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를 흔히 스릴러 작가로 분류하곤 합니다만, 저는 그의 작풍(作風)을 두고, 특유의 쉽고 넉넉한 말투에 따뜻한 인간미를 가득 담아 공기 중 포자처럼 전파하는 휴머니스트의 옛이야기투라 일컫고 싶습니다. 이번 신작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고, 익히 독자가 즐겨 왔던 그만의 톤이 물씬 배인, 허술한 듯하면서도 알고 보면 속이 꽉 찬 장편의 "미담"을 잘 감상했다는 느낌이네요 대만족입니다. 마무리가 약했다, 중반까지 예측이 뻔한 스토리였다 등등의 평을 하시는 다른 독자를 위해, 저 나름대로 그의 변호를 좀 해 볼까 합니다("변호"가 굳이 필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언제나 히가시노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어떤 장르적 외양을 하고 있건 간에 그의 작품은, 한 편의 훈훈한, 그리고 건강한 동화가 전달할 법한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첫째 장치는 선하고 착한 캐릭터들의 면면입니다. 이 중에는, 환경의 보호 덕분이건 강인하고 일관된 선의지 덕분이건, 초심의 순수를 언제나 잃지 않는 믿음직한 인물들도 있고, 마치 "돌아온 탕아"를 연상시키듯 일시적으로 타락, 일탈의 모습을 보였으나, 못내 저버릴 수 없었던 양심을 회복하고 결정적 국면에서 "한 방"을 해 주는 성격들도 눈에 띕니다. 대체로 보면 그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악인들도, 근본부터가 완전히 잘못된 이가 드물고, 악하면서도 어딘가 허술한 점을 노출하여 결과적으로 "선의 회복, 실현"에 반어적, 비(非)고의적으로 기여하는 해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실의 세상 만사가 이처럼 불변의 조리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잘 알듯 우리의 모습은 훨씬 사악하고 타락했으며, 일견 가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밀폐 용기 속에 일시적 교란이 일어나도, 결국에는 제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히가시노 선생의 작은 가공의 세계가 더욱 애틋이 정감을 풍기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겨울에 그 상상만으로도 서늘한 설산(雪山) 스키장을 배경으로 한 픽션을 읽으면, 그 애초의 미학적 쾌감이 증대될까요, 아님 반감이 될까요? 납량(納凉)은 여름철에 실시해야 제격이라는 생각은, 이 소설에서 구리바야시 상이 어린 중학생 아들 슈토에게 예전 낡은 방식의 스키 이야기를 들려 주는 그 품새 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 가볍고 작은 볼륨을 가방 안에 넣어가서, 하루의 코스가 끝난 뒤 다음 날의 질주를 기약하며 잠을 청할 때, 리조트의 숙소에서 읽기라도 하면 제격일 것 같습니다. 결국 장르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얼마나 그 처음의 의도 관철에 성공했는지가 중요하지, 책을 펼쳐 든 독자의 주변 물리적 기후 조건이 문제될 건 없습니다. 어쩌면 겨울에는 이처럼 겨울 이야기를 읽어야 제 철을 건강하게 나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히가시노 선생은 연구를 성실히 하고서 새 작품을 내어 놓는 편입니다만, 그 서술 태도에는 과장이나 현학이 보이지 않아 좋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예전에 알거나 익숙했던 패턴(예를 들면 과거에는 리프트가 대부분 저속[低速] 사양에다 1인용이 많았다는 식)을 구세대 캐릭터의 입을 통해 술회하면서, 다만 새로운 시대에 바뀐 양식은 이러이러하더라는 설명은 젊은 영혼의 역할로 배당합니다. 처음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작가적 가식이 없고, 모르는 건 독자들과 함께 배워나가겠다는 태도가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이러니 그 노령에도 젊은 독자들과 여전히 호흡을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려면서도 예컨대, "심설(深雪)은 특유의 부유감(浮游感)이 있어 좋다."는 진술처럼, 품격 있고 실용적인 감상까지 요약적으로 삽입하는 그 여유도 마음에 듭니다.

 

가식과 위세가 없음은 그의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은 애초에, 평범한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엄청난 규모의 재앙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이지만, 가가 형사 같은 뚜렷한 개성의 주역이 등장하는 다른 시리즈에서도 그 사정이 다르진 않습니다. 우리와 크게 지적 능력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고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추리력, 논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결국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해 냅니다. 그리고 이런 공훈을 세울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는,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정의는 회복되어야 한다."는 순수한 선의지, 공민 의식이라는 점도 거의 언제나 공통적입니다. 사실 장르물에서 기발한 트릭은, 예전의 고전들이 이미 소진시켰고, 현대에 남은 것은 대단히 기교적인, 그래서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번잡한 장치들 뿐입니다. 히가시노는 이 점을 알고, 기술적 수월성의 추구를 목표에서 배제한 채 작품 구축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독자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휴머니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시도는 이번 작품에서도 멋지게 성공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싶네요.

