우 자산어보에 담아내었다. 살아생전 붕당정치의 소용돌이에 먼 곳까지 귀양살이로 운명을 마감했으나,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현재는 제3자처럼 볼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소용돌이 중심과 주변에 있던 자들에겐 큰 멍에가 되었고, 그 멍에는 후손들에게 큰 짐이 된다.

 

영광의 업적은 슬픔과 좌절의 상처가 있어야 새겨지는 것인가? 시골이 있는 강진군에 갈 때 가끔 다산초당에 들릴 때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올라간 이유는 거기가 외가 식구와 먼 친척이란 점도 있지만, 거기선 강진포구가 보이고, 그 바다를 통하면 형님에게 갈 수 있을까라는 사무친 그리움이 스며있다. 그리고 다산에 그리움 역시 강진에도 많이 스며든 것 같다. 시골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보니, 다산 선생님이 처음 강진에 왔을 때 머물던 초가 ‘사의재’의 액자사진과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많은 책들이 방에 꽂혀 있었다. 지금이야 정약용 선생의 책들이 많이 읽혀지고 있겠지만,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정약용 선생을 탄압하던 자들의 후예들이 계속 탄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 높은 문화를 지키는 것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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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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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2번 반복되는 일이란 참으로 슬픈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반면교사 해야 할 일들을 후예들이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그대로 따라하다 못해 더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조광조 평전>을 읽는 내내 기분이 오묘했다. 역사라는 것을 그렇게 연결되고 계속 이어지는가? 왜냐하면 조광조를 보면서 전혀 다른 인물이 생각났다. 인조반정 이후 북벌론이 효종과 헌종 때 대두되면서 그것을 전력 전심으로 추진하려던 인물이 있었다. 백호 윤휴, 이 윤휴라는 선비는 단순히 북벌론만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부강한 조선이 되려면 먼저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그들을 배부르게 먹여주는 것이어야 말로 진정한 국부의 시작이다.

 

생각해보면 영국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생각하자면,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도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생산과 거래로 통해 많은 전 세계 국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기 바라는 마음에 저술했다. 결국 국가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생을 돌보는 것인 점은 18세기 유럽이나 17세 조선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제정이나 국가경영방법에서 누구의 관점에 따라 좋은 정책인가 그렇지 못한가로 이어진다. 헌종 사후 이후 숙종이 왕으로 올라오면서 경신환국이 일어나고, 그 덕분에 청남 계열 인사들은 숙청당한다. 그 중에 하나가 윤휴다. 윤휴는 평생 학문에 매진하고, 가난하고 고고한 선비였고, 백성들에게 많은 인망을 받은 자였다.

 

그가 국문에서 장형을 당한 후 비참한 모습으로 성문을 나올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궁궐 너머에 군왕이 있으나 거기에 전해질 가슴 속의 비통은 너무나도 막막했다. 사대부의 업무, 선비의 도리란 바로 공자가 논어에서 강조하듯이 농민에게 농업의 기술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농업을 마음 편하게 짓도록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윤휴는 바로 그런 일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는 권력이 앞에 가로막아도 목숨 걸고 주장하여 때로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거나 또는 목이 잘려 효수당하거나 죽은 뒤에도 시체를 부관참시 하는 비극도 일어난다.

 

윤휴는 남인계열의 인물이고, 남인은 다시 동인에서 시작된 학파다. 퇴계 이황과 그 이전에 존재하던 조광조란 거대한 태양에 의해 이어진 학파다. 물론 율곡 이이의 서인들도 조광조에게 이어진다고 하나, 남인에게 조광조의 그림자가 큰 이유는 조광조가 바로 소학(小學)이란 경전을 지침을 살았던 소학군자였기 때문이다. 소학의 이어짐은 윤휴의 친구인 고산 윤선도로 이어지고, 고산 윤선도는 왕의 스승으로 학문을 가르칠 때 소학을 효종과 헌종에게 강조했다. 선비란 목숨이 위험해도 그 입을 속여서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양반이란 계급사회가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관점에서 소학을 중시하여 선비정신을 내세운 그들의 의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이 목숨 걸고 권력과 싸웠는가는, 위로는 군왕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피와 고름을 자아내는 간신배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소학의 시작이 조광조이고, 조광조의 제자인 삼휴자는 윤휴의 고조할아버지이고, 조광조 학파 관료이던 귤정 윤구는 윤선도의 증조할아버지다. 소학의 전승은 이렇게 조광조로 시작하여 남인에게 이어진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광필은 조선 사림의 거두나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연산군 시절 유배를 가고, 무오사화에서 결국 참형을 당해야 했다. 조광조 입장에서 2번의 사화를 지켜보고, 중종반정에 따라 다시 정계로 들어온 사림의 영수다.

 

반정이나 혁명은 국가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사건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종 이방원이 형제의 난을 일으키며, 세조가 다시 반정을 일으킨다. 반정과 개국공신이 항상 권력과 붙어있으면서 왕과 좋은 관계이기도 하나 매우 불편한 관계이기도 했다. 공신들은 대부분 무관들이 많았고, 거사 이후 요직을 차지했으며, 특히 병권과 인사권을 가진 병조와 이조 참모진으로 구성되어 자신의 수족을 마음대로 부렸다. 아마 중종 이후로 조선은 왕이란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신하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허수아비처럼 되어버렸다. 왕은 신하의 권력다툼에 의해 독살 되는 일도 있거나 주변 친족마저 사약을 내린다.

