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주 웅장하게, 매우 거대하고 그리고 상당히 잔혹한 4륜 전차 경기일 것이다. 영화사에서 <벤허>는 상당히 유명하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벤허>1959년에 제작된 것이고,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무성영화 시절 15분 정도 내외로 상영된 적이 있었다. 흑백영상에서 컬러영상, 그리고 카메라 기계 및 기술의 발전에 컴퓨터 그래픽까지 더해지니 2016<벤허>Activity 느낌을 불어넣은 영화인 것 같았다. <벤허>는 본래 종교적인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 원작이고, 영화로 제작되면서 거의 1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그들의 저력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보다는 그리스 문화권에 대해 조금 더 관심 있게 보았다. 주로 플라톤이 살던 시절이고,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통한 그리스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보았다. 로마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앞부분 정도 보았다. 로마에 대해 깊이 알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 이야기>를 보는 게 정답일 것 같은데, 그 부분까지 들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다.

 

<벤허>라는 영화는 서기 원년,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시각부터 시작되는 영화고, 영화의 말미 역시 예수가 죽고 나서 벤허가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다소 영화에 대한 내용이 유출되고 있는 점에서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는 게 다소 매너위반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도 이미 <벤허>라는 영화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사랑받았기에 중요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평점을 보았다. 관객들에게 제법 좋은 점수를 땄어도,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바닥을 면하지 못했다. 내가 만약 <벤허>라는 영화에 점수를 몇 점을 줄 수 있는 가에서 10점 만점에 대략 4점이면 많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제법 잘 나온 부분은 볼거리이다. spectacle이란 어떤 이미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반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어지는 사회, 그리고 그 이미지가 강하게 다가오는 매체 중에 하나가 영화라면, 영화 역시 강렬한 spectacle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벤허>가 종교의 목적성을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세계 속의 관객이 열광하는 것은 역시 경마경주다. 내가 별을 4개를 줄 수 있는 것은 경마경주의 강렬함, 그리스와 벌이는 해전의 묘사, 초반에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부임할 때의 웅장함,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시시각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쇼트들이었다. 영화의 쇼트가 지나치게 많았다. 초반 벤허와 메살라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갈등을 빚는데 계속 카메라가 클로즈업(Close-up)으로 정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 벤허의 등 뒤에서 메살라를 바라본다. 어깨너머 샷(Over the Shoulder Shot)은 벤허의 시각으로 본 메살라는 상당히 불만이 차 있는 모습이었다.

 

도중에 카메라 기법에서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은 Walking-out side로 등장한다. 이 촬영기법은 카메라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돌아간다. 그 뜻은 피사체의 사이가 큰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벤허>는 로마에 의해 몰락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역사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기독교적인 우월주의를 나타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작품세계, 즉 서구의 사상이 매우 가부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권능, 그리고 아버지의 권능을 인정받은 큰아들에게 영광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서사구조는 유럽신화에서 그리스로마신화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많은 사람을 열광하게 만든 것처럼 북유럽 신화로 만든 <토르> 역시 그렇다.

 

주신인 오딘은 정신을 잃고, 토르는 몰니르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몰니르를 찾은 순간, 아버지와 자신을 배신한 동생을 물리치고, 다시 아버지의 권능 아래 살아간다. 한국이 가부장제도가 서구사회에 의해 깨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서구영화들이 문화적으로 가부장의 권위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권력이란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 즉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보단 아버지에 의해(혹은 그 대리인에 의해) 거세당한 자만이 남아있다.

 

<벤허>는 유대인들의 왕자, 벤허의 삶과 모험으로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민중과 다른 왕자였으나, 민중이 품고 있는 분노와 증오를 느꼈고, 민중과 같이 예수의 운명적인 날을 보고 회개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자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다. 옛날에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길가에서 돌멩이를 맞아 죽거나 이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예수가 죽은 후 비가 내리자, 그 빗물에 의해 병이 나았다는 점은 종교영화에서 비과학성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것과 같다.

 

물론 영화 이전에 소설부터 그런 요소를 집어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 뭔가 부드러운 요소보단 지나치게 억지스럽게 진행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서사구조나 연출력의 한계성을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는 액션을 강조하는 해전과 전차대회가 최고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지만, 영상과 소리는 결국에 시나리오라는 서사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방법이다. 그렇다면 서사적인 관점에서 <벤허>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

 

<벤허>는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 벤허로 통해 만들어낸 Fact + fiction이다. 사실적인 내용에 허구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이기에 최근에 이런 영화를 두고 Faction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로마제국의 거대함을 볼 수 있었고,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예수를 죽였지만, 초기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하지만 이후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전후관계성,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영상의 시작과 끝만을 생각하지만, 영화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서사는 끝으로 끝맺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벤허>가 종교성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문화가 결국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왕자 벤허가 예수를 신봉하는 점이나, 전차대회에서 로마를 누르고 이기는 것도 그렇다. 전차대회는 로마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이집트, 터키, 게르마니아 등 수많은 종족과 국가들이 출전한다. 그 안에서 벤허가 이기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벤허가 승리한다. 이 영화의 이면에는 기독교 문화가 존재하는 백인들이 앞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점을 은밀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 신화이다. 처음 벤허가 말에서 낙마하여 크게 다칠 때 가족들은 그들의 유일신을 향하여 소원을 빈다. 하지만 메살라는 다른 신에게 빈다. 미네르바라는 단어가 메살라의 입에서 나온다. 로마인이었던 그에게 미네르바는 지혜와 무용의 여신인 아테네를 의미한 것이다. 아테네 여신의 이름을 딴 그리스 국가에서 아테네 도시국가가 있다. 그리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배출한 국가였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만, 마케도니아 인간이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그리스의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그들의 신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 최고는 번개의 신 제우스이고,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신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이었다. 번개와 포도주에서 그리스 문화가 농경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양한 신을 믿은 것이다. 로마가 다양한 신에서 유일신으로 바꾼 이유는 한국에서 무속신앙이 삼국시대까지 활발하다가 불교로 바꾼 것과 같다. 종교가 다양하면 신앙이 저마다 다르고, 군중들은 신앙에 달라지고, 중앙정부에서 통치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에 정치는 종교적인 요소를 항상 동원한다.

 

이스라엘에 처음 온 빌라도나 로마의 관료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를 박해한 이유는 종교라는 신앙심은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로 바뀌어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세상이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사상의 위력은 육체적 고통까지 초월하는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발휘한다. 빌라도는 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말한다. 사실 종교가 철학과 인류애하고 연결되면 위대한 사상으로 연결되나, 군중에 의한 집단심리로 이어지면 파시즘이 되고 만다.

 

아프리카나 혹은 원시민족의 전사들이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창 하나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할까? 그들의 의식을 보면 조상과 신이 전사를 지켜주며, 전사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원시적인 주술행위지만, 그 모습은 근현대적인 사회에서 볼 수 있다. 개인은 죽어도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는 영속한다. <벤허>가 전차대회에 관객을 유도했다면, 그런 종교적인 부분은 은밀하게 관객에게 침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제작진이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사란 점이고, 영화의 맹점은 할리우드 방식은 너무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나 전차대회 장면은 상당히 당시 상황을 고증하려 하지만, 남녀(밴허와 에스더) 간의 관계는 현대 미국을 많이 반영한 것 같았다. 이스라엘은 영미문화권이 아니라 중동문화권이다. 영화에서 시대적 배경은 중동이지만, 삶의 형태는 최대한 영미문화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내가 주장하는 바에서 이 영화는 백인의 우월주의 요소를 상당히 배경에 깔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이란 이름, 신의 이름과 권위 그리고 사명까지 받은 아들과 왕자라는 점, 메살라는 로마의 인간이고 벤허의 의형제(동생)이란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까지 포용한 위대한 문화를 가진 곳이란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국의 백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제법 많은 경제력과 정치적 권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하고 있는 가혹행위를 생각하자면, 기독교적인 사랑과 포용능력은 왠지 모를 가식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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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교묘한 장치가 많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1 21:57   좋아요 1 | URL
저는 묘한 야응이가 좋으냐, 영화를 보니 겉만 번지르하지 안은 거의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가득했습니다.

기억의집 2016-09-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서구 학자들에겐 더 인정 받는다 하더라구요. 시오노 나나미같은 경우는 일본 우익 역사사관을 가지고 있어 일본의 제국주의의 눈으로 로마 제국주의를 서술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미국 영화사가 백인우월주의가 강하죠. 올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흑인배우들이 불참석을 선언할 정도면 여전히 미국은 백인우월주의가 득세인 것 같아요. 제가 미드 로앤오더 열혈 팬이어서 거의 다 봤는데 미드 보면 그나마 kkk단같은 백인우월주의를 범죄로 보는 시각이 강해서... 많이 나아진 듯 하긴 해요.

