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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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라고 하면 막연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연상시키는 도식화한 승리담 -내지 궁상맞은 가난과 착취 학대의 참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죄 없는 민중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럽기까지 한 지배구조의 서슬 퍼런 압제 하에 정말로 참혹한 일상을 살았죠. 지배 계급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보살펴 주기는커녕,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수탈과 폭력을 일삼았으니까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것도 대단히 판에 박인 방식으로, 격한 어조와 살벌한 비주얼의 "인생극장"를 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은 그의 장편 <어머니>도 아주 건성으로 보았기에,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그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작가정신에서 국내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번 고리키의 단편선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그 유명하다는 <어머니>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의외로 재미있더라구요. 제게 그 이전 체홉이나 투르게네프 등이 재미있었던, 감동적이었던 그런 스타일로 재미있었고나 할까요. 작가가 누가 되었건, 어떤 시대에 살며 무슨 사상과 그 신봉자들의 영향을 받았건 간에, 이들 러시아 작가들이 쓰는 풍이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고, 말하는 방법과 그 내용이 참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여튼 그 <어머니>를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열게 되었죠. 단편이나 장편이나, 고리키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예습 과정"이 필요한 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성취는 러시아 문학의 모범적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때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유쾌한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고, 때로는 애들 놀래켜 주려고 뜬금없이 고안된 괴담처럼 무섭기도 한 분위기 속에, 우리들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하는 그 아득한 가치, 혹은 영혼의 순수성 같은 걸, 끊임 없이 경각시켜 주는 것도 같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드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닮은 것도 있고, 어느 한 편이 다른 이야기들을 추상화, 혹은 귀납하여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리해 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고리키는 이 중 어느 작품에서나, "네 영혼을 더럽히지 마라.","신은 언제나 악마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 널 지켜 보고 있지만, 너에게 악마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네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라는 게, 꼭 기독교적 의미의 유일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모토로 내세우는 신령님인데, 다만 민중에게(그리고 지식인에게) 죄의식을 더 강조한다는 게 차이점인 정도의 그런 존재라고나 할지.

 

<마부>
아닌게아니라 이 작품 중에, 도스토옙스끼의 캐릭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바로 대화 중에 언급되기도 합니다. "비범인은 범인(凡人)을 죽여도 경우에 따라 죄가 될 것 없다!" 어디서 왔는지,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모를 마부는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저런 쓸모 없고 사악한 노파는 죽여도 나쁠 게 없으며, 인류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기까지 하다."고 속삭입니다. 악마는 본시 웅변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이처럼 유혹적으로 속삭인다는 게 성격의 공통이고 스타일의 전통이죠.

고리키가 아무리 도스토옙스키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고 해도, 작품 속에 대놓고 라스콜리니코프를 언급한 건 작가로서 선뜻 내키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캐릭터 파벨 니콜라예비치와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데 확신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제가 정리한 바론 이렇습니다.

 

첫째로,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 전에 그 자신의 명철한 이성으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한 바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노파를 죽이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쏘냐와 함께 있을 때이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을 때건, "죄의식"이란 녀석이 그를 한시도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대지에 키스한 후, 법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의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노파를 죽인 것도 부족해 collateral damage로 죄 없는 젊은 여성 한 명까지 해치고 나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가 사전에 라스콜리니코프를 들먹인 것도, 어쩌면 적발되지 않고 일생을 편하게 살기보다, 적정 시점에 죄의식의 발동으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장엄한 최후를 맞이해 보자는 은근한 소망이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았던, "비범인의 평정심"을 지닌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거죠.

둘째로, 그는 이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는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크게 다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 때문에, "신 앞에서 나 역시 별다를 게 없는 불쌍한 영혼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지만,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과연 내 안에는 아무런 규범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이 없는 존재는 우월한 비범인이 아니라, 짐승 같은 하등한 존재라는 각성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던 거죠. 요즘말로 하면, 그는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던가 하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처벌을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른 방법으로 집행합니다. 많은 사람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존경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비루하고 비굴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했는데, 그것은 사악한 범죄자에 대한 의분이 아니라, (작품에서 분명히 나오듯이) 모욕감에서 비롯한 행동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를 처벌하라! 가 아니라, 이런 작자에게 그토록 오랜 동안 굽신거리고 산 억울함이 더 앞섰던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자라야 죄인에게 돌을 던질 텐데, 이 소소하고 구차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치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처럼, 그는 자신이 분명 큰 죄인이지만, 다른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큰 소리로 공표함으로써, 용기와 확신이 부족해서 살인만 하지 않았다 뿐 일상에서 영혼 팔기를 거리껴하지 않는 그 숱한 추악한 죄인들과 함께 운명의 저울에 달리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깨끗한 순교자로 혼자 죽은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릅니다. 또 그의 옆에는 천사적 조언자인 쏘냐가 없었던 대신, "마부"라는 악마적 조력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차이이겠습니다.

