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에 대한 명상 문학의전당 시인선 168
권순자 지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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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란 그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라면 개 체 번식을 위한 생화학 작용 끝의 (다소 요란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미학적 객체로까지 위상을 높이고, 문예의 인기 소재로 삼고, 경우에 따라 존재를 걸듯 탐미의 대상으로 삼는 게 인간입니다. 시인 김춘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에 의미를 꽉꽉 채워 넣은 감성과 인식의 결정체를 상정하고, 단 한 마디로 "곷"이라 명명했습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인간 영혼과 감성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꽃"은 영원히 신비적 매력으로 인류의 곁에, 아니 위에, 남아서 끊임 없는 각성의 원천으로 기능하지 싶습니다.



어찌 보면 꽃을 꽃으로 알아보는 것도 우리 인간이라야 가능함니다. 꽃과 더 오랜 시간을 같은 주파수의 공감대로 딩굴 만한 짐승(초식이건 육식이건)이라 해도, 우리 인간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무심히 소, 양, 사슴 등이 지표에 돋은 각종의 엽록소 용기(容器)를 텁텁한 입으로 뜯는 모습을 보면, 꽃의 성스러움을 그대로 알아 봐주거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포장해 주는 편도 오직 우리 인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간혹 제 동족 중 가장 이쁜 것을 "꽃"에 비기면서도, 일시의 격정을 건사 못 해 잔인하게 목숨을 앗는 종(種) 역시 인간뿐입니다. 이래저래 꽃은 자신의 화사한 모습을 통해 타 종의 존재 본질 통찰을 돕는 성스러운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권순자 시인의 이 시편들은,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모순과 추함이 생의 자취 곳곳에 업보처럼 얼룩진, 있는 그대로의 사람살이를 미화 없이, 때로는 날카로운 과장을 통해 독자에게 심상으로 제시합니다."꽃"을 매체로 삼아 전개되는 "명상"이라니, 그 언어의 울림만 눈을 감고 짚어도 안온한 피안으로 쉬이 인도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꽃이 입은 빛깔 중에서도 어쩜 가장 흔한 편인 "붉음"에 내재한 또다른 환기의 연속에 기인한 걸까요. 사람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 보기 좋고 미쁜 덩이로만 공간이 체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못난 것, 추한 것, 더러운 것이 더 가득 공간에 배어 질서를 흔들고 엔트로피를 증강합니다. "명상"이 "아픔"으로, 나아가 근원적 고뇌로 이어진다니 이보다 더한 역설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촘촘히 보람으로 채우지 못한 채, 듬성듬성 공허한 쾌락과 우두망찰 방관, 나태로 물들임은 "죄"입니다. 마땅한 상대를 찾아 사랑의 결실을 맺지 않은 채, 허랑한 자아만 위무한 보편적 방종인을 두고 권 시인은 "삼촌"이라는 익명을 부여하여 준엄히 심판하고 있습니다(p34).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한 인생은, 저 멀리 인간 존재의 불의와 모순이 뿔 끝의 첨점에 달려 금세라도 비등점 너머로 폭발할 것 같은 소말리아(p96)로 보내 버려야 제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나"를 만날 길 없으면, 표류하는 새가 되어 구천을 떠돌면 해법이 보일 지도 모릅니다(p85). 돌다돌다 지친 존재는, 어느 새 그 모든 번민을 한 줌의 재로 화하게 한, 싸늘히 그 붉은 빛을 뿜는 한 떨기 꽃을 만나 돈오의 희열을 느낄 지 모릅니다.(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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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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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데니스 루헤인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도, 대중에게 잘 먹히는 스타일 하나만 개발해서 몇 번이고 우리고 재탕하는 이들도 있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언제나 다양한 시도를 벌이고, 그 때마다 독자에게 신선한 방식으로 흥미를 주며, 어 떻게 된 일인지 완독 후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듯 감동까지 선사합니다. 매번 참신한 형식으로, 자신의 재능이 빚는 소산에 식상함이란 메뉴는 첨가되지 않음을 강조라도 하듯, 같은 작가의 솜씨가 맞나 싶게 변신을 꾀하지만, 언제나 그의 문장은 - 예컨대 이 작품처럼 수식과 내면 묘사가 최소한으로 절제된. 페이지터너를 의도한 철저한 스토리텔링에 치중한 작품 속에서도- 인생과 인간성의 본질을 꿰뚫는 "한 방의 문장"들이 촘촘히 막간을 수놓습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는 있지만, 명분 없이 살인을 할 수는 없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게 운이며, 운이 곧 삶이다."