저는 요즘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데, 그래도 미국애들은 기존의 구시대적인 프레임을 깨려고 엄청 싸우더라구요. 한국언론에서 보도되는 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았어요. 앨러바마 이야기같은 영화가 오늘날 다시 봐도 재밌잖아요. 하퍼 리같은 작가가 지금 시대에 봐도 대단한 것 같아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2 08:28   좋아요 0 | URL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아직 읽지 못했는데, 목록이 올라가는군요.
나나미 역사 같은 경우 그런 식민사관이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벤허가 지나치다 못해 어설프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미국이 기존 구시대적 가치관을 깨려고 하나 대중매체는 여전하고,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은 활발하고, 그러고 보니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의 노년화가 참으로 마음 아프네요
 

<밀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할까? 한국 영화에서 항일운동열사를 다룬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과거 장동건 씨가 주연으로 나온 <아나키스트>, 최근 개봉된 <암살>까지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은 일제시대 활약하던 친일파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1920~30년대 한국사회를 본다는 것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의 애환과 비극이 녹아있다. 이때 조선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단 2가지 방법이었다. 하나는 그 세상에 발맞추어 살던가 아니면 저항하여 죽어가던가! 물론 여기저기 속하지 못한 채 타국으로 떠나는 조선인들도 많았지만, 타향조차도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이 일본에 함락되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항일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와 그리고 친일파들과 싸웠다. 영화 <밀정>에서 그런 열광의 시기가 1920~30년대이다. 그때가 가장 항일운동이 치열했던 시기다. 우리가 잘 아는 청산리전투가 1920년대부터 시작했다. 191931일의 독립선언문이 탑골공원에 울리고,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1920년대부터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특징을 보면 여러 부류가 있다. 사대부선비들의 조선군주가 잃은 것에 대한 분개심에 의한 유교성향도 있고, 대종교와 천도교 같은 민족주의자 같은 전통사상에 기반 하는 자, 그리고 일제가 초반에 탈()조선의식을 위해 도입한 자유주의가 이제는 정치적 자유주의로 변모되면서 조선인의 자유를 요구했고, 신식 사상인 자유주의 이외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자까지 항일운동 전선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밀정>이란 영화가 현재 건국절 논란과 함께 생각해야 할 점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좌파와 우파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은 현재로선 우파이기도 하나, 일제시대에는 좌파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파라고 여기던 자유주의는 왕이란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천황이란 존재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에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나라를 잃었기에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 일제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자 내지 무정부주의자가 많았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인 대종교도들이 핵심전력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은 대표적인 대종교 신자이고, 한국 대표적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우리 한글을 위해 연구한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 연구자들이 대부분 대종교 신자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언제나 독립군에게 부족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군자금을 위해 자본가들과 협력은 필수였는데, 이때 상해임시정부 자금의 젖줄이던 백산 안희제 역시 대종교 신자였다.

 

대종교란 종교가 독립군의 주축이고, 민족주의라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다른 사상과 다른 세력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독립운동을 보면 암실이나 자살테러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봉창 열사와 윤봉길 열사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장으로 유명한 김원봉 역시 그런 방식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민족주의자 중에 단채 신채호는 대종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자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신채호의 동지로 유명한 아나키스트로 이회영 역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나 과격한 테러리스트로도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밀정>을 보면 그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아나키스트와 연계되면 목숨을 걸고 적진에 침투하므로 일제 입장에서는 그들의 침로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단도를 들고 침투하여 습격하고, 총으로 저격하며, 폭탄을 던져 치명적인 타격을 날린다. <밀정>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조선독립투사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헝가리 사람이나 혹은 그 밖의 서양인들도 동참하는 이유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모든 국가의 존재하는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우던 사람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로 활약하던 시기는 세계적으로 식민지국가가 한참일 때 많이 등장한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 군부세력인 프랑코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부를 장악하고 독재국가를 수립한다. 이때 많은 의용군들이 모여 카탈로니아로 집결하여 파시스트와 싸운다. 국가와 민족 심지어 성별조차 틀린대도 모두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국땅에서 싸운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식민지 정책이나 독재정책을 펼치는 국가정부에서 보자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표적이었다.

 

<밀정>에서 조선총독부가 가장 경계를 펼친 것은 독립군도 있었지만, 의열단이었다. 독립군들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군부대로 이루어졌기에 교전을 펼쳐 진압하면 되겠지만, 의열단이나 무정부주의자 같은 과격파 암살자들은 언제나 자신들 주변에 숨어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부르주아 사회에 침투하거나 혹은 빈곤한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에도 숨어있었다. 언제나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만의 비밀경로와 비밀기지를 만들었고, 일제는 비밀기지를 찾아내어 소탕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일제의 감시를 두려워하므로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하긴 위해서는 첩보작전과 밀정요원이 필요했다. 전쟁이란 어느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무력전투가 발휘되겠지만, 밀정에 의한 전쟁은 장소나 시기와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진 작전이다. 영화 초반 자신들의 비밀기지가 탄로 나자 밀고자를 찾아내고, 그에게 평생 자신들의 주변에 오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밀고자 1명이 존재하면 그 조직은 모두 와해되고, 조직 하나가 와해되면 그 주변의 동료나 지원세력까지 무너진다.

 

일제시대 밀정을 펼친 이유는 일본경찰로 보자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밀정은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사이고, 정보의 출처에 신뢰성이 있어야 하며, 상대가 인간이기에 믿을 수 있는지 혹은 믿을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암살>이란 영화에서 이정재 씨가 맡은 배역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나 막상 뒤로 가면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던 밀정이었다. 친일세력은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서 하나도 처분되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정부의 주요관료와 군경세력이 되었으며, 이들의 후예들은 특권과 재력을 가진 사회인사로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밀정>에서 한때 독립운동을 하던 이정출은 동료들을 배신하고, 일본경찰에 투항하여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다. 영화초반을 보면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친구가 재력가의 집에서 자금을 얻기 위해 찾아오다 일본경찰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도망친다. 이미 포위된 상황에서 진행되는 총격전에서 그가 살아 돌아온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이정출은 사격을 멈추라며 창고 속에서 죽어가던 과거의 동료에게 죽음을 선택하지 말고 같이 나와 삶을 살아가라 한다. 그러나 예전의 동지는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라는 말과 함께 자결한다.

 

이정출은 자신이 배반했던 동지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를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에 한탄한다. 그리고 얼마 후 김우진 일행을 검거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려 하는데, 이정출이 히가시 부장에게 찾아갈 때 하시모토가 찾아온다. 하시모토는 이정출과 같이 의열단을 찾아 검거하라는 명을 받지만, 그가 의열단을 몰아넣는 방식은 이정출과 상당히 다르다. 이정출은 낚싯대를 연못 안에 집어넣고 미끼에 걸린 대어를 낚는 방식이라면, 하시모토는 낚싯대 대신 집적 연못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경성에 숨은 의열단원들은 하시모토의 행동을 본 후 모두 상해로 도망쳤다. 그러나 여기서 하시모토의 집념은 끝나지 않았다. 그도 역시 이정출처럼 조선인이었으나, 과거 항일운동을 한 적이 없이 순수하게 친일세력으로 가담했다. 하시모토가 이정출 옆에 붙인 이유는 히가시 부장의 의도였다. 히가시 부장은 상당한 공을 세운 이정출에게 신뢰하는 척하였으나 그 뒤로는 감시자를 붙인 것이다. 여기에 이정출은 의열단원을 모두 체포하면서도 그들을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해 첩보전을 펼치려 하나 모든 게 수포로 끝나고, 결국 하시모토와 함께 상해로 떠난다.

 

아마 영화의 모티브는 이정출이 김우진의 소개로 의열단장 정채산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고, 그 폭탄에 의해 많은 일본 및 친일파 주요 인사를 죽거나 다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항일운동역사와 의열단, 일제경찰과 친일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이 넘치는 밀정으로 두뇌싸움을 펼친다. <밀정>이 예전에 상영된 <암살>보다 더 만든 점은 영화는 단순히 액션이나 심리전으로 치중한 게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과 소품 더 나아가 카메라 앵글을 아주 잘 이용한 점이다.

 

<암살>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전지현 씨가 맡은 쌍둥이 자매역할이다. 동생이 임시정부에서 상당한 실력을 지닌 저격수고, 언니는 경성에서 친일파의 영애로써 살아간다. 그런데 우연히 정보가 잘못되어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던 언니는 아버지의 총에 의해 죽고, 동생은 언니의 이름을 살아간다. 이런 억지스러운 기계적 장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요소가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너무 드라마틱한 요소를 바란 것인가? 개연적인 요소에서 너무 떨어진 장면에서 영화에서 주제하는 바는 좋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법과 방식은 틀렸다.