사실 그는 운명의 파멸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마치 엄청난 파장과 뒷수습의 두려움 앞에서도 "진실은 여튼 밝혀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결말에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이 천역덕스러움은 느닷 동양풍의 남가일몽 고사에서 영향이라도 받은 듯, "모든 것이 꿈이었어."라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아마 이 장치는, :"나는 도스토옙스끼라는 거장의 터치에는 못 미치는 하수입니다." 같은 자못 겸손된 태도를 취하는, 고리키 특유의 유머일수도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존재를 건 파국의 속죄란, 감히 현실에서 수용할 수 없는 영웅적 결단일 뿐이라는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환영>
이 모든 것을 꿈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진짜 늙은 주인공 한 사람이 더 나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구두쇠입니다. 자신 못지 않은 구두쇠이고 지난 시대의 낡은 규범을 자신에게나 주변에게나 강철 같은 태도로 강제하는 지독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 온 죗값은 못난 후손을 보게 하는 식으로 치르는 게 하늘의 섭리인가 봅니다. 자신의 아들은, 말로는 그럴싸하게 "시대가 변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쓸 줄도 알아야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 같은 궤변을 떠들지만, 내심은 그저 자신의 방탕벽을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계산 뿐입니다. "저 녀석은, 제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맞아 죽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겪은 억압과 자기 부정으로 인한 내심의 상처 때문에, 망나니 아들에게 엄하게 굴질 못합니다. 바로 이 때, "당신이 취해야 할 현명한 방책이 뭔지 알려 주마!" 며 느닷 나타난 존재가 있습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는데, 아마 저 앞 다른 무대에서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만난 "마부"가 변장을 하고 나타난 놈일수도 있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그를 "인간-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일단 부르고 싶어하지만, 사실 이런 명명 속에 이미 정체가 드러나 버린 거나 마찬가지네요. 이반 카라마조프에게 (이복 동생) 스메르자코프가 자기 자신의 메피스토펠레스적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듯, 이 괴령 역시 마부나 비슷하게 결국 자신의 마음 한 켠에서 빚어진 의식의 덩어리입니다. 숨막힐 듯한 나르시즘으로 무장한 그이기에,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당신, 짱이에연!"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는 게죠(p58: 16).

 