"사람이란 끊임 없이 변하는 존재 같지만,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게 인간인 법이다."


이 런 잠언에 가까운 멋진 명제들이, 딱 적소 적시에 등장하여 플롯의 밀도를 배가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성취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이나 다양하게 스타일 변신을 꾀하면서도, 1/3 읽다 보면, 이름을 가려 놓은 채로도, "데니스 루헤인이군!"하며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다 읽고 나면 "역시, 이 작가의 솜씨에선 뭘 건져도 건지는 게 있군!" 하며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정독을 하려니 마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제가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저 장르물에 그치지 않고 본격 문학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며 고개를 주억이게 되는 게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 주법 시대 깡패들의 활극을 소재로, 또 뭘 짜내고 음유할 여지가 남아 있을까요? 이런 닳고닳은 테마를 고른 이상, 제아무리 날고 기는 루헤인이라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구태의연이라는 익숙하고 강력한 늪에 드디어 날렵한 다리를 떨구고야 말 공산이 컸습니다. 소설이 그 배경으로 삼은 미 동부의 번화한 거리는 "빠른 자(the quick)"와 "죽은 자(the dead)"로 그 신분과 운명이 나뉠 뿐이라는 점에서, 지난 세기 개척 시대의 와일드 웨스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총집에서 총을 꺼내는 그 팔동작의 민첩도만이 "빠름"을 판단하는 잣대였던 시절과는 달리, 20세기 초반의 뉴욕, 보스턴, 그리고 그의 지배를 받는 하부 구조의 거리들(예컨대 먼 남쪽의, 쿠바, 푸에르토리코와 가깝고, 가까운 만큼 그 범죄적 운명과도 친근한, 플로리다의 템파 같은 곳)에서는, 머리의 회전도와 판단의 정확성이 더 핵심적인 중요도를 차지한다는 점 정도겠습니다.


조지프 커글린은 고위 경찰 간부의 귀한 막내아들로 자라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의 손위 두 형도 마찬가지였죠. 비록 키가 작긴 해도, 잘생긴 얼굴에 배짱도 좋고, 두뇌 회전도 비상했던 데다 본디 심성도 착한 아이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왜 범죄자의 운명,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강도질이나 하는 신세로 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헤인은 언제나 그러했듯 이 의문을 푸는 숙제를 독자에게 맡기지만, 힌트는 아주 공정하게 주고 있습니다. 얼핏 보아 부모의 불화라든가(양친은,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 알 수 있듯,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으면 지나쳤지 모자랄 게 조금도 없는 유형이죠), 어린 눈에도 포찰될 수 있었던 직권 남용, 부패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라든가 하는 피상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나는 문명인들과만 거래한다."며, 별 힘도 들지 않을 것 같은 이탈리안 마피아의 지시 청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건강한 영혼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흔히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문예물에서 저지르곤 하는 과오가, 바로 범죄를 미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명한 <대부> 시지를 감독한 코폴라도, 연작 2편에서 공연히 피델 카스트로라는 코드를 슬쩍 끌어들임으로써 터무니없이 조직 범죄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패착을 저질렀지만(이 루헤인의 작품에서도 아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은 오히려 미국발 조직범죄를 그 섬에서 일소하려는 흐름에 강한 민중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기에 성공 가능했죠. 스페인의 봉건적 압제로부터 미국이 전재을 통해 카리브 해 일대를 해방한 건, 바로 이처럼 장애 없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였고, 이는 대부분 폭력 조직의 힘을 빌려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루 헤인은 느와르를 연출하면서도 그 주역을 맡은 캐릭터들의 배후에, 죄의식, 양심, 영혼이라는 견제자, 최후의 심판자를 고안, 삽입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본-말, 주-객의 원위치가 무엇인지, 극의 재미와 역의 매력에 홀려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베풉니다.