 

이 소설에서 가장 비난의 초점이 될 만한 악역은 물론 도고 소장입니다. 연구와 학술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허위의 태도가 엄격히 배제되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일본 유수의 대학 기관의 고위 책임자이면서도 양심을 속이는 행태를 밥먹듯 보이는 위인입니다. K-55 개발 자체가 벌써 불법적인 용역 수임이었고, 그의 부조리한 관리 방식은 하급 연구원인 구즈하라에게 배신과 일탈의 동인을 제공하다시피 했습니다. 구즈하라의 악행이 물론 더 큰 악당의 잘못에 의해 합리화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 이 소장은 지위상의 책임 뿐 아니라 개별 행위에 있어서의 과실도 함께 물려야 할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구즈하라는 비효율적이고 부도덕한 조직에서 더 이상 소속의 이유와 의무감을 찾을 수 없었고, 이런 조직이 버젓이 높은 평판을 유지하며 부당한 이익을 챙기게끔 용인하는 사회 전체에 대한 경멸감까지 갖게 됩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수십만 인명을 한순간에 희생시킬 수 있는 무서운 테러 예비 단계를 일개인의 몸으로 기획하는 결과를 낳으나, 때마침 천벌의 섭리라도 작동한 것인지 그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문제는, 테러의 주범이 돌연 사망함으로써 그 예방과 진압에의 길이 아주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도고 소장은 처음에, 그저 사태를 묻어버리려고 했었으나, 가장 신임하는 부하 직원 구리바야시의 강력한 만류로 마음을 돌려먹게 됩니다. 구리바야시는 순수한 양심의 발로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나, 도고 소장은 결국 당국이 최종 귀책 사유를 반드시 자신에게서 발견하리라는 두려움, 그리고 구리바야시를 비롯한 다른 부하 연구원들의 입단속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에, 첩첩 설산 중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묻혀 있을 밀폐 용기를 찾아 나서는 일에 혈안이 됩니다. 두 사람의 행동 동기는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데, 다만 그 수행 방식의 비능률성과 무계획성만큼은 서로 닮았습니다. 도고 소장은 잔재주에만 능했을 뿐, 돌발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시피한 위인입니다. 예를 들어, 구리바야시가 원군을 보내달라고 하자, 소장은 "입막음 대상이 들어나면 사후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단순한 동기 하나로 주저하다가, 리조트 구호 요원(소장 입장에서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을, 아니 알 필요가 없었을 네즈)을 잘 설득했다는 전화 연락 하나에 바로 기다렸다는듯 단념해 버립니다. 치밀하고 생산적인 악당에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기량입니다. 그저 부하 직원에게 닦달하고 보채는 것 말고는 아무 계획이 없는 분수입니다.

 

구리바야시 역시 순전히 행운에 의해 그 정도까지라도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선생의 작품에서 언제나 감지되는 바처럼, 그의 세계 속에서는 주인공들의 의식적인 분투 외에, 이해할 수 없는 제3의 손이 하나 개입하여, 사태의 바른 해결에 일조를 하곤 합니다. 구리바야시는, 만약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들과 아들의 인맥이 없었다면, 스키장의 개략적 위치도 파악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스키장에서 네즈와 치아키 같은 선의의 인물들, 또 미하루, 이즈미, 유키 같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사태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고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을까요? 구리바야시, 그리고 도고 소장은 이 끔찍한 테러 전단계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고, 어느 정도는 사태의 유발 책임자이기까지 합니다. 가가 형사 같은 믿음직한 추적자, 해결사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공권력 당국은 처음부터 정보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네즈 등은 막막한 설산에서 그 누구보다 험지를 누비고 다닐 신체적 능력이 갖추어진 인물이지만, 거대한 음모와 기술적 난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입니다. 끔찍한 테러 발발이 목전인데, 이렇다 할 영웅이 없습니다.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는 게 상식에 부합하는 경로였겠으나, 알 수 없는 우연과 행운이 거듭되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갑니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조금도 어색하거나 무리스럽지 않게 다가옵니다. 왜일까요? 겉으로 보아 조금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상황이, 사실은 인간성 보편에 내재한 선의지로 인해 이미 수렴의 어느 한 지점을 예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우연이고 행운의 소산인 듯하나, 사실은 필연이요 사필귀정의 더 튼튼한 압설(壓雪) 정규 코스로 그 모든 사건들은 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우연"의 배후에는 인간의 선한 마음이 먼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고,이런 이심전심의 공감을 두고 우리는 "신의 섭리"라고 불러 줘도 됩니다.

 

