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무엇을 찾아가는가?

인간에게 자신이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고, 누구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지 또한 그것으로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영화관에서 관람한 <괴물의 아이>는 전형적인 서사를 갖춘 애니메이션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가진 한 소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작품이다. 렌이란 소년은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주변 친척으로부터 외갓집의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나오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전에 이혼을 하여 소식조차 닿지를 않는다. 이런 어린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2. 서사의 시작

렌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망했는데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음에 대해 어른들의 사회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부정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현실이란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괴로워하고, 죽은 어머니를 계속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깊은 상처는 렌에게 지울 수 없는 짐이 되어 가슴에 큰 구멍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 구멍이 발생한 이유는 부모와의 이별에서 겪은 흔적이므로,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렌에게 현실의 세계는 그저 괴로움으로 가득한 먼 세계였던 것이다. 렌이 우울함에 지쳤을 때 갑자기 덩치 큰 사내가 렌에게 말을 건다. 그의 이름은 쿠마테츠, 강력한 힘을 괴물로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해 괴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 렌이 현실에서 있을 곳은 없었고, 그에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욕망은 공간적으로 비틀게 되었고, 평범한 인간이 갈 수 없는 괴물의 세계로 갔다. 괴물의 세계를 가니, 현대사회와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건축양식은 일본의 근대 초반의 모습을 갖추었고, 시부야의 대도시의 모습보단 그저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의 도시처럼 생겼다. 렌이 만난 쿠마테츠는 그 도시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은 괴짜였고, 쿠마테츠는 수장 자리를 두고 이오젠이란 강한 멧돼지 괴물과 결투를 해야 했다.

 

3. 인간의 관계

처음 만난 쿠마테츠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정한 일에는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외골수적인 쿠마테츠는 길에서 우연히 시비가 걸린 이오젠과 싸우면서 아무도 그에게 응원을 해주지 않는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차가운 반응과 거부감이었다. 렌을 큐타라고 이름 짓고 제자를 삼으려 해도, 그런 성격인지라 렌과 쿠마테츠는 계속 다투기만 했다. 다투기만 하다가 렌은 어느 순간 알았다. 렌은 자신이 부모 없는 외톨이란 점에서 세상과의 단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렌 본인만 느낀 감정이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자라온 외로운 괴물이었던 것이다.

 

부모 없이 혼자서 커야 하는 아이들은 예절이나 사람대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보호받지 못하기에 언제나 다른 자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고, 상대방에게 억눌리지 않기 위해 항상 거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렌이 쿠마테츠에게 제자로 들어간 이유는 자신만이 혼자라는 슬픔을 가진 게 아니라 쿠마테츠 역시 그런 슬픔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분명 독자적인 주체로서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나기까지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고, 어머니와 분리되더라도 육체가 아닌 정신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바로 가족이란 것은 육체적인 끈과 더불어 정신적인 끈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끈을 상실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이다. 쿠마테츠와 함께 살아가는 렌에게 가족의 빈자리를 쿠마테츠로 채울 수 있었고, 언제나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쿠마테츠에게도 삶의 지지대가 생겼다. 인간은 분명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 있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심으로 무장한다. 그 긴장감은 분명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자신이 고독하다는 마음에서 깊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쿠마테츠가 렌을 제자로 삼으면서 강해진 것은 렌만이 아니다. 쿠마테츠도 이전보다 더 강한 무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보다 옆에 누군가 같이 한다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다고 무조건 인간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렌은 강해져도, 렌을 이은 다른 제자들은 강한 제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의 개성과 주체적인 요소도 자신 혼자서 만들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로서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쿠마테츠와 렌이 수장의 부탁으로 강한 자를 찾아가면서 그들이 말하는 강함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강해질 수 있다면, 그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4. 강함이 무엇인가?

옛날에 사람들은 의식을 치루면서 사회적 공동체를 단결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서로를 지켜내려 했다. 흔히 제사음식으로 동물을 바치며, 그들의 고기를 신에게 올린 후에 마을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로 소와 돼지가 있지만, 보통 양(羊)을 이용했고, 제사에 바칠 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좋은 의식이 될 수 있었다. 고기의 양이 많다는 것은 배고픈 고대인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이 크다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미(美)라는 한자어가 탄생한다. 아름다운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제사에 바치는 양고기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미적인 갈등에 의해 살아간다. 미라는 기준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에 따른 결과로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판단력은 어떤 상황에 놓일 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저울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결코 모두에게 일관적인 요소로 될 수 없지만,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윤리적 논리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기심과 교활함을 이성의 논리라는 무기로써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만 저지를 뿐이다.

 

다소 렌과 여고생 카에데의 만남은 너무 진부한 요소가 반영된 글리셰(cliche)로 가득하나, 렌이 카에데와 친하게 지낼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카에데 역시 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면 행동하는 모습이 렌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행패를 부리는 학생들로부터 카에데를 구한 렌은 이때까지 친구는 쿠마테츠와 타타라, 햐쿠슈보에 불과했지만, 이제 인간의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 괴물의 세계에 자란 렌은 현실의 세계에서 말소된 인간이 되었지만, 다시 인간이란 세상에 사회적인 존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의 첫 걸음으로 언어의 사용이다.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진 언어, 그리고 자신의 연배에 맞는 언어로서 교육과정을 접한 렌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 현실에서 보이는 것보다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있는 환상이 더 진실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렌에게 현실은 자신에게 진실한 세상이 아니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외갓집으로 가야했던 렌은 혼자 힘으로 집에서 나왔다. 인간의 현실세계가 아닌 괴물이란 환상적인 세계로 갔던 렌에게 자신의 존재적인 진실은 현실이 아닌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뭐든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렇게 되는 일들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 조건과 한계가 따르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감을 맛본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 이상적인 공간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렌은 괴물의 세계에서 쿠마테츠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정체성의 혼돈을 의미한다. 행방불명이 되어 다시 자신의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렌에게 다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새겨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버지가 과거의 일은 잊고, 다시 새로 시작하자는 말에 렌은 분노한다.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슬픔이 다시 떠올랐으며, 그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자신에게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쿠마테츠와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현재는 과거의 시간을 축척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과거에 의해 축척된 현재는 다시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미래에서 현실로 전환된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고,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미래를 향하여 발을 돌리는 것조차도 부정당하게 되는 셈이다.

 

쿠마테츠와 보내면서 렌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쿠마테츠와 보낸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아주 소중했으며, 쿠마테츠와의 추억은 자신을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의지할 게 없다면 자신의 가슴에 빈 공간이 생기고, 인간은 그 공간에서 나온 깊은 어둠과 아픔으로 세상을 극단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인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구멍이지, 마음 안에서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계속 가슴 속을 도려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결국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의 속내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해지고, 그 강함은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로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없다. 논리라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이 반영되어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논리로 말할 수 없는 마음이 강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카에데는 흔히 볼 수 있는 가냘픈 소녀이다. 카에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공부를 봐주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후반부에 가면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에서 용기를 내어 렌의 곁에 서준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카에데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서 강한 마음으로 렌과 함께 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억지로 보여주는 것보다 자발적인 모습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쿠마테츠가 이오젠과 대결할 때 처음에 밀리기 시작했다. 옆에 함께 해주던 렌이 인간세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에 화가 나서 싸워서 렌이 집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렌이 다시 무도장에 오자, 쿠마테츠는 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후 힘을 되찾은 후 이오젠에게 승리한다.