 

<밀정>은 그런 억지스러운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모든 상황이 우연의 일치보단 차라리 복선과 미리 밑에 깔아둔 양념이 위로 드러나게 하여 맛을 내도록 유도했다. 영화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의열단장 정채산 역할을 맡은 이병헌 씨가 이정출을 포섭하는 장면이 참 재미있다. 나를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은 본능이나, 이정출을 믿고 싶은 것은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는 점이다. 인간은합리적인 이성을 가지에 이익을 추구하나, 자신을 움직여주는 감정과 그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 있기에 불가능한 것을 알아도, 의미 없이 죽어갈 수 있어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정출이 무사히 폭탄을 실은 열차를 경성까지 보내주지만, 그건 김우빈과 의열단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시모토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히가시 부장은 이정출을 신뢰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폭탄을 실은 열차, 경성으로 향하는 의열단원, 의열단원을 쫓는 하시모토 일행과 그 사이에 갈등하는 이정출, 위기와 갈등은 여지없이 파국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묘하게 돌아간다. 김우진은 배신자를 찾아냈으나, 그 순간 김우진과 이정출이 공모했다는 사실이 하시모토에게 들킨다.

 

위기의 순간, 하시모토는 여유롭게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하시모토 부하 중에 권총을 들고 이정출에게 다가온다. 그는 상해에서 이정출에게 심한 모욕을 받은 자였다. 그는 이정출이 결국 배신할 것이고, 여기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어떤 짓을 할 것이라 여긴 점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리되어도 이정출은 다시 경성에서 위기에 봉착한다. 처음 김우진 일행을 밀고한 배신자가 이정출을 다시 꾀어내려 한 것이었다. 히가시 부장은 처음부터 이정출을 배신했고, 이정출은 자신이 살기위해 배신했던 동지를 배신하여 일제경찰에 붙었지만, 일제경찰은 이정출을 속이고 배신했다.

 

상해에서 정채산은 이정출과 단 둘이 있으면서 자신을 당장 죽여보라 말하면서 그를 믿는다고 했고, 히가시 부장은 평소 베테랑 형상인 이정출을 믿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날렸다.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국가는 있을 것이다. 이정출이 일본을 선택한 건 더 이상 독립될 가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정출은 조선이란 국가는 포기해도 조선인이란 인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초반 연계순이 경성에 진입할 때 다른 일본경찰은 그녀를 몰랐지만, 이정출은 그녀의 얼굴을 알았으며, 그녀를 처음부터 잡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연계순이 죽어가자 이정출은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다. 처음 영화에 등장한 의열단원 김장옥이 죽음을 선택한 게 안타까워하던 이정출이었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조선이란 국가도 없었지만, 조선인이란 인간도 없었다. 정채산과 김우진이 이정출을 믿을 수 있던 이유는 국가를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을 되찾아 가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슬프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를 펼치기 전에 죽거나 체포당해 고문당했고, 차가운 감옥바닥에서 병이 들어 죽어나갔다.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부질없는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유,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한다. 이정출은 자신은 조선 대신 일본이란 국가를 선택했던 것처럼, 김우진과 의열단원들은 조선이란 국가는 없어져도 내 마음 속에 국가는 오직 조선이었다. 대한독립만세! 외치며 죽어간 김장옥 역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물론 고문은 힘들고 괴롭고 끔찍해도 자신이 조국을 위해 살아가고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자신이 살아간 길을 찾은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혹은 자신이 자신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밀정>은 아주 무거운 소재이고, 현대사회에서도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화감독의 센스가 참으로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김우진이 폭탄을 점검할 때 이정출이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밖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할머니가 처음에 이정출이 나오고, 그 다음에 김우진이 나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관객과 영화 속의 두 사람은 서로간의 관계를 알고 있지만, 화장실 밖의 할머니는 모르고 있으므로 황당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정채산이 이정출과 함께 술을 마시자는데, 계속 술잔이 이어지고, 나중에 술이 바닥이 나는 모습 역시 그렇다. 첩보심리와 위기상황이 닥칠 때 총격전과 암살이 일어나는 점에서 영화는 상당히 무겁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 내에 관객들에게 긴장을 잠시 풀어주는 연출을 도입한다.

 

영화연출과 관련해서 잘 만든 것이라 생각 드는 이유는 카메라 앵글을 참 잘 이용한 점이다. 영화 주인공은 이정출의 송강호 씨, 김우진의 공우 씨이다. 영화배우 송강호 씨는 국민배우이고, 연기력은 이미 <설국열차>로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연기했던 영화 중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은 영화 <변호인>이다. <변호인>에서 송강호 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으며, 작품 후반부 부림사건으로 잡혀온 진우 변호과정에서 카메라 앵글은 샷과 샷의 전환 한 번도 없이 약 3분 동안 롱 테이크(longtake) 기법을 적용한다. 쇼트 없이 단 한 번의 연속촬영 시간에서 송강호 씨의 연기력이 카메라의 연출을 뛰어넘은 셈이다.

 

그러나 <밀정>은 조금 달랐다. 송강호 씨가 주연배우지만, 그가 카메라에 담길 때 <변호인>처럼 강하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공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카메라 앵글은 인물이 말하는 대사보단 인물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행동을 유심하게 관찰한다. 보통 카메라 기법에서 어깨너머 샷(Over the Shoulder Shot)은 어느 인물이 다른 사물과 대상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밀정>에선 그런 관찰방법은 카메라 앵글에 드러난 인물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제3의 인물까지 반영한 몽타주 촬영기법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하던 가장 명장면은 상해로 온 이정출과 하시모토가 서로 의심하지만, 이정출은 일단 김우진과 같이 목적지로 향하고, 그 뒤로 승용차가 따르고, 그 승용차 뒤로는 트럭 하나가 따른다. 승용차는 하시모토의 부하고, 트럭은 의열단원 일행이었다. 일본경찰이 추격자를 붙일 것을 예상하여, 그 추격자의 추격자를 붙인 것이다. 김우진과 이정출이 걸어서 의열단장에게 걸아가는 것도 그렇다. 카메라를 미디엄 내지 풀 샷(Medium and Full Shot)으로 관찰하는가 싶더니 창문에서 2사람을 촬영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은 누군가 그들이 오는 장면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곧 밀정을 하고 있는 자와 당하는 자, 그리고 그 2가지의 요소까지 모두 감시하는 자가 카메라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카메라의 시선은 경성역에 도착한 의열단원이 경찰에게 잡히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보통 정면을 주시하여 수많은 사람과 서울역을 중심으로 롱 샷(Long Shot)으로 촬영한다. 그런 다음 주요인물이 나오면 Full shot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영화장면에서 지붕 아래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군중 속에서 몰래 빠져나가려한 의열단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연히 볼 수 있게 말이다.

 

미쟝센적 요소에서 무대소품이나 배경장면 역시 잘 만들었다. 1920년대는 부르주아 문화와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건축양식, 열차 내 승객차량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 부르주아 문화는 노란색 빛이 돌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회색빛이 도는 게 특징이다. 아지트 외부는 안개로 가려진다. 열차 내 객실 같은 경우 등급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고, 당시 기차 내에서 흡연이 가능한 점, 열차 지붕에 달린 조명이나 장식까지 잘 재현했다. 공간적 설정에서 밀정은 어느 특정지역에 의존한 게 아니라 어느 장소라도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마음이 참 안타깝다. 의열단원들은 목숨을 걸어도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죽거나, 죽지 않아도 해방된 조국에 오니 일제시대 친일파들은 득세한다. <대종교 천도교>라는 책을 보면, 대종교와 천도교의 종교적 가치관과 역사적 배경이 나온다. 하지만 대종교의 이야기에서 실제 대종교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종교적 신앙심보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조선의 경성에 돌아오니 일제앞잡이 순사가 형사로 돌아와 독립운동가에게 뭐 하러 왔냐면서 조롱 섞인 비난을 날린다.

 

<밀정>이나 <암살> 그리고 <아나키스트>를 보면 잘생긴 영화배우가 멋지게 옷을 차려 입는 모습이 나온다. 독립운동가 중에 제법 잘생긴 분들도 많았고, 의상스타일은 댄디즘을 추구했다. 정돈된 양복, 화려한 코트, 멋진 구두는 이들에게 하나의 전투복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무장투쟁을 했기에 항상 멋쟁이로 등장한다. 그들이 멋진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자신이 죽을지 모르기에 그 옷차림 자체가 장례식 수의였다. 그래서 핸섬하고 정돈된 옷차림은 화려하게 불타 꺼지는 촛불의 심지와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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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9-1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밀정> 봐서 정말 많이 공감 됩니다.
근데,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였어요?
전 여태 민족주의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 병립할 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11 21:22   좋아요 0 | URL
저 책에서 보니깐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 한국청년에게 정신적 지주더군요
그래서 진짜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나키스트 전세계 모임에 나가기도 했고, 여러 나라 청년들이 활동했다니 대단하지요.