 

세자 음해설로 중종은 자신의 아내 경빈과 경빈의 아들에게 죽음을 명한다. 권력관계에서 왕과 권력승자에게 미움을 보이면 여지없이 피를 보고 마는 조선의 권력세계에서 양반이란 결코 좋은 자리인지 아닌지는 그 권력의 중심지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공신 수는 태조와 세조의 개국과 반정공신 수보다 많았고, 과거 연산군 아래서 아첨하던 자가 갑자기 공신으로 되기도 하며, 전혀 상관없는 자가 뇌물로 들어와서 요직을 차지한다. 권력을 목표로 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 순간 국고는 비게 되고, 백성의 마음은 허무로 차게 된다.

 

조광조의 입신은 바로 저런 훈구대신보다 더 못된 반정공신의 간신배 질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에게 가진 것은 오직 바른 말만 하는 입과 바른 생각을 전하는 붓이다. 그가 가진 말과 붓으로 왕을 설득하고, 조정의 권력자와 대치했다. 대쪽 같이 바른 자이기에 오직 옳은 말만 했다. 왕을 고위대신 앞에 좌장하게 하여 학문을 논하는 경연장에서 조광조의 태도는 중종을 반정이란 이름으로 올렸던 자들에게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과 같이 있는 모습과 왕에게 진언하는 언사에서 조선의 모순과 병폐를 나열했고, 그것에 이익을 보던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광조는 증오의 대상이다.

 

충분히 재물이 있지만,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업을 하는 왕족, 백성의 구휼미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고관대신의 행태에 과연 조광조에게 보일 빛이란 무엇인가? 조광조는 바로 중종의 그림자 뒤로 숨은 자들을 맞서 싸우다가 결국 패배하고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그 이름을 영구불천으로 새기게 된다. 아직 순박하고 착한 왕이나, 판단력이 흐리고 의심이 많으며 겁에 가득한 중종, 중종은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기 위해 조광조란 태양을 받아들이나 조광조가 거대할수록 자신은 조광조의 그늘로 가려워짐을 느꼈을 것이다.

 

조광조의 상소와 죽기 직전의 발언은 한양 성균관의 유생과 진사, 그리고 전국 유생들에게 커다란 공론이 되었다. 중종의 조광조의 유배와 사약을 내리는 게 신속한 이유는 더 이상 조광조를 중심으로 자신이 불편하게 여긴 권력의 그늘을 내어주기 싫었던 것이다. 물론 조광조를 죽인다고 하여 그에게 불이익은 없지만, 조광조란 이름은 정식 태자가 아닌 반정의 성공에 얼떨결로 군주가 되어야 했던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들었기 때문이다. 중종이 만약 조광조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저 이름이 유야무야한 임금이 되었을 것이고, 반정공신의 간신배에 그저 허송세월만 보냈을 것이다. 조광조란 이름이 알리게 된 것은 중종의 현명한 선택이고, 중종의 어리석은 선택이다.

 

후대 임금들은 자신의 선조가 아니더라도 학문의 스승으로 모셔지는 학자를 기리는 문묘대제에 조광조란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고도 서러웠다. 중종이 눈 감는 날까지 조광조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조광조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명예가 회복되었고, 조정에 기용되기도 했다. 조광조, 그의 친구와 제자 등 주변사람들에게 기묘사화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되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명백한 폭군의 증오에서 시작된 광기의 살육이었다. 하지만 기묘사화는 기묘(己卯)라는 이름처럼 참으로 기묘(奇妙)하게 일이 돌아갔다.

 

중종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후라고 하나, 그 역사적 순간은 한국의 역사교과서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 각종 문학과 정치이야기에서 등장한다. 명분이 없이 권력자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주변의 이해관계가 맞물렸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연산군 시절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명분보다는 그 뒤에 숨은 실리가 있었다. 연산군이 계속 폭정과 더불어 왕고를 낭비하여 국고가 모자라자 주변 대신들의 재산에 대려고 했고, 이에 반발하게 된 것이다. 진정 국가를 위하고 왕을 보필하면 도성 밖의 농촌의 황폐한 초가집을 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광조에 대해 읽으면서 이런 말이 생각났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한국에서 두사부일체(頭師父一體)라는 영화가 있었다. 조폭을 등장시키는 코미디 영화라 하나 한국의 문화적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폭문화에서 두목을 아버지와 스승을 동급으로 보니 말이다. 한국의 이런 강압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가로막은 행위가 영화제목처럼 나온 것이다. 조광조를 보면 군왕, 스승, 아버지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무엇일까? 어째보면 아버지이겠지만, 그래도 그의 세계는 스승이었다.

 

조광조 일파 중에 거짓으로 올라간 공신의 자손도 있고, 권력자들의 후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의 눈치보단 자신의 학문으로 개혁을 주장했다. 아버지가 고위관직이 있어도 개혁을 추구하던 아들로 보자면 스승의 위치가 아버지와 군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다행히 조선에서 자식들은 처음 학문을 배우는 자는 대부분 아버지였다. 아니면 할아버지, 삼촌, 큰형님도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스승의 존재는 매우 독특했다. 김광필이 죽기 전에 만나, 김광필의 문묘에 모시려 한 점은 그에게 스승이란 학문의 물줄기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다.