 

5. 허먼 멜빌의 <모비 딕>

19세기 영미문학 작가로 허먼 멜빌이 있었다. 그가 만든 소설 <모비딕>은 거의 1,0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소설이며, 소설을 읽으면 고래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괴물의 아이>는 일본의 설화에서 민담이나 전설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괴물들은 수인으로 이루어졌고, 수장으로 나오는 토끼는 자신의 옷에 연꽃을 새겨 넣었다. 연꽃은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으로 더러운 연못에도 향기로운 연꽃이 나온다는 점에서 진정 향기로운 인간은 깨끗하기만 한 곳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처와 아픔, 시련을 겪은 인간에게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교감이 있어야지 인간은 진실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모비 딕>은 그것과 반대되는 소설이다. 9살 집에서 나온 렌이 친척들이 짐 정리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책이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렸을 때 우연히 카에데를 알게 된 동기도 <모비 딕>을 읽어서이다. 이치로히코와 결투를 펼칠 때, 이치로히코는 렌이 들고 있던 <모비 딕>을 발견한 후 쿠지라(고래)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치로히코는 스스로 흰 고래(모비 딕의 한자어는 백경(白鯨)이다)이 되어 시부야의 거리를 파괴한다.

 

<모비 딕>이란 소설을 보면 주인공 이슈메일은 고래잡이배를 탑승하고, 그 안에서 이교도 용사 퀴퀘그를 만난다. 위대한 전사의 후예인 퀴퀘그는 고래잡이배에서 거친 바다를 누비며 고래를 사냥하러 왔으며, 주인공 이슈메일과 의기투합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은 에이해브이다. 그는 포경선에서 아주 노련한 선장으로 다리 한쪽을 잃어 목발을 사용하여 걸어 다닌다. 에이해브 선장의 다리를 빼앗은 것은 아주 큰 흰 고래 모비 딕(Moby dick)이었다. 몇 년 동안 복수에 눈을 빼앗겨 미치광이처럼 변한 선장은 오로지 모비 딕을 찾기 위해 머나먼 바다를 향하여 찾아간다.

 

집에 아내와 자식이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많은 고래를 포획하여 돈을 크게 벌어도 소용없다. 오로지 모비 딕에게 작살을 날려 모비 딕의 배를 가르고 그 살을 씹어 먹는 게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다. 모비 딕을 알고 있던 카에데는 그 소설에서 인간의 내면이 바로 모비 딕이란 큰 고래이며, 인간은 자신을 파멸하기 전까지 어디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방황한다는 점이다. 실제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타던 배에 탑승했던 선원은 거의 다 죽는다. 오로지 소설에서 주변사람과 상황을 관찰하는 이슈메일만이 기록의 전달자로서 살아남을 뿐이다.

 

인간을 사로잡은 집착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날린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삶의 목적, 자신의 현재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면 삶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지 못해 매우 비참하고 쓸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옆에 누가 있어도 고립된 자신과 고독으로 가득한 마음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다. 이치로히코가 모비 딕으로 변한 점은 그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을 다르나, 비슷한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소속의식으로 통한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믿었던 진실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이치로히코는 그런 자신의 어둠에 갇혀 폭주하게 된 것이다. 자신 스스로 모비 딕이 되던 것처럼 말이다. <모비 딕>과 관련하여 애니메이션 음악을 일본 밴드그룹 Mr. Children이 맡았다. Mr. Children도 제법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음악연출을 맡았을 때, 소설 <모비 딕>이 나온 점에서 Led Zeppelin의 <Moby Dick>이란 곡을 삽입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오지 않은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고래가 되어 시부야 바다처럼 묘사된 아스팔트 도로를 돌아다니는 모습, 고래가 바다에서 뛰어 오를 때의 모습, 렌이 고래와 싸우는 모습은Led Zeppelin의 <Moby Dick>하고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생각하면 소설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패배했지만, <괴물의 아이>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되어야 했던 렌은 모비 딕에게 승리한다. 그것은 렌이 모비 딕으로 변한 이치로히코의 어둠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6.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인간

<괴물의 아이>의 리뷰에서 많이 생각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나름 영상 연출과 복선관계에서 잘 배치하려 했지만, 주제의식에서 큰 독창성을 볼 수 없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독창성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늑대아이>편이 훨씬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과도기적인 청소년을 거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모험이나 드라마장르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다. 작품의 절정에 가면 쿠마테츠가 보인 결단은 인간에게 의지가 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바로 신이란 점이고, 그 중에서 정령신이란 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령들을 믿는 것을 두고 샤머니즘이라고 한다. 작품에서는 다소 토테미즘적인 요소를 보였다. 괴물들은 동물들이 수인처럼 등장했으며, 토템이란 것은 인간들이 동물을 자신의 조상이나 신으로 모시며, 그 동물의 특성에 따라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작품에서 수장인 토끼, 쿠마테츠의 라이벌 이오젠은 돼지, 타타라는 원숭이였고, 렌이 처음 주텐가이에서 마주친 괴물은 말이었다. 이 동물은 주로 12간지에 등장하는 동물이며, 쿠마테츠의 경우 곰으로 등장하나, 일본 북해도 토착민족 중에 하나인 아이누족의 종교문화가 곰을 토템으로 하므로 기본적으로 일본문화권에서 토템적인 요소를 지닌 동물들이 괴수로 나온 점이다. 게다가 이들은 수장이 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토템을 믿는 민족에게 그 토템의 동물은 신이다.

 

인간의 세계와 갈라진 괴물의 세계는 본래 분리되기보단 인간의 사회에서 잊어진 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 과거에 유지했던 신앙적 체계가 크게 변했다. 그런데 쿠마테츠가 선택한 정령신 형태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마음속의 칼, 쿠마테츠가 언제나 주장하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진짜 마음속의 칼이 되어 렌과 함께 살아간다. 괴수가 아니라 하나의 신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뭔가 집착할 수 있는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에 기대지 못한다면 자신의 소지품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행운의 부적으로 반지와 펜던트, 인형이나 목걸이는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카에데가 처음 렌에게 건넨 물건은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책갈피였다. 렌이 정체성의 혼돈으로 괴로워하자, 카에데가 그것을 행운의 상징이라 한다. 그러자 렌은 안정을 되찾았으며, 후에 이치로히코와의 결투에서도 그가 가진 고립감을 채워주기 위해 카에데가 준 책갈피를 이치로히코의 손목에 걸어준다.

 

자신의 마음에 의지할 수 없는 존재, 자신만의 신이란 존재가 없다면 어떤 상징적 도구에 자신의 마음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며, 가끔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과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 알아주는 이 없이 혼자 계속 외롭게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외로움을 채울 수 없기에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우울한 굴레를 신의 방문과 행운의 상징으로 대체하여 결론부로 보여준 점은 다소 안타깝다고 여긴다. 오히려 다시 재회한 아버지와 혹은 카에데와의 교류,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는 과정이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에데는 괴물의 세계를 모르는데 불구하고, 수장과 괴물의 주민들의 초대로 괴물의 마을에 찾아온다.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하는 렌에게,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축척된 공간적 기억을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하여 한 발을 밟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축척된 시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렌에게만 스스로 돌아보게 함으로 앞으로 나가야 할 새로운 대안으로 반증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렌은 모두 사건을 해결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검술을 두 번 다시 펼치지 않았으나, 앞으로 새롭게 살아갈 것이라면 더 새로운 모습이 좋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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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대학교 만화창작학과 박인하 교수님의 아이유에 대한 사태를 두고 가와이이 미학에 대하여 쓴 글을 보았고, 나는 거기에 대한 덧글을 단 후에 다시 답글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분의 덧글을 바라보면서 현대사회의 인간이 겪는 모순을 생각했다. 과거 여성에 대한 미디어와 대중의 시선을 보면서 이번 아이유 사태를 다시금 생각한 것은 이른바 “국민 여동생”이란 하나의 스펙타클이었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되는 사회이고, 이미지라는 것은 있는 그 자체가 아닌 만들어진 가상적 존재이지만, 그 가상의 존재성이 현실의 인간에게 하나의 사실성으로 다가오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2004년 <어린 신부>라는 영화가 있었다. 거기 주인공으로 등장한 문근영 씨는 히로인으로 연기했다. <어린 신부>에서 아직 나이가 어린 여고생이 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오신 소꿉친구 오빠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운명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결과는 그 오빠는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자신도 그 오빠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이다. <어린 신부>에서 보여준 문근영 씨의 연기는 이른바 국민 여동생이라고 불리기 좋은 사례를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10년 후의 아이유에게서는 그런 점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문근영 씨의 과거는 무척 귀여운 소녀인 점은 분명하지만, 그녀는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영화관에 등장한 게 아니라 단지 연기자 중에서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란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문근영 씨는 꾸준히 연기를 펼쳐 좋은 영화를 선보이고, 최근 개봉한 <사도>에서는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혜경궁 홍씨로 등장한다. 과거에 보이던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60살 환갑장치에서는 할머니 연기까지 완벽히 소화한다.

