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모바일 접근성, 모두를 위한 비즈니스 확장
수크리티 차다 지음, 김현영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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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성이란 개념은 늦게 잡아도 PC 운영체제인 윈도 시절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아마 제어판에 들어가 보면 접근성 항목이 있었을 테고, 이후 스마트폰 설정에도 보다 세밀화한 코너가 마련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판단 후 다시 들어가 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책을 쓴 분은 안드로이드 개발자이신데, 접근성이란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고 더 구체화하며 더 강력한 기능을 부여하여 전개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모든 프로토콜은 이상적인 내용과 비전을 담아 전문가들이 정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프로토콜을 모든 개인과 회사들, 특히 운영체제와 브라우저를 만드는 큰 회사들이 일일이 준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p34를 보면 웹 컨텐츠 접근성 지침이 설명되는데, 이를 줄여서 WCAG라 부릅니다. 이는 네 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는데(p35), 인식과 운용, 이해의 용이성, 견고성 등이 그것입니다. 이 원칙들을 어떻게 준수할 것인가? 책에서는 그 수준(준수하는 정도)를 A, AA(더블에이), AAA의 세 레벨로 나눕니다. 

요즘은 한국 TV 드라마를 봐도 재방송에서는 한국어 자막이 대부분 깔립니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화면을 가린다며 불평하기도 하나 누구나 차별 없이 컨텐츠를 향유해야 한다는 원칙에 수긍하고 변화한 풍토에 적응하는 편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이 책 p42를 보면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정보를, 해당 감각이 불편한 이들에게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방법이 제시되었습니다. p43을 보면,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의지하는 야후 파이낸스가 제공하는 "오디오 차트"가 나오는데, 주식(혹은 어떤 금융상품이든) 가격 변동 차트가 안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 정보를 전달하는지 개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소셜 미디어입니다. 이런 걸 쓸 때에도 이제 모두에게 차별 없이 더 편리한 사용을 배려할 필요가 있겠네요. 대체로는 이런 컨텐츠가 유저들에게 제목을 가장 먼저 읽히게 하고, 제목-이미지 설명-가격 등을 함께 그룹화하여 개별 항목으로 주의가 분산되지 않게 하라는 지침이 있습니다(p80). p82를 보면 안드로이드 앱에서 어떤 코드를 집어넣어 이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네요. 또 콘텐츠의 흐름을 가로 또는 세로로 제한하여 쉬운 추적과 독해를 도우라고도 합니다. 

사실 특정 옵션은 이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들을 위해서는 비활성화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접근성 코너(운영 체제에서)는 이를 위한 것인데, 아쉽게도 이 조건이 그리 잘 충족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안드로이드 레벨에서 이를 허용해도 기기 제조사의 배려가 부족해지기도 합니다. p108에 이에 대해서 자세한 논의가 나오는데, 개발자들이 물론 수고가 많겠습니다만 원칙에 보다 충실하게 전향적인 태도로 임했으면 좋겠네요. p109의 한 구절, "글로벌 설정 준수"라는 말도 그 함의가 다르게 다가오는 듯도 하고요. 

