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14 -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4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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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띠 해인 올해 2013년을 두고는, 김난도 교수님은 COBRA TWIST를 화두로 잡았었죠. 한 해를 예측한다는 분들의 능 력이나 솜씨를 두고, 한 해가 지난 후에 그 맞고 틀림을 평가해 보는 건 여러 모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사후적 평가의 매서운 칼날은 피해갈 수 있는 장사나 고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분들의 경우, 이런 자체 점검이나 자아 비판(?)을, 스스로 시도한다는 게 또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죠. 그 자신을 일류 브랜드 중 하나로 대중에 성공적으로 각인시킨 김난도 교수님의 경우, 알아서 이런 힘든 작업을 수고스럽게 수행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COBRA TWIST의 경우, 억지스럽다든가, 어떤 사항의 경우 무리하다든가, 현재의 추세를 두고 억지스럽게 내년에 적용을 시도했다든가 하는 비판이 작년 이 시점에 있었습니다. 억지스럽다는 비판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의 키워드가 아닌 허사(虛辭)를 두고(예컨대 It's 같은) 애크로님 구성에 동원한다든가 하는 그 "형식"을 두고도 이뤄진 면이 있었죠. 잘나가는 사람을 두고 비판이 있는 건 당연한데, 그 중에는 온당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그야말로 무리수가 꽤 되는 것 같아요. 자신 없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애써 투사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니까요.


COBRA TWIST의 리뷰(이 책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비중입니다)를 찬찬히 뜯어 보면,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해도 맞는 예측이 참 많았음에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B, "BRAVO, Scandimom" 같은 것은 제가 작년 책을 다시 읽어봐도, 또 올해 판에 적으신 회고 섹터를 읽어봐도 참 잘 들어맞았고 시의적절하기까지 했다 싶더군요. 불만으로 남는 건 그 제목문구 작성의 다소 부자연스러움인데(...), 이 역시 이미 룰을 그리 느슨하게 자체 설정한 후려니 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난도 교수님의 트렌드 분석은 확실히 인문적 소양을 강력한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강점 덕에,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실물의 분석이요 어디부터가 화려한 수사의 아우라인지가 좀 헷갈리기도 하죠. 그런데 트렌드 분석이라는 게 KDI 보고서와는 다른 점이 또 그 부분이라서, 그것도 하나의 읽는 맛으로 간주하고 멀미 안 나게 이 시리즈 고유의, 혹은 저자 특유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가올 2014년은 갑오경장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근래 저자가 보여준 스타일과는 달리 좀 진부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DARK HORSE가 올해의 키워드 모음입니다. 이 시리즈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그저 두문자의 유희적 조합이라서 큰 의미를 둘 건 아닌데, 김난도 교수님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점쟁이 스타일이 느껴져서 재미가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님 책보다 (약간) 먼저 나온 다른 트렌드 서적도 언급한 것도 있고, 교수님 자신만이 언급하고 분석한 항목도 있지만, 그의 탁월한 점은 한정된 숫자로 키워드들을 제한하여 선정하는 능력(백화점식 나열이 아닌)이고, 그 각 키워드에 자신의 풍부한 인문적 지식을 덧입혀 해설하는 재주죠.


D는 SWAG입니다(왜 D인지는 책을 참조).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아이돌 저스틴 비버가 내한했을 때도, 강남 모 클럽에서 GD와 조우했을 때 이 단어가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요. SWAG 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은 경청할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단어 하나가 이렇게 많은 뜻을 담고 있는가, 이 짧고 경박한 개념에 이렇게 많은 의의가 품어지면, 내년엔 또 어떤 신개념이 나타나서 그 시대의 좋다는 컨셉은 다 독차지할 예정일까,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일종의 회의감도 피할 수 없더군요. 아무튼 SWAG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교수님의 말을 빌리면) 유일한 절대태인 "자유"가 중요하다고 하시니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수님의 청춘 시절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서도 더 정교하고 넉넉한 형태로 다 나온 이야기 아닌가요? Dude!