 

문근영 씨는 완벽한 연기자이고, 이제는 영화세계는 훌륭한 배우일 수밖에 없다. 아이유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래 되었는가? 아이유 역시 국민 여동생이란 별명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이돌문화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 관심을 가져도 아이돌 그 자체에게 관심은 없다. 여성의 성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문화산업을 통해 수익을 거두거나 혹은 그 자신조차도 그런 기회를 노리는 것만을 나쁘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만약 대중가수 프로그램에 락이 나오고, 발라드가 나오고, 그리고 아이돌이 나와 서로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면 아이돌이 대중문화에 다양성이 될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은 오히려 아이돌 그 자체가 대중문화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아이돌은 인간이지만, TV매체 혹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세계에서 하나의 신이 되었다. 신은 반드시 신성한 존재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도 가능하다. 샤머니즘에서 인간의 군주는 신의 대리인이거나 혹은 신의 후손이라고 자부했다.

 

신의 대리인에게 오는 것은 오로지 복종의 환희만 가능했다. 믿음이란 영역에서 신앙적 요소와 달리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만이 용인되었다. 최소한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전으로 통해 믿음을 요구하지만, 그 믿음과 경전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와 인류애까지 넘어간다. 종교에서 단순히 신앙생활이 믿음만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 믿음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삶의 미학에 이어지는 순간 진정한 종교생활이 탄생한다.

 

아이돌은 종교가 아니지만, 현대적 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이다. 한국에서 아이돌 이전의 아이돌문화로 보자면 조용필 씨를 시작하여 이승철, 이승환, 김현식, 임재범 등과 같은 보컬리스트(락문화)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지오디 같이 남성가수, 이제는 대부분은 여성가수로 되었다. 여성가수에 대한 광적인 반응은 남성에게는 성적인 판타지를 여성에게는 자신도 아이돌여성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다시 타인으로 투영되는 것으로 그들만의 커뮤니티 즉 사회성을 획득한 것이다.

 

아이돌가수, 그 중에서 왜 아이유만이 이런 독특한 아이덴티를 가지게 된 것인가? 아이유가 국민 여동생이란 칭호가 그렇다. 아이유는 김광석이란 포크송 가수를 좋아했고, 그의 노래를 좋아하여 많이 따라 부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녀가 부르는 곡은 팝적인 요소가 많으며, 다른 아이돌가수처럼 날카롭거나 혹은 모델 같은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국민 여동생이란 단어는 결국 친숙성을 대중들이 받아들이게 한 이미지다. 아이유란 사람이 실제 어떤 인간이고, 무슨 가치관과 생각을 하는지는 주변에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알 수 없다.

 

오로지 미디어에 의해 그녀를 그런 모습으로 보여주게 만든 콘텐츠제작자의 의도로서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민여동생이 되어야 했던 아이유, 그리고 대중의 호의는 긍정적인 요소와 더불어 부정적 요소까지 만들어내었다. 대중은 국민 여동생이란 단어에서 자신만의 공간에 있어주길 바라는 것,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것으로 보려고 했다. 박인하 교수님이 가와이이 미학처럼, 아이유는 가와이이에서 귀엽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싶고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남성이 단순히 여성을 여자 친구나 애인으로 삼고 싶다는 것 이상으로 내가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전국의 수많은 팬들이 그런 생각을 해도 아이유가 만일 결혼을 하거나 애인을 사귄다면 단 하나의 남성일 뿐이다. 여러 남성과 복잡한 관계가 되면 그 이상의 치명적인 상황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저 팬들이나 혹은 대중들은 아이유는 그렇게 보여주었으니 앞으로도 역시 그래야 한다는 스펙타클을 끊임없이 생산한 것이다. 수동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한 아이유의 모습에 곧 관객조차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수동성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생산된 것이다.

 

최근 장기하 씨와 일에서 자신들만의 세계에 균열을 발생한 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게다가 제제의 일에서 일화가 만파하다. 만약 최근 유행하는 섹시아이콘의 아이돌이 그런 대사를 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유라는 이미지에서 그런 가사를 제작한 점에서 대중과 팬들을 용납할 수 없다. 최근 아이돌에서 여성댄스그룹은 팜 파탈 이미지가 강하다. 강렬한 화장과 의상, 그리고 몸동작은 남성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 강렬함에 남성들은 거부감 내지 위축성을 느낀다.

 

이와 다르게 아이돌로서 아이유는 그런 팜 파탈 이미지가 배제된 인물이다. 팜 파탈의 이미지가 강한 아이돌에게 남성은 능동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배제된 존재로 이어진다. 하지만 팜 파탈이 없다면 그런 불안 심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강박의식에 벗어난 가수에게 예상하지 못한 가사의 등장은 분명 불안한 요소를 재발견하게 된 것과 같다. 익숙해야 할 것이 익숙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되어 섬뜩하게 여기는 언캐니적인 요소가 등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익숙한 것에 의존하려는 것은 대부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나, 이런 일이 일어난 계기는 현대사회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과거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과거의 시대를 많이 따라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급격히 변화하자 관계성이 무너졌다. 아직도 한국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많은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남성 역시 그 불리한 요소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부 소수들의 권력과 자본의 독식으로 그 외의 인간들은 소외된 점이다.

 

단순히 이런 문제를 남자가 바라보는 여성상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왜 남성이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조건에서 임금이 남성이 높다고 하나, 최근 직업군에서 남성만 할 수 있거나 여성만 할 수 있는 일의 직종은 점차 줄어든다.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종, 기술, 하부관료에서는 오히려 여성들의 강한 진입을 보여준다. 20~30년 전만 해도 가정의 모든 경제적 생계수단은 아버지로부터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버지 혼자서도 힘들고, 남녀 모두 맞벌이 하지 않으면 생계가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남성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많은 여성들도 기존 사회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불리함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그것은 남녀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라는 커다란 구조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많은 남성들은 군대를 2~3년 보낸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간다. 그러면 자신과 동갑인 여성이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직급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등록증으로 동갑이라도 회사에서는 엄연히 직상상사이고, 선임이다.

 

자신의 위치와 현실적 조건에서 느끼는 간극에서 대중문화와의 관계성에서 아이유의 인기에서 국민 여동생 이미지는 남성들이 느끼는 불안 심리와 보상 심리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심리적 안정성을 추구하려던 그들에게 균열이 온 셈이다. 가와이이 미학이란 요소에서 본다면 남성들은 자신들이 아주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감을 다시 되찾지 못하여 그것을 대체할 그 무엇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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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9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든, 동녘 출판사 측으로선 광고 효과는 크게 보는 것 같습니다. 즉 동녘 측에서 의도했든 안 했든 아이유라는 대형 아이돌 스타를 통한 일종의 “스타 마케팅” 효과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얘기죠. 저는 이런 측면에서 (야유의 형식을 빌려 진중권도 지적했지만) 동녘이 아이유 사태에 유감 논평을 냈을 때 좀 의아스러웠고, 약간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시/소설/문학작품을 사지선다형 문제 풀이식으로 가르치는 한국 국어 교육의 박제화된 논리가 저기에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윤 추구를 제1 목표로 삼는 기획사 체제로 돌아가는 한국 대중문화/대중음악계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창작 욕구와 독자적 작품 세계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활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은둔 공간에선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철저하게 상업적 논리/방법론/목표로 아이돌들을 ‘픽업’하고 조련해 하나의 대중문화상품으로 제작/판매하는 기획사들이 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섹스 칸셉트(혹은 섹시 칸셉트)를 노골적으로 적용하는 게 이제는 한국 대중문화/대중음악의 보편적 양식이 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하나의 일정한 세태/풍조로 자리잡아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와중에 혹은 이행의 과정에서 아이유 사태가 불거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도 만화애니비평 님의 위 진단과 비슷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만화애니비평 2015-11-09 10:28   좋아요 0 | URL
한국 기업형 자본주의 윤리는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게 아니라 기업주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이 인간으로 보는 것보다 상품으로 가고, 특히 여성성을 이용한 성적인 전략에서 아이유는 역으로 이용하는 컨셉으로 갔다는 것이죠.