사마천 2016-09-1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인은 옷이 수의라고 하더군요, 아니키스트들 모두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꺼져가는 촛불의 심지, 언제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 하루 충실해야만 했던 그들..
좋은 리뷰 잘 보았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11 21:23   좋아요 0 | URL
예비군도 예비군복이 수의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두기에 언제나 차분하고 담담한 그들의 삶이
참 뭐라고 할까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실존주의적 인간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화리뷰를 쓸 때 힘든 점은 최소 의자에 1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엉덩이가 아파올 때가 있고, 중간에 글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순간도 있다. 그냥 보통 대중영화라면 1시간 조금 넘게 쓰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영화도 있다. 또한 어떤 영화를 보고 쓰려면 맨 정신이 아니라 맥주 1~2캔 정도 마셔가면서 적어야 할 때도 있다. 글을 적는 것이란 반드시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맑은 정신에 쓰기도 어려운 작품들도 있는 법이다. 이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대중영화보단 독립 혹은 예술영화 쪽에 많이 나온다.

 

오락이나 여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대중영화는 대체로 르포르타주 형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에 근거로 한 재구성 내지 재조립 혹은 실재 영상인터뷰나 기록을 편집해서 만든 작품도 제법 많다. 지난 2년 전 한국의 비극이던 세월호 사건 때, 대중매체에선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한국의 민폐거리로 둔갑시켜 언론과 미디어로 노출되었다. 객관적인 관찰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유가족 내지 혹은 구조작업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들의 정보는 언론과 미디어, 뉴스라는 이미지매체로 통해 가능하다. 하지만 매체라는 미디어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이 같이 공존해야 기사의 배부가 시작된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우리는 그들의 입보단 평소 우리가 접하는 매체로 통해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영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직접 그들의 영화 아닌 영화 주인공으로 삼아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매우 괴롭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가 나오는 영화란 사실 영화로 보기보단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르포르타주 영화는 No Fiction으로 우리 관객에 다가온다. 물론 실제 사건 인물과 가상의 이야기를 결합된 영화도 있지만, 사실이란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아픔을 받아야 하는 예술 아닌 예술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라 하지만, 때로는 충격으로 자극되어 현실의 인식전환 계기도 된다. 때로는 생각하기 괴로운 일들까지 떠올려주는 트라우마 발현요소까지도 된다. 그래도 눈을 감거나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관객, 그것도 구경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영화는 <그림자들의 섬>이다. 그림자, The island of Shadows라 불리는 이 명칭에서 전에 생각나던 영화가 있다. 영화 <영도>이었다. 그 영화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나 살인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천대받자, 이에 대한 반사회적인 행동과 비참한 가족의 운명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버지가 떠나가고, 어머니는 도망가자, 그는 나중에 우연히 어머니의 새 남편을 죽이게 되고, 그 새 남편과 어머니 사이의 이복동생에 죽임을 당한다. 그 과정에 친형의 아내인 형수가 찾아오고, 그 형수의 가족은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영원히 풀 수 없는 저주가 <영도>라는 영화에서 보여준다. 웃긴 것은 영화촬영 장소가 영도(영선동)이고, 주인공 이름도 영도다. 부산에서 영도라는 곳은 약간 저주 내지 터부가 살아있는 장소이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자는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도에서 나오면 영도가 보이는 곳에 살지 않으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영도 할매 귀신(샤머니즘적으로 산신)의 저주라고 우습게 소리도 하겠지만, 영도라는 곳은 부산 안에서 가장 구석에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지금도 가끔 영도주변을 돌아보면 옛날 재래식화장실이 많으며, 건축물 구조가 슬레이트 지붕도 많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부산을 제2의 도시로 만들었고, 영도는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봉래산자락에 놓인 봉래동, 신선동, 영선동 일원은 산복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부산 내에서도 아주 낙후된 지역이다. 영화 <영도>처럼 <그림자들의 섬>이란 영화제목 역시 그런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그림자란 햇빛을 받아 어느 물체 뒤로 생긴 음영자국이다.

 

영도는 한자어로 影島라고 적는다. 그림자의 섬을 말하는 게 영도이다. 그림자 섬에 살아가는 그림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실제 영도에서 태어나 영도에서 기본교육 받고 영도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그림자들의 섬>을 보자면, 바로 영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한진중공업의 역사와 비극, 그리고 현실적 아픔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서 영도라는 지역이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는 영화이다. 영도는 주요 산업체가 한진중공업이 위치한다. 이 회사 주변으로 중소규모의 선박회사와 하청업체, 그 외 필요한 가게와 식당이 위치한다.

 

영도에 살면 배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어선과 어부, 화물선과 선원, 배의 자재와 운반기사 등등이다. 집에 계신 아버지도 선원이고, 내 친구 중에 컨테이너 화물을 옮기는 크레인 기사도 있고, 수산물 가공공장에 일하던 녀석도 있었다. 부산에서 항만과 어업 관련 종사자가 많은 이유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힘들었고, 글 적는 것도 힘든 것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옆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선박과 관련된 노동자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다. 아버지가 선원이기에 가끔 듣는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지를 말이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나, 아버지 옆에 계신 동료가 이런 애기를 했다고 한다. 대형선박에 사용된 용접용 전력은 매우 강하므로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용접 중에 전기가 누전되어 어떤 노동자가 감전되었는데 아주 시커먼 모습으로 죽었다고 한다. 선박수선 중에 사망하거나 다치는 노동자는 매우 많으면 그들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어둠으로 스쳐간다.

 

말 그대로 세상의 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 역시 용접 중에 전기누전으로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에 대해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일시적이고 우연일지 모르나, 그 사고에 이르는 조건은 매우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자들의 섬>을 보면서 죽은 노동자에 대한 현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나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집에 가서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 퇴근 후에 지나가는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다.

 

어느 날 산업재해로 사람이 죽었다. 회사에선 그저 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하던 동료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유명한 김진숙 씨가 증언했다. 산업재해로 죽은 동료가 자신의 집 방향과 비슷해서 같이 퇴근했다. 그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집에 아이들은 대문에서 기다렸고, 아버지가 오자말자 달려들어 달라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여전히 대문에서 기다린다.

 

김진숙이란 인간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였던 것이다. 산업재해란 쉬운 단어가 아니다. 옆에서 보던 사람이,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하루 사이에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 된다. 설사 옆에 있어도 그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사람이 된다. 영화를 보고난 뒤, 내가 리뷰를 작성하면서 내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장면이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 근로환경 개선 등을 위해 노동운동하던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자살하면서 동료들은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을 열어준다.

 

자살이란 사회적 타살이다. 죽음이란 극단적 행위로 부조리한 현실에 몸을 던지던 노동자들, 그리고 자살하기 전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들,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기억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올해 정월, 나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 게 아니라 비통한 심정으로 장례식장과 화장터, 그리고 묘지공원에 있었다.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작업 중 질식사로 사망했다. 친구는 불법파견으로 나가있었고, 근로조건인 21, 안전장구도 없이 혼자 작업하다 죽었다.

 

장례절차야 그냥 진행했지만, 사고원인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구가 속한 회사에서 소극적인 반응으로 대응했다. 친구의 시신이 한줌의 재로 변하는 순간에 내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림자들의 섬>에서 나온 노동자의 죽음 역시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 친구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고, 그저 주변 가족과 친구들에게 슬픔만 남기고 떠났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어용노조로 대부분 갔지만 일부는 남아있다. 그들이 계속 투쟁하는 이유는 내 자식과 혹은 미래에 살아가는 후예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한다.