 

유학자로서 아니 선비로서 왕을 보좌하기 위해서는 왕에게 신임을 받아야 하며, 그 신임을 받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향한 군자의 정신이다. 그래서일까? 조광조의 유배와 사형이 확정되자 조광조의 동생은 통곡을 외치며 급하게 길거리를 지나간다. 이때 어느 노파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조광조의 동생은 자신은 형의 죽음으로 눈물을 흘리는데, 노파는 왜 눈물을 흘리는지 묻는다. 그러자 노파는 조광조가 죽게 되었다는 말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다른 조정대신을 몰라도 조광조만은 힘이 없는 백성을 알아주는 진정한 군자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운명을 맞이하는 선비들은 조선의 역사상에서 끝없이 등장한다. 명종 때 등장한 또 하나의 사화,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모반사건이 기축옥사를 일으킨다. 조광조 학문적으로 이어받은 이발은 기축옥사에서 죽고, 그것도 모자라 이발의 어머니와 형제까지 국문에 끌려와 장살당해 죽는다. 이발의 친족들은 제주도 넘어가거나 산에 숨거나 또는 외로운 섬에 숨어 살았다. 다행히 그들의 무고를 아는 사람 때문에 잡혀죽지 않았으나, 죽은 자의 명예가 살아날 때까지 세상에 이름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조선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죄가 없는 자를 무고하여 참변을 일으킨 간신들은 죽은 이후 벼슬에서 삭탈되고, 묘지의 시체를 유린당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선비는 권력자의 눈에 잘못 들어오면 누명에 의해 유배가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설사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을 하다가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역사의 기록에서 의인으로 칭송되어도 후손들이 겪는 운명의 굴레는 참으로 비참하다. 조광조의 죽음은 선비에 의해 유학으로 통치되는 조선이 자신의 사상적 정체성에 큰 상처를 입혔다. 조광조 죽음처럼 군사부일체에서 군주가 가장 먼저 오더라도 스승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끔 집안의 문헌에서 뒤져보면서 생각한다. 조광조 문하 중에 삼휴자(三休子) 말고 삼휴당(三休堂)이란 분이 있다. 삼휴자는 집안의 상으로 변을 피하였으나, 삼휴당은 한양 태학에서 조광조의 문하로 있다가 기묘사화에 변을 당한 후 스승의 죽음을 보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중종 말기, 그는 중종에 의해 어모장군이란 관직을 하사 받았으나, 그 자리를 매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삼휴당(三休堂)이란 분은 나의 직계 할아버지였다. 학창시절 국사시험에 나오면 외우던 4대 사화를 다시 확인해보니, 나에게 피해갈 수 없었던 과거의 얼룩이었던 것이다. 역사라는 기록의 축척으로 통해 전해오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의 거취와 운명까지 틀어막거나 돌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내가 그 역사라는 기록을 보고 생각하지만, 내가 죽고 난 뒤 먼 미래의 후손들은 나라는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운명의 수레바퀴를 탈 것이다. 조광조 평전을 읽으면서 E.H 카의 <역사는 무엇인가>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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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6-06-1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증말 읽고 싶은데...만화애니비평님과 제가 취향이 비슷한 듯 싶어요. 므흣 ㅋ

조광조도 그렇고 윤휴(이덕일 아자씨가 쓴 거) 요거 읽고 싶었거든요. 전 조선 역사 속에서 인물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읽으면서 오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보며 그리고 중국 `삼국지`를 보며 아! 시바 우리는 뭐 이렇게 인물도 없고 역사도 재미 없냐라고 20대에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조광조, 정도전 뭐 물론 이순신도 그렇고요. 인물이 없는 게 아니더라구요. 다만 그런 인물들이 묻혀지고 그리고 뭔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그런 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선 역사 속의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 중 단연코 좋아하는 사람이 조광조에요! 뭔가 이 분 ㅠ 볼 때마다 안타깝다고 할까요...처절하다고 할까요? 권력이 없음에도 정의를 외치다가 죽은 진짜 지조있는 그런 삶..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책 읽을만 한가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19 11:34   좋아요 0 | URL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덕일 아저씨 책) 읽어보았죠.
사실 조선에 대단히 많은 인물이 있었죠. 대신 일본은 승자의 입장에서 많은 인물을 다룬다면 우리는 패자였죠. 최후의 죽음을 보면 열받지요.

조광조와 기묘사화를 보고, 이전의 연산시대의 사화, 또 다시 사회와 옥사를 보면서 조광조가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여담이나 사실 조광조의 학문은 조선선비의 기반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유성룡은 남인(원래 동인)인데, 남인들이 조광조(그리고 퇴계 이황) 학문을 이어받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동인계열 의병장 및 장수들이 많았죠. 그 시작점은 조광조인 겁니다. 남명 조식의 문하생에서 곽재우장군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덕일씨도 그렇지만 한명기 교수도 서인(노론)에 의해 실록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루쉰P 2016-06-19 22:11   좋아요 0 | URL
오우 조광조가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올곧은 지식인으로 살다간 사람으로 알았거든요. 흐음 대단하네...

만화애니비평님의 말이 맞아요.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보면 재밌는 것이 승자로 끝나니 시원한데 우리는 패자니, 에이 뭐 이런 뭐야 이거 그러면서 책을 덮게 되고 괜히 짜증이 나더군요. 슬프기도 하구요. 근데 정말 지금 정치나 노론, 소론 하는 거나 한국적 DNA가 있는 것일까요? 당쟁이나 지금 새누리나 민주나 비슷비슷 하다는 생각을 져 버릴 수가 없어요.

이 책 정말 어머! 이건 정말 사야해!