아이유가 솔직히 하나의 인간이고 여성인데, 자신의 감정과 마음조차도 미디어에서는 매도당해야 하는 운명이죠. 아이유는 그래야 한다는 식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한계성은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감이나 취향을 적용하기에 그 미적선택의 범위가 좁고도 좁은 한국사회의 단편적인 이질감이라고 말하기에 님의 질의는 정확하게 맞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1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중의 지적이 신경질적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본 것이지요. 확실히 이번 앨범은 로리타 취향을 저격했습니다. 문제는 나이죠. 그 로리타 취향의 대상이 5살이냐 혹은 13세 이상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5세를 저격했다면 그건 정말 추하죠. 그건 소녀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범죄적 요소이니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11-10 17:17   좋아요 0 | URL
아이유 연세가 23살이면 엄연한 성인이고, 게다가 연애를 해도 무방하고, 자신의 의지로서 결혼도 할 수 있죠. 대중이 그런 아이유에게 언제까지나 소녀라는 이미지를 원하는 욕망이 보인다는 점이죠. 오덕 사이에서 로리지온 누님연방이란 영원한 라이벌이 있으니..
 

성적인 요소를 일상적으로 말하기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직장 사무실에서 직원들끼리 식사하면서 반드시 남자끼리만 혹은 여자끼리만 먹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남녀가 섞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은근히 의도하지 않게 야한 이야기로 나타날 수 있다. 점심(나까지 4사람이 먹음) 때 피팅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모델을 하는 여성이 상당히 몸매가 좋고 얼굴도 예쁘지만, 그게 반드시 오리지널이 아니라 포토샵으로 수정하고, 사진촬영기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얼굴도 예쁘다고 하여 몸매에서 허리가 저렇게 잘록한데 어떻게 가슴까지 큰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말이다.

 

이야기하면서 저런 모델은 성형외과에서 수술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체적인 구조상 허리와 가슴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가슴을 수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가 추가로 이야기했다.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면서 2차원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신체구조가 많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 근골계와 해부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움직임이 이상하고, 캐릭터의 모습이 이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해부학을 배우고, 만화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것은 아니나, 집에 만화애니메이션 개론학문을 들어가면 분명히 해부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게다가 과거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독학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하여 공부했다. 페미니즘을 연구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별이겠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신체적 구조다. 신체적 구조에 의해 사회적인 갈등이 부가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을 동시에 접어 들어가면 여성의 해부학적인 구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척추가 몸을 지탱하는 토대이다. 그런데 여자의 가슴이 너무 크면, 목과 어깨를 앞에서 누르기 때문에 경완통이 발생하고, 흉추 쪽으로 무게부담이 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보통 피팅 모델이 그렇게 날씬한 허리인데도 가슴이 큰 이유는 가슴을 수술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직원이 나는 가슴이 작은데 라는 말을 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기본적인 지식이 기반 된 발언이 묘하게 분위기를 만들었다. 가끔 밥 먹다가 이런 이야기를 몇 번 나오지만, 조금은 이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뭔가 야한 이야기주제는 일상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왜 야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가에서 조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문화에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것이 있다. 기원 전 2만 년 전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맨몸의 여성의 만든 상으로 석상의 의미는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즉 인간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관심을 가진 셈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남녀의 문제를 조선시대로 올라가면 무조건 답답할 것이라 여기나, 남성의 남근을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이 마을 사당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야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파렴치한 요소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파렴치하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그 파렴치한 행위가 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으면 태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수정관이나 정자 및 난자이식 수술이 성공해도, 그 정자와 난자조차도 분명히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동물이란 조건이 따르는 것만큼 동물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사회적인 조건과 제도적인 요소에 따라 인간은 동물적 요소가 강하게 억제되었다. 하지만 본래의 인간이 가진 본성을 모조리 통제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적 도착과 변태적인 행위들은 단순히 인간의 개인적인 의지와 판단력에서 발생되는 게 아니라 무의식 세계에 가해진 억압과 통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억압된 심리의 증세는 성적인 변태행위도 일으키지만, 다른 정신적 착란, 도착, 편집증 등 다양한 심리적 증세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모든 성적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고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53분기를 지나면서 내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이다. 상당히 야한 단어와 저질스러운 표현에 따라 성적인 요소가 강한 이 작품은 적나라한 강도가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호기심 및 욕구는 남성이 강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여성이 더 강하게 나온 편이다.

 

남녀 모두 성적인 관심과 욕구를 모두 거세당하면, 당연히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은 남녀를 떠나 호기심이 강하거나, 어느 계기로 인해 충동을 주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작품에서 성적인 욕구와 흥분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공평한 수준까지 보여준다. 왜 그런 것인가? 작품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여 학생을 보내고 사회로 나가면서도 성적인 단속을 받는다. 목에 달고 있는 PM은 조금이라도 야한 단어가 나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정부의 기관이 직접 찾아가서 벌칙을 적용한다.

 

고도로 통제된 사회에서 성적인 지식이 사라진 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에 각인된 성적 욕망이 무참하게 거세당한 것이다. 야한 내용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어떤 상황에 닥칠 경우 그것에 대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 과거의 인간은 (문명이 시작 전) 자연 속의 인간이었다면, 현대는 문명 속에 인간이다. 문명 속에 인간은 성적인 반응이 생물학적 반응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문명적인 소산물에 의해 자극되기도 한다.SOX단을 위기로 빠뜨린 군집한 피륙을 보면, 그들은 상대방의 성적인 접촉이나 자극을 원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원한다.

 

특히 상의보단 체취가 강하게 남는 하의 쪽을 선호한 점에서 그들은 행동은 변태적 행동에서 물적인 집착인 패티시즘을 보인다. 이런 문제가 등장한 이유는 바로 성적인 억압과 통제에 의해서다. 건장한 남녀라면 서로의 신체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성적인 충동은 남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기존 구세대에서는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고, 남성이 주도하는 점에서 성적인 불평등을 강조했다. 한국사회에서 과거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국으로 끌려가 돌아온 여성들이 환향녀에서 화냥년으로 바뀌거나 남편이 죽으면 시댁 가족들의 눈총에 의해 자살하는 만들어진 열녀들도 많다.

 

그러나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남녀 모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회장 안나의 경우, 오쿠마에 대한 애정공세는 사랑을 넘어 스토커 이상의 공포감을 안겨준다. 문제는 안나의 행동은 분명히 충동적으로 성적인 욕구에 의해 행동하나, 정작 본인은 외설을 모조리 단속하고 분서갱유하는 학생회장이다. 주체와 대상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인식하지 못하여 자신이 하는 행동과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서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 의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가려진 자신 안의 숨겨진 본성이 사회적인 규율에 의해 통제받는 것이다. 물론 그런 통제성이 없다면 성범죄와 각종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자체를 모조리 통제하는 것은 그 사회에 다양한 표현과 개성을 죽이는 것이 된다. 애니메이션에서 오쿠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물건을 들고 온천에 가서 그 비밀을 찾는다. 분명 그것은 야한 것은 맞지만, 야한 것이 들어가서 외설적인 물건이 아니라 예술로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다. 인간은 과거 오래전부터 성적인 요소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했다.