A 는 Body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의 설명이 가장 좋았습니다. 딴지 거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바디"의 재발견 역시 20년 전에 서양의 모 인문학자께서 일찌감치 설파한 테마입니다. 자신의 존재감 확인(때로는 야릇한 고통을 매개로), 관계 회복의 욕구 등은 교수님만이 할 수 있는 장중한 언어로 이 "트렌드론"의 깊이를 배가하고 있습니다. "브라운컬러론" 역시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여 적절히 잘 삽입, 통합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R 은 "니치"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키워드입니다. 니치를 넘어 울트라니치를 찾아야 한다는 취지인데, 공학 역시 나노의 단위를 기반으로 첨단의 가능성을 물색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이 원자화, 쿼크화되는 시대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결과임을 잘 설명하고 계시더군요. 이는 작년의 트렌드 중 A의 "나홀로 라운징"의 연장선상에 있는 변형 마이크로트렌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K, 키덜트의 추세는 사실 몇 년 전부터 거론되던 단골 아이템이라 딱히 갑오년에 고유한 걸로 부각하기는 좀 그랬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기회를 세대 전반의 담론으로 연결시키는 교수님의 내공이 빛났구요. H는 하이브리드, 이 역시 예전부터 사골 우려먹듯 인용되던 아이템이지만, 저자는 "패치워크" 개념과 연결함으로써(연결이라기보다 패치워크가 더 주된 개념으로 제시됩니다) 같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점을 부각합니다. O는 플랫폼론의 부각입니다. 한편으로는 유저들의 취향이 미시화 파편화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르는 생산 소비 어느 섹터이건 뭉쳐야 산다고 하는 "판"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R 은 해석의 재해석입니다. 리붓 역시 어느 새 대형 블록버스터의 제작 붐과 맞물려, 일상의 유행어가 되어 버렷습니다. 리붓은 리셋과는 다르죠. 재해석은 기존의 해석을 계승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것을 존재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요. S는 우연발견의 기쁨인데, 이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 리모트한 준비가 예정한 결과물입니다("세렌디피티"라는 개념과도 연결되죠. 왜 그걸 전면에 끄집어내지 않으셨을까?) E는 관음과 노출이 묘하게 결합한 트렌드를 지적하고 있고(오히려 노출, 피관음에 초점이 더 무겁게 놓여 있습니다), S는 교수님 특유의 섬세함으로, 없어도 무방할 복수 어미의 삽입이라는 정성이 깃들었기에 더 주목이 가는 키워드인데, 그 내포는 "돌직구"입니다. 과연 포기하기 아까운 트렌드가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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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인 러브
로지 술탄 지음, 황소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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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에 빠진 헬렌 켈러"


10여 년 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그해 오스카, 골든글러브의 주요 부문을 휩쓴 적이 있죠. "사랑"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설, 신화화한 위인에게서, 의외로 "그도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애정 행각 같은 게 공개되면 사람들은 일종의 즐거운 충격처럼 받아들이나 봅니다. 이 <헬렌 켈러 인 러브>작년 발표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화제을 모으며, 이 무명 작가를 단숨에 유명 인사의 대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이 책의 소재가 화제를 모으는 건 단지 "사랑 이야기"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헬렌 켈러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읽으며 알게 된 것처럼, 여러 중증의 장애를 후천적으로 갖게 된,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큰 불행을 맞이하고서도, 이를 총명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낙관적이고 선한 심성으로 극복하고 일어선 분이었죠. 그러니, "그런 극한적 장애를 지닌 이에게도 과연 사랑이 가능할까?" 하는, 장애를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의 한심하고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은 사실 더 큰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애인(그가 아무리 유명인사였다고 해도)의 사랑"이란, 그것도 같은 장애인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인과의 사랑이라면, 그것도 장애를 가진 쪽이 여성이고, 정상인 상대가 남성이라면, 우리의 의구심은 더욱 커집니다.


이 소설은, 작가 로지 술탄이 기존의 정평 있는 전기와, 켈러 재단 측이 열람을 허락한 편지와 각종 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 채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놀라는 건,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매우 생생하며, 그 대화의 표현이 익살맞으면서도 심각하고, 그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들 간의 관계, 상호 이해의 정도가 대단히 심도 있으며, 특수한 개별적 개인들끼리에서 빚어지는 호감, 애정, 혐오, 불신, 갈등, 화해 등의 모습이 시대와 장소를 크게 달리하는 우리에게까지 주는 공감이 진한 농도로 다가온다는 점에서입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라고 하면, 읽어 보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만 따분한 이야기" 정도로 정리하고 외면하려던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아마 충격이 꽤 클 것입니다. 사실 헬렌 켈러의 사연은, 그 가장 공식적이고 점잖으며 진지한 대목에서도 "따분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토록 심한 장애를 지녔던 한 인간이 스승과 주변의 따뜻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정확하고 감성적으로 세련된" 보호 아래, 결국 평균인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 할 지성을 갖춘 성인으로 자라나는 모습은,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큰 자본을 들여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겠고요. 어지간히 감동도 주고 정서적 고양도 시켜 준 그 위인이, 러브스토리(대단히 드문 타입)의 주 인공까지 겸한 채, 미묘하고 치열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사랑을 틔워 나간다면, 게다가 주위의 결사적인 반대를 등에 지고서 가망 없는 항해를 밀고 나간다면, 독자는 어려서 받은 감동의 구조가 한켠에서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미처 몰랐던 진실의 이면을 비로소 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동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말은 소설 서두에 이미 단정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야반도주를 꾀했지만, 연인 피터 페이건은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관한 서술들은 나중의 일부 반전도 예비하지 않은 채 확정적으로 모든 여지를 차단합니다. 소설의 대단원은 그 처음에 제시된 상황과 대부분 일치하며, 따라서 독자는 "이 아슬아슬한 평행 우주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붕괴를 유발할 정도로 발달 전개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심을 일단 마치고 로망을 관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말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도(작가가 그런 식으로 얼개를 꾸리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작품 외적 객관적 지식으로 이미 "별 일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물둘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대단히 미묘하게 꼬여갔다가, 참으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해소와 봉합, 아니 발전적 승화를 맞이하는 그 모든 드라마를 지켜 보면서, 독자는 "아닌 줄 알지만,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 터지는 것 아닐까?"하는 조바심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독자는 객관적 역사의 경과를 알고 있으나, 동시에 이 오밀조밀한 인간관계의 실타래가 이 로지 술탄(이름도 참 특이하죠)이라는 작가의 손 안에서 빚어진 허구임도 역시 충분히 감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정과 한계가 뻔한데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이 읽는 내내 떠나질 않는 드문 체험을 하는 거죠.