만화애니비평 2016-06-19 22:32   좋아요 0 | URL
인연이란 재미있습니다. 조광조 문인 중에 서평처럼 삼휴자 윤관은 윤휴의 할아버지고, 귤정공 윤구는 윤선도의 조상입니다. 유성룡이 남인계열로서 율곡 이이와 함께 있었는데, 그때 이준경이란 영의정이 있었지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율곡 이이가 하는 짓은 바로 붕당짓는 일이라면서 걱정했는데,
이준경이 바로 기묘명현 중에 한분인 이연경과 친척입니다. 이준경이 말한 것처럼 붕당정치가 생기고, 이후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남인과 소론들은 사도세자 사후 정조가 즉위할 때 시파로서 왕권강화와 부정부패를 추구했으나 결국 정조의 죽음으로 망했죠....

재미난 일담으로 지금 국회의장 정세균 의원이 정약용의 후손입니다.
새누리의 원씨 성을 가진 양반이 있는데, 그 사람의 직계는 원균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선의 붕당정치의 후손들은 아직 전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쉰P 2016-06-2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이달의 당선작이 될 줄 직감했어요 ㅋ 축하드려요. 즐건 금욜 화끈하게 보내세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26 21:04   좋아요 0 | URL
으아...
자유인 루쉰을 읽었지만
하나 보고 뭐라 말하기가 참 거시기 하네요
시간 되면 아Q정전을 봐야게네요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 대한민국 네티즌이 열광한 KBS 화제의 칼럼!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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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방송국에서 한국경제를 다룬 박종훈 기자의 컬럼이 <대담한 경제>라는 책으로 나왔다. 본래 경제학 전공출신 전문기자인 점에서 그의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도서모임에서 한 번 소개받은 서적으로 내용이 어느 정도 전문성을 높게 다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반대중을 위한 책으로 보편적이고 쉬운 문체로 작성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보기엔 좋을지 모르나, 깊이 경제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이 말하고 있는 초점이나 대상이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의 설명으로 진행된 점에서 심도 있게 들어갈 수 없는 점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책에서 경제학을 다룬 점에서 기억나는 이름은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 그리고 슘페터이다. 둘 다 경제학자인 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저술 시기는 영국에서 중상주의를 강조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 경영학자 중에서 중상주의를 표방하는 자도 많으며, 국가정부와 대기업의 행동을 보면 신자유주의라고 하나, 막상 그것은 중상주의에 가깝다.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낡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지금의 국가정책은 애덤 스미스가 그 당시 매우 낡아 빠졌다는 중상주의와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다. 과연 어느 것부터 우선적으로 낡아빠진 정책인가?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 신자유주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본다. 시카고대학, 이른바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하고 매우 관련된 대학교, 시카고학파가 존재할 정도로 시카고대학은 미국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연관이 있다. 20세기 아니 21세기에도 하이에크와 밀턴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통화의 정책과 정부의 관여성에서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 즉 시장자유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과 다른 “보이고 싶은 않은 손”이 되고 말았지만, 적어도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시장조율에서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자본과의 관계성은 다변적이면서 한편으로 단순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상은 제각각이나 모두들 경제적인 경영적인 마인드는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에 대한 서로의 관점에서 변수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현실적 조건이다. 중상주의가 문제인 점은 국가와 대상인 간의 정경유착 관계가 물가를 좌우하고,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별 것 아닌 제도조차 건축양식과 의복문화까지 바꾸니 경제라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벗어나려도 벗어날 수 없는 필수불가결적인 존재다. 다시금 애덤 스미스를 논하고 싶은 것은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경제부분 기자가 말한 것처럼 경제의 필수는 돈만 버는 것만큼 돈이 현실에서 돌고 도는 게 중요하다. 즉 필요한 물건이 제대로 돌아가게 해야 경제가 사는 것이다.

 