 

단지 직설적으로 성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그 상대 이성에 대한 환상성이 빚어진 것이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란 아프로디테, 즉 미의 여신이다. 아름다운 여신의 몸은 보면 현대적인 미녀와 다르지만, 그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적인 대상이었고, 성적인 환상력을 불어넣은 존재인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 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서 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신화에서 인간들의 욕망이 그림체의 이미지로 등장할 때,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당시 인간에게 야한 것을 그리고자하는 의지보다는 야하게 보이는 그 자체가 모두 공유하고 있던 인식이란 점이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 국가정부는 그런 예술작품조차도 부정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의 문화유산을 보면 신성성을 강조하거나 주술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들이 현대로 와서 예술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이 남은 물건조차도 예술품 내지 문화재로 남는다. 작품에서 그런 것들이 모조리 부정되는 점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두고 우리는 외설적이거나 혹은 불건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르네상스에서 발생한 미적 양식과 더불어 그리스신화에 대한 인류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거기에 야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제외된다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역사와 함께 동반한 유산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인간의 예술과 문학은 결국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발견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이다. 그런 창조적인 공간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예술로서는 승화가 된다는 점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다양한 사고와 의미를 부여하며, 거기에 따른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다. 만약 야한 이야기와 장면이 현실에서 등장하면 보통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성적 욕구 Libido적인 욕망도 느끼겠지만, 한편으로 그 야한 것이 단순히 적나라한 나체와 노골적 행위가 아닌 어떤 의미를 두고 있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성적인 요소로서 기호적인 의미도 담고 있어, 어떤 의상이나 물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편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창출하기도 한다. 도가 지나친 영역에서 분명 독이 되겠지만, 그 조차도 없다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는 점이다. 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사회를 원하는 것인가? 작품에서는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패러디를 한 안드로이드는 전기 안마의 꿈을 꾸는가라는 편으로 보여준다. 학교에 새로 온 선도부 엘리트 츠키미구사 오보로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안나의 아버지에 의해 반강제로 세뇌된 생활을 해오던 그는 자신이 남자지만, 만약 위에서 명령하면 남자인 자신이라도 여자로서 살 수 있고, 다시 남자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여되고, 성정체성마저도 외부권력에 의해 좌우된 점을 본다면 정말 끔찍한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와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는 점은 그로 인해 누군가 이익을 본다는 것이다. 사회적 통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그 사회가 감시와 통제조차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목에 달려 있는 PM은 파놉티콘이란 일망원형감시 체계를 다중적으로 관리함으로서 24시간 연속적 감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감시로 인해 조금이라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입건 후 사회의 격리로 통해 위험인자를 제거한다. 다른 생각과 다른 방향성을 거절하게 되면 그 사회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하게 된다. 문제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대중의 인식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프로파간다라는 선전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다. 실시간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 점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생각하게 만든다.

 

<1984>를 읽으면 텔레스크린이 오세아니아에 살고 있는 관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들은 오세아니아 대부분 인구로 자리 잡은 프롤(프롤레타리아)보다 조금 더 우월한 생활조건을 가지고 있으나, 그래도 맛이 없는 음식과 질이 나쁜 보급품만 나올 뿐이다. 사무실에 가서 언제나 감시받으며, 감시자는 텔레스크린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까지다. <1984> 주인공 원스턴 스미스의 옆집에 살던 남자는 평소 열심히 당 활동을 하던 바보지만, 그의 자녀들은 더 무서운 파시스트의 후보생이었다. 자는 아버지가 잠꼬대로 빅브라더 타도!”를 듣자말자 국가에 신고하여 어두운 철창이 있는 고문실까지 보냈다.

 

인간의 윤리적 의식, 도덕적 판단력이 모조리 소멸된 것이다. <1984>의 악몽적인 현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강력한 전체주의화적인 정책이다. 그런 세계는 자신과 타자의 경계는 없고, 인간은 오로지 그 조직과 사회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존재한다. 부품은 항상 여분 량이 존재하므로, 그들의 가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묘사되는 것이다. <1984>에서 인구를 유지를 위해 성행위를 하지만, 성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스미스는 마치 아내가 딱딱 굳어 있는 나무 같이 느꼈다.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다리만 벌리는 모습에 스미스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란 바로 그런 것이고, 아무 교감 없는 성행위는 단순히 동물이 새끼를 낳기 위한 동물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1984>에서 더 무서운 음모는 국가가 나중에 성욕구조차도 없애기 위해 전기조작장치를 만들려고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신경은 전기적 신호로 이루어지므로 뇌척수에 전기적 조작을 하면 성적욕구가 불능으로 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은 남녀 간의 애정과 결혼이 아닌 시험관아기 내지 유전자조작 같은 비윤리적인 영역으로 가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바로 그런 시험관 아기들이 태어나 알파, 베타, 감마 등의 분류로 나누어지는데, 열등한 유전자는 저장에 의해 수정된 난자를 64등분까지 하여 한 번 수정된 태아들이 똑같은 얼굴과 모습으로 64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세계가 과연 아름다울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성적인 욕망을 배제하는 것은 <1984><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것처럼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인간의 충동은 위험에 빠질 수 있겠지만, 그 충동이 없는 세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세상이다. 잘못된 것이 없는 세상보단 잘못된 게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 기존 사회를 유지하고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는 결국 남녀 간의 동의 아래 결혼하여 자녀를 생산한다.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성행위는 필수적이나, 만약 성행위 대신 <멋진 신세계>처럼 따로 정자와 난자를 뽑아내어 시험관에서 키워 출산시킨다면, 그 아이는 부모에게 과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부모의 사랑이란 것은 자신의 DNA를 유전 받았다는 동물적인 요소도 있지만, 같이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는 시간적 개념이 존재한다. 아니라면 남녀 간의 성행위가 부부가 된 이후에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조차도 난감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선택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이성조차도 감정의 한 가지라고 한다면, 이성은 자신의 선험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외부의 감각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본 작품을 두고 한국 사회를 보자. 최근 뉴스기사에 한국의 게임업체가 상당히 어려워지고, 많은 업체들은 스스로 기업을 그만둘 정도로 심각해졌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임이나 혹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산업은 이른바 콘텐츠사업이다. 콘텐츠사업은 인간에게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라 재미와 감동 같은 무형의 서비스의 제공한다.

 

문제는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로 이루어진 이것들은 매체로 통해 전달되므로, 매체의 검열과 통제는 게임콘텐츠산업에 치명적인 덫으로 작용한다. 그 검열의 원인은 폭력성이 있었지만, 그보다 선정성이었다. 아동 및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국회에서 법률로서 제정되더라도 시행령과 시행규칙, 훈령, 지침 등이 정부기관의 관료입장을 반영함에 따라 게임 산업의 쇠사슬로 되었다. 규제라는 가이드라인은 최소한의 경계를 막기 위해서지 모든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판단기준은 자신의 선험적인 영역이고, 그것을 개인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변의 상황과 권력관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면 자신의 객관적 인지능력과 주관적 의지가 상실하여 수동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의 본연적으로 살아야할 능동적 가치관이 여기서부터 붕괴되는 것이다. 나쁘게 될지 모르는 것을 막는 것보다 나쁠 수 있어서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닐까? 물론 SOX단을 보고 잘못된 길로 테러를 자행한 군집한 피륙을 본다면, 자유의지 대신 물질적인(인체의 온기가 스민 속옷) 성적쾌락은 성적욕망조차도 이성적으로 즐기지도 통제하지 못하고, 단순히 거기에 매달린 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욕망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성적본능과 더불어 사랑이란 감정과 이성적인 절제가 없다면 그것은 허무로 끝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히 집착에 불과하다. 오쿠마는 처음에 안나 학생회장을 동경했으나, 자신의 이성과 본능을 구분하지 못한 안나의 태도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에게 집착만 하는 스토커일 뿐이다. 이와 다르게 엉뚱하지만 중요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아야메에게 오쿠마가 이끌리고 사랑의 감정을 품는 것은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고, 너무 과도하게 지나치는 부분도 있다. 그런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없게 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성적인 요소에서 서로 이성간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것만은 아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에서 사랑이란 형태가 정신적 행위로 육체적 행위로 나올 뿐이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에서는 성적인 억압으로 통제하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이 작품에서 따로 제기하는 질문이 사랑이다.