모든 규약이 그렇지만 서로 충돌하는 항목이 반드시 있고, p143을 보면 타깃을 크게 설정하는 쪽으로 권장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이 지나치게 넒어질 때 탐색이 오히려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배율을 높일 때 하나의 고정된 방향만 가능하게 하는 UI 팩터를, 사용자 설정을 통해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더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웹을, 또 모바일을 이용하게 돕는 환경은, 결국은 특정 부류의 이용자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길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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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체코 - 최고의 체코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북, 최신판 ’24~’25 프렌즈 Friends 37
권나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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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는 대략 10년 전부터 한국인들도 새삼 그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알아 보고 부쩍 자주 찾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공을 들여 경영하던 제법 넓은 영지였고, 독립된 군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은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선명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냉전 시대에도 고유의 문화가 발달했음은 물론 공산권 중에서는 공업이 비교적 잘 발달한 지역이라서 생활 수준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관광 인프라도 좋을 뿐 아니라 개성 있는 문화 유적도 많아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구경 오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세기 초에 완성된 카를 교(橋)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한데, 이 이름이 유래한 카를 4세만 해도 보헤미아를 고유의 영토로 다스리던 군주였고 합스부르크 가(家)보다 더 명망 높던 혈통이었습니다. 이랬던 가문과 국가가 한번 세력을 잃고 나니 백성은 백성대로, 왕가는 왕가대로 쪼그라들어 강대국의 핍박을 받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으니 한국인들에게도 남 일 같지 않은 사연입니다. p142에 카를교 박물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p154를 보면 우 파보우카, 체르나 마도나 같은 카페 명소들이 소개되는데, 체코가 원래 가톨릭 전통도 유구하지만 프라하의 defenestration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종교개혁의 본고장이기도 하며 더 오래 전에 위대한 후스도 배출했을 만큼 신교의 개성도 강하게 풍기는 고장입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들이 터잡아 활동하고 공업이 발달한 것도 진취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의 영향이 없었다고 결코 단정할 수 없습니다. 

p170에도 나오듯 체코의 랜드마크 하면 또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유럽은 게르만, 슬라브 가리지 않고 상무(尙武)적인 기질이 강했으며 귀족 신분제 자체가 무장의 배타성에 상당 부분 기반하여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귀족들 사이에 문예의 교육도 중시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방어가 가능할 정도의 무술은 필수 소양이었으며 무력으로 나와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올바른 귀족 대접을 받기 어려울 정도였죠. 같은 페이지에 나오는 국립 박물관은 외국의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고 이 나라의 매력에 푹 빠져 볼 수 있는 필수 코스입니다.  

로마 대약탈로 인해 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시의를 잘 탄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이 유럽 곳곳에 스며듦에 따라 종교의 자유는 시대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17세기 초 들어 30년 전쟁이 터지고 실력 위주 의 풍조가 확산됨에 따라 가장 출세한 인물 중 하나가 용병대장으로 유명한 폰 발렌슈타인이었는데 책 p214에 그의 궁(宮)과 정원이 소개됩니다. 한국 중등 교육 과정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인지도도 높고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죠. 바로 맞은편에 카프카 박물관이 나오는데 이 역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사랑받는 문인을 테마로 삼은 곳입니다. 