중상주의 한계, 잡 집어내듯이 최근 우리나라는 무역흑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외화관계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수출입 관계에서 수출의 증대가 아니라 단지 수입이 적게 된 것이었다. 스미스는 수입이란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면 문제지만, 수입하지 않아도 문제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한 재화를 구할 수 없을 경우 생활의 질이 하락되고, 현재 그 삶의 질이 낮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수입물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제적으로 성장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나도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주변에도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하는 것이 부동산 문제다. 국내는 부동산이 주요 시장이 되었고,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국가세금과 국민의 경제력, 토목건설공사로 많은 국가세금이 나라를 갉아먹고 있다. 왜 국내 경제가 어려운가? 그것은 경제라는 것은 생산을 하면 소비가 되어야 하고, 소비가 되려면 임금이 필요하다. 임금을 받아야 하나 취업이 잘 안 되고, 하더라도 비정규직이 되어 임금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여 기계의 도입은 많은 임금노동자를 거리로 내몬다. 그런다고 공장기계나 도구를 부수는 과거의 행태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된다면 새로운 가치관을 맞이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바둑시합에서 구글에서 나온 알파고 컴퓨터가 바둑9단 선수를 5전 4승으로 이긴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이 알파고의 기능이 상용화 되면 지구의 일자리가 반 정도가 사라진다. 인간 생활 진보를 위한 도구가 오히려 인간을 삼키는 도구로 도래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던 일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응책은 새로운 변화를 맞춘 기술이 필요하고, 거기에 많은 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제사를 지내러 시골에 가면서 작은아버지하고 우연히 정수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수기는 기본적으로 막여과라는 섬세한 여재를 이용하여 이물질을 제거한다. 내가 다니는 사무실의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는 도중, 정수기를 살펴보니 정수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모우는 집수통 바닥이 붉은 색을 띠었다. 원인은 아마 물속에 있는 산화철일 가능성이 높다. 수도관이 알루미늄이나 콘크리트도 사용되나 과거에 주철관 같은 쇠를 사용했다. 물의 화학반응은 쇠를 산화시키므로 정수기의 기능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작은아버지는 정수기 교체에서 미국 것을 사용했는데, 과거의 물맛과 다르고, 그 물이 고급 커피숍에도 사용될 정도로 좋은 물건이라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생각하면 물에 대한 설비기능, 환경적인 관점에서 결국 장비의 수준은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내 정수기업체가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라 만드는 흉내 내기가 가능해도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는 창조성은 없다. 창조경제를 외치나, 창조적인 것은 과연 그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1세기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20세기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문제는 대량생산의 기능은 증강하는 반면 대량소비의 기능은 감소한다. 인간이 하루식사 량이 정해져있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개수도 한계다. 그런데 웃기게도 먹고사는 것이 걱정인 21세기가 되었다. 생각하면 간단하다. 좋은 먹거리와 좋은 옷을 사야할 돈이 쓸데없는 곳에 사용되거나 또는 억지로 돈을 꼴아 박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원하고 조장했는가? 국민들은 정부 책임론을 말하나, 막상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다. 심심하면 일어나는 것이 우리 집 앞에 왜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지 혹은 왜 우리 동네 주변 산업단지나 대규모 공단이 오는가에서 그것을 만드는 민간업체의 무책임도 있지만, 그것을 허락해주는 정부의 기능도 있다.

 

그런 정부를 만든 것은 국민이고, 그것을 용인한 것도 국민이다. 부동산 경제에 대한 문제는 금리인하 후 무리한 대출로 집에 대한 과다한 가격으로 집이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집을 빚을 내서 구매한 사람들은 대출이자 원금으로 고생한다. 그런데도 빚으로 구매한 집값이 오르기를 바란다. 집값으로 서민들은 고민하면서도 차액을 남기려고 하니, 결국 집 말고 다른 곳에 사용될 돈이 적어진다. 돈이 없으니 결혼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이를 낳아 길러주는 것은 거의 각오해야 할 수준이다. 한국 인구에서 재생산될 수 있는 인구, 즉 여성 1인당 출산비가 1.1 조금 넘는다. 여성 1명이 아이 1명을 조금 넘게 낳고, 문제는 그 아이들조차 모두 100% 무사히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는 18세기 이전부터 문제라고 지적했고, 스파르타가 용감해도 인구감소로 모두 멸망했다. 그 원인은 빈부격차이고, 빈부격차는 재생산이란 경제적 시스템을 파괴한다. 새로운 노동인구의 생성은 새로운 시장경제의 원천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인재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시대까지 인구가 급속히 폭발하다 이제 그 당시 인구가 노년화로 되어 노동력을 상실 후, 집에서 연금을 받아야 하나, 점점 이들을 부양할 젊은 계층들이 감소되면서 한국사회는 침하하고 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안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고 해도 그 객관성이 공공의 영역으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익에서인지 혹은 집단적 이권에서 보는 지에서 큰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한국사회의 경제는 단순히 한국만의 입장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기존 한국 사회의 변화가 복잡다양하게 얽혀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 대안을 어떻게 찾을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비롯되는지를 알려면,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단순히 기록물의 누적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전쟁,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종훈 기자의 <대담한 경제>는 기본적으로 외국의 역사적 문헌에서 경제적 문제를 찾아내어 현실의 한국사회와 대조한다.

 

누군가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생각할지 모르나, 민주주의 개념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철학적 사상도 없이 일반적인 국가권력 계몽주의는 단지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세뇌시킬 뿐이다. 특히 경제는 그렇다. 어떤 이권이나 이익이라도 그 최종적 형태는 경제적 조건으로 드러난다. 말로만 청년실업, 노년빈곤, 출생률 저하, 내수침체를 말하나 그 기초는 어디서부터인가? 최근 담배와 술 가격이 올랐다.

 

한국의 세금출처에서 간접세가 절대적이다. 술과 담배 가격이 올랐다는 것은 세금이 부족하고, 세금이 부족한 이유는 원래 거두어야 세수가 구멍이 나서 대신 메운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대담할지 모르겠다. 어째든 작가는 마지막 말에 희망은 있다고 보나, 희망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으니 어찌 <대담한 경제>가 아닐 수가 있을까? 물론 저자도 언급하듯이 사토리 세대, 일본의 청년층들의 뭐든지 포기하기(마음이 편하지?)는 당장 불만이 보이지 않은 나라가 불능이 되는 지름길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 마음은 당장 편할지라도 모순의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현실도피라는 마약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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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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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늘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친구하고 오랜만에 만나거나, 심지어 식당에 식사하는 도중 옆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경제이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는 Economics가 아니라 Business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경제적 관심은 국가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개인적 영역의 경제와 공적인 영역의 경제는 다르다. 게다가 어떤 사업을 하면서 수행하는 경제성 평가가 공공기관이 한다면 모르나. 일반 민간사업자가 하는 것이라면 그건 경제성이 아니라 경영성이라 말하는 것이 바르다.