히가시노 선생은 본격 소설가로 데뷔한 사람이 아니지만, 노력파 다운 성실성과 여유가 묻어난다는 점은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꼭 보면 소설 중간쯤 가서, 독자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웃음을 자아내는 재주도 선보입니다. 구리바야시는 네즈들의 추궁에 못 이겨, "섭씨 10℃ 이상이면 소멸해 버리는 특수백신"이라는 엉터리 핑계를 지어냅니다. 우리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듯, 구리바야시는 능란하게 낯빛을 바꾸지 않고 거짓을 늘어 놓을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허술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사명에 느슨하게 임하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도 아닌 네즈는, 이 말을 곧이 듣고 테디 베어의 수색에 나섭니다. 상관도 "어차피 너의 일 중 하나"라며 다른 직무를 면제해 주기까지 합니다. 이 동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뭔가 미심쩍지만, 왠지 도와줘야만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는 느낌이었죠. 실상 구리바야시는 분명 거짓말을 한 데다, 나쁜 세력의 도구로까지 움직이던 처지였습니다. 상대는 특별히 바보가 아니었는데도 그의 들러댐에 넘어가고, 나아가 근원적인 신뢰까지 보냅니다. 이는, 결국 저 먼 섭리적 차원에서 작용한, 보다 큰 공동선에의 이끌림 같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나중에 보고받자, 도고 소장은 "섭씨 10℃ 이상에서 소멸하는 백신이라면, 인체에 무슨 수로 작용을 한단 말인가? 방귀만큼도 영향을 못 미치는 백신이라니 제대로 지어냈어야지!"라고 짜증을 부립니다(독자인 저도 앞에서 의아해했기에, 이 대목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여기에 구리바야시는 그답지 않게" 그건 소장님 같은 전문가나 알아채지 일반인은 그냥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고 받아치죠. 어찌보면 세상 사는 융통성이나 요령도 지지리 없는, 되다 만 악당과 졸개 사이의 웃지 못할 촌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물질의 운명이, 이처럼이나 빈 구석 많은 엉터리들의 손에서 좌우되고 있을 무렵, 진짜 치밀하고 음험한 악당 한 명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합니다. 겉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도 의욕도 없는 무사안일 순종형 여직원이었던 오리구치 마나미가 바로 인물인데요. 이 사람은 알고 보니 진정 무서운 위험 분자였습니다. 그녀는 머리도 좋고 생각도 멀리, 깊이 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빼어난 학업 성적을 올려 봐야 출세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남의 미움이나 받기 좋다"며 만점에 가까운 시험 성적을 하위 조작까지 하는 무서운 염세형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굴신, 조신하여 남의 경계를 푼 후에, 결정적 찬스를 노려 거금을 우려낼 기회만 노리는 가공할 이중인격자였죠. 더 무서운 건 이런 여인의 가면 행각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녀의 진단과 판단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있는 사회 병리와 모순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소설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도고 소장의 위임을 받고 물건을 인수하겠습니다."며 구리바야시를 찾습니다. 참 정말,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한 수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 소식을 도고 소장이 알면 "뭐야? 난 그런 명령을 내린 적 없는데!"라며 길길이 뛰는 무능 악역의 클리셰 한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군요. 오히려 더 강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리구치는 처음부터 도고 소장을 찾아가서 정식 명령까지 받아온 것이었습니다. 하긴,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설을 꼼꼼히 읽고 이후 진행을 작가의 호흡에 맞춰 예측해 보면, 이처럼 히가시노의 센스 있는 스텝이 체감(體感)되어, 그 페이지 넘기는 재미가 더합니다.

 

과연 마지막이 "약했다"고 생각되십니까? 어설픈 악당들을 실컷 고생시키고 혼쭐을 빼 놓은 후에, 그녀는 완벽한 계획을 빈틈 없이 수행하고 유유히 출국할 태세입니다. 바로 그 직전, 그녀로서는 어이 없다 할 우연과 낭패가 개입하여,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죠. 제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지막의 그 반전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소설의 앞 부분에서, 부자 간의 묘하게 엇갈리는 의지와 감정의 대치 속에, 복선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험은 임계 수위를 넘었고, 영웅은 없고, 통제의 기술 수준은 인간의 악의를 감당 못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이 파국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겠습니까? 오로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선의지, 양심, 연대 의식입니다. 히가시노는 마치 동화에서처럼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를 놓친다면, 우리 역시 두 눈 버젓이 뜨고도 감지 신호를 보내는 테디베어를 나꿔 채지 못한 빙원(氷原)의 초라한 낙오자나 다를 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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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순간들 - 불멸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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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빅토리아 시대의 숨막힐 듯한 속박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새 세기를 맞은 영국의 지식 계층은 다양한 방향으로 활로를 모색합니다. 다른 나라의 발달 국면과 비교하여 영국의 그것이 언제나 눈에 띄는 점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담론과, 이른바 "시대정신"에 매몰됨 없이, 개인과 개성, 개별성의 건강한 성장이 언제나 제 색깔, 제 향기를 가지고 각각의 텃밭에서 피어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장 버지니아 울프의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의 사회상과 비교해 보십시오. 한다하는 지식인들도, 결국은 크고작은 소속의 "진영논리"에 물들어, 소집단의 얕은 명분과 구호 아래 파멸적인 분열상을 보이거나(스페인, 프랑스), 아니면 소수파를 압살하는 섬뜩한 전체주의를 풍선처럼 부풀려 개인과 자아의 바람직한 발달상을 저해하는 결과(독일)를 낳았을 뿐입니다. 영국은 이런 대륙의 조류에 휩쓸림 없이, 그저 뉴트럴하고 제 위치에서 한없이 진지한, 따라서 고유의 정서와 사유에 정직한 개인개인들로 공동체를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가 잘 알듯, 결국 발작 끝에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섬세한 정서와 칼날 같은 이성이 주는 영혼에의 길항을 견딜 수 없었던 탓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만, 파국의 결단이 내려진 그 순간의 정신상태를 두고 의학적인 재단(정상/비정상)을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소수 지식인들의 멘털은, 얕고 속된 상식론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비교 대상은 아닙니다만, 지난 세기 말 프랑스의 천재적 맑시스트인 루이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결국 책임조각사유가 증명되어 풀려 난 일도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정신은, 다른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죠.