13세기 보헤미아 왕국(이미 이때 대공령 따위가 아닌 버젓한 왕국이었습니다)의 위세를 드높인 바츨라프 2세 때의 영화를 증명하는 쿠트나 호라(p308). 은이 화폐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중국에서도 명대에 들어와서나 가능했는데 보헤미아에서는 이미 이때 은광에 기반하여 조폐 기능까지 행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p314를 보면 성 바르바라 성당이 나오는데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본 곳입니다. 그 내역은 수호 성인(성녀)인 바르바라의 행적을 기림인데 책에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처럼 전화(戰禍)와 외침(外侵)을 많이 겪은 나라이지만 p390 이하에 잘 나오듯 고딕 양식의 종교 시설이 이처럼 잘 보존된 나라도 드물다 싶을 만큼, 대체 나라 전체가 예쁘고 개성 강한 유적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체코입니다. 그런가하면 모던한 카페나 맛집도 많아서 유럽 안에서도 젊은이들이 분위기를 사랑하고 즐기는 힙한 맛집이 많아서 요즘 같은 국경 없는 시대에 세계 각국의 청춘들이 모여 추억을 만드는 체코. 한 권의 컴패니언과 함께 멋진 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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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열림원 세계문학 4
헤르만 헤세 지음, 김길웅 옮김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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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힌두이즘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담아 창작했던 고전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단일 정체성을 가진 대각성인이 한 분 있었는데, 이 소설 속에서는 먼저 깨달아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고타마라는 인물이 있고, 고귀한 태생의 젊은 구도자인 주인공 싯다르타가 따로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싯다르타는 살짝 싱클레어를 닮았고 고타마가 데미안 포지션이기는 하나 훨씬 정서가 안정되었고(ㅎㅎ) 보편적 도덕성을 지향하는 개성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배경도 인도이며 분위기가 심오하고 신비롭기는 하나 이 장편에서 표현된 철학이 과연 불교와 깊은 관계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그저 헤르만 헤세 고유의 유니버스로 파악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적 싯다르타가 구도의 길을 걸을 때에도 온갖 사악한 영들이 끼어들어 집요하게 그 득도를 방해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p65에 나오듯 마라가 빚어내는 마야의 베일은 그의 눈을 어지럽히지만, 싯다르타가 어떤 필터를 통하지 않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볼 때 온 누리는 색(色)으로 마법을 부립니다. 그 색은 물론 구도(求道)와 무관하게 비천한 감각과 욕망을 따를 뿐인 평범한 인간의 눈에도 그리 보이지만, 이 시점의 싯다르타 눈에 보이는 의미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이 형상은 대체, 왜 다른 모습이지 않고 그 모습 그 색이라야만 하는가, 이런 심각한 의문과 함께 바라본 형상은, 이제 싯다르타를 전혀 다른 세계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색이 비로소 공(空)임을 그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공(空)인지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p86에 나오는 카말라와 싯다르타의 만남 장면은 마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에서 주인공 블라디미르가 지나이다 부인을 만나는 대목과도 닮았습니다. 작품 속에서의 기능은 상당히 다르지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에바 부인의 등장 씬도 연상되는 부분이 있죠. 왜 청년은 헤세의 세계에서 이처럼 어떤 연상의 여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꼭 받고 특정 의례를 거쳐야만 하는 걸까요? 사실 카말라가 싯다르타에게 좁은 의미의 색, 즉 색정(色情)을 마스터해 주는 대목은 이제 제가 나이 들어 읽으니 그리 편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해서 싯다르타는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떠나보내는데... 어쩌면 카말라 부인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점잖은 분이 아니라 일종의 고급창녀(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라든가) 혹은 한국 텐프로 대마담 같은 사람이었다는 거죠(p168). 다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 시점의 싯다르타에겐 그렇게 아득한 스승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왔던 친구 고빈다가 p140에 다시 나옵니다. 이제는 제법 의젓한 스님 티가 나는데, 그래도 싯다르타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만 고빈다는 싯다르타, 이제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못 알아보죠. 그도그럴것이 이제 싯다르타는 누가 봐도 위대한 스승이지 자신과 철없던 시절 함께 발가벗고 뛰놀던 그 소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성공해서 외모 관리가 잘 되어 여전히 젊어 보이는 동창이, 그간 너무 고생하여 찌들고 상한 동창을 못 알아보곤 하는 풍속과 정반대이긴 합니다만. 

역사적 싯다르타에게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싯다르타도 저 창녀 카말라에게서 본 아들이 있고, 이제 그 아들이 그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합니다. 아들이 개구쟁이라서가 아니라(뭐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그 혈육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사랑이 부처님으로서 도달한 그의 평정심에 마지막 파문을 일으킨 셈입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 마지막 고비도 기어이 극복합니다. p208에서 이제 고승이 된 고빈다는 다시 싯다르타를 만나지만 또다시 그를 못 알아봅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초월자가 되었기에, 누가 그를 만나든 간에 그는 팔색의 형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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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 2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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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나?" "네, 민우는 귀공자처럼 자란 아이였고 공부도 잘했습니다.(p112)" 그러나 현태가 찾은 민우의 이모는 매우 냉랭하게 대합니다. 세상의 염량세태가 다 이런 법이므로 너무 서러워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을 넘었다 싶으면 반드시 응징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모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좀 뒤 p123에 나옵니다. 그 이모는 기지촌 출신으로, 아주 힘든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말하는 뽄새에서도 무식함이 배어나죠. 읽으면서 그 배경을 알고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이 대목은 사실 약간 억지처럼도 느껴졌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이 삽입되는 건 소설의 대중적 매력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긴 했겠지만 말입니다. 