<종>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단편에는 "크리스마스 주간"이란 부제가 없는데, 이는 소설의 배경이 빤히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에밀레종 설화에도 나오듯이, 종이란 주조물이 제대로 오랜 세월 그 기능을 하려면 제작 과정에서 장인적 기술 못지 않게, 뭔가 초자연적이라 할 만큼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야 하나 봅니다. 마을에서 대단히 큰 미움을 받지만 그 영향력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티프 프라호프는, 저 대서양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가 빚어낸 고유한 구두쇠상 스크루지와도 비슷한 성격입니다. 그와 차이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회심이 빚은 기쁨으로 그 아침을 맞게 된 스쿠루지와는 달리, 부활절 전야에 그토록 마음 한구석에서 평정심을 갉아 먹던 불길한 예감, "종이 깨질지도 모른다." 가 현실화되었다는 참담한 체험입니다. 사실 종소리는 그의 위신과 체면, "시장 당선"을 위한 전제조건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 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는 점도 이미 프라호프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종소리"는 본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합니다. 만약 부활절 새벽에 종소리를 듣는다면, 이는 아마 그의 더 오래된, 제 인생의 기억에 켜켜이 쌓인 그 모든 죄악을 송두리째 들고 일어나게 했을 텝니다(영화 <스파이더맨3>에도 나오듯이). 종소리가 들린다면, 이처럼 그는 존재 자체가 붕괴했을 테고, 만약 안 들리면 이는 일시적으로 마을에서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결과 정도에 그칩니다. 저는 이 결말에서 그는 짐짓 패배(남들이 모두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만은 종의 균열과 더불어 홀로 저주받았다는 죽음과 같은 수치를 느껴야 함)를 가장하지만, 층계를 내려가는 걸음은 안도로 가득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종이 깨어진 것으로, 그는 일시적인 죗값을 치른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분노했다면, 워낙 악질의 성품인 이상 종지기 노인 루카에게 엄청난 분풀이를 하고 바로 해고했을 것입니다. 헌데, 왠지 모르는 사이에 종에다가 미심쩍은 짓깨나 했을 법한 노인을 그냥 넘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로맨스>
최소한, 연하의 소년이 연상의 여인(많이 연상은 아니지만)으로부터 충격적이라 할 만한 연정의 컴팩트를 접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 황폐해진다는 설정은 투르게니예프의 <첫사랑>을 닮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소년은, 마치 여의도에 밀집한 금융가에서, 재빠르고 센스있게 배달과 퀵서비스를 전담하는 모 실존 인물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면, 에드가 스노의 르포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어린 홍군("홍위병" 아님!) 소년을 연상하게도 하죠. 장개석의 추격전에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셔츠 깃 하나를 세우는데도 온갖 멋을 다 부리는 스트리트- 스마트 타입. 일이 고되고 궂다 보니 얼굴에 묻은 때를 씻어낼 시간도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타고난 외모의 맵시를 가꿀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 날 공장에서 갑자기 사고를 당하고, 이런 사고는 보통 신체일부가 불구가 되는 걸로 귀착이 잘 나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런 결과는 면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어떤 누나(정도겠죠?)뻘 되는 여인에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쇼크를 입고, 어떤 육신의 상처 없이도 구제불능의 폐인지경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런 설정에서 꼭 훼방꾼 연적으로는 군인이 등장하는데, 아마 자신이 갖지 못한 남성성의 총체를 상징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완껏 접근하다 보면 꼭 안되라는 법도 없고(신분이나 재산 따위의 벽이 있는지도 딱부러지게 안 나옵니다),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 것도 아닌데, 여튼 짝사랑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고, 그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마치 서른은 넘은 듯한 찌들고 늙은, 생명의 불꽃을 잃은 듯한 외모로 바뀝니다.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찬란하게 빛나는 청춘도 한 순간에 시들게 할 수 있는 그 찰나적 연정의 불운한 교차 따위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원인인지를 지적하며, 우리네 인생의 그 숱한 격정과 환희 따위의 부질없음을 지적하고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 눈의 여인>
여기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목소리는 경찰관 조심 키릴로비치입니다. 어느 여인이 그를 찾아오는데, 사연이란 한심합니다. 매춘부로 등록해 달라는 거죠. 아이가 여럿이고 남편은 죽어서 생계를 꾸려 갈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인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타락과 음욕을 두루 채우고 손쉽게 돈도 벌 생각인데, 거짓으로 명분을 꾸려 대고 있다고 본 거죠. 하지만 우연히도 그녀의 이어지는행적을 지켜 보게 되고, 자신에게 털어 놓은 말들이 다 사실임도 확인합니다. 생의참상과 질곡 속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지만, 감춰진 내적 동기는 지극히 숭고한,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러시아의 어머니상이었던 것이죠. 경찰관이란 직책이 제정러시아에서 대단히, 반민중적이고 잔인한 압제적 체제의 주구였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리키는 이 조심 키릴로비치를 냉정하고 공정한 제3자적 조력자의 시야에 둠으로써, 민중 스스로 오해하기 쉬운 취약 계층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인을 단죄할 때, 그는 어리석은 대중의 손쉬운 군중심리에 매몰되지만, 다시 공정한 법집행자이자 심판관의 위치로 복귀할 때, 그는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쿨리나 할머니>
역자 이수경 박사님은 이 아쿨리나 할머니가 진짜 고리키의 외조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참 놀라운 일인데요. 막심 고리키 자신이 최하층 빈민 출신이니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이 아쿨리나 할머니라는 존재를, 자신도 천대 받으면서 자신보다 더 못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할머니한테 빌붙고 사는 자들은 계층과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민중을 보호하고 구호해야 할 지배계층이, 전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근로 대중에 기식하고 사는 기막힌 참상, 그 와중에서도 "어머니 대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체제의 모순과 병폐를 고스란히 자기 희생으로 떠받치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민중의 어떤 화신 정도로 해석했습니다.

 

<이제르길 노파>
같은 러시아 할머니지만 이분은 정말 "자유부인"으로 한 생을 화끈하게 살다가, 육체적 매력이 다했구나 싶은 순간 화류계 생활을 과감히 정리하고 조용히 명상적 정착 생활로 패턴 체인지를 했다는 점에서, 위의 아쿨리나 님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죠(정도가 아니라 극과 극).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 무렵 제정 체제로 인근 나라와 민족들을 많이도 괴롭혔습니다. 한때는 더 강력한 국력으로 볼가 강 유역을 넘봤던 투르크 제국의 국민, 루마니아인, 뱀처럼 사악하면서도 "그리스인이 무슨 상관이라고 제가 나선" 폴란드 귀족, ... 등등 해서 거쳐간 남자만도 셀 수없이 많습니다. 매춘부 생활은 했지만, 돈을 푸대자루로 들고 와서 그녀의 머리 위로 퍼 부은 늙은 부자 영감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하지 않은, 강단과 주관이 강한 여인이었죠. 이제 그녀는 인생의 황혼에 서서 마치 초자연적 염력이나 발휘하듯, "네 눈엔 저 먹구름의 그림자가 그림자로만 보이디? 저건 불멸의 라라라는 녀석이다." "저 빛깔이 푸른 색이더냐? 하긴 이제 내 눈에는 색이 안 보이지만 아마 그럴게다. 저건 제 손으로 제 심장을 꺼내 흩뿌린 단코의 자취지."