 

이 책은 모두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챕터는 자신의 조카 바네사 벨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인데, 역자의 친절한 설명이 말해 주듯 이 조카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 편지를 쓸 무렵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역자 후기에 자세히 나오지만, 바네사 벨은 물론 편지라는 지면의 세계에서만 등장한, 상정된 존재가 아니고, 스페인 내전 당시에 참전까지 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기도 한, 불꽃 같은 존재감으로 세상을 물들인 실존 인물입니다. 이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이모(버지니아 울프)의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은 일이 있었기에(성장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하는군요), 한 생명과 영혼이 그 건강과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대체 앞으로 태어날 생명이 어떤 성품과 기질, 그리고 지향을 지닐 줄 알고 이처럼 자상한, 자세한 내력을 풀어 주고 있는 걸까요. 그녀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태어날 생명에게는 할머니가 될 줄리아 스티븐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이 편지에서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대목은, 아무리 혈족의 입장에서 행한 관찰과 분석이라고 하지만, 그 서술과 분석의 상세함과 미적 완결성이 주는 각성과 충격이 현대의 독자마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딸이라고 해서 반드시 어머니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 역시 언제나 참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어머니를 설명하는 그 모든 기준과 분석틀, 언어는,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세상의 그 어떤 개성과 인격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입니다. 줄리아 스티븐은 물론 비범하고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만, 한 개인에 불과한 "존재"로부터 이렇게나 많은 "추억"과 "상념"이 도출된다는 게 그저 놀랍게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영혼 깊숙히 심어진 불안과 고뇌의 단초는, 바로 이런 비범한 어머니가 남기거나 지어 둔 인생의 족적, 그리고 그에서 파생된 인연(공교롭게도 이런 제목의 작품이 있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인으로 예정된 바네사로서는 촌수를 따지기도 힘겨울 스텔라 덕워스는, 성(姓)이 잭슨(태생), 덕워스(첫남편), 스티븐(둘째 남편이자 버지니아 울프의 생부)으로 세 번이 바뀐 줄리아 스티븐의 첫째 남편과의 소생인, 씨다른 언니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것이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도 순간의 알력과 다툼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달갑지 않은 복합가정에서의 인연과 교차였는데다, 개성도 그 이상 강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맞물리고 부딪히는 상황이었다면, 그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멜론이나 포도 한 입, 한 알도 입에 익은 토양의 소산이 아니면 임산부의 까탈마냥 그 미세한 미감의 변형을 못 견뎌 하며 토해 내었을 듯한 버지니아 울프(뿐 아니라 그 핏줄들이 다 마찬가지더군요)였다면, 그 알레르기반응의 격함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2부 과거의 스케치는 버지니아 울프 개인의 말년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진정한 회고록 성격을 갖춘 건 이 부분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작가가 다루고 그려 내는 대상과 그 결과물에는 아무 제한이 없어야 원칙이겠지만, 상념과 묘사를 이런 스타일로 풀어내는 작업은, 남성에게는 그가 아무리 문학적 천재라도 불가능한 과업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3부는 주로 그녀가 속한 클럽 회원들 앞에서 낭독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게 역자의 설명입니다. "낭독"이란 즉시의 청자, 청중을 전제로 하는 거동이며, 따라서 그 원고는 비평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언제나 예비하는, 오픈되고 교호적인 속성을 지닙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결코 고립된 정신세계를 지닌 영혼이 아니었으며,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그리고 독자 누구의 생각으로도 공감할) "손가락 하나만 잘못 대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섬세한" 그 정신세계가, 사실은 다른 개성의 지성으로부터의 즉각적인 판단 작용에 언제나 반응 태세를 갖춘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음도 증명하는 셈입니다.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슬픈 운명이며, 우리는 기껏해야 그 슬픈 운명을 용감하게 직시하는 선에서 그 최선을 기대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인식과 감성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응원이 있기에, 우리는 그저 슬픔 이상의 어떤 적극적인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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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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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바바리아(바이에른)는 히틀러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이후 나치의 발호를 가능하게 한 온상 구실을 (불명예스럽게도) 맡은 적도 있고, 대체로 대단히 보수적이며 시대의 계몽적 조류에 적응이 늦은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은 꼭 그렇진 않겠지만요). 지금으로부터 근 400년을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쟁이 독일 전역을 피폐하게 만들며 통일과 근대화를 몇 걸음 더 늦춰 놓는 재앙을 끼치고 끝났을 때도, 유독 이 지역은 분쟁의 참화를 더욱 아프고 파괴적으로 겪어, 이후의 발전을 독일 타 영방보다 늦게, 그리고 느리게 치런 낸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미지출처: www.ndr.de, stakedamsels.com)

 

현대 문명국에서는 직업의 자유라는 걸 당연히 여기고 이를 누리지만, 중근세에만 해도 직업의 선택, 수행, 심지어 종료의 모든 과정은 상위 신분자의 면허가 있어야 했고, 직업 조합(길드)의 통제를 따로 받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곧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가업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유럽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사정만 해도, 자유민인 농민 계층은 대대로 부쳐 먹던 토지에 계박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가축 도살, 예인, 무속 등의 직분은 혈통과 함께 철저히 세습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들을 천민으로 고착하여 사회적 계층 이동을 철저히 막은 것은 아주 뿌리가 깊은 mores에 해당했죠. 개인의 힘으로는 이에 저항할 수 없었고, 타율적 근대화 조치인 갑오경장 이후에나 형식적으로 법적 제약이 해제되었습니다.