이 소설에는 명언이 참 많이 나오는데요. 커글린은 그의 출신 배경에 어울리게 가장 고급의 아일랜드식 교육을 받습니다만, 그 중에는 카톨릭 신앙이라는 배경이 빠지질 않습니다. 아버지 토 마스 재비어 경정은 그 살아온 깊은 고뇌의 흔적을 길지도 않은 말 몇 마디로, 비극성과 장려함을 가득 담아,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독자들을 향해 간증하듯, 유언하듯, 존재를 털어 내듯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은 불의의 순간 선의의 경찰처럼 현장에 개입하여 잔손을 쓰지도 않고, 악의의 경찰처럼 뇌물을 받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단지 죄인의 가슴 속에 영혼이라는 형틀을 주조하여 장착한 후, 그 자가 일생을 두고 회한과 모멸감. 영혼의 잠식과 함께 살아가도록 형벌을 내린다." 읽다 보면, "아, 그런 거였구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부당한 고통을 겪는 현실로, 바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손쉬운 억단은 삼가야 하겠구나." 같은 (뜬금 없는) 깨달음이 밀려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오히려 동물적인 본능이 빚은 못난 감정에의 매몰을 무기로 터무니없는 무고를 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 소설에 나오는 몇몇 묘사처럼. 개처럼 두들겨 맞고 형체도 못 알아 보게 만든 채 차디찬 대양의 심저에 가라앉게 하는 수밖에 없겠죠.


주 인공이, 신분 태생상의 유리점이야 어찌 되었든 초심자의 위태위태한 지점에 세워져서, 도무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 복판, 생사의 기로에 서서 꼼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천성의 재치와 배짱으로 타개하여 도리어 정상으로 향하는 발판으로 삼는 멋진 곡예의 모습은, 성공하는 스릴러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의 장치입니다. 루헤인은 스릴러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요 양념을 독창적으로 고안하여 독자가 주인공의 거듭된 전락과 파멸 수렴 행보에 서서히 피로감을 느껴갈 즈음에 적실히 삽입, 소설의 "흥행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지(적 착각)"과 "사물의 진상" 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넘나들며 스토리텔링을 하느냐도 오락적 성패를 가름하는 요소인데, 과연 에마가 그토록 매력적인, 멋진 사내놈 하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여자였는지에 대한 해답 역시, 주인공 조 커글린의 시점과 (당연히 우리 독자로는 편향되어 보이는) 아버지 토마스의 시점, 그리고 중반 이후에 재등장하는 디온 바르톨로의 시점을 통해 각각 달리 전달함으로써, 독자에게 정확한 실상을 자체 추론을 통해 재구성하는 쾌감까지 주고 있습니다.


미 궁에 빠진, 혹은 흑막에 가려 있던 진실을 캐치하는 작업은 우리의 주인공 조도 열심히 액자 안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누가, 앨버트 화이트에게 자신을 팔았는지 알아 내어, "빚을 갚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의 수완과 배짱, 영혼 안에서 들끓는 열정을 제대로 알아 본 대부 토마스 페스카토레는, "조가 가장 믿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배신자로 가장 바짝 염두에 두고 있는" 디온을 멀리 몬트리올에서 플로리다까지 빼 내어, 조의 영혼 그 작은 교란을 해소하게 돕습니다. 첫눈에 만난 옛 친구는,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로 조를 맞는데, 이어 저녁 무렵에 긴 침묵을 거치고 나온 고백은 "그래, 내가 배신자였어."라는 침통한 한 마디죠. 하지만 진짜 반전은 지금부터인데요. 사태의 정리를 친구의 해석으로 정리하고 돌아온 조는, 대부와의 통화에서 정반대의 결론으로 낙착을 봅니다. 이는 마치, 영화 <대부 1>에서 돈 코를레오네가 뉴욕의 5대 패밀리와 간만의 회동을 마치고, "범인은 (그간 알려져 있던 바, 혹은 장본인들이 공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르시티였다."며 충격적인 선포를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모르긴 해도 루헤인 역시 이 멋진 플롯을 짜내며 그 고전 영화의 명장면에 크게 영향 받았으리라 저는 짐작하고 있어요.