 

역자는 라라를 두고 극단적 이기주의자, 단코를 이타주의자, 그리고 이베르길 노파를 그 가운데 선 리버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파의 일생을 거쳐간 그 수많은 남자들 중에, 특별히 노인의 영혼을 홀렸던 남자 둘의 이상형을 그리 우화적으로 풀어 놓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른 말로, 라라와 단코는 같은 인물의 다른 두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대중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범한 존재를 중상 모략하고 저주합니다. 그 비범한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면, 그는 무리에서 추방당한 파문자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 불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우월성의 증거인데, 범속한 무리들 사이에선 오히려 저주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단코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추종자들로부터 "우리를 잘못 인도하고 있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심장을 꺼내들고 순교를 한 그 순간부터, 그는 정의와 박애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피맛을 보아야 대중은 유순해지고,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됩니다. 자유로운 여성 이제르길은 그 모든 어리석음을 경멸하고, 자신에 내재한 모성을 발동시켜 그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을 남겨 자신의 힘으로 배태할 것을 열망합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비범한 남성과의 결합이었으며, 혹은 그녀 자신에 내재한 아니무스에의 간절한 희구였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라라와 단코는 결국 이제르길 노파 영혼의 가장 빛나는 한 귀퉁이를 잘라 빚은 펜던트였다고 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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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Change - 가장 위대한 나를 실현하는 삶의 연금술
이승헌 지음, 윤구용 옮김 / 한문화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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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총장은 단학, 기수련, 뇌호흡 등으로 미국에까지 잘 알려진 분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단지 한 개인의 신체와 영혼에 국한된 게 아니고, 크게는 우주와 맞닿아 있고, 작게는 원자 안 소립자, 양자 안의 파동, 에너지, 그 물리적 구조의 미묘한 얼개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나의 현재 삶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더 나은 상태, 혹은 더 활기 있고 유쾌하며 보람된 상태로 발전해야겠다는 욕구, 다시 말해 "변화"를 위한 모색을 시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할지, 어떤 방법부터 밟아 나가야 바람직한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막막합니다. 건강의 문제, 가족, 친지와의 사랑, 우정 같은 관계 형성의 문제도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차원의 고민, 즉 "나란 존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문제 역시 깊은 내면으로부터 나를 괴롭히고 자극하는 질문입니다.

 