 

주변에서 재테크나 혹은 돈을 어떻게 벌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개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판도와 가치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들이 나보다 우월하게 알고 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가진 지식의 단 1%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요새같이 자기계발서 중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책들이 넘치고,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이익을 보는 이는 소수라는 점이고, 대부분 주식에서 큰 손해를 보거나, 부동산의 경우 내 집값이 오르면 옆 동네 집값도 오른다.

 

이런 부분에서 조금 걱정을 지나 많은 인간들의 가면을 보게 된다. 겉으론 나라와 경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나, 막상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로 이어진다. 물론 나도 내 인생하고 내 가족이 소중하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자기 주변의 밭에만 물을 대기를 바라는 것보다, 밭의 물이 알아서 잘 내려갈 수 있는 형태를 원한다. 한국사회에선 아직도 낙수효과 Trickle Down 신화를 믿는 모양이다. 최근 불경기와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은 어디에서 왔을까?

 

전에 어느 책에서 일본의 경제문제를 위한 정책에서 일하는 사람의 임금을 올리려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디플레이션 경제는 소비위축과 더불어 일본의 인구가 축소됨에 따라 일본정부가 새롭게 시도하는 정책이다. 인구가 감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비율에서 전반적으로 입이 큰 도자기 병처럼 20~40대 인구가 제일 많고, 10대나 영유아가 계속 유입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그 나라의 생산력과 그리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러나 요새는 입구가 좁고 가는 도자기 병처럼 되고 있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추세고, 노령인구가 할 수 있는 노동력의 한계가 온 것이고, 게다가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정책이 날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노년의 빈곤에 따라 노년의 실업은 양날의 검이 된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과거에 할 수 없으나, 단순노무나 사무실의 문서정리, 일반적인 서비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건강이나 신체적 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청년실업과 관련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친구의 통화에서 아쉬운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친구의 말을 옳을지도 모르나, 친구는 장사를 한다. 판매하는 물건들이 사치품은 아니나, 살 수 있는 부류가 일반 서민들이고, 비싸지 않은 기호식품 내지 건강식품이다. 따라서 서민층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 않으면 전혀 팔리지 않을 물건이다.

 

경제적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고, 국가정책과 국민적 정서가 따르기 마련이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친구는 주식시장에 관심이 많고, 금리나 코스닥에 관심이 많다. 난 다소 관심이 없고(나중에 거시경제학을 따로 공부할 생각이나), 사회적 구조에서 접근한다. 내가 결론내린 부분은 항상 부동산 문제다. 회사에서나 친구나, 오랜만에 만난 과거 직장동료나 식사 중에 들리는 이야기는 바로 부동산이다. 부동산의 문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벌어도 그것은 벌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소소한 것으로 번다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은 더 많이 번다.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현명함이다.

 

어느 순간 집값이 폭등하고, 그 지역이 어느 정도 과밀화되면, 도심지 사람들은 변두리에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 부동산을 활성화시킨다. 그러면 결국 그 지역 토박이 주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이 오기 시작한다. 처음에 집값이 오르면 좋으나,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도 같은 지역 아파트에 갈 돈이 나오지 않고, 주변에 아파트가 모이면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다. 치킨 가격 비밀에서 요새 치킨이 조금 저렴하면 15,000원, 보통 2만원 정도한다. 치킨의 비밀에서 닭의 가격, 즉 생닭의 가격이 최근 오르지 않았고, 치킨에 필요한 식용유와 전분 그 외의 식재료가 오른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임시로 일하는 직원 급료가 올랐는가? 불과 5년 전 치킨 값은 15,000원도 비싸다고 여겼다. 그런데 5년 후에 최저 급료가 1,500원 올랐다. 그러나 집값은 2배 정도 올랐다. 알바르바이트생의 시간당 급료가 5년 전에 비해 1,500원이 올랐다고, 치킨 값이 5,000원이 올랐다면 말이 안 맞다. 나머지 3,500원에서 소득세나 각종 세금, 사장의 수익이 그렇게 오를 리가 없다. 문제는 임대료다. 지방에서 삼겹살 1인분이 4,000원이 현재 7,000원까지 오르고, 수도권에서 1인분이 10,000원 이상은 기본이다.

 

임금의 상승폭이 정말 크다면 저렇게 올라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문제는 임대료다.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수익을 3가지로 나눈다. 임금, 이윤, 지대라고 말이다. 이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에도 나오나, 사실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한 개념이다. <국부론>이 18세기에 저술된 책이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거의 대부분 일치할 정도로 시장경제학을 연구한 도서다. 바로 사람들은 자신의 딜레마, 즉 이익의 모순이 지대라는 점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에 충실하기도 하나, 자신의 미래에도 관심을 가진다. 내 직장동료나 친구도 자기의 수중에 돈이 오르는 것을 바라지만, 마지막은 자기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녀들은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말로 끝낸다. 문제는 본인들의 자녀를 계속 몰고 가는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자신이란 사실이다. 물가의 상승, 최저임금의 상승해도 결국 1일 8시간 주5일의 근로기준법을 지켜도 세금을 공제해도 100만원도 안 된다. 요새 100만원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나?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세상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분이 서울 유명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자본>을 읽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솔직히 <자본>을 돈 벌라고 보는 책이 아니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보는 책이다(물론 이 책을 보고 경영적으로 연구한 자도 있다고 한다). <자본>의 탄생에서 당시의 자본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는 다르나, 21세기에도 <국부론>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고 하면, <자본>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세계 4대 경제학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그리고 케인즈와 하이에크가 있다. 우리의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걸어가고 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온 경제학 도서가 이미 현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수요의 공급이 제대로 되는가에서 현재 수요의 대상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 인구가 축소하여 거품처럼 올라오는 부동산은 어느 일정지역을 제외하면 유령의 마을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임금의 문제, 지나친 노동 강도 그리고 현실의 경제적 조건들은 인간들의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미래라는 담보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은 돌아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단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당시 다른 사회주의자와 달리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시장체계인 점을 알았다.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려면 물적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데, 현재를 보고 그때를 봐도 물적인 토대인 상품은 넘치나 그것을 소모할 수 있는 시장수요는 줄고, 그것에 의해 공황이 닥치고, 치명적인 위기로 이어진다.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부동산이 끼여 있고, 한국의 지금 부동산 열기는 식을 생각이 없다. 최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에서 주택문제는 그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단지 마르크스가 보던 시기는 주요 대상이 상품에 투하되는 되는 노동력이고, 현재는 노동력보단 금융시장이다. 그러나 결국 금융시장에서 얻어지는 돈은 그냥 땅에서 솟아난 돈이 아니라 누군가의 돈을 당겨오는 것이어야 가능하다.