루헤인이 이처럼 플롯의 트위스팅에 능한 줄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아버지 토마스가 시계 하나를 초라하게 구겨진 아들에게 건 네 줄 때, "대체 뭔 속셈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대부는 바로 그 물품의 가치를 알아 보죠. "내 집 한 채보다 가격이 비싼 아이템이군." 주머니에 챙겨 넣은 후 페스카토레는 세상 누구도 그 눈빛 하나에 다 녹여 낼 것 같은 다정한 분위기로 조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한테 아들 셋이 있다는 걸 알고 있냐?" "네.""그런 나인데, 네 아버지가 이걸 나한테 건네라며 너를 바라보았을 그 순간의 애틋함, 부정을 어찌 내가 모를까? 자식을 키워 봐야 그 마음을 아는 법니다." 아마 여기까지에서 우리 독자뿐 아니라 조 역시, "이젠 살았구나."하는 안도가 온 몸을 감싸고 돌았을 텝니다. 그러나 심해의 포식자처럼 냉혹하고 가차없었기에 그 바닥에서 그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페스카토레는, 결국 이 말 한 마디로 그 모든 가련한 기대를 뒤집는군요. "네 아버지한테, 까불지 말고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해라, 응?" 이쯤 되면 시드니 셀던이 아마 무덤 안에서 전율할 만도 한 수완 아닐까 싶더군요. 우리의 루헤인은 정말 못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잔재미로 소설이 끝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장르 소설이란 설사 한 순간을 진하게 즐겼다고 해도, 마치 작렬하는 햇살 안에 혼을 던져 버리듯 재밌게 즐긴 바다의 한 구석에, 이제는 은밀히 내다 버린 나의 배설물도 그 본체의 성분을 이루고 있겠거니 하는 꺼림칙함으로 두번 몸을 담그고는 싶지 않은 느낌과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루헤인의 작품들은, 마치 러시아의 고전명작을 대할 때만큼이나, 쉽게 읽고 서재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불경을 피하고 싶은, 모종의 존숭감이 들게 하는 마력을 공톨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작품 세부 장치나 개별 문장이 담고 있는, 만만찮은 무게감과 내공이 그 큰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인간 쓰레기들의 불꽃 같은 처절한 생존 경쟁의 뒤안에는, 우리 모두가 그 업보처럼 공유하는 죄의식과 영혼 구원의 문제가, 불길한 탄트라의 자수처럼 수놓아져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루헤인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인간 근원"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할 시간을, "스릴러를 통해"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들이 뭐라건, 저는 이 볼륨을 그런 용도로 사용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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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의병장의 꿈 -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30년, 제2판 나남신서 1450
조상호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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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출판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상호 회장님의 이 자서전을 읽고서, 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의 나남출판사에 대한 인상이라면 "책이 비싸다."는 게 일단 맨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대학교재 제작을 많이 하는 출판사라는 이미지였지, 이 책에서 대단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처럼 "사회과학 전문", "좌파 서적" 이라는 생각은 못 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 세대라면 아마 이런 인식에 혀를 찰지도 모르겠지만요("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나남하면 바로 불온서적이야!"), 최소한 저는 하 모 교수님의 <국제정치학 개론>, 2001년에 간행된 박명림 교수님의 <한국전쟁의 원인> 등의 책들 때문에, 좌파는 고사하고 그 정반대의 경향을 띤 출판사인 줄 알았습니다. 공교럽게도 저는 작년 이맘때 이 출판사에서 출간된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책 역시 좌우로 굳이 나누자면 우파 쪽이라서, 이런 잘못된 선입견이 더욱 굳었네요.