이승헌 총장은 어려서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왜 존재하며, 나를 둘러싼 우주와의 관계 그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아주 골치가 아파왔다고 회상하는군요. 보통 이런 고민을 어려서 해 보기도 쉽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는 학업 혹은 생업에 바빠 잊고 지내는 게 흔한 모습입니다. 헌데 확실히 특별한 분은 이런 점에서도 우리하고 다른 면이 있는가 봅니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아내와 두 아들에게 생계 수단을 마련해 주고" 산사로 들어가 21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수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몸으로 깨달음이 전해져 오는 체험을 했다는군요. 머리 속으로 생각과 추리를 통해 지식을 알거나, 세속적인 체험과 교류를 통해 감을 익힌다든가 하는 식이 아닌, 영혼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통합적인 깨달음을 경험했다는 술회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가 세계에 보급하고 발전시킨 단학과 뇌호흡의 기초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승헌 총장은 현대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과학의 언어로 그 기초부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네요. 어떤 운동, 혹은 존재 형태가, 입자면 입자고, 파동이면 파동일 뿐, 둘 사이의 경계에 걸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종래 물리학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듯이 이중 슬릿의 실험이 행해진 후, 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죠. 전자를 그 두 슬릿 사이로 통과하게 발사를 시키니까, 벽면에 난 흔적은 슬릿의 구멍을 따라 평행한 일직선 모양 자국이 나야 마땅한데도, 간섭 무늬의 모양이 그려져더라는 것입니다. (간섭 무늬라는 건 두 동심원이 물결 모양으로 서로 만나서 합쳐지는 걸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파동은 서로 만나면 모양이 찌그러지는 게 아니라 제 3의 모양을 형성하죠) 그럼 이 전자는 파동인가 해서 슬릿에 대고 검출기로 측정을 해 보니 이번에는 입자 모양이 나오더라는 거죠.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처음에는 분명 파동이었는데, 누가 눈을 들이대니 입자로 바뀌었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파동이라는 건 확률의 문제입니다.  어떤 아이가 커서 군인이 될지, 혹은 범죄자가 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 보면 그 가능성은 현실에서 하나로 확정되죠. 이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개입이 있으니까 가능합니다. 하지만, 검출기를 갖다 대니 (뭔가 확실한 모양을 지닌) 입자였다가, 만약 검출기 없이 그대로 통과시킨다면 "군인 40%, 범죄자 60%"로 분리되어 확률분포를 이룬다면, 이것은 뭔가 섬뜩하기까지 한 일이죠. 이런 역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비유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관적 관념론을 이야기할 때,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의 유명한 진술을 예로 들곤 합니다. 숲에서 나무가 쓰려졌는데, 아무도 그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 소리는 난 것인가 나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 "소리는 나지 않았다."고 대답한 사람이 버클리이고, 이런 태도를 가리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하죠. 이 입장은 수백 년에 걸쳐, 아이들 말대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해도, 소리는 객관적으로 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생각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쉽게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객관론이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전자를 (기계를 통해서건 어떤 방법으로건) 관측을 하면 그 순간 입자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그러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이리 갈 확률 30%, 저것이 될 확률 70% 같은 식으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승헌 총장은 이게 바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예전에 불렸던 관점의 복권, 명예 회복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현상은, 존재한 적도 없게 된다는 말로도 표현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치환 관계를 규명한 바 있습니다. 이 총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너지와 의식 사이의 상호 전환을 논하고 있네요. 우리의 의식은, 형체 없는 것을 형체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유해하고 구차한 것을 소중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무의미를 의미로 전환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에서 의식이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사물과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 속에 감추어진 에너지를 최대한 건설적으로 끌어내고, 이를 물질계에 구축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물이라고 하면, H2O라는 화학식으로 이해한다든가, 흰 바탕에 무미한 느낌이라든가 하는 사항으로는 본질적으로 안다고 하기 어렵고, 오직 그 "물"을 자기 몸에 끼얹어 느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식은 이처럼, "경험질"이라고 하는 총체적 인식을 통해 사물을 뇌 안에 정리하게 되는데, 우리가 변화를 통해 에너지를 생성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은 이 같은 참된 앎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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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 중원을 차지한 리더들의 핵심 전략
황호 지음 / 내안에뜰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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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처드 닉슨 시절에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이런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나다. "Power is the ultimate aprodisiac."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부족한 말입니다. 권력이야말로 성욕보다, 물욕보다, 혹은 차라리 부모의 사랑보다, 더 우선하고 더 치명적이고 더 중독적인 마성의 원천입니다. 권력은 부자 간에도 공유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낡은 말입니다. 권력은 언제나 부자 사이의 쟁탈물이었으며,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영조와 사도세자, 인조와 소현세자, 이성계와 이방원의 알력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멀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부자 술탄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예 역시 허다합니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인간이 인간 본연의 정과 도리를 망각하기에 이르는 걸까요?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책에는 모두 네 사람의, 중원의 패자(覇者)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다 내로라 하는, 오천 년 중국역사상 첫째둘째를 다툴 인걸들이요 대 지략가에 영웅들입니다. 그 중에서 처음에 나오는 이가 바로 무측천인데, 잠시 말을 들어 봅시다. "권력에는 인정이 없다... 속으로 뉘우칠지라도 결코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 (하략)" 그녀 스스로가 파워 폴리틱스의 달인이었던 까닭에, 권력의 속성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요약하기도 힘들 만큼 명언으로 보입니다. 제 생각에, 악귀와도 같이 치밀하고 단호했던 무측천도, 속으로 뉘우치는 때가 있기는 했나 봅니다. 아예 뉘우침이라는 걸 모르는 이와, 저처럼 은근 뉘우치기도 하면서 현실적인 정략 구사에는 무자비한 수완가,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요, 또 어느 쪽이 더 성공적인 권력 추구자일까요? 그 해답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의붓자식도 아닌 자기 속으로 낳은 친아들조차 희생시키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무측천 본인 말고는 답할 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무자비한 군주로는 서태후가 있었죠(무측천과는 달리 직접 보위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만). 서태후 역시 자신의 친아들인 동치제에게 조금도 정을 주지 않아, 결국 정치의 파행을 더욱 심화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아직까지도 중국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효율적인 정책을 편 군주로 평가받는 창업자인데, 그는 기실 농민 출신으로 천자가 된 매우 드문 출세형 위인이라서 더 큰 사랑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 특히 중점적으로 소개된 일화는, 항우보다 먼저 진(秦)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주색 향락과 사치에 빠진 유방을 보고, 그의 책사 장량이 "고작 이런 짓을 하려고 거병을 하셨단 말입니까?"라며 꾸짖었던 일화입니다. 유방은 결코 온후관인한 성품이 아니었는데, 다만 그의 확실한 장점은, 아랫사람이 하는 말도 그것이 합당한 충고라면 무조건 수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당태종 이세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무려, 자기의 형 둘을 오로지 권력 쟁취를 위해 희생시켰으니, 권력의 냉혹함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거론될 자격이 있는 인물이겠습니다(그가 원튼 않든). 이런 그도, 일단 권좌에 오른 후에는, 신하들의 간언을. 그 마음에 내키건 아니건, 심지어 그 타당성이 확실하건 그 반대건, 일단 듣고보았다는 게 그 성품의 위대함으로 평가됩니다. 장량은 유방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인물이기라도 했지만, 위징은 자신의 형이자 정적인 이건성의 측근이었습니다. 목숨을 앗겨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이세민은 놀랍게도 이 위징을 자신의 재이 상으로 삼아, 그로부터 나오는 온갖 고언과 직언을 다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다만 마지막 주원장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출신이 한미했던 탓에, 주변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심지어는 멸족을 시키기까지 하여, 결국 제국 말기에는 통치의 문란을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의 위대한 점은, 왜구의 노략질에 대해 단호한 대책을 마련하고, 자신이 극빈 농민의 자손이었던 만큼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정치의 기본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고, 모든 질서와 안정은 오로지 권력의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확고한 통치 철학이 아니었나 하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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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케네스 & 글로리아 코플랜드 지음 / 사랑의메세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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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만, 왜 사랑에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연관을 맺어야만 하는지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가운데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드라마에서의 "사랑"과, 이 책에서 저자가 사용하는 으의미의 "사랑"'입니다. 다소 투박하게 가르자면, 전자는 "에로스"에 가깝고, 후자는 "아가페"를 주로 의미하겠습니다만, 그런 이분법(내지는 삼분법) 자체가 큰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가소로운 이야기입니다. 철없는 10대의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눈총 받을 불장난이겠으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해서 육적인 면이 언제나 배제되는 성질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섣부른 이분법은, 사랑과 신 앞에 동시에 오만해지는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저자 케네쓰 코플랜드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분이네요. 아무래도 여전히 미국 내에서 열악한 위치에 머물러 있을 체로키 인디언 혈통의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라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좋은 목소리 하나로 나이트클럽  직업 가수 생활도 하다가, 돌연 어느 순간 회심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도 예사 교인이 아니라, 대단히 독실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닌 그런 분입니다. 이분이 이런 회심의 계기를 가진 데에는, 부인 글로리아와의 만남이 결정적 역할을 했고, 따라서 이 책은 두 분 부부의 공동 명의로 된 저작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너희를 집어 삼킬 순간만을 노리고 있"으나, 저자는 일견 암흑이 빛을 내려 누를 것만 같은 세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집어 삼키는 일은, 오로지 우리가 그것을 "허락"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 허락을 내리는 순간에는, "마치 홍수와 같이 우리 안으로 쳐들어 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야 그가 우리를 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자유 의지를 주었으니, 믿음을 갖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요한 복음의 말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에 거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사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면, 사탄에게 우리를 삼킬 것을 허용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험한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은, 결국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입니다.