 

제가 조금 실망한 것은,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사형집행인"을 직업, 가업으로 가진 주인공이, 그 인적 자질만은 비범하고 탁월하게 설정된 종래의 관습을 작가 올리버 푀치(Oliver Pötzsch)가 미처 떨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 인간적 품격과 능력까지 남의 멸시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점에서, 제 운명을 자력으로 개척하며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내러티브란, 언제나 읽는 이에게 감정의 고양과 정서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특별한 업적을 세우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딱히 칭찬할 것도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남들보다 그 처한 신분적,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공히 열악했음에도, 그 모든 불운을 딛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점에 오르는 인생이, 오늘날의 독자에겐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대대로 사형집행인의 직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들의 천대만 받아 오던 한 사나이가, 자신보다 더 비참하고 억울한 지경에 빠진 자를 연대의식,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구명하고, 불의하고 비겁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구성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남주건 여주건 여전히 잘생기거나 아름다워야 하고, 혹 그게 안된다면 강인한 신체에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세팅이라야지, 신분이나 조건까지 나쁜 판에 이런 일체의 매력조차도 결여한 설정이라면 도저히 몰입이 안 된다는 분이 있다면, 그런 독자는 이 책을 안심하고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주인공 야콥 퀴슬은 직분이 천역이라는 것 외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듬직한 신체 조건에 완력도 상당하고, 그에 어울리게 용기와 배짱도 대단하며,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게(?) 지식욕까지 왕성하여 타 분야의 전문가들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체계적인 지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억울한 처지의 희생양이 권력의 냉혹한 책략, 대중의 어리석은 광기에 의해 처단되고 목숨을 잃는 부조리를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정의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이도저도 아무것도 못 갖춘 사람이, 선의지와 끈기, 성실성만 가지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혹은 그 일보 직전에 좌절하는) 이야기를 더 기대했습니다. 야콥 퀴슬은 이미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많기에, 설사 이런저런 장애가 그를 가로막아도 이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감동이라기보다는 당연해 보였던 게 제 입장이었습니다.

 

소년이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가혹한 폭행을 당하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채 강물에 버려져, 이웃 주민들에 의해 발견됩니다. 그의 부친이 라이벌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의 운송 조합과 갈등 관계에 놓였기에, 처음에는 다들 그쪽으로 사태의 귀인을 잡아 갑니다. 헌데, 사체에는 흑마술의 징표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단서 하나만으로 easy victim 하나를 상정한 채, 마을의 산파를 살인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광기를 발산, 린치를 가하기 직전입니다. 산파를 사형(私刑)의 곤경에서구해낸 사람은 사형집행인 쾨슬이고, 선거후(선제후. elector) 공작 쪽에서 파견한 진용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의 7일 간에 진범을 잡아내지 않으면, 그는 애꿎은 이웃,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무고한 인명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할 판입니다.

 

이런 설정은 참 역설적이면서 묘한 기시감까지 자아냅니다. 사형집행인이, 원사(寃死) 직전에 몰린 결백한 영혼을 구해낸다는 테마, 게다가 그 사형집행인은 가외로 익힌 약학, 의학 지식까지 전문가 수준으로 구비하고 있어, 주업은 사람을 죽이는 일, 부업은 사람을 낫우는, 때로는 살리는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과 사의 양 벡터가, 양심과 순수를 언제나 지향하는 이 쾨슬의 영혼을 파멸에의 죄의식으로부터 균형을 잡으며 지탱해 주고 있던 셈이죠. 또한, <환상의 여인>이나 <영구차로 돌진하라(조나선 라티머 작)>에서 보던 테마, 억울한 죄인이 감옥 안에서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명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러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신분을 초월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적절하게 끼어듭니다. 도시의 중산층, 신사 계급으로 편입되기 직전의 의사 가문의 젊은이는, 얄궂게도 공동체의 천민이자 제도외적 의약 처방으로 마뜩치 않은 경업(競業)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 사형집행인의 아름다운 딸(바로 이 책의 제목, 독일어로는 Henkerstochter입니다)을 좋아합니다. 막달레나라는 여성의 미모와 순결함 못지 않게, 그 부친이 지닌 방대한 의학서,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집요하고 진지한 지식욕을 존경하는 청년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안락과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 준 그의 부친이지만, 정작 자신이 끌려하는 이런 요소들은 결여하고 있다는 게 그들 부자가 처한 비극이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그가 처한 사회적, 정치적 입장, 또 그가 속한 출신 계급에 무관하게,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날카로운 타파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과업을 도와 앞에서 낡은 인습과 폐단을, 마치 단호하고 강력한 terminator의 뚝심으로 정지(整地)하는 소명을 지닌 듯한 장년의 쾨슬이 있습니다.

 