 

임금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빚을 내어 통화량을 증폭시켜 인플레이션 되는 현실에서 사실상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를 파고든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 역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을 다시 찬양하며 따라가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역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소비하지 못하면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내 친구의 장사불경기와 마트에 살 것 없다고 말하는 회사동료의 말을 들으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어긋났는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자본>에선 지대에 부분은 현실의 이런 미친 임대료까지 예상하지 않으나, 지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광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게 사실인가? <자본>의 탄생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본질적 문제가 당시에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여기서 마르크스는 새롭게 경제학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면 아직도 21세기에 1970~80년대 산업재해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사실 <자본>을 읽다보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통계적으로 조사한 내용이 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농촌에 많은 인구가 상주하고 있으나 21세기는 농촌보단 도시에 인구가 치중하고 있다. 산업예비군들이 언제라도 보충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일자리 부족한 것도 있지만, 미래에 일자리가 넘쳐도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악몽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자본>의 탄생이 그냥 한 사람의 광기 내지 오만이 아니라 현실적 모순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내기까지 그도 역시 현실적으로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예전부터 존재한 경제학 도서를 참조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역사와 통계 그리고 철학과 문학까지 반영했다. 딱히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말대로 하란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려면 카드를 다른 방식으로 돌려볼 수밖에 없다. 2010년대 도래하자 한국의 키워드 중에 하나가 경제민주화이다.

 

사실 이런 정책은 케인즈의 사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케인즈 역시 자본주의 거시경제학 개념에 마르크스의 사회구조 분석을 상당히 참고했다고 하니, 경제정책이 국가의 조율과 조정이란 통제 아래 진행되면 신자유주의적으로 문제지만, 한편으로 현 상태를 보자면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제민주화에서 먼저 정리할 부분은 물가와 임금일 것이다. 국민들이 일자리만 얻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의 임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소비 없는 생산품들이 넘치면 결국 경제적으로 부도와 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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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시바! 닭들이 왜 비싼가 했어! 생닭은 가격이 안 오르는데....임대료였구나 임대료...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 전 마르크스는 항상 읽어보고 싶고, 관심이 많이 가는데 아직도 제대로 이 분의 책을 읽지를 못 했어요.. ㅠ.ㅠ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하여 경제학의 전혀 기초지식이 없는 저 같은 우매한 자가 읽기 좋은 책이 있을까요? 전 이사야 벌린인가 그 사람이 쓴 `마르크스 평전`만 읽었어요 ㅠ

만화애니비평 2016-06-19 11:37   좋아요 0 | URL
사실 임대료가 저렴한 시골에서 고기를 먹으면 비싼 이유는 임대료 대신 노동력이죠. 시골촌닭은 닭사육장이 아닌 시골집터 안에서 소량으로 키우니 그만큼 인력이 드는 것이고요. 닭에 대해 생각해보면 제가 맡은 업무 중에 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 있습니다. 저희 지역에 닭의 사육두수가 급증한 것은 치킨의 위력이죠.

저도 처음에 마르크스 잘 몰랐지만, 읽어도 참으로 어렵지만, 덕심으로 밀어붙였죠. 오덕오덕!! 마르크스는 한번 강신준 교수님의 서적을 읽어보세요.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라던지 혹은 다른 마르크스 서적이 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님이신 김수행 교수님이 별세하여 자본번역가로는 강신준 교수님만 남았지만, 볼만할 겁니다. 사실 이분은 직접 강연을 들으면 재미있습니다.

루쉰P 2016-06-19 22:07   좋아요 0 | URL
흠 대체 뭐하시는 분인지...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라니...제 상상속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양 손을 턱에 괴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에반게리온의 신지 아버지 모습이 잠깐 훅 지나가네요...ㅋ
전 차라리 노동력에 값을 지불하고 싶어요. 임대료 따위에 치킨값을 내야 하다니 니미럴...치느님에 대한 모욕이라구요!!!!