이성과 충동 사이의 갈등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하는 건 그 자체로 진부할 뿐 아니라, 이 개성 넘치고 독창적이며, "세련된" 이야기에 베풀 합당한 대접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는 내내, 켈러의 안타까운 마음, 비록 강도 높은 훈련 과정을 통해 고도로 단련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육신, 맨살, 혈관의 깊고도 가느다란 그 모든 은밀한 지점까지 흐르고 지나갈 욕정(가장 저평가된 채로 말한다면요)과 본연의 심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이점 위에 사서 속 편한(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타당한) 충고를 애니 설리번의 등에 업혀 내내 내뱉습니다. "켈러 양(이 당시 그녀는 삼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충 분히 공감은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테죠.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세요. 그분은 오늘의 당신 존재를 빚어낸 분입니다. 당신의 인격은 양도할 수 없는 당신 고유의 자산이요 본체의 일부지만, 오늘의 상태로서의 그것은 선생님께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봐서라도 당신은 그녀를 거역할 수 없고, 게다가 그녀의 충고는 당신을 둘러싼 현실을, (대단히 죄송하지만) 눈이 불편하고 귀가 온전하지는 않을 당신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텝니다."


그런데 우리 독자도 확신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끝까지 전개되며, 우리는 켈러 양의 진술로 걸러진 진상밖에 접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피터 페이건이라는 남자의 눈빛, 행동거지, (만약 숨기는 바가 있었다면) 이로부터 유츄할 수 있는 딴속셈 등은, 우리가 누군가의 설명이라는 매개 없이 접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떠셨는지요. 페이건이, 우리가 알고 있듯 공식적인 역사에서 석연찮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루저"라는 작품 외적 지식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켈러 양이 그를 좇았다면 두 사람 다, 최소한 켈러 양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인생의 다차원적 비극을 남기고 말았을 못 미덥고 마땅찮은 인물 아니었을까 하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지들 않으셨는지. 페이건의 인품과 됨됨이에 대해서는, 우선 애니 설리번의 "입"이 맹폭격을 가하는 중입니다. 이 작품은 어림으로 1/10 정도의 분량이, "피터 페이건의 변변치 못함"을 질타하는 애니의 대사로 이뤄져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녀가 바라본 페이건은, 어딘가 좀 모자랍니다(음식을 입에 묻히고 흘리는 모습이라든가). 그러면서도 명성과 관심을 사냥하는 천박한 근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뺀질뺀질한 눈빛"은, 설리번 선생의 눈에 맺히고 전두엽에 각인된 그의 첫인상입니다. 그럼 어딘가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분명 속물이고 위선자라도, 두뇌가 좋지 못해서 속셈을 쉬이 노출하는 무능한 타입도 있을 것으므로 그닥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애니는 어느 시점 이후, 그녀의 지병 때문에 도저히 켈러 양의 곁에 머물 수 없어 따뜻한 남쪽으로 요양을 떠납니다(푸에르토 리코).