아닌게아니라 바로 이 책 중에서도, 박명림 교수의 출판에 대한 이면의 사연이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하긴 그 책의 서문을, 바로 다름 아닌 최장집 교수님이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썼으니 그때 바로 알아봤어야 할 일입니다. 학술서에 대고 그 성향의 좌우를 가를 게 애초에 아닙니다만, 종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의 지배적 이론은 브루스 커밍스의 이른바 수정주의 경향이 크게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 교수의 이 최신 성과가 그 중 상당수의 이론 기반을 허물어뜨린 셈이니, 좌파 성향의 독자라면 그리 정서적으로 환영할 책은 아니었다고 봐야겠죠. 어찌 보면 아끼는 제자의 연구 진로에 있어, 당신과는 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방향을 전환함을 독려하기까지 한 최 교수의 아량과 덕망에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아무튼 같은 논리가 이 저자, 조상호 사장에게도 적용됩니다. 좌파 성향을 출판인이 지니고 있다 해서, 그 간행하는 출판물 모두가 좌파 성향이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겠죠. 이 책 말미에 보면,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와의 공격적(조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곤욕을 치르는 듯한)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내가 경북 영양 출신의 조지훈 시인을 기린 문학상도 수여하고 있고, 젊어서부터 시인을 사무치게 흠모해 왔거늘 호남 편향이라니 말이 안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책을 (최근 기준으로) 출판한 곳은 우리 회사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조지훈 시인에 대한 열정과 존경의 진정성은 누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보수 언론과의 대담을 수세적 입장에서 내내 치러 낸 것도, "의병장"을 자처하는 그의 언사적 공격성과는 달리, 유순하시고 포용적인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책에서 대단히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는 분은 고 김준엽 고대 총장입니다. 요즘은 공격적 CEO 타입이 주로 그 자리에 오르지만, 전통적으로 이 학교는 점잖은 학자풍의 귀골이 총장직에 자주 올랐던 편이죠. 뭐 김준엽 선생에 대해서는 소개가 필요 없는, 학계의 거목이자 존경 받은 재야인사, 소시적의 독립 운동 경력까지 해서(이 대목에서 고 장준하 선생과 연결되죠) 너무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조상호 회장이 바로, 이 김준엽 선생과 거의 평생에 걸쳐 사제지간, 출판 편집계의 대선배와 직원의 인연으로 이어진 분임을 저는 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거의 1/3 은 김준엽 선생과의 인연에 얽힌 사연입니다.

책 제목에 "언론"이 들어가 있는데, 조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지사형 언론인 김중배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월간지 <신동아>는 군사 정권 당시에도 이미 비판적인 논조로 유명했죠. 조 선생의 동아일보 쪽 인맥은 이렇게 열려 있었던 줄 처음 알았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저 역시, 옛 삼성출판사에서 솔 출판사, 그리고 지금의 나남에 이르기까지 그 판권이 옮아간 경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요,  출판계의 산 증인이신 필자를 통해 이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네요.


이 책에는 조 회장이, 오타가 난 책을 일일이 수거한 후, 바로잡혀진 책을 서점가에 재배포했다는 감동적인 실화도 실려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개정판인데도, 여전히 오타가 바로잡혀져 있지 않은 모습이 몇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p164: 5에서 "장학금은 → 장학금을"으로 바로잡혀야 합니다. 보조사의 운용은 대체로 너그럽게 봐 넘길 수 있지만, 책에 나온 대로라면 그 의미가 심히 교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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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2 기황후 2
장영철.정경순 지음 / 마음의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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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후반부까지만 해도, 양이라는 캐릭터는 자신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부족한 채, 그저 개인적 원한만을 생존의 동력으로 삼은 단순한 타입이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민족의식, 그리고 이를 인격적으로 화체한 고귀한 후계자 충혜왕에 대한 연정이 가미되어, 악착스럽게 제 의지를 밀고 나가며 결과적으로 원 제국의 최고 실력자 연철목아(엘-테무르)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되죠(물론 양이에 감정 이입하는 우리 독자 입장에선 그 반대로 보입니다만).