 

안나는 이때까지 사랑을 몰랐지만, 우연한 사고로 인해 입맞춤을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고, 단순히 성적본능에 빠진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라 하지만, 사랑에 대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남녀 간의 사랑을 묻자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것은 안나가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물어봤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상적인 인류애적인 사랑도 중요하나 그 토대가 바로 개인 일상생활에서 사랑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안나가 평소 건전한 사회, 맑은 세상은 인류애적인 가치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회적 슬로건으로 강제로 집행된 폭력이었다.

 

이성에 대해 잘 모르니 호기심이 생기고, 호기심이 생기다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호기심 자체를 없애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일까? 오히려 그런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다 보니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과 사회적 가치관과의 괴리성에서 모순과 부조리가 생긴다. 불온한 생각이나 행동이 나온다는 것은 그 사회가 건전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불온한 생각이나 행동조차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회만큼 죽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과연 무엇이라 할까? 처음에 돈과 지위, 명예를 말하겠지만, 마지막은 행복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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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사도세자→정조 이렇게 내려오는 영화나 드라마 소재는 참으로 많다. 조선왕조에서 많은 왕들이 있으나, 그 왕들의 수 이상으로 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형제와 부자 그리고 많은 인척 사이에 피의 숙청으로 이루어진 눈물의 역사다. 왜 피와 눈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영화 <사도>에서 이미 스포일러 사도가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하지만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사도의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할 점이다.

 

 

영화에서 영조와 사도는 처음에는 좋은 부자관계로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고, 글과 그림에 대한 재주가 남다르게 뛰어났다. 물론 정조 역시 명문에 그림도 잘 그렸다. 게다가 학문의 뜻도 높으니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 학자군주로서 세종과 어깨를 견줄만할 존재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로 불리던 정조 시대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사도의 죽음이 큰 공이 크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와 영조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이유가 부자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처음 부분에서 루이15세를 암살하려던 하급관리 다미엥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왕의 신체는 자연적인 신체와 더불어 신분, 권력, 상징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 왕의 신체는 하나가 아니라 2중의 구조를 가진 것이다. 영조의 상징적인 왕이란 2중 구조에서 권력, 신분, 상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도의 죽음에서 왜 영조는 사도를 몰아갈 수밖에 없는가?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넣을 때 영조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온다. 아무도 뒤주에 사도를 가두고 못질을 하지 못하자, 직접 못을 가지고 망치질을 한다.

 

 

망치질 하던 영조의 손은 왠지 모르게 망설임이 보인다. 정성스럽지 못한 망치질은 그의 이중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라는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다고 하나, 그 역사적인 맥락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조는 숙종에 대해 사도에게 이야기를 한다. 숙종을 자신의 아내에게 사약을 내린 왕이다. 숙종이 등급 할 때는 나이가 아직 어린 시절이었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죽자 엄청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임금의 상에서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 예송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예송논쟁은 2번에 걸쳐 일어나고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왜 예송논쟁이 중요한가? <사도>라는 영화를 만약 제대로 보았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여기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효종이 즉위하고, 인조가 겪었던 청나라에 대한 모욕을 갖고자 북벌론을 제기했다. 이때 신하 중에서 가장 소신 있게 밀어 붙인 사람이 바로 백호 윤휴라는 선비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숙종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다. 그가 예송논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편으로 또 논쟁의 자리에 있던 것이 국가예산과 운영에 대한 부분이었다.

 

 

윤휴는 군포세와 세금의 문제, 그리고 백성의 지나친 생활고를 한탄하며, 당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백성의 시름을 놓아주고자 했다. 백골징포 황구첨정이라 하여 죽은 시아비와 이제 갓 태어난 아들에게도 군적을 올려 세금을 받은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여기에 눈물을 흘렸고,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살이 할 때는 군포세의 부당함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한 사내는 자신의 성기를 칼로 베어버렸다. 영화 <사도>는 단순히 사도의 죽음과 추후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나, 사도가 죽을 때 많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윤은 사도가 뒤주에서 괴롭게 죽자,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때 태어난 분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어릴 때 불리는 이름이 귀농(歸農)이었다. 사실 이것도 사도의 죽음과 깊은 상관이 있었다. 사도가 성품이 우수하여 많은 젊은 선비와 우호관계를 나누었다. 대부분 국가의 부정부패에 한탄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백성을 볼 때마다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도가 영조 아래 대리청정을 한다는 사실은 무엇은 말하는가? 영화는 부자관계로 보자고 했지만, 절대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것만 강조했다면 이 영화는 그저 부자갈등으로만 막을 내린다.

 

 

단지 부자갈등으로 보는 그 세상의 흐름,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는 영조에게 말한다. 사람이 있어야 예법이 있지, 예법이 있어야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조선의 6조 행정에서 예조가 있다. 예를 다루는 것을 관리한다. 특히 왕족들의 행사나 체계를 다루는 부서다. 예조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예가 조선의 통치의 토대가 되었다. 왜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의 유학이 조선을 휘둘렀는가? 사도는 공자의 유학사상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은 조선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란 주자의 성리학이 잡고 있었다.

 

 

공자의 유학은 인간을 위해 그 기본을 삼아 학문을 정비했지만, 주자의 학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에서 더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윤휴의 죽은 예송논쟁, 즉 상복착용 기간으로 문제가 되었다. 예송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고, 가문이 몰락했는가? 조선에서 예라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윤휴의 죽음 숙종에서 이어졌고, 당시 정권은 노론에게 돌아갔다. 영화에서 영조와 모종의 관계를 맺은 신하들이 병권에 대한 문제를 운운한다.

 

 