전근대적이고 인간의 계몽, 자유를 방해하는 신분 계급, 제도의 작폐도 문제이지만, 선의의 주인공들을 곤경에 몰아 넣는 데에는 다름 아닌 무지몽매한 대중의 광기, 집단 히스테리도 큰 몫을 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일부에서 신드롬이라 할 만큼 대지를 황폐하게 했던 "마녀사냥"이라는 게, 대체 왜 발생하고 만연했는지에 대해 역사서는 많은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 속시원한 논증에 성공한 시각이 별로 없더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집단 광기가 왜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는지 비로소 해명이 되는 느낌이었는데요. 전쟁으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겪고, 그 책임을 지배 계층에 따질 방법은 없고, 그 모든 불의와 상흔을 이성적으로 정리할 능력은 되지 않고, 어리석은 대중은 혁명이 아닌,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 가장 약한 희생자를 골라 집중 한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카타리 파의 학살", "주기적인 유태인 사냥" 등 주로 권력층의 조장, 유도에 의해 이런 비극이 저질러진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민중 자신이 어리석고 우매하며 타락했던 탓에 더 크게 기인한 것 아닌가, 이 책에 등장하는 그런 집단 히스테리는, 인간 본성의 선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희생되어야 한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고아나 취약 계층에 대해 적극적인 단죄와 공격에 가담합니다. 나치 체제 하에서, 가장 가혹한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이 불구자, 정신병자, 유태인(부유한 자들은 일찌감치 빠져 나왔습니다. 중산층과 서민만이 수탈과 살상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들이었는데, 체제의 모순과 실패의 죄과를 결국 이들이 다 걸머지고 절멸된 셈이죠. 만약 또한번의 재앙이 닥친다면, 그 다음번의 희생양은 앞 단계에서 열심히 돌팔매질을 했던 대열 중 가장 약한 자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지배층의 악의 못지 않게, 무지와 타락이 빚은 민중의 악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이 작품의 몇몇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천민 쾨슬의 존재의의를 가장 두드러지게 하는 건, 이런 암흑과도 같은 총체적 모순을, 보편적 지식과 이성의 힘으로 타개하려는 그 바른 의지에 있습니다. 살인범을 잡는다고 이 근본적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가 명탐정이기만 했다면, 공동체의 폭동 하나를 사전 예방한 공적에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구원자, 치유자, atoner의 소명까지 가슴에 품었기에, 길고 긴 암흑의 한 기간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종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무지와 타락에 최종의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억센 두 팔로 집행한 진정한 영웅이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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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위한 이솝우화 원앤원북스 고전시리즈 - 원앤원클래식 5
이솝 지음, 이선미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이솝(아이소프스)는 본래 동화작가가 아니었죠. 고대 그리스에 동화라는 문학 장르가 있었을 리도 없고, 이솝 자신의 창작 의도도 픽션을 통해 동시대인들을 계도하는 쪽에 있었을 테니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자기계발과 원활한 처신의 한 수에 여념이 없는 우리 어른들을 위해 재조명, 재해석, 재편집을 한 책이 필요합니다. 이 책 <성인을 위한 이솝 우화>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어 렸을 때는 개미나 베짱이가 말을 한다거나, 은혜를 반드시 갚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재미와 교훈을 정리하는 데에 주안이 맞춰져서, 이솝 우화의 밝고 건전한 모습만 머리에 남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원형에 가까운, 그리고 성인들에게 제시되어도 큰 무리가 없는 내용까지 다 접한 느낌은, 이솝 시대에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리숙한 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무서운 곳이며, 그런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혜와 판단력, 융통성을 날카롭게 가다듬어야겠다는 일종의 각성이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아기코끼리를 잡아 먹는 사자.", "(먹잇감인) 얼룩말에게 역습을 당해 부상당한 사자"의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죠. 인터넷이 대중화된 이래 이런 동영상은 네티즌들에게 언제나 인기입니다만, 이런 컨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모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점은, 저런 약육강식의 법칙이 냉연히 전 공간, 전 시간을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들은 그 오래 전부터 지녔으나 문명화 과정에서 잊고 지낸, 동물적 생존 본능을 일깨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약히고, 느리고, 둔한 자는 반드시 강자의 먹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비록 약자로 태어났다 해도, 꾀와 슬기를 적절히 발휘하면 강자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이치도 우리에게 깨우칩니다.


먹 이사슬의 관계가 분명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깊은, 때로는 비정한 인간사의 교훈을 일깨우지만, 이 이솝 우화는 "너 자신을 알라"는 본연의 철학적, 윤리적 각성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성인군자에게도, 우리 같은 범속한 일상인에게도, 너무나 어려운 원초적 태스크입니다. 이 책의 겉날개에도 나와 있듯, 바로 저 근본적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감옥 안에서 이 이솝 우화를 운문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무료함을 달랫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산문이 대체로 질이 떨어지는 포맷으로, 운문을 문학의 정수로 보는 게 보통의 관행이었으므로, 그의 동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우화들도, 예컨대 남들의 멋져 보이는 모습만 따라하려다 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말 울음 소리를 내는 솔개(15)", 뒷감당할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사자를 가두어 놓다가 가축과 위신을 상실한 농부의 이야기(11), 자신의 분수를 착각하다가 목숨의 위협까지 받게 된 어리석은 행태를 풍자한 "독수리와 갈까마귀와 목동(4)", 춤을 잘 추는 원숭이을 따라하다가 모두의 분노를 산 낙타(50), 일시적인 성과와 본질적인 능력을 혼동한 당나귀(71)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각성을 유도합니다. 근래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의 발전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된 사실은, 사람은 객관적으로 오류가 분명한데도 유독 자신에게만은 넉넉한 가능성과 후한 전망을 하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솝은 이미 2천 년을 앞선 시점에, 인간 보편의 자기 합리화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최우선에 놓여야 할 과제가 "주제 파악"임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 솝은 어디까지나 인간 본성의 단면을 풍자하는 의도로 이 작품을 쓴 게 분명하지만, 동물의 생태에 대해서도 박식한 면이 있었나 봅니다. 우리가 흔히 나쁜 기억력의 상징처럼 간주하는 동물 까마귀는, 실제로는 대단히 영리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화에서도, 까마귀는 제법 똑똑한 속성으로 꾸며진 반면, 갈까마귀는 언제나 바보짓을 하는 단골 배역에 놓입니다. 이솝 우화를 통틀어서 가장 빛나는 처세의 챔피언이라 할 여우이지만, 때로는 제가 제 꾀에 넘어가거나(14. 덫에 꼬리가 잘린 여우), 영리한 사람 특유의 자기 합리화를 한다거나(신 포도. sour grape), 머리를 짜 내어도 극복할 수 없는 태생의 한계를 절망한다든가(3. 여우와 독수리)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우가 보여 준 최고의 술수는, 자신을 모략한 늑대를 두고 역으로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는 임기응변의 진수가 표현된 "늑대와 사자와 여우(90)"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반 면, 여우는 동료들로부터, 아니면 자신의 실수로부터가 아니면 좀처럼 패자가 되지 않는 패턴인데, 다만 강자에 안이한 신뢰를 보낸 일화인 독수리 편에서 무력한 모습을 유일하게 드러냅니다. 이 경우에도 용케 나무에 일어난 화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불에 그을린 독수리 새끼들을 잡아 먹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결과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우연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숭발력 정도였다는 게 눈에 띕니다. 자신의 머리로만 이뤄낸 복수극 기획이 아닌, 잠시 동안 찾아온 행운에서 최대한 이익을 취하는 민첩성이 그 비결의 전부인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당한 만큼 되갚아 준 복수는 아닙니다. 다만 독수리에게 최대한 감정의 상처를 깊게 했다는 점에서, 동양적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소극적 앙갚음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야기에서 정교하게 eye foe eye의 균형적 플롯을 설계한 이솝의 이야기 솜씨치고는 좀 예외에 속하는 편입니다.