강신주 ㅠ.ㅠ 그거 책 샀었는데, 경제적 고난의 파도에 헌책방에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흐흐흑

다시 사야지 헤헷, 마르크스 참 매력적인 이름이에요. 왠지 친해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한다고 할까요? 흠 노무사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를 읽어보지도 못한다면 그건 노동에 대한 모독이에요 훗

추천 감사합니다잉 ㅋ

만화애니비평 2016-06-19 22:28   좋아요 0 | URL
저요? 환경공학을 전공했고, 환경 대관협의하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 된 일인지 오덕이 되어 이상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ㅎㅎㅎ

뿔태안경은 안끼고 애니나 영화볼때나 안경끼지만, 덩치는 좋은 편입니다.ㅎㅎㅎ

강신준 교수님 경제학 서적들이 쉬운 편은 아니나 그나마 쉽게 만든 편이죠. 처음부터 새로 구매하지 마시고 도서관에서 천천히 들여본 뒤에 결정을 하십시오..ㅎㅎ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베스트셀러로 출판되었던 <책은 도끼다>의 박웅현 카피가 다시 인문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도서를 출판했다. 카피라이터, 광고와 혹은 어떤 문구로 통해 고객 내지 수용자에게 어떤 마음이나 감동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카피라이터로는 정철이란 분이 있었고, 정철 카피와 박웅현 카피는 국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분이다. 그러나 각각의 책을 보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정철 카피 역시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분의 책을 보면 조금 더 쉽고도 강한 메시지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웅현 카피의 책이 인문학적 감성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카피라이터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공감대가 다르겠지만, 그 방향성과 의미성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웅현 카피의 <여덟 단어>를 읽을 때, 조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박웅현 카피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얼마 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어느 분과 페미니즘 담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류 페미니즘 사상과 나하고 맞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하다가 결론부에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문구가 나올 때 인간은 결론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 사고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여덟 단어>에서 의미하는 가치관은 매우 좋을 수도 있고, 박웅현 작가 역시 다변적인 현실인간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례에서 삶을 설계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괴리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피곤하고 따분하고 지루한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유는 없이 한가로운 맛도 없이 게다가 팍팍한 일상에서 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전투적인 인생에서 새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전환이다. 카피라이터의 사고는 곧 생각의 전환이고, 그것이 광고로 기획되어 자신의 생계벌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여덟 단어>는 사고의 전환이나 생각의 확장은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에서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


물론 작가 역시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사례에서 말해주는 부분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감상보다 먼저 작가의 담론을 심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여덟 단어>가 나쁜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쁜 책은 아니지만, 그렇게 좋은 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작가 본인이 카피라이터 때문에 책 본문을 읽을 때마다 발상의 전개가 참 대단하나, 그 발상에 독자가 심취하면 책으로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허사가 된다는 점이다.


책의 주제 여덟의 주제는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이다. 만일 이 책을 아직 책에 대해 잘 접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제 입문하는 분에게 추천할 수 있겠지만, 정작 깊은 내용을 찾는 분에게 추천 드리지 않을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철학이나 인문학 서적에서 플라톤, 칸트, 니체, 스피노자 등의 원전 번역서를 읽지 않더라도 이런 철학자를 소개하는 도서에서 충분히 저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철학은 모든 사유의 시작이고, 정치학과 사회학의 시초이다. 작가 역시 인생에서 철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만일 이미 어느 정도 인문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박웅현 작가의 말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인문학적인 견해보다는 그런 견해를 상당히 잘 포장된 문구로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에 놀라워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매체는 다르게 변해가더라도 콘텐츠의 질과 소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없으나 변하지 않을 것도 있다.”라는 방식은 이미 오래된 문구이며,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한계점이 있고, 그 한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놓여있다. 운명이란 자신이 헤쳐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주어지는 것인가? 어느 것이든 둘 다 정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어진 조건과 환경 안에서 앞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르나 제일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자신이 찾아가는 길이 자신의 의도하고 무관하게 흘러가 거기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으나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든 자신의 조건 아래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길을 여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조건과 상황이 무척 다변적이다. 저자도 알고 있지만, 그 사례로 들어보는 것들이 너무 좋은 것만을 보여준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은 이렇게 그물에 걸려도 잘 풀고 다르게 가는데, 이런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의 성공담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열린 생각으로 가고자하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답답한 세상의 기변에 깔린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거기에 맞추어 개인이 알아서 잘 해야 한다는 논조가 다소 스며있다.


박웅현 카피의 마인드는 좋다. 특히 외국의 CEO가 회사를 오고가는데 쓸데없이 허례허식도 필요하고, 서로의 자존감을 건들지 않는 것도 좋다. 한국이 그게 용인될 사회가 아닌 것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기존의 한국 기성세대가 가진 관료주의식 내지 군대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 살 필요가 없지 않으냐 말은 무리수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답답한 사회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조금씩 여유를 찾아 변화해야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위의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일하고 존재하는 공간적 기반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공간적 주박을 부정하기 보단 그 주박에 대한 문제점을 생각하고 조금씩 고치기 위해 생각의 전환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는 아니나 인문학적으로 자기계발서 같은 도서다. 단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를 뿐이다.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 대해 상당히 꺼리는 편인데, 그 이유는 자신의 롤 모델은 자신의 롤 모델이지 그 이상으로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거의 희박하다. 단순히 가능성으로 제시하면 모르나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방식만큼 더 멍청한 조언과 조언자는 없다.


<여덟 단어>의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을 보고 우리는 당장 우리 삶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조금 삶의 저편에 작은 바람은 분다고 생각한다. <여덟 단어>는 저자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었지, 저자의 삶을 롤 모델까지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예가 너무 일반적인 사람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내가 이 책을 비판한 점이다. 작가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을 듣고 그것에 대해 분명히 판단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현실적으로 무리수가 있다면 결코 그것은 좋은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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