여튼 이 장편 소설은 독자들이 지루해할 틈 없이 페이지가 잘 넘어갑니다. 두 권 분량의 긴 이야기지만 젊은 남녀 주인공 그 비련의 사연을 정석적으로 풀어나가기에, 발표된지 세월이 이렇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때로는 마음이 아파지면서 독자가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1권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최인호씨는 그 시대의 풍속을 충분히 잘 녹여내는 분이라서, 그가 1970년대에 엄청나게 생산해 낸 작품들과는 이 작품이 또 분위기가 달라서 1980년대의 자식임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소 밝아졌으면서도 여전한 애상이 깃들어서 최인호스러움을 잃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최인호씨가 쓴 예전의 완전한 통속물도 책프 참여 차 읽어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에로티시즘을 얼마나 즐겨 구사했는지 잘 알지만, 이 작품은 마치 황순원 <소나기>의 20대 장편버전처럼 담백하고 청순합니다. 

한때 그렇게나 고결하게 성장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아이였으나 이제는 가장 처참한 지경까지 타락해버린 민우, 우리의 피리부는 소년은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지... 선하고 지혜로웠던 주인공이 이처럼 몰락하는 것도 최인호 작품 공식 중 하나입니다. 2권 p170에서 민우의 근황을 전하는 현태의 말을 듣다 보면 차라리 귀를 막고 싶습니다. 민우는 그새 기지촌에서 다른 여성 하나를 만나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유전자가 어디 안 갔는지 잘생긴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요소가 사연의 비극성을 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처지일수록 그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분별한 성관계에 빠져들 수 있는데(될대로 되라 심리) 남자건 여자건 이게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아파집니다. 