 

영화 중간에 보니깐 지난 대선 이후 어느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그때 장례식을 열면서 영도 봉래동과 중구 중앙동을 연결하는 부산대교에서 자살한 노동자를 기리는 행진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보았다. 한진중공업에서 계속 투쟁하는 노동자와 희망버스가 올 때도 그 장면을 지나가면서 보았다. 영도에 살아가는 소시민이기에 지켜보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분노도 하겠지만, 때로는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김진숙 씨는 비계다리가 지금은 알루미늄이나 예전에 나무합판일 때 우천 시 많은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구멍 난 비계다리를 보면서 그냥 구멍이 났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기만에 찬 합리화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다고 없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그런 자기합리화에 기만적으로 주변을 외면해야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의 죽음을 보고 무관심하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운명에 빠질 아이러니가 아쉬움을 더한다. <그림자들의 섬> 이전에 노동문제를 다룬 영화로 <위로공단>을 보았다. 1970년대 공장 여공들은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 공장의 여공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기계와 장비는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은 여전히 부족하다. 화려한 밤의 네온사인, 높은 건물이 만든 마천루 세계는 누군가의 피와 고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피와 고름을 쏟아내는 그림자들은 그래도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내 마음 속에 파고드는 우울함은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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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0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주로 처리하니 보험 처리 비용이 줄어서 돈벌고, 파업하면 밥그릇 이슈로 여론을 나쁘게 형성하며 손배청구로 돈벌고... 은수미 의원이 그러더군요. 각종 커넥션들을 파악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못하도록 제동을 거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다고.
사람들이 더 파편화되어 회생되기 어려울 정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4 22:55   좋아요 0 | URL
제 맞습니다 돈 조금이라도 적게 주려고 친구가 먹던 약 가지고 보상금 비율을 조정하자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노동법이 이래 엿 같으니 참으로 한이 맺힙니다.

2016-09-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5 08:50   좋아요 0 | URL
세월호도 한국의 트라우마이듯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그 자체가 트라우마와의 투쟁인듯 싶습니다.
잊고 살아갈 수 있으나,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 불청객은 참으로 그렇네요
 

▲ 1장 주권은 양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2장 주권을 분할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 주권은 보편적 의지(일반의지)로 절대 나눌 수도 없고분할할 수 없다주권은 개인에게 소유된 권리이며보편적 의지는 국가 법률을 이루는 토대이다국가는 이루는 3가지이다입법행정사법으로 보편적 의지는 입법에 해당되며입법은 주권자의 동의로 이루어지며사적인 이익에 반영 되서는 안 된다하지만 행정적인 요소 정부의 법령은 사소한 개별적 이익이 첨언되는 부분이 있다.

   ◦ 한국의 법체계는 법률시행령시행규칙으로 나누며법률은 국회에서 시행령은 대통령의 승인시행규칙은 국무위원인 장관의 승인 아래 반포된다법률은 보편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시행령과 시행규칙은 그 정부의 구성원의 의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법률이 정부에 의해 교체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국민들은 법률에만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만일 정부가 법률 위에 있다면 정부의 통치권자는 민주주의국가의 행정기관 수장이 아니라 전제군주의 참주가 될 것이다보편적 의지로 탄생된 법률은 어느 특정세력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규칙이 아니라 만민에게 균등한 권리를 주기 위한 것이다.











▲ 3장 보편적 의지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 전체의 의지와 보편적 의지에 대한 부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중요한 부분이다보편적 의지는 개별적인 구성원들의 이기심을 모두 제외하여 남은 하나의 결정체이다즉 당장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이익으로 보편적 의지로 구성된 의사결정이다그러나 전체의 의지는 개별의 의지들이 모여 하나의 파당을 이룬 것이다이런 부분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보편적 의지가 아닌 파당을 만드는 전체의 의지는 자신들의 이익에서 찾을 수 있다.

   ◦ 국내 현실에서 신생아출산 감소는 인구감소로 이어지고앞으로 수 십 년 후 한국은 국방정치경제적 활동이 매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발생한다그 이유는 젊은 계층들이 출산을 꺼리고 있으며결혼 자체도 주저하고 있다이에 대해 국가적으로 보편적 의지를 찾는다면 젊은 세대를 늘려 한국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보편적 의지이다.

   ◦ 하지만 이것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경제학에서 자본이 생기는 것은 임금이윤지대이다임금은 물가에 비해 인상수준은 부족하고지대는 계속 오른다지대의 상승은 곧 부동산의 상승이고집값이 오르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다젊은 부부가 결혼하면 우선 집이 필요한데부동산 가격으로 집을 구매하지 못하고결혼을 보류한다또한 인플레이션에서 동산은 상업행위로 증대하지만그 자체로 조건적인 물가상승을 야기하지 않는다.











   ◦ 과거 식량 같이 특정물품에 가격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과 기술력의 발전은 생산가격이 저하(유지)시킨다그러나 상품에는 자본투하에서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이 있으며고정자본은 공장의 기계도 있지만토지세도 있다결국 원료의 가격이 오르지 않고임금이 오르지 않는데도 현재 물가가 계속 상승한다면 고정자본 내 지대가 원인이다경제학에서 지대의 상승은 임금저하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부동산 상승은 지대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화폐(동산 및 부동산공급량을 증대시켜 물가를 올린다.

   ◦ 사람들은 부동산 투자로 차액을 노리지만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건 큰 부담이고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집을 구하는 순간에 그들은 부동산 매매로 통한 차액을 노린다이런 개인적 의지가 전체의 의지로 대변되어 정치적 행위로 이어진다보편적 의지로 본다면 한국은 인구감소로 멀지 않은 미래 국방력 감소경제생산성 저하로 우려된다그러나 전체의 의지는 그런 점을 무시하고 당장의 이익을 원한다보편적 의지가 무너지는 것은 그 나라와 사회의 존속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 4장 주권의 한계에 대하여

   ◦ 주권에 대한 보편적 의지에서 개별적 이익에 대한 보상은 없으나그가 국가에 대한 의무와 주권행사는 그에게 책임을 요구하나그 개인은 자신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다가령 공화국(共和國)이란 정치학적으로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 어떤 위험에 의해 재산과 생명을 위협을 받지 않아야 하는 점이다공화국의 위협이 닥치면 개인은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나그 개인은 언제나 공화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점이다.

   ◦ 주권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마다 국가와의 계약관계이다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에서 공적인 영역에 대하여 다루지그 영역에 사적 이익을 논해서는 안 된다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에서 사적인 이익이 반영될 경우 그 사회는 심각한 균열이 발생된다만일 어느 개인에 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법률이 존재하는 경우 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닌 다시 봉건귀족사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 5장 생살권에 관하여”, 6장 법에 관하여

   ◦ 사람은 생물체이기에 자신의 생명을 언제나 보존하기를 원하고생명의 위험이나 그런 상황에 처해질 것에 대하여 자신 스스로 혹은 사회적인 보호 아래 생존권을 추구할 수 있다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각 개인마다 부여된 것이고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곧 사회적으로 맺어진 계약을 스스로 깨는 것과 같다그는 자연적으로 인간이나사회적으로 그 법칙을 깬 죄인이다사회적 합의에서 모두 공평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파괴하는 자는 그 자신도 파괴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 법률은 자신에게 권한을 주기 때문에 다른 자에 대해 똑같은 권한을 준다만약 타인의 권한을 파괴하는 순간그는 그 파괴한 권한만큼 자신에게 되돌려 받는 것이다그가 만일 법칙을 깨고 사회에 남는 순간그 사회는 계약위반에 대하여 용인하는 것이고다른 어떤 사람이 또 다른 타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순간그 사회는 혼돈의 사회가 될 것이다그러므로 계약을 위반한 자는 사회의 적이 되는 것이고그에게 남은 것은 법적인 처형과 추방만 남을 뿐이다그에 대한 사면은 재판관도 행정관리도 아닌 주권자이나그 행위는 매우 드물다.

   ◦ 한국처럼 삼권분립인 사회에서 죄인에 대한 처벌은 사법부가죄인에 대한 사면은 행정부가 수행한다문제는 행정부의 권한에서 사면되는 죄인들의 부류가 전혀 정당하지 못한 점이다루소가 말하는 사면의 범주는 살인에 대한 부분이다한국에서 살인죄는 중형에 처해 장기간 투옥되나그것은 단지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다사회적으로 약자를 내몰아 죽게 만드는 살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을 구사하지 않는다.












   ◦ 자유주의 철학과 관련하여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참고하면죄인에 대한 처벌도 중요하지만그 죄인이 죄를 저지르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개인이므로 어떻게든 처벌을 하면 되나그 자체만으로 사회 내에서 그 죄인이 저질렀던 똑같은 죄들이 멈추지 않는다그 이유는 바로 그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 법이 제대로 작동되는 나라는 공화국이고공화국은 개인의 연령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법이란 이름아래 그 누구도 타인보다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주권행위는 모두가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그러나 행정행위는 개인 간의 관계나 혹은 어느 개인의 명령인 점에서 주권행위와 다르다.