동 물들을 굳이 끌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만을 등장시켜 강렬한 깨우침을 주는 일화는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39. 허풍쟁이를 보면, 증인과 증거가 없어 아쉬울 뿐, 왕년에 로도스에서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 적이 있다고 큰소리치는 자를 향해,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해 보시오!"라고 일갈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능력의 증명은, 실제로 눈 앞에서 시연해 보이는 방법만큼 확실한 게 없죠. 여기서 나온 유명한 어구가 라틴어로 Hic Rhodos, Hic Saltus 라는 말입니다("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 무덤에 묻힌 숱한 시체들 앞에 서서, "이 사람들이 과거에 다 나를 따르던 자들이다."라고 하니까, "그거 손쉬운 자랑이구나. 무덤에서 저들이 아니라며 일어날 일은 없을 테니."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생각나죠. "76. 위선자"를 보면, 네가 손에 그걸 쥐고 있으니 무슨 신탁이 나오건 네 입맛대로이겠구나."라는 신의 통박이 나옵니다. 헐리웃 영화 "300"에서도 잠시 인용되지만, 고 대의 신탁 담당자들이 정치와 사회 문제 해결 과정에서 부린 농간은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이솝 우화는 이처럼 사회 고발의 모습을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일부 일본인 철학자가 비판했듯, 이솝 우화를 그저 "현실 체념의 노예 철학"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해학적인 우화도 있습니다. 헤르메스 신이 자신의 신상(神像)의 시장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보기 위해 내려갔더니, 다른 신의 조각을 사면 끼워 주는 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이야기, 치료비가 없어 곧 죽음을 맞이할 가난한 환자가, "목숨만 살려 준다면 소 백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다"며 신에게 기원하는 걸 보고 걱정하는 아내를 향해, "정말 내가 일어나기라도 해서, 공물을 못 바치는 나를 두고 신들이 항의라도 할 일이 생기기나 할까?"라고 하는 모습을 통해, 가난한 자는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현실, 나아가 비용을 쓴다 한들 과연 치료의 효험이 들을지 의심스러운 의사들을 그저 믿어야 하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까지 풍자하는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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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레이디 가가에게 배우는 진심의 비즈니스
재키 후바 지음, 이예진 옮김, 이주형 감수 / 처음북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레이디가가가 완전히, 대중 문화의 한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은 게 이제는 꽤 지난 시점입니다. 저 자신부터도 그랬고, 그녀는 안티가 참 많은 연예인에 속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도 드러나듯 그런 반대자들을 하나하나 더 설득(?)하여, 결국은 "첨엔 안 그랬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더라."라는 평가를 결국은 이끌어내는 대단한 엔터테이너요, (이 책의 관점에서라면) 비즈니스우먼입니다.

 

이 책은 어떻게 "광팬"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요즘 기업들이 초미의 관심사로 삼고 있는 마케팅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을 낸 처음북스에서, 얼마 전에 낸  좋은 마케팅서들을 거의 다 읽어 보았는데요. 그 중에는 게임화 전략을 역설한 "로열티 3.0"을 깊이 있게 논한 책도 있었고, 고객을 고객이 아닌 "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언급한 책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흐름과 취지가, 이 책에서 레이디가가라는 생생한 실례, 누구나 그 실체를 감지하고 성취의 볼륨을 우러러보는 성공자를 통해, 일종의 케이스북으로 응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연히 한국어판 출판사만 같았다뿐이지, 원저자들이나 그 책을 펴낸 출판사들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도 없고, 서술의 방식이나 스타일도 판이한데, 결국은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고, 시대의 대세가 이쪽으로 흐르는 게 확실하구나 하는 깨달음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제 1장은 "1%를 공략하라."입니다. 여기서 1%는, 상위 1% 같은 고소득층, 혹은 엘리트 취향을 노리라는 뜻으로 제시된 게 아닙니다. 나의 상품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호응할 수 있는 소비자층을 노리라는 겁니다. 그 1%는, 사회 소외 계층일 수도 있고, 레이디가가의 팬들(초기 형성층)에서 보듯 어디서 왕따나 당하고 사는 불쌍한 그룹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에 초기 마케팅을 집중하면 왠지 이미지만 나쁘게 각인될 것 같아 불안합니다. 가가도 처음에는 "니 팬이라는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왕따 후보들이나 놀림감 같은 인생들 뿐이냐?" 같은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기에 확실히 포섭되고. 감동을 받은 소비자들이, 이후 보편적 사랑과 호응을 얻는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토대를 이룬다는 게 오히려 더 믿을 만한 팩트라고 하는군요.