이후부터는 더 단호하고 더 실력을 갖춘 방해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케이트 애덤스 켈러,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도 물론 피터 페이건의 실물을 보았지만(고용인이니까요), 그런 직관적인 인 상보다는 다른 이유와 필요에서 그를 반대합니다. 소설 중반을 넘기면서 명확히 드러나지만, 켈러 가문은 남부 지방에서 유서 깊은 명문에 속합니다. 하잘것없는 아일랜드 뜨내기 혈통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습니다. 큰 불명예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나 볼 법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의식이 있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페이건이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리버럴이라는 점입니다. 이 가문에서 진보 성향을 갖춘 인사는 헬렌 뿐인데, 사위(헬렌에게는 제부) 워런을 포함해 모든 성원은 옛 남부의 긍지, 그리고 면도날만한 틈도 허용하지 않을 배타적 신분의식, 보수적 정치관으로 가득합니다. 페이건은 어떤 관점에서도 가망이 없는 구혼자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페이건은 다소 불공정한 대접을 받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 선 애니 설리번은, 유년 시절에는 켈러 가문의 피용인, 지금은 유명인사로서 독자 회계가 가능한 헬렌의 보조자 신분입니다. 선생님이다 뭐다 해도 여기는 동양이 아닌 이상 엄연히 계약 관계의 한 당사자일 뿐입니다. 만약 피터든 그 누구든 헬렌의 곁에 반려자가 등장하면, 그녀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헳렌이라는 존재의 양성, 완성, (냉혹하게 말하면) 흥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게다가 애니는, 놈팽이 스타일의 어떤 남성(존 메이시)와 실패한 사랑을,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처지입니다. 여러 사정 때문에 객관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반전이 있습니다!). 어머니인 케이트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피터가 케이트라고 호칭하자, "미시즈 켈러라고 부르시오."라고 받아치는 장면도 있죠). 뭔가 변변찮은 인물이긴 한데, 그대로 내치기엔 좀 불공정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 모호한 느낌도 듭니다. 이 소설의 빼어난 점은, 결국 이처럼 모든 것을 흐릿한 장막 속에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방치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경계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진상을 고스란히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헬렌 켈러는 선하디 선한, 신의 계시자라기도 합니까? 소설 후반의 밀드레드(헬렌의 더동생)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언니는 지독한 고집 불통이었지.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어. 마사(마사 워싱턴은 집안 흑인 요리사의 어린 딸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사는 설리번의 고용 이전에 헬렌의 발달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동반자였다고 합니다)가 언니 손에 잡혀서 머리칼을 다 깎여야 했던 일 생각 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이 모든 내러티브는 헬렌 개인의 주관적 관점을 짙게 품은, 변형 왜곡의 그림자가 만만찮은 범위로 드리우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일은 누가 보는지의 각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성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죠. 눈이 심하게 멀었느냐, 그렇지 않고 일곱 빛깔 가시 광선을 인지할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는 기실 눈 멀고 귀 먹은 장애인에 불과합니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등장 인물 사이의 대사가 너무도 재치있고, 신랄하며, 유머러스한 표현이 많아 그를 곱씹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거죠. 오 가는 말이 너무도 재밌어서, 이게 과연 작가 개인의 상상인지, 실제 서신에 그 비슷한 표현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라고 하면, 아마 당사자들 사이에선 입에 올리기도 꺼려지는 금기이자 저주일 겁니다. 그런데 헬렌과 애니, 심지어 나중의 피터 페이건까지, 장애 소재 말고는 농담거리가 없나 싶을 만큼, 쉬지도 않고 조크와 위트를 "눈멂, 귀먹음"에 대해 주고받습니다. 저주를 따뜻한 여유로 승화하는 이런 성숙한 태도야말로, 한 인간의 위대함과 그가 속한 문화의 숭고한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헬렌 켈러가 대단히 강경한 사회주의자였음은, 생각 외로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시기의 미국은 욱일승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게, 고도의 자본주의 발달이 세계를 집어삼킬 듯 기세를 뻗는 모습이었습니다. 취임 전에는 가장 온화하고 기품 있는 박애주의자였던 윌슨 대통령이, 이 소설의 배경인 1916년(따라서 아직 선전 포고는 이뤄지지 않을 시점입니다) 즈음에 개입주의로 국가 노선을 바꾸고 드는 것도, 이제 커질 만큼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어 보겠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죠. 헬렌은 이런 그를 두고 "나보다 더 눈이 먼 사람"이라며 맹공을 가하는 대목이 소설에도 나옵니다. 자본주의의 극적인 발달은 물질위주의 태도와 사고 방식을 곳곳에 스며들게 합니다. 예를 들면 헬렌의 아버지 아서 켈러 예비역 대령은, 설리번 선생에게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남부의 노예제가 벌어들인 돈으로, 당신의 봉급이 지불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대독 개전에 반대("우리는 독일을 향해 전쟁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하 며 서부 전선에서 부상하여 눈이 먼 독잂 병사에게 구호 기금을 전달하려는 헬렌에게 기자들은 "당신은 참전을 찬성하는 그 자본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이 시점에 국가 반역을 꾀하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아기자기한 심리의 변화와 재치 있는 대사, 심오한 인간 정신의 미덕을 깨우치는 재미 외에도, 이처럼 역사의 단면을 배울 수 있는 다른 교육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번역이 정말 정확하고, 원문의 미묘한 뜻이 잘 전달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겨진 것 같고, 제가 본 범위 안에서는 오타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책이 참 아담하고 예쁘게 만들어졌습니다. 약간 폰트가 작게 느껴질 분도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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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앱경제 시대 유틸리티 마케팅이 온다 - 정보가 보편화된 시대의 소비자와 마케팅의 본질적 변화
제이 배어 지음, 황문창 옮김, 이청길 감수 / 처음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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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렇게 하면 손실이 기대이익을 상회합니다."