   ◦ 보편적 의지는 언제나 올바르지만그것을 지도하는 판단이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니다그러므로 보편적 의지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때로는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으로 보도록 하여 그것이 찾고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고개별적 의지들의 유혹으로부터 그것을 지켜주어야 한다개인은 공익이 무엇인지 알지만 배척하고공중은 공익을 원하지만 잘 분별하지 못한다보편적 의지를 제대로 사회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하여 제대로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 7장 입법자에 대하여

◦ 입법자는 행정가나 주권자도 아니며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것에 대하여 법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입법자의 자격은 자신을 위한 법이 아니라 자신과 무관해야 할 것이며자신이 다른 행정적인 업무와 겸임해서도 안 된다입법자가 될 수 있는 자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비범한 영혼을 소유자고높은 정신력을 토대로 인간사회에 필요한 법칙들을 만들어 낸다루소가 말한 것처럼 입법자는 기계를 발명해내는 기계 기사고군주 내지 행정가들은 그 기계기사가 만들어낸 기계를 조립하여 작동시키는 자이다.

   ◦ 기계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순수하게 만들어진 것이나그것을 조립하여 어떻게 굴리는지에 대해서는 행정가들이 처리할 부분이다그렇기에 입법자는 행정가들이 오용할 수 있는 행정착오를 방지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 수밖에 없다입법자들이 만일 덕이 없고 부족하다면 인민들이 그들을 따를 줄 리가 없고만일 그럴 자들이 위치한다면 그들의 능력한계를 보고 인민 스스로가 그들을 입법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 그러나 세상은 모두 <사회계약론>처럼 되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그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이란 말도 있다입법자가 수준이 낮은 인간이라면 그 나라의 국민 역시 수준이 낮다는 것은 반증하여 준다민주주의 정치제도는 가장 현명한 인간도 참여할 수 있지만가장 형편없는 인간도 참여할 수 있다루소는 이런 점을 알았지만입법자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에 그 미래성에 걸었다.











   ◦ 하지만 니체는 루소를 경멸했다니체는 대중사회에 대한 무지함과 경박함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했다니체가 민주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대중이 모인 자리는 온갖 거짓말과 위선이 넘치며도덕이란 이름은 광기에 의해 파멸될 수 있음을 설파한다토크빌은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좋은 정치제도라고 말한 이유도 그렇다결국 입법자를 만드는 것과 그 입법자들이 만드는 법이 인민에게 효용적인지를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민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 8장 인민에 관하여”, 9장 및 제10장 인민에 관하여 계속

   ◦ 루소가 보는 인민이란 바른 판단을 내리기보단 어릴 적에 유순하나 나이가 들면 완고해지고자신들이 가진 완고함을 버리기가 어려운 존재다게다가 인민을 통치하고 있는 군주조차 인민과 동일한 수준의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다인민이 제대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때를 기다려야 하며억지로 그들을 주입해도 의미가 없다.

   ◦ 인간이 사는 국가에서 정치구조가 복잡할수록 인민에게 주어지는 부담은 늘어가고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부담이 적어진다관료제도가 복잡한 국가의 통치자는 정무에 시달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인민의 생활을 지켜볼 수 없다그러나 하급공무원들은 중앙에서 벗어난 지방에 위치함에 따라 직접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그들 자신이 되고그들은 위로는 중앙정부를 속이고 아래로는 인민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 사이즈가 맞지 않은 옷은 찢어지거나 빠지게 되는 마련이고국가의 경우 소멸하거나 무너지게 된다인민에게 살기 좋은 정부란 통치구조가 복잡하지 않고직접적으로 행정부와 인민간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루소가 보는 진정한 의미의 강대국은 나라가 넓은 나라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통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로 본다국가 영토는 넓어도 봉건제도의 모순으로 몰락한 사례를 보자면 중국의 역사가 그렇고프랑스도 그렇다.

   ◦ 통치제도에 따라 그 곳에 살아가는 인민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고그들에게 자유라는 의지가 있기 전까지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그런 점에서 통치제에 대해 알기 위해서 2가지 조건을 관찰해야 한다. 1가지는 영토다른 1가지는 인구의 수다인구가 적은 나라에 영토가 넓을 경우 국가를 지키기 어렵고영토는 좁은데 인구가 많으면 식량의 부족으로 국가존속이 어렵다따라서 국가는 적당한 영토와 적당한 인구 비례가 맞아야 강대국이 된다.

   ◦ 이런 비례에 따라 국가는 전쟁을 통해 정복하기도 하고정복당하기도 한다인민의 수에 따라 그 나라는 영속이 가능한지 아닌지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입법자는 인민과 영토의 규모그리고 주변 국가의 형태를 보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법을 만들 때는 언제나 현재의 기준이 아니라 앞으로 전망예측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인구 규모는 단순히 전체 영토 면적 대비만이 아니다인구가 주거하는 곳이 산지평야강가해안가에 따라 다르며각 토지별 특성에 따라 인민들은 모여 살거나 흩어져 살기 때문이다.

   ◦ 인민의 특성인민의 생활인민의 모습에서 입법자는 고민하게 될 것이다어떤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인민이 존재하는 곳이 적당할까루소는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법이란 참된 굴레를 받지 않은 자뿌리 깊은 관습과 미신에 지배받지 않은 자갑작스런 침입에도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인접국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며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 전쟁에 저항할 수 있는 자들이다이들은 서로 다 알 수 있고서로 도움을 주거나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인간이다.

   ◦ 루소는 그런 자들은 코르시카 섬(프랑스 동남쪽 섬나라)의 주민이라 한다루소가 제시한 직접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이 가능한 나라는 그런 규모의 나라인 것이다현대사회로 보자면 나라규모가 작지만 모든 국민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각자 빈곤함과 나태함이 없이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하지만 대부분 국가는 거대하게 변했고이런 정치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방자치단체로 통해 직접적인 민주주의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그조차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 루소는 자신의 저작 중에 <코르시카 헌법 구상>이란 책을 저술한다인구수와 관련하여 루소는 항상 남자는 30세 이전에 결혼하여 아이를 2명을 낳는 것을 권장한다그가 시민의 자격으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구성인원이 계속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사회가 영속되지 않으면 개인이 속한 사회가 붕괴되고그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몸이다이런 관점은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에서도 나온다사회의 영속되지 않은 개인은 사회적 혜택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 <사회계약론>에 추후에 등장하는 내용이나루소가 가장 좋지 않게 보는 국가 중에 하나가 인구가 증가하지 않고 계속 축소되는 사회이다그것은 그 나라의 미래의 존속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고인민의 생활이 매우 위협받는 점이다한국은 보편적 의지로 인구감소로 인해 군부대 운영 같은 국방외교 문제만 아니라 경제 역시 문제다생산된 물품을 팔려면 소비자가 존재해야 한다만일 인구가 감소하면 당장 유아 및 아동에 대한 의류음식병원(산부인과등이 축소되고이들이 계속 성장할 쯤 교육기관이나 교육관련 산업이 축소된다마지막 이들이 성장이 완료되면 다양한 산업이 축소되어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정치경제학으로 중요한 이유는 인민의 존속은 그 사회가 유지되는가 아니면 소멸하는가에 대한 갈림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이 위기에서 구출해줄 수 있는 정치적인 제도로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그것은 입법자들이 어떤 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하지만 입법자는 인민의 손에 그리고 국민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리이다인민의 생활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지만그 정치제를 만들어가는 것은 인민 스스로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결국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이런 부분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아테네 도시국가가 오만에 찬 거드름으로 스파르타에게 망했고스파르타는 겸손함과 성실성을 잃고 빈부격차로 인해 결국 패망했다.










▲ 11장 다양한 입법 체계에 관하여

   ◦ 입법의 조건은 2가지를 고려하여 제시한다그것은 자유와 평등인데자유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행동할 수 없으며평등은 자유라는 것은 공평하게 부여받는 것이다즉 평등이 없다면 자유는 없는 것이고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사회적도덕적 불평이 인간을 억압하고 그 문제점을 소유에 대한 부분을 지적한다사유재산에서 인간이 자신을 팔만큼 가난해서는 안 되고(인간이 노예처럼 되기에), 누군가를 살만큼 부유해서는 안 된다(노예보다 위에 있어서 그 자신이 더 심한 노예가 된다).











   ◦ 루소는 입법에 대한 부분에서 그 사회의 조건산업체계를 고려하고산업체계와 사회는 인민이 거주하는 기상지리환경적 조건에 따라 조율할 것을 권장한다입법체계는 결국 그 사회에 가장 알맞은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다만일 그 사회를 고려하지 않은 법률이 세워지면 인민들은 혼란에 빠지고빈부의 격차로 인한 불평등은 심각하게 될 것이다만일 평지에 쌀과 곡식을 재배하는 국가에서 세금을 곡식이 아닌 소금이 된다면 소금을 구하지 못하는 인민들은 모두 다 감옥의 죄수가 될 것이다.