한때 피리부는 소년이었던 그는 이제 고기잡는(p212) 사내가 되었습니다. 현태는 민우에게 다혜 씨의 근황을 알려 주고 그녀에게 졸업을 축하해 주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민우는 자기가 한 짓 때문에 다혜를 볼 면목도 없고 이처럼이나 자신이 망가진 모습을 보여 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다혈질의 현태(p225)는 언제나 민우-다혜 커플의 속내를 가장 정확하게 꿰뚫은 관찰자이자 행동가였고, 일부러 민우가 자신을 망가뜨리는 중임을 다혜에게 (불필요하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행여 민우를 자신으로부터 누가 빼앗아갈까 전전긍긍하는 불쌍한 은영이(p230)... 이 소설에서 제일 불쌍한 인물이 바로 은영이죠.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피리 부는 소년. 과거는 추억일 뿐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네.(p262)" 현태의 말이 맞으며, 이제 민우는 자신의 현실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p285를 보면 여전히 현실에 부적응 상태를 드러내지만 은영이와의 궁합은 무척 좋은 듯합니다. 은영도 지독한 무능자인 민우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그나저나, 소설의 결말은 대단히 비극적이고 악인인 노파는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며 기어이 추가 악행을 저지릅니다. 제가 소설에서 가장 몸서리쳐지는 게 저런 썩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듯한 노파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삶은중단되었지만 누군가들의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집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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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 1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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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고 최인호씨는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이었습니다.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이끌어낸 분이었다고 하고, 무엇보다 엄청난 다작(多作)을 한 작가였습니다. 스스로도 어느 인터뷰에 나와서 "나는 괴물이었다"고 회고했었는데, 창작 영감의 원천이 마르지 않고 통속물이든 뭐든 끊임없이 지어온 그 엄청난 활력에 대해 평단과 대중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이 <겨울 나그네>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당대 청춘 스타였던 강석우씨 등이 주연으로 기용되어 젊은이들이 많이 관람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이 책 띠지에도 나오듯 지금 뮤지컬로도 상연 중인데, 이미 1990년대 후반에 박칼린 감독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뮤지컬에 대한 국내 인식이 대단히 미진할 때인데 역시 박칼린(이분도 그때는 무명)씨였다 싶습니다. 원작이 워낙 좋으니까, 인프라가 부실해도 히트작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최인호씨의 소설은 장면 묘사가 영화처럼 생생하면서도 독자한테 쉽게쉽게 넘어갑니다. 작가가 천재이기 때문에 본인 눈 앞에 (가만 있어도) 그림이 영상이 절로 펼쳐지므로 큰 수고를 않아도 이렇게 글이 쓰이는 것입니다. 구성이나 날카로운 주제의식 부각은 이문열이 나을 수 있지만 이런 생생한 스토리텔링 면에서는 최인호씨가 훨씬 뛰어납니다. 이 1권 p114만 해도, 민우, 운전사(당시 표현을 따릅니다), 다혜 등이 빚는 장면을 보면 영화를 안 봐도 독자 눈 앞에 영화 한 편이 상영됩니다. 유머러스하게 "호텔 보이처럼" 민우가 다혜한테 허리를 굽히는 매너를 보십시오. 경쾌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선한 마음이 가득한 주인공의 개성이 잘 드러납니다. 참고로 이 시절의 호텔 보이들은 사람 봐 가면서 차별 엄청 했습니다. 지금은? 예컨대 반포 JW 매OO 같은 곳은 직원들이 엄청 친절합니다. 이 대목에선, 민우가 쾅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는 장면, 다혜가 민우 옆얼굴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장면 등이 유명하죠.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p142)." 이 작품 속에는 부모 세대가 전횡하듯 정한 룰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이 있습니다. 사회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젊은이들도 그 호흡에 맞춰 살아야 하는데 기성세대들의 훈육은 그 폭발할 듯한 유기체의 약동을 질식시키려 듭니다. 젊은이들이 반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혜는 아무 부족할 것 없이 자랐고 그 부모님들도 딸에게 너무 잘해 주는 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영혼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끊임없이 반항합니다. 본래 젊은 세대는 이처럼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반항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존재입니다. 프랑스의 68세대를 떠올려 보십시오. 

한편 민우는 아버지가 그 끔찍한 사고를 겪고 식물인간처럼 누운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만 의연히 대처합니다. 역시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친과 잘 통하는 착한 아들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민우는 아버지에게 애써 뭘 말하려 들지 말라며, 나는 눈빛만으로도 아버지가 뭘 뜻하는지 안다며 안심시키고 그 심기까지를 간호하려 듭니다. 이렇게 애가 마음이 착하니까 얼굴에도 그 심성이 반영되어 잘생겨지는 겁니다. 싼티나는 색기 같은 것과는 유가 다르죠. 아, 그러나 형인 민섭이는... 

"한형국, 일어나라, 나와 담판하자. 너한테만 안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 독자들이야 민우한테 감정이입하여 저 비정한 채권자를 욕할 수 있지만 이 사람한테도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대체 이 채권자들이 무슨 죄로 그 손실을 감당해야 합니까. 잘못은 한민섭이란 악당이 저지르고 그 죄책은 부친, 남은 아들, 채권자가 뒤집어쓰는 건데 이때만 해도 가족이라면 연대책임을 져야만 하는(법적으로야 아니지만) 시대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민우는 그 별명이 피리부는소년이었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영화가 워낙 큰 히트를 쳐서 1980년대 당시 여대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와서는 강석우씨(지금은 노인인데)가 형상화한 피리 부는 소년의 이미지 때문에 설레서 잠을 못 이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1권 p296에서 피리부는 소년은 드디어 아버지에 대한 비보(悲報)를 듣습니다. 이 여린 마음을 지닌 소년(청년이긴 합니다만)은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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