"마케팅 차원에서 봐 줄 필요도 있다구."

어 느 새 일상사무의 대화에서도, "마케칭 차원에서"라는 말이, 당장의 대차대조표 분석을 휴리스틱하게 뛰어넘자는 의미로 관용화한지가 꽤 된 듯합니다. 논리적으로는 근거가 박약한 말입니다. 손해면 손해고 이익이면 이익이지, 마케팅 차원에서 넘어가자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지만 분위기상 그것도 일리있다 싶을 때 그냥 묻어가는 의미로 잘 쓰이는 말입니다.


SNS가 혁명을 일으킨 건 정치나 사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의미가 다소 막연하지만 "소통"의 방식과 수단에서 그 의의를 다하고 마는 것도 아닙니다. SNS의 파워가 진정 큰 파고를 몰고 올 분야는 바로 비즈니스입니다. " 소통"이란 비경제적, 비물질적인 정서의 교감이 위주가 되는데, 사업을 끌어들이는 건 벌써 소통의 본질을 이탈하는 것 아닌가 거부감이 드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월든 식의 삶을 고집하는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서건 무엇인가를 구입하 고 소비해야만 문명인으로서의 생존이 가능합니다. 누구에게서 무엇을 사는 문제가 우리를 떠날 수 없다면, 마케팅의 문제는 보편적으로 대중에 밀착된 이슈입니다. 누구한테서건 무엇을 사야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물건과 서비스를 사라고 권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마케팅의 본질입니다. SNS를 통한 소통이 일상화된 시대에, 마치 프라이빗한 친구처럼 다정하고, 가깝고, 신뢰감 있게 다가오는 마케터가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SNS 마케팅의 승자이고, 모바일 퍼스트를 넘어 모바일 온리를 예견하는 시대에 SNS는 마케팅 전쟁의 유일한 결전장입니다.


저자는 마케팅의 개념이 어떻게 진화를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 속시원하면서도 적실성 넘치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제 1세대 마케팅 기법은 "최초상기"입니다. 구 매자, 수요자에게 "그 물건을 파는 내가 바로 여기 있소!"라며 "들이대듯" 각인시키는 방법입니다. 시장에서 상인들은 서로 질세라 목청을 높여가며 손님을 끕니다. 유흥가의 삐끼들은 준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갈 길 바쁜 손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일단 고객의 뇌리에 남기 위해, 잦은 반복과 노출로 웨어와 브랜드를 "들이대고" 보는 게 이 최초상기 수법입니다. p28에 나온 "히트곡제조기"라는 트위터리안이 그 좋은 예라며 저자는 소개하고 있는데요, 물론 긍정의 예가 아닌 "대단히" 부정적인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이 사람에 대해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있으나, 책 후반부에서 매우 희화화한 낵맥락에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합니다) 이 방법은 첫째 노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없는 먼 위치의 상대에게 전혀 쓸 수 없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이 기법이  기업의 신뢰를 깎아먹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마케팅의 다음 발전 단계는 "상위노출"입니다. 이 기법의 대표 주자는 전화번호부 옐로우페이지입니다.
과 거에는 이 기법에 대해 대단히 혁신적인 발상의 예로 많이 거론하였으나,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한 후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했죠. 이후에는 주로 검색 포털에서 이 상위노출의 이슈가 많이 문제되었지만,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대로, 한번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정보는 의사 결정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또한, 지금처럼 큰 변혁을 맞고 있는 시대에 있어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이제 "광고라면 그 내용의 양질 여부에 관계 없이 지긋지긋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정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인포머셜"이라고 해서,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마케팅에 삽입해 접근성 제고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기법 역시, 소비자가 결국은 염증을 낼 "트로이의 목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 체 그럼 이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소비자를, 어떻게 하면 나에게 충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소비자를 내 고객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게 바른 진로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소비자는 고객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나는 고객에게 판매자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친구로서 접근하는 겁니다. 만약 그가 전정한 친구라면, 당장의 이익이 없다고 냉정하게 서비스 제공을 거절해서 되겠습니까? 그건 이미 친구가 아니죠. 친구라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친구를 적시에 도울 줄 아는 게(a friend in need) 진정한 친구(a friend indeed)입 니다. 이제 결론이 나왔습니다. 무엇이 궁극의 마케팅일까요? "소비자를, 친구의 눈높이에서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이를 우리는 친구로서 "믿게" 됩니다. 이런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회사는 충성스러운 고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자는 멋진 격언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움(helping)과 판매(selling)는 글자 두 개 차이이다. 잘 팔려면, 평소에 잘 도와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SNS시대에, 사람들은 지역과 대면 접촉 기회를 떠나 다양한 이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모바일 SNS 입니다. 이런 관계의 유지에서, 신뢰는 소통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건입니다. 이런 친밀한 네트워크 안에, 기업은 더 이상 요란한 구호와 쇼맨십을 앞세운, "광고라는 게 팍팍 표시나는" 구태를 뒤집어 쓰고는 침투할 수 없습니다. 동창생처럼, 여친처럼, 은사처럼, 부모님처럼 그 망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네트웍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판매원의 복장을 하고서는, 더 이상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친구에게서만 무엇을 믿고 삽니다. 친구 아니면 팔 수 없습니다. 친구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어 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처자는 그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모바일 기기에 적용되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여, 광고 따위는 치워버리고 이용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무 속셈이나 계산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정말 친구에게 하듯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내 업종에서는 경쟂자 그 누구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대답도 명쾌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 종전과는 다른 수위의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았다 싶으면, 그 유사 분야가 아닌 전혀 동떨어진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겁니다. 고객의 눈높이가 이미 높아졌는데, 종전의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죠. 더군다나 경쟁자가 안이한 태도를 늑장을 피우고 있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업계 선두로 치고나가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저자는 상기하고도 있습니다.