▲ 12장 법의 종류

   ◦ 법은 언제나 인민에게 좋은 결과를 주어야 한다따라서 첫 번째 기본법(헌법)은 항상 인민의 공익을 위해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공공에 대한 이익에서 보편적 의지에 따르기에 그 상황에 맞추어 법을 정비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두 번 째 법은 통치제와 구성원 간의 법이다주권에 의한 기본법은 존재하더라도 인민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제도적인 요소에서 또 다른 법적인 제도가 필요하다민법(民法)은 사적인 영역에서 활용되는 법률이다주권에 대한 법은 기본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며그 안에서 자유로운 인민들이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적영역이므로 이에 대한 법률이 필요하다.

   ◦ 세 번째는 사람과 법 사이에서 대한 법률로 이른바 형법이나 사법처리를 말한다형법은 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고 이에 대한 처리를 명시한다네 번째는 법률로 정해진 게 아니라 인간의 생활이나 혹은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누적된 습관법이다한국사회에서 습관에 의한 법은 때로는 기본법이나 민법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그것은 신화적(어느 특정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의 공통된 무의식요건이 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한국에서 이런 습관에 의한 법은 명절이 있으며어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모두 집에서 쉬거나 고향에 간다최근 전통문화가 해체되면서 차례나 제사 절차가 사라지고 있지만아직도 한국은 명절문화는 소중한 습관이다하지만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가령 남자는 만 20세 이상 되면 군복무를 하게 되어 있지만때에 따라서는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군복무를 하지 않은 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현실적으로 차별을 두고 있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 2부에 대한 정리 및 고찰

   ◦ <사회계약론> 2부는 주권에 대한 고찰전체의 의지와 보편의 의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보편의 의지는 이른바 우리에겐 헌법을 시작하여 법률을 말한다법률은 그 규칙이 지배되는 곳에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지켜야 하는 약속이다만일 법률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루소는 그에 대해서 사회계약을 어긴 자는 그에 합당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한다즉 보편적 의지로 만들어진 법 앞에 모두가 지키는 순간 모두에 대한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그것은 자신의 생존권이 보장받는 것이고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는 권리에 대해 인민은 자신의 공화국을 지킬 의무가 있다.

   ◦ 루소가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중시한다그리고 그 정체는 한국이나 대부분 자유주의국가에서 채택 중인 대의(간접)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이다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적당한 규모의 영토와 인구가 형성되어야 하고그들은 서로를 잘 알 만큼 신뢰가 필요하며서로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가난해서 안 된다루소는 사유재산으로 인한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이 바로 인간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 지나치게 가난하면 인간은 비굴해지며자신의 생존권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이런 부류가 증가하면 인구수가 증가하지 않아 공화국의 사회적 기능유지가 불가능하게 되므로 결국 국가는 붕괴할 수 있다공화국이 제대로 잘 운영되려면 우선 공화국의 지배이념인 법률을 확립되어야 하고법률을 만들어야 할 부류는 주권자도 행정가도 아닌 입법자가 가능하다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입법자는 외국인이 맡은 경우가 있는데외국인은 자신이 그 나라의 이해당사자가 아니기에 공정한 시선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 <사회계약론>이 정치사회학으로 높은 도서인 이유는 정치체에 대한 고찰에서 사회학이란 개인을 사회 속의 하나의 존재로 간주하여 객관적인 자세로 주변 상황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입법자가 만일 외국인이 아닌 국내인일 경우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지 비범한 자이어야 하는데만일 그가 개인적 이익에 함몰되어 있다면 공익을 위한 법률을 제대로 정비할 수 없다일반 개인은 자신의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고그 개별적 이익을 모두 원하는 부류는 전체의 의지로서 파당을 형성한다.

   ◦ 전체의 이익을 배제한 순수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공익에 대한 검토가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기능이 부여되어야 한다따라서 입법자는 자신이 그동안 과거에 해오던 행적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하지만 입법자를 선출하는 자는 결국 인민이다인민이 자신에게 주어진 지적 수준과 판단력이 없다면 입법자 역시 그에 따라 선출된다인민은 억지로 주입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기다려야 한다.

   ◦ 입법자가 법을 만들 때에는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외교상황을 보고 판단하여 입법해야 한다또한 입법을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유와 평등이다인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와 그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평등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인간이 자유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노예에 불과하다입법자의 역할은 자신과 살아가는 인민들에게 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하지만 법은 입법자가 만든 기본법만이 아니라 행정 내지 사적이해 관계에서 나오는 민법죄를 지은 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형법법은 아니나 법 이상으로 그 나라 민족이나 지역사람 생활에 영향을 주는 습관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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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0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과목이 공금한데요..^^?

만화애니비평 2016-09-02 10:48   좋아요 0 | URL
환경공학과 입니다. 공대생이죠..ㅎㅎ

마립간 2016-09-02 12:30   좋아요 0 | URL
공학의 아버지는 과학이고, 과학의 아버지는 철학이죠.

syo 2016-09-0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입이 떡 벌어지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09-02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졸음이 와서 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계약론 현실적 담론

   ◦ 21세기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고, 모든 국가의 주권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이나 세계 민주주의국가 헌법에서 국민주권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인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나왔다.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이기도 하지만, 혁명가들의 복음서라고 불린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론>이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동기는 우선 유럽에선 1789714일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전쟁, 19세기 남미 시몬 볼리비아의 독립혁명, 20세기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까지 이어진다.






   





   ◦ 민주주의국가 체계에서 자유주의국가와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부분에서 루소의 사상은 <사회계약론>에서 좌우파적인 분리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가장 중시했고, 자유와 평등에서 루소는 평등을 중시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평등권이 인간에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자유권과 평등권에서 현실적 정치사회경제 영역에서 다소 어긋난 반응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루소가 살던 시절은 자본주의체계가 도입하려던 시기고,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서 프랑스대혁명은 자본주의 정치체계가 도입되고,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이라고 말한다.









   

   ◦ 평등은 인간의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생존권이고, 자유는 인간의 권리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사유권이다. 하지만 루소의 사상을 보면 생존을 위한 자유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사회계약론>에서의 간극은 바로 소유권에 대한 관점에서 루소에게 좌파와 우파의 영역이 겹치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과 사회계약론

   세계 3대 혁명으로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대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달리 민중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한 혁명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 칭하는 헤게모니를 뒤집어 피지배계급 대상이 지배계급으로 되는 정치사회적 현상이다.

   루소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가 될 수 있던 계기는 그가 살던 시절, 계몽주의자와 백과사전파인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와 함께 지식인 사회에 있었다. 다른 자들은 프랑스국왕과 귀족의 어리석은 행정을 비웃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민중은 없었다. 프랑스의 대부분 국민들은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였던 것이다. 루소는 계몽주의 엘리트와 다르게 오히려 자연과 벗하는 농민을 존중했고, 도시에 가난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안타까워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신체적 불평등보단 오히려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에 목격했고,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 보았다. 루소는 살아생전 <에밀><사회계약론>으로 국권과 교권에 대한 비판으로 현상수배자로 몰렸으며, 그가 50~60대부터는 엄청난 탄압과 멸시 속에 살았다.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으면 그가 지나가던 길에 거리에서 달려오던 큰 개와 부딪혀서 기절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파리 경찰청의 간부가 군악대를 거느리고, 루소 집에 와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루소에게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들은 루이16세가 있는 왕궁까지 찾아와 조롱거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루소의 <에밀>은 금지도서가 되었지만, <에밀>에서 모든 사람들은 목수가 되어야 하거나 농업기술자가 되어 자신만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루이16세의 취미생활은 자물쇠제작이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 상류여성들은 자녀를 출산하면 자신의 모유가 아니라 유모의 모유를 수유했는데, <에밀>에서 친모가 수유해야 아이의 심신이 탁월해진다는 말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모유를 직접 수유했다.

   루소가 실제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인사가 된 것은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등과 같은 오페라를 제작했고, 낭만주의 소설 <신 엘로이즈>는 당시 여성들의 모든 마음을 빼앗았다. 프랑스대혁명 이전 유럽은 책 가격이 아주 비쌌다. 보통 책 1권이면 가족4명인 가정에서 2주 동안 생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루소의 명성은 높아지고,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현실에 비관하는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 읽혀지고, 추후 프랑스대혁명에서 혁명가 지도자 중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은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혁명과 혁명정부를 수립한다.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생 쥐스트는 국민공회에서 프랑스헌법을 <사회계약론>을 토대로 만들었고, 혁명 이전부터 이들은 찻집이나 호프, 혹은 시장거리에서 루소의 사상을 전파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시작은 미국독립운동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자신의 적대국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고, 전쟁에 따른 예산낭비는 국고를 바닥나게 했다. 부족한 세수를 해결해야 하나,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납부를 거부했고 계속 농민과 노동자에게 그 짐을 부과했다. 게다가 봉건영주의 지방자치통치가 중앙집권화로 이어지고, 지방의 농민들은 점점 빈곤과 부조리에서 불만이 쌓여갔다. 전쟁이나 세금, 그리고 이 상황에서 왕족과 귀족의 생활의 현상유지는 프랑스 전역의 국민들을 불만을 야기했고, 그 불만의 에너지가 일정수준에 이르자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졌.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의 사상을 보고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민중의 분노가 우선 누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노를 하더라도 그들이 겪은 문제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고,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나 방법론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했다. 프랑스 국민의 분노는 도화선 없는 화약덩어리라면, 루소의 사상은 그 화약덩어리에 도화선을 붙여준 셈이었다.