예수는 피의 희생물일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인간을 사랑해서 우리에게 그 대표로 파견한 중보자(mediator)라고 합니다(이 책 p52). 삼위일체의 교리란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롭죠. 우리를 사랑해서 지상에 파견한 그 아드님이, 바로 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우리 곁에 오셨을 때엔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파도 있지만, 기독교의 주류는 아무래도 이를 인정하는 쪽이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를 한없이 아끼고 자애하는 모습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실수를 연발로 저질"렀다고 해도, 우리를 바로 엄히 벌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다독이는 게 아버지의 태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도,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천벌을 받지 않고 저리 활개를 펴고 지상을 돌아다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건 대관용,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외투 안에 몰아 넣고 관조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은 오로지 사랑 속에서만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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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종합연구소 2014 한국 경제 대예측 - 일본 최고 민간경제연구소의 한국 경제 전망
노무라종합연구소 엮음 / 청림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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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나와 있는 "대예측"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범위도 넓고 폭도 깊은 분석을 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보통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에 이런 책들이 나오긴 하지만, 특히나 이 책처럼 매년 정기적이라 할 만큼 고정된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내는 류라면, 집필측이 참 애로를 겪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크로트렌드만 다루는 입장이라면 크게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이 책처럼, 깊이와 폭을 동시에 노리는 책이, 그 스탠스를 잡기가 난감한 거죠. 거시적 상황이나 여건이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크게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업데이트되었다는 인상을 뚜렷이 남기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서인데요. 제가 매년 이 책을 보고 있지만, 볼 때마다 놀라는 건, 2014년판이면 정말 그 출판시점에서의 적실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구색만 갖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스타일, 테마를 바꾸는 식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고민, 정확한 데이타에 기초하고 이루는 분석, 집필이라야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폭"을 갖추었다고 하면, 이 책이 다루는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뜻입니다. "깊이"가 느껴진다는 말은, 단기 트렌드의 정보 전달에 치우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독자 혼자 힘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다음 기간에 대한 분석을 해 줄 수 있게 하는 프레임을 키워 주는 교육적 컨텐츠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근래 좋은 경제경영서가 많이 나오지만, "싱싱한 물고기"를 잔뜩 담고 있음에도 정작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은 보기 드물었습니다. 헌데, 이 책은 "고기를 낚는 방법", "여기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싱싱한 녀석을 건질 수 있는 방법"까지 두루 가르쳐 주는 책이었다고나 할까요. 정보도 좋지만, 그 정보 이면에 숨은 거대한 체계와 논리를 배우는 독서가 즐거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한국경제" 대예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책은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는 세계 경제 대전망입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아 1부까지는 각국 시리즈에 공통 module이고, 2부부터 특화된 각론이 전개되는구나. 약았는걸?" 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게 놀라웠습니다(정성을 많이 들인 기획, 집필이라는 말입니다). 3장의 내용이, 뚜렷하게 "한국과 일본"에 포커스를 두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용이 절대 그 제목을 배신하지 않는, 성실한 편제였다고나 할까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워낙 큰 충격을 몰고 왔으므로, 다소 식상하지만 이 책도 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1부 1장의 제목은 "세계 경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입니다. 아 마 우리가 10년쯤으로 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고 하면, 미래에 나온 책의 한 챕터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게 다소 의아할 텝니다. "무슨 새삼스러운..?" 그런데 그 미묘한 10년기 동안, 세계는 미국의 패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고, 중국의 잽싼 부상이 세상의 모습을 통째로 바꿔 놓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직도 미국 타령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기가 일쑤였죠. 격하고 다이내믹한 풍랑을 겪고 난 후에야 냉정을 되찾은 세계는, "여전히 미국이 문제(중립적인 의미에서)"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초미의 관심사는 양적 완화 정책의 변화 기조입니다. 이미 미 연준은 긴축 기조로 돌아설 것임을 천명했고,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듯, 뉴스 인용에 그치지 않고 상세한 분석과 전망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정식으로 취임한 재닛 옐런의 성향도 본문 중에 잠시 언급합니다. 아무래도 일본측의 시야에서 바라보는 만큼, 2001년 당시의 "일본은행"이 취한 긴축 정책과의 비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상황이 크게 차이가 나는 만큼 불필요한 시도가 아니었나 보여집니다. 여튼 결론은, 당시의 일본은 단기국채 위주의 회수 정책이었고, 미국의 지금 그것은 중장기 maturity 를 대상으로 한 만큼, 그 결과를 두고 섣부른 유추는 금물이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긴축의 속도가 완만할 것인가 그 반대이겠는가에 대해서는, 이 노무라 시리즈가 언제나 그래왔듯, "유보"적인 결론입니다. 노무라 시리즈가 믿음이 가는 건, 어차피 변수가 다양하게 개입하는 경제현황의 전망에 있어서, 무리한 확단은 언제나 패착으로 향하며, 설사 점친 방향이 맞았다 한들 행운의 소산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독자에게까지 상기시켜 준다는 점입니다. 판단은, 마지막 순간까지 흘러나오는 정보를 모두 취합한 후 우리 스스로에게 남겨진 몫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은 미국의 정치상황을 잠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듯 지금은 공화 민주 양당의 정책 이격도가, 유사 이래 최대라고 할 만큼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정치는 경제사회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종속변수이니만큼, 미국 경제가 안고 있는 양극화 추세가 문제이지 정치인의 무능을 탓할 건 아니죠. 하지만 정치인들이,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사후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경제 분석서에서 정치 이야기가 많이 개입하면 산만해지는 단점이 있는데, 이 책은 딱 적절할 만큼만 짚어 주고 있습니다. 노무라 시리즈가 이래서 좋다는 겁니다.