충혜왕은 1권 끄트머리에서 연철목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도성수비대장을 맡게 됩니다. 사실 아무리 왕족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꺼려져야 할) 외국인이 국가 기무, 나아가 권신 개인의 명운을 좌우할 키 포스트에 등용된다는 건 좀 억지입니다만, 이런 건 개인의 능력과 매력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기마 전투 부족의 공통된 특징은, 혈연보다 능력을 우선시해서 양부자 관계가 꽤나 발달해 있다는 점인데, 연철목아 역시 고려의 충혜왕을 이런 시선으로 봤을 가능성이 큽니다(두 친아들이 성격만 급했을 뿐 대단히 무능했다는 설정이 매우 강조되고도 있죠). 문제는 그처럼 탁월한 자질과 숭고한 운명을 부여받아, 마땅히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부상했어야 할  충혜왕이, 후반으로 갈수록 주저앉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기황후가 이를 대체하여 강렬한 프로타고니스트로 부상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녀는 결국 충혜왕을 위해,아니면 (스포일러이므로 더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그보다 더 유리한 위치의 고귀한 혈통을 지닌 그 누구를 위해, 조력자나 발판이 되겠다는 것 이상의 의지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최소한 소설 속에서 그녀는 철저히 고려인이지, 대원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비전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이 여인의 열렬한 연모, 모성애의 대상이 되었던 두 남성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한 눈물만 보이며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철저히 들러리에 그친 또다른 비운의 남성 타환(원 순제)의 말로는, 대단히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행보를 보이지만, 그러기에 이야기의 맥락을 좇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는 합니다. 1권 처음만 해도, 이 타환은 일종의 온달형 캐릭터로, 현명하고 당찬 평강공주형 반려자 양이의 도움을 받아 뭔가 나중에 단단히 한몫을 해 줄것만 같았으나, 결국은 두 여인으로부터 모두 외면 받는 처지에다 정치적 실패자까지 겸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몰락합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캐릭터들 사이의 엇갈린 사랑, 그 좌초와 부작용에서 비롯했다는 식의 설정도 뭔가 맥빠진 감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기황후의 대적(archenemy)이라면,  여자들이라기보다는 두 남성입니다. 타나실리나 이후의 백안홀도는 캐릭터의 밀도나 깊이가 약하죠. 1권과 2권 중반까지는 연철, 그 이후는 백안(바얀)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잘된 부분은 바로 이들과의 지략 싸움과 반전, 그리고 후반부에서 기황후의 정적인 백안의 전략과 태도가 어떤 사건등을 계기로 설득력 있게 변화해 가는지를 잘 이끌어나가는 대목입니다. 이상화한 주인공들보다는 악역 캐릭터의 행보에 더 필연성이 실리는데, 독자의 증오를 한몸에 사는 두 고려인 악당, 왕고(사실 그는 이렇게 시시한 악한이 아닌, 충혜왕의 부친 충숙왕과 헤게모니를 두고 일생 동안 자웅을 겨룬 왕족 출신 거물이었죠), 그리고 최악의 비열한 졸개형 임병수(미천한 출신으로 질기게도 양이를 따라다니며 악연을 이어가는) 등이 오래 기억에 남지 싶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기황후는 충혜왕과 동갑이며, 원 순제 토곤(타환)은 이들보다 5살 연하였습니다(그러니, TV극에서의 배우 주진모는 어느 기준에서도 좀 연로하다 싶은 배역이죠. 배우 개인의 실제 연령으로나, 드라마에서 하고 나오는 외양이나.... 하지원은 지창욱과 거진 10년 차이지만, 관리를 잘해서인지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나이로만 보았을 때 네 인물의 엇나간 구애의 chain이란 설정은, 상당한 공감을 유발할 수 있죠. 그 모든 장애와 역경을 딛고 마침내 부귀와 권세의 정점에 오른 기황후가, 정작 그간의 모든 포부를 이룰 수 있는 포스트에서 고작 "흉년, 기근"이라는 변수에 무릎을 꿇고 천하를 잃었다든가, 실제 역사에서 혈육(기씨 일족)을 도살한 공민왕의 최측근 최영과 손을 잡고 신흥 명을 협공할 계획(이 자체도 원이 아닌 고려의 천하를 위한 의도였다는군요!세상에) 같은 설정은, 그러나 그저 판타지물에서 흔히 보는 비약 정도로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잔재미가 드물지 않게 보이는 좋은 읽을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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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1 기황후 1
장영철.정경순 지음 / 마음의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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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딛고 거친 운명의 행로를 개척해 나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꼭 외모의 아름다움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캐릭터 기승냥의 경우는 그 대범하면서도 충직하고, 나아가 우직하리만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그 성품상의 아름다움 외에, 겉모습도 대단히 고왔나 모양입니다. 성격도 곧고 착하며, 그 바른 내면을 반영이라도 하듯 아름답게 빚어진 얼굴선과 이목구비의 배치, 몸매의 고운 자태까지 갖춘 소녀, 여인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부당한 운명의 굴레 때문에 모진 수난을 겪는다면, 이를 지켜 보는 독자들의 마음은 큰 폭으로 교란당하거나, 상처를 입곤 하기까지 하죠.