경신환국에서 노론이 득세하고 숙종은 노론과 같이 통치를 하였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에서 태어났다. 중전도 혹은 정식적인 후궁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 무수리의 아들이란 이름은 영조에게 신분적 콤플렉스를 주었다. 영조가 자신의 형을 이어 왕이 되었을 때 병권을 노론에게 위탁한 것은 신분적 한계도 있었던 것도 있지만, 왕권을 둘러싼 반정이나 쿠데타 문제를 조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병권을 잡아 반정을 일으킨 왕들은 자신이 사랑하던 형과 동생 그리고 조카마저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왕은 군주제도에서 왕권 중심 정치와 신권 중심 정치로 대립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내놓으나 그것은 신권 중심의 현실에서 그나마 왕권을 부여하려 했지만, 겉모습만 탕평이지 붕당 간의 갈등은 늘 위기의 불씨였다. 사도는 바로 그 붕당정치 안에서 젊은 남인 선비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는 바로 경신환국 이후로 권력을 잡은 사대부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군포세를 낮추고 양반의 세금을 조달하며, 군복무를 백성만 아니라 양반에게 하기를 사도는 처음 시도했다. 공자의 유학에서 선비는 하급 문관과 무관을 수행하던 자였다. 그렇기에 항상 도리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인간적 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것이 처음 공자가 생각한 인간의 예인데, 조선에서 다르게 변질되었다. 군포세 같은 경우 윤휴 때 크게 반발을 보였으며, 사도 역시 큰 반발에 벽에 가로 막혔다. 병권 같은 경우 일부 특정 정파가 모두 관직을 독점하여 독재 수준으로 이르렀다. 병권을 잡는 것은 곧 군사를 다루는 것이고, 군사를 다루는 것은 나중에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옹립하여 반정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노론이 영조에게 압박을 주는 이유가 바로 병권에서이다. 사도가 영조의 심기를 건든 이유가 분명히 모순이 있는 정치적 현실을 건든 것이고, 그것은 영조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영조는 계속 나라의 정치적 목적이고, 사도는 인간의 도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유학에서는 선비가 개인의 영역에서 먼저 그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국가의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영조가 펼친 탕평정책에서 남인들은 열세하고 노론의 강대했다. <사도> 영화에서 정조가 즉위할 때 자신이 어린 시절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고 하는데, 정조는 어린 시절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항상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사도를 죽이면서 풍악을 울리는 모습은 단순히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왕이란 신분이 명분만 좋은 자리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도가 죽고, 정조가 다음 왕위로 계승되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옆을 떠나지 않으려하던 정조를 따귀를 때리면서까지 보내려 한다. 이후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정조도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숙청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사도>는 이런 전후맥락을 통해 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부분은 채제공의 역할이 축소된 점이다. 채제공은 사도가 위기에 몰릴 때 영조에게 목숨을 걸고 말린 사람이고, 정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진정한 충신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족들의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의 이야기다. 영화는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왕족을 개인적으로 다루고 싶지만, 그것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영조의 아내가 죽고, 나이가 어린 정순황후가 중전으로 온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영빈에게 말을 낮추어 쓰는 현실에서 사도는 자신의 어머니를 외면한 아버지의 무정함에 탄식을 한다. 영조는 뭔가 성격이 다혈질 같아서 영화 대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조의 행동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집을 잡혀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했던 결벽증이었던 것이다. 옷고름이나 용모 하나라도 영조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예법, 즉 조선의 통치기구와 신하들의 감시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사도는 바로 그것이 싫었다. 조금 흐트러져도 아니라면, 중전이 아닌 친모에 대한 행동에서도 그가 바란 것은 인간의 도리였다. 인간의 도리를 위해 만들어낸 예법이 오히려 인간의 도리를 망치는 꼴이 되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묻는다. 왜 영빈에게 절을 4번 했냐고, 정조는 단지 아버지 사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라면 절을 4번이 아니라 천 번과 만 번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공자의 유학에서도 가족관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던 마음인 것이다. 정조는 사도의 마음을 이어받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했다. 단지 사도처럼 직접 대놓기보다는 은근히 말을 돌린다.

 

 

영조와 사도의 대결에서 결국 예법을 중시한 영조가 승리했다. 하지만 정조는 예법보단 인간의 도리로서 마지막 장면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에서 부채춤을 춘다. 부채에 그려진 용의 그림, 사도가 아들 정조가 무사히 자라나길 바라며 그렸던 그림,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왕을 이어가지만, 사도는 자신이 죽고 아들을 살려내어 왕으로 만든다. 피할 수 없는 가치관의 대립이 결국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사도의 죽음으로 이어져 간다. 그러나 결론은 정조의 마음이 옳고, 정조가 그리던 사도의 가치가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조는 수원에 사도세자 묘지에 종종 방문하고 수원화성을 건축하여 미래를 다지려 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축할 때 백성의 재산이 아니라 왕가의 재산으로 이용하고, 최대한 백성의 노역을 동원하지 않으려 했다. 수원화성이 정약용 선생의 기증기로 세운 이유가 바로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전에 실록에서 나온 내용을 보니 조선의 왕 성종은 길가에 다리가 잘려진 소녀를 두고 큰 형사사건을 지시했다. 그 소녀는 천민의 딸이었고, 몸에 병이 들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범인을 찾아 치조를 하고 그 소녀를 관아에서 보살피도록 지시했다. 무릇 왕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은 백성들조차 걱정하여 정사를 봐야한다.

 

 

신분이 천한 계집아이라고 천대하면 안 된다. 군주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어버이라는 점은 언제나 백성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억울함이 없도록 항상 정사에 매진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정성스럽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큰일에 그 도리를 따를 수 있겠다는 말인가? 사도는 작은 것에 시작하여 큰 길로 가려 했다. 하지만 영조는 큰 권력이란 이름 앞에 사도를 가로막았다. 영조가 권력에 무력한 이유는 그의 위치가 언제나 위태롭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노론대신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사도와 정조가 죽으면 왕실 인척 하나를 왕으로 내세우면 되는 점을 말이다.

 

 

실제 그게 정조 이후에 이루어지고,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로 이어진다. 부자관계의 이야기지만 부자끼리 나눈 대화와 그들의 뜻이 현실의 상황을 비교하여 보자면 참으로 그렇다. 작은 하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할 윤리적 덕목을 망각하는 순간 비극은 일어난다. 영조와 사도 간의 대립은 단순히 부자관계만이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시작되는 인간적 도리이다. 사도가 인간적 도리로서 아버지 영조에게 다가가야지 그가 원하던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실에 평생 한으로 살아간다.

 

 

죽이고 싶지 않아도 죽여야만 했던 영조는 평생 후회한다. 금등에 자신의 비서를 넣어 세손 정조에게 물려준 것을 소재로 만든 소설 <영원한 제국>처럼,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사도를 죽였으나 자신의 의지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예법, 궁궐에서 말하는 예조의 기능이 비극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세상의 법도나 도덕에 의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도리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조차 가지지 못하니 사도는 그 시대에만 존재한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상징적 존재다.

 

 

단지 세상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가 실천되려면 결국 누군가 희생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사도는 단지 사도세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인간의 의지다. 영조는 그런 의지도 알지만 끊을 수밖에 없는 힘이 없는 강자이다. 자신의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변의 관여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의 의견을 윤허하고 책임지는 것이라 한다. 결국 영조는 왕조사회의 군주지만, 당시 사회가 왕권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신권에 의한 정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고, 명분이 곧 예법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눈물에서 말하지만, 인간이 있어야 예법이 있는 것이다. 현대에서 법과 제도가 있지만, 그 법과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 법과 제도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과 제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무형적 존재이기에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실행한다. 사도는 영조와 부자관계로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나, 사도의 죽음에서 보듯이 세상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사도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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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영도이다. 영도에 살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나, 여기는 아직까지 지역명과 같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이다. 영도를 말하면 흔히 주변에서 영도구(影島區)라 하지 않고 영도시(影島市)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단체 관할기관에서 분명 영도구는 부산광역시 안에 포함된 지방자치단체이다. 그런데 영도를 두고 영도시라고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영도가 부산에서도 뭔가 조금 다른 지역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흔히 서울이나 또는 다른 지역에서 한강을 두고 강남지역하고 강북지역이 뭔가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천이나 해안 혹은 산간지대를 사이로 기후가 대기기상학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런 지역에 몇 군데가 있으니 그 중에 하나가 영도이다. 영도다리 하나를 차이로 뭔가 기상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영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싼 섬이다. 섬이지만 상당히 부지가 넓은 편이라 교량이 지금 4개를 두고 이래저래 왕래를 하고 있다. 영도(影島)라는 말에서 그림자 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장난으로 사람들은 Young Island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영도>를 영문으로 <Shadow Island>라고 정확히 적었다. 그림자의 섬, 왠지 태양을 빛이 보이지 않고, 태양빛 뒤로 가려진 그림자가 음영으로 가득한 곳이 영도라는 점이다.