어 렵사리 개발한 앱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앱이 소비자에게 널리 애용되게 방안을 따로 마련해야 하고, 처음부터 널리 쓰이고 입소문이 날 앱을 골라 개발해야 합니다. 앱의 기능 우수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용자가 그 존재 여부를 모르는 앱은, 벌써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마케팅을 마케팅하라."는 명제의 본 뜻입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과 이의 홍보, 진열은 마케팅 3.0의 한 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앱이 아니라, SNS 환경 그 자체고, 어떻게 하면 관계망 안에 "친구"로서 단단한 자리를 잡느냐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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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원건과 싼이그룹 이야기 - 세계를 제패한 중국판 정주영 신화
허전린 지음, 정호운 옮김 / 유아이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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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직도 한국인들은 "량원건"이라는 기업가도, "싼이"라는 대규모 기업의 이름에도 익숙지 못한 게 보통 아닐까 싶습니다. 뚜렷한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의 지난 이력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체가 우리의 생존과 번영, 안위에 직접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애써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썩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겠죠.


저는 이 "량원건 성공 스토리"를 읽고, 마치 한국의 정주영처럼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가진 어떤 개척가의 빛나는 입지전을 훑어낸 후 제 자신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도 나와 있듯이, "미국의 19세기 초 골드러시 당시, 돈을 번 측은 골드 디거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장비를 제조하고 조달하거나 여정에 필요한 식량을 공 급하던 상인들이었다."는 거죠. 마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긴다는 말처럼, 한창 국가 건설의 붐이 일던 도약기의 중국에서, 일시적인 승자와 행운아는 이후 허무하게 자리를 내어 주기도 했지만, 이들 기업가들이 무슨 영역에서 활약하건 그들의 사옥, 그들의 헤드쿼터, 그들의 이동 경로 그 구축과 안위를 보장할 건설 사업만큼은 지속적인 수요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산 업 분야도 탑 비즈니스맨도 그 부침(浮沈)을 거듭했지만, 그들을 뒤에서 보조하는 중장비 제조 산업은 경기를 타지 않고 굳건히 알짜 수익원으로 남는 게 당연했고, 곳곳에서 흙을 파고 땅을 다지며 건물을 지어올리는 모습이 그칠 날이 없는 만큼, 이 량원건의 싼이집단(그룹)은 여태 큰 위기 없이 승승장구했습니다. 이 책의 제 2장 p31에 나오는 마이클 포터의 말처럼, "무슨 산업에 진출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잘되는 산업을 선택하면 돈을 못 벌기가 어려울 것이고, 전망 없는 산업에 진출하면 돈을 벌기가 어려울 것이다."가,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해 줍니다. 량원건이란 사업가가 특별히 미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전략을 현명하게 짜서 치밀한 사업 관리와 능수능란한 인맥관리 능력으로 오늘의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한국의 정주영 창업주처럼 남들이 보기에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에 비범한 배짱과 초인적인 집착으로 뛰어들어, 그야말로 무에서거대 제국을 창출한 경우와는 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어느 천재 사업가의 일생을 되짚어서 그로부터 교훈을 추출하는 데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지금의 중국 사업가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오늘날의 부와 성취를 이루었는지 그 전형적인 성공 공식을 추출해 보는 작업, 또 책을 읽는 중 얻을 수 있는, 중국의 정치, 사업 환경에 대한 갖가지 부대 지식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뇌리에 깊이 새겨졌던 것은, 중국은 누가 뭐래도 공산당 1당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당국의 규율과 규제의 수준이란, 다른 자유로운 문화권 출신의 사업가가 쉬이 적응하기 어려울 만큼 강도 높으면서도 독특한 컬러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이 책의 서두는, 미국 오리건 주에 진출한 싼이 그룹의 미국 현지 법인 Ralls가, 연방 정부로부터 "국가 안보 저해 우려"를 이유로 시설 철수를 명령한 조치에 대한 법원 제소를 결정한 일화로부터 시작합니다. "법치주의가 지배하고, 공평한 기회가 보장된다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부당하고 편파적인 행정이 시행될 수 있는가?" 싼이 그룹은 전 중국의 분노와 의기를 대변하겠다는 듯 가망 없어 보이는 법정 투쟁에 나서는데요. 사실 자국 내에서는 외국 출신 기업가들에게, 도저히 납득 못 할 불합리한 규제를, "여기는 너희 땅이 아닌 중국"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요하는 저들이, 타지에서 당한 불이익에는, 전세계적 차원의 정의 구현 책임을 홀로 떠맡기라도 한 양 과장된 언사를 발하는 모습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중국의 행태는 국외에서도 고운 시선의 대상이 아닌데, 예를 들면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소위 자원 확보라는 기치 아래 벌이는 이기적이고 약탈적인 행보가 현지인의 비난을 받는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죠.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법정 투쟁을 두고 "호상(湖湘) 문화의 의기남아는 천하의 문제를 자기 일마냥 생각하여 총대를 매고 진두에 나서며..." 같은 말로 미화하고 있는 점인데요. 국부 마오도 후난 성 출신이고, 수호지에 등장하는 호걸 상당수도 이 지방 출신이라는 게 의미심장하죠. 의기가 서로 투합한 지역 연고의 협객 집단이, 대의와 조국을 위해 분연히 나선다는 로망은 몇 천 년이 지나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네요. 물론 그 낭만이 주변 모두를 위해 좋은 결과를 낳을지, 아니면 그들만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호기에 지나지 않을지는 큰 의문으로 남지만요.