1부 시간에 나온 질의 및 의문사항 정리

수동적인 인간에 대하여

   루소가 말하는 수동적인 인간은 자신의 판단력에 의해 모든 것을 관찰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인기나 유행이나 타성의 존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부분은 단순히 정치사회적인 요소가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진보가 인간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는가에서 루소는 부정적인 관점으로 답했다. 학문은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고, 예술은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루소는 타인의 가치에 치중하는 인간을 비판했다. 이런 요소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에도 담론할 수 있다. 루소의 사상은 18세기이나 21세기 현대철학자에고 통용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수동성을 제대로 비판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유행에 매몰된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대중매체에 파묻혀 구경꾼에 불과하게 된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처럼 예술과 미디어는 인간에게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인간의 생활에서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스펙타클이란 단어로 통해 정의했다. 스펙타클이란 이미지가 매개되어진 사회이다. 이미지란 눈에 보이거나 혹은 우리 관념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아침에 거리를 걷는 사람이나 차로에 움직이는 차조차도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되는 미디어에 비판되는데, 미디어에 의해 사람들은 의존하고 열광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주어진 정보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상실되고 대신 미디어에 따라 움직인다. 수동적인 인간이 스펙타클이란 미디어에 드러난 이미지에 열광하면 할수록 더 심각한 스펙타클러가 된다. <루소사상의 이해>에서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연극에 관한 편지를 보내면서 프랑스에 유행중인 연극에 대해 비판했다.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수동적인 인간이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다는 점이다. 연극에서 일어난 이야기 속에 치중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망각한다는 점이다.











   루소가 원하는 예술은 모두가 같이 참여하는 예술행위이다. 가령 한국에서 농촌에서 행해지던 농악놀이나 부산 어촌에서 행해지는 용왕제일 것이다. 모두 같이 의식을 즐기며 너나 할 것 없이 스스로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루소의 예술사상은 20세기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하고 연결된다. 그의 반미학적 관점은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프랑스 상황주의 운동과 맥락이 있고, 소외된 민중을 주체대상으로 또한 식민지 개발반대와 미개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인민이란 무엇인가?

   인민(人民)이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인이다. 즉 국민(國民)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나, 인민은 국민과 다르다. 프랑스대혁명 시대, 왕정시대의 국민(國民)은 국가주권을 가진 민주주의사회의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와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인간을 무엇이라 칭해야 하는가? 프랑스대혁명 이후 파리의 사람들은 모든 남녀노소를 이렇게 칭했다. 시민(citoyen)이라 불렀다. 영어 citizen이란 시민(市民)이란 뜻으로 어느 특정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민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민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거주자와 구성하는 자에서 후자 쪽이 능동적인 인간이다.

   인민(人民)이란 단어를 영어로는 people이란 뜻이다. 왕정시대에 국가주권이 없는 국민은 신민(臣民)에 불과했다. 그들은 주권 없는 국민이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고 결국 국가를 만들었다. 인민은 국가수립 전부터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인간을 말한다. 하지만 인민은 국가를 만들기도 하나, 또한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범주를 어디에까지 넓혀야 하나?











   20세기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 중에 존 롤즈가 있다. 빌 클린턴이 하버드대학교 시절의 은사이고, 그가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 초빙되어 식사대접을 받던 미국 철학자 중에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의 저서로 <정의론>, <정치적 자유주의>가 있지만, 그가 죽기 전에 창간한 도서로 <만민법>이란 책이 있다. 영어로 The raw of peoples이다. 여기서 만민(萬民)이란 peoples이고, 만민은 인민들이란 뜻이다.

   롤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나 실현가능한 유토피아적 자유주의 철학을 추구했고, 그의 사상은 칸트의 사상에서 나왔으며, 칸트는 루소의 <에밀>을 읽은 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3대 비판을 내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이란 저자를 집필했으며, 루 소 역시 <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발췌>, <생피에르 영구평화안 비판>처럼 자유주의철학은 이상적인 세계건설에서 이성적 인간을 추구했다.











   롤즈는 칸트주의자로서 <만민법>을 집필했고, 그가 추구한 사상은 합리적 인간이 아니라 합당한 인간을 추구했다. 합리적인 것은 상대방에게 서로 피해주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합당한 인간은 타인에게 선을 제공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상인 점이다. 그러나 인민이란 단어가 오용되는 경우가 있는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중국 같은 겉으로 공산주의라 말하면서 속으로 자본주의와 유교이념을 동시에 추구하는 국가를 볼 수 있다.

   인민에 대한 관점으로 20세기 여성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사상으로 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로, 나치 아우슈비츠수용소장인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서적을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을 3부류로 구분한다. people(시민 내지 인민), mobs(선동가), mass(대중 내지 군중)이다. people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고, mobsmass를 선동하는 자이다. mass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people 내지 mobs의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부류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인민(people)이란 모든 정치사회적 행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는 참된 인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에 대하여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에 대해 사유재산이 문제라고 한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강자와 약자, 최후에 주인과 노예로 이어져 영구 불멸한 인간불평등이 시작되는 것으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말하고 있다. 루소가 토지점용에 대해 허락하는 점은 아무도 그 땅에서 살지 않고 필요한 땅에서만 농사를 지어가는 것이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에서 경제적인 관점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중상주의 내지 중금주의 시대 유럽이 아니라 무역의 교류와 분업을 통해 필요한 재원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루소의 그런 관점은 <정치경제론>에 드러나는 바이고, 루소 역시 인간의 생계를 위해 농촌을 황폐화 시키지 말 것을 권용했다.










   루소는 식량이 가장 싼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식량이 너무 비싸면 인간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밀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라 가장 필요 없는 사람이 먼저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밀로 가발을 만들고, 주스를 만들기 위해 물을 소모하여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촌이 가장 식량이 부족하여 농민은 논밭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의 성장은 농촌을 착취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으며, 농촌의 황폐화는 식량문제와 더불어 현대에서 말하는 환경오염의 문제도 일어난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에서 농지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가령 1토지에 노예1인의 생산량과 자유농의 생산량의 차이는 3배라고 한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일구는 토지에서 높은 수준의 식량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식량의 질과 양은 저하된다. 루소가 말한 것처럼 너무 많은 땅을 가진 자는 자신이 아니라 주변 인간을 농노로써 농사를 짓게 한다. 노예인 자들의 능동적으로 농사를 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농사를 하는 것이다.










   루소의 <정치경제론>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서로 합의하자.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는 수고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사소한 것을 내게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섬기는 영예를 허락하노라.”, 이 단어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그대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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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9-0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덜덜한 페이퍼네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서인지, 그런 흐름이 전세계적인 추세여서인지 올해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저자가 루소네요.

2016년은 루소의 해인듯. 전작해야겠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19:19   좋아요 0 | URL
루소사상은 맑스와 롤즈를 시작해도 닿인 곳이죠.
무서운 양반입니다..참

붉은돼지 2016-09-0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소생은 루소는 하나도 읽은게 없군요 ㅜㅜ
제가 요즘 고백을 좀 많이 하고 있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19:19   좋아요 0 | URL
루소의 <고백>이 생각나는데, 9월은 고백의 달이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만애비, 롤스 하면 만애비 !

만화애니비평 2016-09-01 20:04   좋아요 0 | URL
맑스도 포함해줘용~~

기억의집 2016-09-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루소 페이퍼 올리신 적 있을실 때 루소의 책을 샀는데 아직도 안 읽고 있네요. 루소가 대단하긴 합니다. 불평등한 신분제 시대에 자유와 평등을 말하다니.

만화애니비평 2016-09-01 23:14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조차 없던 민중을 앞으로 올린 점에서 참 대단한 사상가죠

기억의집 2016-09-01 23:23   좋아요 0 | URL
참 이런 거 보면 사회 변혁의 시작점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이런 사상가(철학자)가 위대한 단순히 지식을 전파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