 

영도지역에 대한 리얼리티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지만, 너무 지나친 감이 적지 않게 있었다. 영도에 거주하면서 방파제에 대낮부터 고등학생들이 담배 피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주택으로 둘러싼 공터에서 담배 피는 학생도 별로 없다. 옥상에 올라간 몰래 담배 피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나치게 미국 할렘의 모습이 생각났다. 뭔가 반은 맞은 것 같아도 반은 아닌 것 같았다. 영도가 과거에 조직폭력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영도와 남포동 중심으로 유명한 조직폭력단도 많았고, 동네 자체가 흉흉한 분위기도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다고 영화에서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점에서 과거만큼 동네의 치안이 위험하지 않은 점이다. 대낮부터 조직폭력배가 남항동이나 대평동 일대의 항구에서 사람들에게 찾아가 사기대출로 폭행을 휘두르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단지 영도다리 아래에 위치한 봉래동 일원에 보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종종 길을 가다 보면 스타렉스나 카니발 같은 차량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여자들이 내리는 것은 지나가다 본 적은 있다. 확실히 영도라는 지역을 모르는 부산 밖의 사람들이 보면 영도는 마치 범죄로 넘치는 고담시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라는 설정이 실사영상이란 점에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현실의 조건으로 따라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SF나 판타지장르가 아닌 이상 현실적 조건, 리얼리티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건에서 리얼리즘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현실과 역사적인 맥락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어중간하게 리얼리티를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영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영도할매귀신 눈에 걸리지 않게 이사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영도할매귀신이란 말은 어째 보면 미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의 문화인류학적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령 옛날 외국인들이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오면 항상 영도를 보게 된다. 밤에 유람선을 타고 온 외국인들이 영도를 보며, 부산이 엄청난 발전한 곳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마 그때가 1960년대 이후일 것이다. 영도를 보면 높은 곳까지 불빛이 들어와 있는 장면에서 그들은 영도에 엄청나게 많은 고층빌딩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사실 빌딩이 아니라 영도는 평탄한 섬이 아니라 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그 높은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니 불빛이 고지대까지 보인다.

 

영화 <영도>에서 주인공 영도가 사는 곳은 영선동 산복도로가 있는 곳이다. 여기는 영화로 촬영하기 아주 좋은 장소다. 말 그대로 서민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고, 아파트 내에 공동화장실이 있고, 집마다 평수는 대략 12평 내외로 아주 작은 규모다. 이런 집은 영도 영선동 이외에 부산역에 있는 초량동 위로 올라가면 수정동이 있다. 거기 역시 부산의 산복도로 중에 유명한 곳이다. 과거 부산에 빈곤계층이 사는 곳이 상당히 많았는데, 점점 그런 주택형식은 줄어들고 있지만, 부산 영도 안으로 들어가 태종대가 있는 동삼2동에 가면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 변기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영도할매귀신의 이야기는 결국 부산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에 하나가 영도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교통, 높은 지역, 삶의 주거가 안락하지 못한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많고, 그들이 계속 거기 사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제대로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산업근대화 시기에 많은 피난민과 구직자들이 몰려왔을 때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지대가 저렴한 영도로 몰렸던 것이다. 영화 <영도>에서 영화제목도 주인공의 이름이 영도라는 점, 형사들이 찾아와 영도에게 영도 이외에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영도라는 이름, 영도라는 지역, 영도라는 주박은 결국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영도는 태어나 어린 시절에 그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쇄살인마였고, 도끼로 시체를 토막 내는 것도 모자라 인육을 먹었다. 살인마의 아들, 그것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로 다가왔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괴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억압을 당한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영도는 영도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에게 소외와 고독 그리고 차별을 선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2명만 나온다. 단짝 친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촌형 아래서 자란다. 그러다보니 가정환경에 충실하지 못하여 비행을 저지르고, 학교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영도가 왜 불량해졌는가? 여기서 이 영화는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낸다. 조직폭력단에 들어간 영도는 거기 두목에게 불려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목은 영도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가지고 영도를 가지고 조롱한다. 영도친구 꽁이 영도를 데리고 사촌형에게 가서 그 일을 이야기하자, 사촌형은 장어구이 식당에 가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어둠에 사는 인간들이 사회의 문제와 인권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나, 거기서 엄청난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2가지의 불평등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이다. 영도와 꽁에게 얻은 불평은 후자이다. 대부분 한국사회이든 혹은 루소가 18세기 프랑스를 살았든지 바로 2번째 불평등이 우리 인간사를 고통으로 내몬다. 영도는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 아니라 나쁜 인간으로 되어야만 했다. 결국 나쁜 인간이 된 영도는 아버지에 의한 피해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로 인해 망가진 인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작중에서 영도는 성적 욕구도 거의 없었다. 물론 형 일도의 아내, 아니라면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부모를 잃은 미란에게 은근히 성적인 환상을 품지만, 이내 그 환상의 세계인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영도를 누운 채로 위에서 성행위를 하던 미란이 영도의 심장을 꺼내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도가 성적인 욕구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범죄로 동네에서 제대로 살 수 없었다. 얼굴을 봐도 누구에게 얻어맞았고, 그때 영도의 형을 데리고 가출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죄를 계속 이어받아간 영도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가 우연히 만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도라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하다못해 어머니가 사는 곳을 찾아 서구로 가는데, 바다 넘어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영도를 나나도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운명론적인 비극이다.

 

이렇듯 영화 <영도>는 인간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에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을 계속 강조한다. 유일하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영도가 죽어야 가능했다. 안타까운 것은 영도는 방황과 고독 그리고 허무 속에 살아가다 마지막으로 삶의 목표를 찾아가려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집 앞에 두고 간 커다란 곰 인형은 수배자로 도망치던 아버지가 나두고 간 것이다. 아버지의 죄에 고통스러운 인생이 되어도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애인이던 술주정뱅이 노인을 폭행하던 이유도, 그 노인이 어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죄보다 더 분노로 다가온 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무책임한 태도였다. 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결국 영도를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간다.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조금 바꾸게 된 동기는 미란의 아이 미미 덕분이었다. 일도의 아내 미란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영도의 심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도는 죽고, 미미는 남았다. 미란은 미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켰다.

 

다른 사람에게 모두 거칠었던 영도이나, 미미를 건물 밖에 놀게 하고, 노래방에서 일당으로 일하던 미란을 억지로 붙잡아 영도는 자신의 집에서 잠재운다. 미란이 미미를 걱정하고 아끼던 모습에서 다른 어른들과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자신을 버린 여자 영도의 어머니 미미를 끝까지 지키던 미란). 후반부에 영도가 죽기 전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려온다. 그 발신자는 미란, 영도는 형 일도가 죽은 후에 미란과 연락하고, 미미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큰 곰 인형을 산 이유는 자신이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미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 목적은 무참하게 파괴된다. 자신의 저지른 죄의 대가가 끝까지 따라 붙은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그는 살 수 없었다. 이때까지 그런 비극적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앞으로는 거기서 벗어나 새 삶을 찾으려 해도 세상이 역시 그를 절망의 그늘로 데리고 간다. 영화 <영도>라는 제목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Shadow Island이다. <영도>라는 제목으로 영도에서 촬영하고 영도라는 주인공이지만, 영도는 꼭 반드시 부산에 있는 영도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쇠사슬은 언제나 우리를 짓누른다. 영도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인간 누구라도 가질 수 있고, 괴물은 처음부터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과정의 연속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한 선택되어지는 게 비극이다. 영도는 가난과 고독 그리고 절망이란 운명에서 살아간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나도 영화 <영도>만큼은 절대로 될 수 없겠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영도라는 운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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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 영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문장 웃깁니다.
만애비 님 생각할 때마다 항상 뾰족구두 가지고 비오는 날 뛰어다니던 풍경이 떠오르는군요... ㅎㅎㅎ 요즘 왜 네버 블로그는 잘 안 하슈 ?

만화애니비평 2015-09-26 11:10   좋아요 0 | URL
그게 그래 웃기는 겁니까??ㄴㅋㅋㅋㅋ

진격의 오덕이 생각나는군요.요새 공부하다고 정신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