량 원건은 가난한 직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집안이 한미했고 학창 시절 학업에서 딱히 두각을 드러낸 바도 없었지만 대단히 성실하고 영리했던 타입이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국영 공장에 관리직으로 취임했는데, 어느 순간 괜찮은 돈벌이가 될 구상이 떠올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아직 중국은 성장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고, 관[官]은 민간에 거의 재량과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단계였습니다), 동창과 동향 친구들과 더불어 사업체를 차립니다. 당시만 해도 공공 섹터의 일자리를 마다하고 "돈벌이 따위"에나 나서는 모습이란, 명분과 실리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짓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창엊 초기의 어려움을 일정 기간 완화해 줄 자본금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구요. 이처럼 무일푼, 주위의 비웃음을 한껏 안고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한국의 정주영과 공통점이 존재하긴 합니다.

싼 이그룹의 놀라운 점은, 중장비 제조와 건설 부문에서 거둔 국내에서의 큰 성공을 기반으로, 바로 해외 공략에 나섰다는 그 패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기존의 거인들과 마찰이 일 수밖에 없었는데요. 책의 초반에 잠시 소개되는 것처럼, 벤츠와 (일본의) Sony를 상대로 법적 쟁송을 한바탕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듯, 벤츠의 로고(우리가 잘 아는)와, 이 싼이그룹의 로고는 대단히 비슷합니다. 저도 책을 받아들었을 때 바로 벤츠가 떠올랐을 정도였는데요. 어쨌든 싼이는 이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그때의 승리가 가져다 준 쾌감이 아직도 생생한 듯, 저자는 량원건이 그 미미한 출발을 다질 무렵부터 무명의 한 디자이너에게 받은 이 유서 깊은(?) 도안이 어떻게 탄생하고, 창업주가 지금까지도 그 관대한 보상을 행하고 있는지 자못 유쾌한 어조로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나와 량원건>입니다. "나"는 누구냐면, 허진린(何眞臨. 하진림) 전 싼이 부사장입 니다. 그는 공산당 당료로 초기 경력을 시작하다가, 비교적 일찍 민간 사업 분야에서 진출하여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커리어를 뚜렷하기 다진 케이스로, 싼이로부터는 오래 구애를 받았으나 비교적 늦게 합류한 편이라고 합니다. 장기 비전의 설계, PR, 그룹의 "입"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하네요. 량원건 회장이 그다지 학식이 빼어난 편이 아님을 잘 커버하는, 요긴한 가신 노릇을 측근에서 수행하는 핵심 막료입니다. 그 자신도 스스로 량회장과의 인연을 "군신 관계"로 칭하고 있습니다. 제 8기 전인대(아마 1996년으로 추정됩니다)에서 "국가지도자"에게 대담한 발언을 통해, 민간 기업이 그 영역에서 자율성을 보장받기를 강력히 청원한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요. 여기서 "국가지도자"는 "심판이 휘슬도 불고, 공도 차면 승부의 공정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소위 state capitalism의 폐해와 모순을 경계하는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매체에서 즐겨 거론되는 관용어입니다. "국가지도자"는 책에 그 실명이 나와 있지 않으나 장쩌민임이 거의 확실합니다. 마치 "피휘"라도 하듯 삼가는 태도를 저자는 보이고 있더군요.