소녀 기승냥은 어려서부터 남복이 입혀진 채 사내 아이로 자라납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즈음이 우리 민족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시련을 입던, 원(元) 제국 간섭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얼굴이 예쁘다 싶은 여성은, 마치 세금이나 진상품마냥, 종주권을 보유한 몽골 황실, 귀족들에게 공녀(貢女)로 끌려 가서, 전혀 원치 않던 비천한 노예의 삶을 타향 이국 만리에서 영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아버지 기자오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귀한 딸을 딸로 키우지 못하고, 남들 보는 눈이 무서워 선머슴으로 둔갑시켜 양육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딸 양이가 아직 어렸던 때, 바로 두 부녀의 눈 앞에서 그 생모가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한 악몽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도 한몫합니다. 양이는 제법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의 유품인 비녀를 손에 쥐고 나서야 아버지로부터 이 사실, 즉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죠. "출생의 비밀"은 또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양이가 제법 성장한 후(아직도 대외적 성별은 사내아이입니다), 기자오는 대단히 미묘한 정치적 성격을 띤 임무를 맡게 됩니다. 원 제국은 당시 정국이 대단히 불안했었는데, 연철이라는 권신이 황제의 폐립, 생사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고, 마땅히 보위에 올라야 할 타환이라는 소년을, 이름만 그럴싸한 황태제 자리에 올려둔 채, 멀리 이 땅 고려에까지 귀양을 보냅니다. 연철은 대단히 간교한 책략을 구사하던 자라, 머나먼 이국에서 타환을 제거하고, 그 책임을 고려에게 돌려 오랜 숙원이던 입성(立省) 조치까지 완수할 작정이었습니다. 연철은 이를 두고 스스로 일석이조의 묘책으로 평가하는 중이네요.