" 미국의 세계 맹주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이 챕터는 사실 그 다루는 주제가, 이 정도 분량에서 소화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겠으므로, 시간 없는 분들은 패스해도 좋을듯합니다. 누구에게나 재미 있을 토픽이지만, 또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입니다. 일본이 언제나 군침을 다시는 동남아의 볼륨 존에 대해서도, 그 성장세는 그리 낙관할 형편이 아니며, 결국은 중국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까지 아주 조금 흘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볼 일이 아니지만, 역시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노무라 시리즈에서 취하리라 충분히 기대되는 스탠스네요.


아배노믹스의 성패를 두고는 대체로 두 가지 점을 분명히합니다. 하나는, 우리 한국에서의 불편한 분위기와는 달리, 여전히 이 정권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 최소한 기대치가 높다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두번째로, 이 정권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소비세율 인상 조치의 결과를 두고, 당국은 경기 실속(失速)을 막기 위해 갖은 궁리를 다 짜내고 있다는 점이죠. 책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는 사항인데, "결국 5~10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기 십상이다."는 관점이 일단 기본으로 깔려 있긴 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형편이 디테일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노정함도 집필진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저성장시대에의 건강한 적응, 혹은 표면적 탈출을 위해(더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우울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국 정부가 어떤 기조 하에서 정책을 펴고 있으며, 대체로 효과를 보는 편인지에 대한 촌평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2부가 볼만합니다. 본디 거시 분석은 누가 해도 비슷한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 말하는 사람의 역량이나 내공이 드러나게 되어 있죠. 이 후반부서는 전기전자, 자동차, IT, 부동산, 금융, 그리고 유통 분야를 논급하고 있습니다.