량원건의 출신이 비천한 직공의 아들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명문 공산당 당료의 딸에게 구애했다가 여성의 양친으로부터 거절당한 일 역시 유명하다는데요, 저자 허진린은 이 일에 대해서도 "빈부 격차라는 시선으로 볼 게 아니라, 중산 농민 계급의 끝자락에 속한(참.... 읽으면서도 그런 개념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량과, 소농의 부르주아 근성을 적대시하던 당료의 시각 차이"라고 애써 미화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승자에게는 시비를 따지지 않는 법이라던, 스탈린의 마오에 대한 코멘트가 생각이 나더군요. 하지만 량원건이,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한번 맺은 인연과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 보기 드문 인품의 소유자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은, 중국이 현재 국제 M&A 시장에서 돌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이책에서도 확인할 수있다는 건데요. 세 달 전에 <국제인수합병>이 라는 책의 리뷰를 통해, "유럽 기업은 콧대가 높아서, 거액만 제시한다고 바로 기업을 팔지 않는다. 하물며 동양인에게는"이라고 적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푸츠마이스터社 카를 슐레히터 회장이, 이 량원건에게 선뜻 회사의 운명을 맡긴 건, 대단한 상징성을 지닌 것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이 사건을 두고 저자는 놀랍게도, "육조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법통을 물려 받은 대사건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좀 분별없는 과장이라고까지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 혜능이 미천하고 빈한한 출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긴 합니다.


큰 물에서 놀면 같은 그릇이리도 성공의 가망이 높다는 뜻을 유명한 표현으로 남긴 고사는, 사실 이사(李斯)의 그것을 따를 말이 없죠. 어느 날 관의 창고를 지키며 쥐가 배불리 쌀을 갉아먹는 모습을 보고, 같은 쥐라도 담장 밖을 떠도는 놈은 배를 주리는 반면, 곳간 안의 녀석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호강을 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이후 대국의 무대로 진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진시황의 아래에서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말로가 말할 수 없이 비참했죠. 저자 허진린이 그 고사를 모를 리 없음에도 굳이 인용하지 않은 건, 주군의 장래에 행여 불길한 언사를 띄우기 저어하는 마음이 컸을 줄 압니다. 량원건이 한고조 유방 같은 성공한 창업주가 될지, 2인자 권신으로서 그 극심한 명암이 교차했던 이사와 같은 길을 걸을지는 지켜 봐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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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코틀러 인브랜딩 - 브랜드 속 브랜드로 승부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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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인브랜딩이 필요한가?


시 장의 경쟁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의 극치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가격으로 승부를 보자니, 원가 책정의 단계에서부터 개별 기업의  통제를 벗어나고, 마진을 낮춰서, 셰어(share) 선점 전략을 쓰자니 제살깎아먹기로 귀결할 뿐입니다. 품질 혁신이 아니고서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R&D의 결실이란 단기간에 쉽게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결국 소비자에게, "나의 제품은 다른 경쟁 제조사들이 만드는 그것들과는 질적으로 차별됩니다." 라는 마케팅 영역에서 승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요? 제품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브랜드"의 고안 단계에 초점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 이름이나 붙여서는 안 되고, 제품의 속성이 그 짧은 음절 안에 화체(化體)되는 방식으로 작명되어야 하죠. 이것이 바로 코틀러가 말하는, "ingredient branding", 줄여서 inbranding입니다. 상표의 그 사운드만 귀로 들어도 제품의 내역과 품질, 구성, "아우라"가 떠오를 만큼, 그 한 마디로 복잡한 매뉴얼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압축적인 효과를 지닌 이름을 지어 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라!' 이것이 필립 코틀러가 외치는 핵심의 메시지입니다.


2. 인텔의 예

저 자들은 이 책 3장에서, 인텔의 예를 아주 자세히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으나, 예전 스티브 잡스는 "인텔은, 마이크로칩을 포테이토칩처럼 팔아 먹는 놀라운 회사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죠. CPU라는 부속은 내장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고, 최종 소비자(엔드 유저)가 쉽게 외부에서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한때, 컴퓨터 구매자들은 "인텔 인사이드"의 로고 스티커가 붙여진 제품만 시장에서 구매하려 하는, 작은 하드웨어(아무리 그것이 컴퓨터의 심장이라고 해도) 하나의 존재 여부에 구매 동기의 전부를 거는 놀라운 행태를 보이곤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코를러가 말하는 "인브랜딩,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성분-특성 부각 상표화"의 좋은 예입니다.

원서와 청림출판의 표를 대조해 보았습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고, 그 내용의 타당성 면에서 확실한 검증이 이뤄졌습니다.


기업브랜딩과 인브랜딩은 서로 중첩되지 않고,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또한, 음식, TV 등 인간의 기초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소비되어 없어지는 제품들도, 인브랜딩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전제를 분명히합니다.

특히 중간 부품 제조회사를 "기관"으로 인브랜딩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흥미를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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