 

이 장에서는, 신규 고객 유치에 정신을 분산하느라 기존 고객의 원성을 사는 어느 케이블 채널의 불만 접수 부서에 대한 예시를 들고 있습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이런 마케팅은 게도 구럭도 다 놓치는 최악의 한 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이디가가식의 전략은, 나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1%(설사 전체 표본에의 대표성이 현저히 떨어지더라도)에 집중해서, 최악의 경우라도 그들만큼만은 확실히 잡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어디서건 환영 받지 못하던 그룹에게 그토록 정성을 들여 주면, 고마워서라도 다른 쪽으로 변심하려 들지 않을 테니,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런 전략은 결국 발전의 전망 없이 현재의 자리에 눌러 앉고 만다든가, 결국은 보편적 시장에서 큰 규모의 성공을 봐야 하는 기업의 비전을 위축시킨다든가 하는 쪽으로 주저앉을 가능성도 큽니다. 또, 레이디가가의 지금 모습은, 누가 봐도 유니버설 필드의 승자이지, 일부 오타쿠에만 공을 들여 틈새 시장의 단물만 빨고 사는 중소기업의 모습이 아닙니다(그 역시 생존 전략의 일환이겠습니다만).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은 "가치를 기반으로 경영하라"입니다. 요즘 어느 책을 보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업에는 영혼이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과 상통합니다. 그녀는 "본 디스 웨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이 재단을 통해 소외받고 학대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자신의 활동이, 단지 인기있는 연예인을 따라다니는 일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사회 활동에 동참한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가치 경영이며, 소비자에게 모종의 신뢰를 심어 주는, 앞서 가는 기업의 액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략에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강령이 있는데요, 그것은 "반대자를 포용하라"입니다. 레이디가가는 우리도 잘 알다시피 보수 기독교 단체, 멀리서는 이슬람으로부터까지 폭 넓은 반대를 받고 있는 입장입니다.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두 종교가 레이디가가에 대해서만은 공동 전선을 펴는 모습이 참 우습기도 합니다만, 여튼 레이디가가는 이들 단체에 대해, 그저 적대적이거나 방어적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재단의 이름을 보면 "본 디스 웨이"입니다. "난 이렇게 태어났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죠. 반대하는 단체들의 주장을 보면, "아이들을 계속 그런 식으로 격려만 하면, 평생 그렇게 비정상 왕따로 살다 인생을 마치게 된다"입니다. 아마 우리들은 이 말에 더 공감할 것입니다. 레이디가가는 이에 대해, 팬들에게는 Be Yourself라는 메시지로 격려를 보내며,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안티를 즐기며, 나는 오히려 이런 반대를 자신의 행동, 퍼포먼스의 동력으로 삼는다.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용"이라는 게 반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한다는 게 아니라, 굳이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독자적 행보(마이 웨이)를 보이겠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이 책의 특징은, 레이디가가 이야기만 상세히 소개하는 게 아니라, 실제 기업의 다른 성공 사례를 적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 환경에서 응용이 가능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홀푸드와 메쏘드라는 기업이 그들인데요. 전자는 요식체인이고, 후자는 친환경 세제를 만드는 기업입니다. 전자는 "유기농 원료만을 사용하여 최상의 음식을 만들겠다." 후자는 "환경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기존의 컨셉과 정반대되는 상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선다."는 걸 각각 모토로 내걸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라." ,"커뮤니티에 이름을 붙여 줘라." ,"말할 거리를 만들어라." 등등은 사업에 관계된 원칙이라기보다, 정말 연예인들이 어떻게 팬클럽을 관리해야 장수하고 임팩트 있는 부대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요령 같습니다. 물론, 이제 기업들은 고객 대하기를 팬클럽 대하듯이 해야 살아남는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이야기거리를 만들라 같은 원칙은, 현재 중고차 거래 사이트인 보배드림이라든가, 세스코의 재치있는 고객 응대 담당자 등의 멋진 사례를 통해 이미 우리 환경에서도 그 유용성이 입증된 명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마케팅 실무가나 CEO들이 잊지 않아야 할 근본 명제가 있습니다. 다루는 상품자체가 일류의 퀄리티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이디가가는 찬찬히 관찰해 보면 머리도 영리한 편이고, 생각외로 가창력도 뛰어나며, 작곡 실력도 자체 수요를 다 커버하는 생산적이고 유능한 뮤지션입니다. 만약 이런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이미지 포장만으로 밀어붙였다면 과연 충성도 놓은 고객층이 형성되었을까요? "한번 들어봐, 괜찮아." 를 권유하는 열혈 전도도, 자신이 그 상품에 대한 확신이 먼저 들어야 주변에의 전파가 가능한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마케팅 자체가 아니라 그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상품의 품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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