전기전자의 장이 그나마 가장 "식상한(?)" 편이었고, 나머지 분석은 정말 읽는 순간 눈 앞에 새로운 경지가 보일 만큼 신선했습니다. 특 히 한국 가전 업체들의 미국 시장 대약진을 집중 거론하고, 일본 업체들의 초라한 패퇴(흑색 가전) 속의 권토 중래(백색 가전) 분위기를 언급하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월폴은 현재 덩핌 혐의로 한국 2社를 자국 법원에 제소한 상태인데, 이는 미국 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체 위기를 절감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반격 태세가 만만치 않다는 점도 상기하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종래의 거인들"은, 과거의 영화가 주는 달콤한 기억에 빠져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 못하는 분위기라는 것도 살짝 암시합니다. 자동차의 경우, 친환경 컨셉은 더 이상 시장 선도의 소재가 아니라, 기업이 이 판에서 살아 남느냐의 문제라고 아주 단언하고 있습니다. 신흥국 시장에서 자동차 메이저들은 승부를 봐야 할 단계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며, 그 중에서도 닛산의 도약세가 현재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아주 볼만한 파트가 IT입니다. 우리는 누구가, 잡스의 애플이 지난 10년기 중에 자리잡아 놓은 스마트폰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체감하지만, 정작 그 본질적인 경제사적, 문명사적, 혹은 인문적 의의가 무엇인지 표현해 보라고 하면 미디어에서 쉽게 들어오던 상투어 몇 마디를 풀어 보는 데 그치는 게 고작이죠. 그런데 이 책은 아주 짧은 분량 안에, 왜 스마트 혁명이 그토록 지대한 의의를 지니는지 아주 핵심만 찔러서 품격 있게 표현해 주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경제 분석서에 추상어구, 역사적 의의 타령이 들어가면, 외관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몰입도와 효율이 떨어집니다. 노무라 시리즈는 정반대로, 문제를 근본 차원에서 이해를 돕는다는 확실한 메리트를 이 대목에서도 보여 줍니다. 거의 감동 수준이었습니다.


유통의 키워드는 한마디로 "컨버전스"입니다. 사실 유통에서의 혁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국에서조차 이미 1990년대애 가격 파괴니 뭐니 해서 치열한 경쟁의 바람이 일었다는 걸 우리 대부분이 기억합니다. 어찌 보면 재래시장과 대형 마트의 충돌도, 시장의 강자-약자 간 불공정경쟁의 갑을 이슈가 아닌, 혁신과 정체 사이의 치열한 각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혁신의 키를 강자 쪽에서 쥐고 판을 끌어간다는 데 있을 뿐이죠. 이 장에서 초점을 대담하게 옮기는 분야는, "PB"입니다. 왜 저기 우리도 GS나 CU 같은 데서,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파는 우유나 스낵을 보곤 하죠(제법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제품들은 대체로 저가인 편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뤄집니다.


요즘 선대인씨 덕분에 부동산 시장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부쩍 높아졌죠? 선대인씨 책을 읽고 기본 프레임을 잡은 독자라면, 이 책의 부동산 파트를 읽으시고 보다 시장 중심적인 처방과 타개책이 무엇인지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대인씨의 최근 베스트셀러가, "이 정부에서 폭탄 돌리기를 바로 끝내 버려야 한다."는 거시 정책 위주의 내용이었다면, 이 책의 해당 파트는 시장이 언제나 직면하게 마련인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곤경을, 어떻게 선진 시스템과 기법을 도입, 혹은 창안하여 극복해 내는지에 대한 놀랄 만한 청사진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 새로운 트렌드가, 일본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지 그들도 구미의 것을 연구하여 자국 실정에 맞게 변형한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건,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1인 가구의 증가나, 소유에서 사용향유 위주의 패턴으로 바뀐다는 피상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대중은 그 기업의 경영 과실을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주식회사 제도입니다. 부동산 개발 역시, "공모"를 통해서, 혹은 그 단계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공신력을 충분히 확보한 민간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개인이 투자의 애로를 벗어날 방법은 있다는 것입니다. 작 금의 부동산 난국은 비단 세입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집주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고충이 (어차피 한계가 분명한) 정부의 개입으로 뭐가 나아질 수는 없고, 시장의 성숙과 선진화라는 민간 차원에서 접근해야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긴, 어찌 그 이치가 비단 부동산 섹터에 한정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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