어리고 여린 소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런 거대하고 추악한 음모의 중심부에, 어느 새 제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단계까지 말려드고 마는 모습은, 한편으로 그녀의 천성인 곧은 의지와 진한 혈육애, 다른 한편으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애국심과 민족애에 기인하기에, 독자는 일단 무조건의 동조와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골의 정사를 전횡하는 세력의 무시무시한 괴수인 연철을 한 축에 놓고, 다른 한 편에 여리고 가냘픈 식민지의 소녀 하나를 배치하여, 도저히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을 전개하게 했다는 것이죠. 물론 둘은 처음부터 미스매치인 상대이고(비록 양이가, 유배 온 타환에게 무술을 개인 레슨할 만큼 잘 단련된 신체를 지녔다고는 하나, 설사 초절정의 무예를 보유했다 한들 제국의 시스템에 대적할 수는 없죠.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강인한 신체는 대청도에서 일단 몸을 피신했다가 다시 개경에 잠입할 때에만 제 몫을 발휘하고, 이후에는 별 요긴히 쓰이질 못합니다. 물론 중국에서 갖은 시련을 용케도 이겨 내는 모습이 2권에 나오지만, 그게 어린 시절부터의 무술 실력에 기댄 바 크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이 가망 없어 보이는 대결이 균형이라도 어느 정도 맞추거나, 우리 독자가 은근 원하는 바대로 프로타고니스트 양이의 승리로 끝나려면, 다른 인적(人的) 변수가 도중에 여럿 개입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충혜왕(드라마에선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 호칭을 피하고 있는데, 어차피 시호는 죽은 뒤에 붙여지는 것으므로 오히려 TV 극(劇)의 태도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를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백안, 탈탈, 방신우, 고용보, 독만 들입니다. 이의 반대편에 서는 인물들, 즉 가뜩이나 어려운 양이의 처지를 몇 배나 힘들게 하는 장치로는, 왕고, 임병수, 타나실리 등이 있겠습니다.

여기서 모호한 위치는 바로 충혜왕입니다. 그는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고려 뿐 아니라 원 제국의 (드러난 부분에서, 혹은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모두) 운명을 좌우하는, 실로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고, 개인적 자질이나 (성적) 매력도 탁월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역사의 진로를 바꿀 결정적 순간에서 언제나 수동적이고(성격은 그렇지 않고 정반대의 과격한 스타일입니다만), 고작 한 개인으로서의 정서와 감정에 매몰되어 주저않고 맙니다. 2권에서 기황후가 되는 양이, 그를 일생의 연적으로 간주하는 타환(원 순제), 정부인 타나실리 황후까지 모두 이 충혜왕의 구심적 자장에서 벗어날 줄 모를 정도로 그는 강렬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이지만, 단 한 번도 사태의 중심에 서질 못합니다. 모습만 번드르르하고 능력과 의지가 결핍되었냐면 그것도 전혀 아니라서 기이한 인상까지 줍니다.

역사에 잘 나오듯 충혜왕은 그리 긍정적인 인물이 실제로는 못 되었습니다. 사료에 기억된 대목만으로도, 충혜왕은 누구에게나 비난 받아 마땅한 행적을 남긴 자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半)  판타지물에서는, 얼마든지 대체 역사가 전개 가능하다고 보고, 필경 미남자에다 총명한 두뇌를 지녔음에 틀림 없는 그(조선조 폭군 연산군도 남자로서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매혹적인 스타일이었죠)를 두고 기록 역사의 희생물 정도로 격상, 미화하는 작업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긴 합니다. 타환은 원 순제, 혜종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실존 인물인데, 결과적으로 망국 군주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묘사하고 있듯 어딘가 좀 부족한 인물됨의 설정이 그 실상에서 크게는 벗어나지 않는 듯도 합니다. 타환은 한자 음차를 우리식으로 읽은 거라 몽골어 원음과 큰 차이가 납니다. "토곤"이 실제 발음에 가깝습니다. 연철은 얼른 들어도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이상한데, 이는 한자로 표기하면 燕鐵木兒(연철목아)입니다. 그런데, "철목아(테무르)"까지가 몽골인 이름에 흔히 쓰이는 단위이므로, 굳이 저 이름을 형태별로 나누자면 "연-철목아(엘-테무르)"가 되겠죠. 따라서 이 캐릭터의 이름을 "연철"이라고 정한 건 오류에 가깝습니다(아무리 한국식 독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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