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20시간의 법칙 - 무엇이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완벽하게 배운다
조시 카우프만 지음, 방영호 외 옮김 / 알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발견"이 열풍처럼 통용되고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유행은 다소 가라앉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이들은 이제 유행 차원을 넘어 아예 이 명제를 확립된 법칙으로 받아들이고도 있는 형편입니다.


카우프만의 이 책에서도 수시로 언급되는 말콤 글래드웰의 그 주장은, 주장 자체의 혁신성에 기대었다기보다는, 그의 현란하고 설득력 넘치는 언변에 의존한 바 컸다고도 보여집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사실 글래드웰의 순수 창의 소산도 아니고, 앤더스 에릭슨 박사의 실증 연구 결과 중 엑기스를 아름답게 추출하여 대중에 시연한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제품 자체의 탁월성보다는 마케팅 역량에 크게 힘입은 히트 상품에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1만 시간이란, 정상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적은 투자가 아닙니다. 단순 육체 노동으로 환산해도, 웬만한 사람에게는 막대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킬 자원입니다. 여간 재능이 부족하지 않고서야, 일만 시간을 투자해서 설사 달인까지는 될 수 없다고 해도, 상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란 그게 오히려 힘듭니다. 글래드웰의 그 법칙이 주는 매력은 1) 일단 누구나 공감하거나 이미 알고 있던, 그래서 기꺼이 동의를 보낼 수 있는 내용이고. 2)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시간만 일정하게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 "양적인 발상"에 혹할 만하며, 3) 설사 결과가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그러나 최선을 다했어!"라는 일종의 도덕적 숭고감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하기에, "사후 회환"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입니다. 책임질 사람도, 패배한 사람도 없다는 견지에서, 이 "법칙"은 그 수용자보다 차라리 주창자를 winner로 만드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카 우프만은 이 책에서, 글래드웰의 그 언명과는 외관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는 "처음 20시간의 법칙"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아, 1만 시간.. 하고는 뭔가 다른 입장인가 보다, 그와는 정반대되는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지레 가질 만도 한 컨셉입니다. 사실, "1만 시간"이라는 말에 선뜻 기운부터 솟는 이들은, 시간을 금쪽 같이 관리해서 써 본 적이 없는 무경험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1만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닙니다. 달인이 된다는 달콤한 결과 언급에 혹하지 않고, "여전히 힘들겠군.."이라며 고개를 흔드는 이들은, 오히려 이 책의 표제와 기조에 끌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신은 지금 정반대로 말하는 것 아닌가? 1만 시간 정도 투자해야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말은 차라리 덜 유혹적이지만, 20시간으로 뭐가 바뀐다는 주장은 오히려 요행을 부추기는 분위기 아닌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해 정면으로 답하기보다는, 저는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간접 해명을 할까 합니다.


우선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그리고 책 서두와 중간중간에 글래드웰을 자주도 언급하고 있지만, 저자 카우프만은 결코 "1만 시간의 법칙"과 그 주창자를 "디스diss"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어느 정도는 경의를 표하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다만 이 와중에 슬쩍 그가 강조하는 포인트가 두엇 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독하게 1만 시간을 투자할 각오가 되어있는가?"

"1만 시간을 투자하여 달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어느 정도 진정성이 갖추었는가?"

"1만 시간씩이나 투자하고서 소정의 결과가 안 나왔을 경우, 그 보상은 정신적 위안 외에 어떤 것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가?"


카 우프만은 "1만 시간..."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라, "그 좋다는 1만 시간 스케줄"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먼저 묻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1만 시간을 투자해서 달인이 되었다 해도, 알고 보니 이 분야에서 달인까지는 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면(개인적 만족 면으로나 사회에서의 상품적 수요 면에서나), 사실 이 투자는 성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달인까지나 되지 않고, 그저 내가 적당히 만족하고 증기기 위해, 어지간히 재주에 능해서 남과 나를 만족시키는 레벨만 성취하고 싶다면, 1만 시간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 투자만으로 가능하다는 취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격 대비 고성능"이란 미덕과도 통합니다. 고통스럽고 기회 비용도 엄청난 1만 시간을 쏟을 게 아니라, 약게약게 잠시만(상대적으로) 집중한 후,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게, 나 자신과 시간한테 모두 덜 미안한 길이라는 거죠. 이런 의견에 누가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취 지는 좋습니다. 이제 그럼,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대체 어떻게 20시간을 보내야 최대한의 효용을 뽑을 수 있을까?" 소설가도 장편보다 단편에서 승부 내기가 더 힘들다는 말처럼, 카우프만은 차라리 더 모험적인 승부수를 독자에게 던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진정성과 자신감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이상, 말에 대한 책임은 쉽사리 지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글래드웰의 문장이 "나-저자-와 당신-독자-를 구별하는 스타일이라면, 이 카우프만은 1 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 안에 모든 주제를 포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모습은, " 내가 직접 해서 안 되는 것이면 독자들에게도 강변하지 않겠다."는 겸손과 실천 중시의 태도를 풍깁니다. 자계서의 생명은 "실천과 실용성"인데, 이를 만족 못 하는 책이라면 제아무리 멋진 말로 겉을 포장한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말에선 일단 강한 신뢰감이 풍깁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이 책의 후반부는 그가 직접 시도해 본 "20시간 실전 적용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책 의 제 2장에서 그는 이른바 10원칙을 제시합니다(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찾아 보시구요). 일반 이론은 이 2장에서 그가 제시한 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일반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강조하지만) 실천이 문제입니다. 저자는 그래서, 어떤 실험군이나 연구 대상 집단이 아닌 자신이 직접 실천에 옮겨 본 요가, 우쿨렐레, 윈드서핑, 바둑에의 "도전기"를 자세히 풀어 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바둑은, 서양인에게는 아마 마법의 게임과도 같은,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오락(두뇌 스포츠에 가까운)일 것 같습니다. 그는 "체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체스보다 훨씬 고급의 두뇌작용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 바둑이란 게임에서, 자신이 이뤄낸 성취(우리 동양권 독자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니지만)를 대단히 뿌듯해합니다.  아마 그는 이 정도의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책 한 권을 쓸 자신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성인 남성이라면 아마 군 복무 중에 담배와 함께 배우는 필수 취미 정도겠지만 말이죠.


결론은 그것입니다. 달인이 되고 싶으면 1만 시간을 투자하되, 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잘하고 싶으면 20시간을 똘똘하게 투자하라! 이 두 요청은 알고 보면 서로 배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 관계라고나 할까요? 양과 질이 서로 상충관계라고 보는 분도 있겠지만(지나친 몰입으로 예컨대 1만 시간을 유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시간을 영리하게, 그리고 즐겁게 쓰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 못 할 바는 전혀 없습니다. 이 책에는 권두 부록으로, 예쁜 노란색 바탕의 시간 계획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실용성 면에서 참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을 남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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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호텔 - 영혼과 심장이 있는 병원, 라구나 혼다 이야기
빅토리아 스위트 지음, 김성훈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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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의료인의 본분이 무엇이며, 그 범위와 효력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 동양애서 예로부터 전해지는 격언이 있었으니, "의술은 인술이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술이 아닌 것은 의숧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낫게 하고,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함이 의료인의 직분이었고, 그래서  doctor라는 말의 번역어 "의사"에는 스승이라는 의미의 師가 들어갑니다. 흔히 장래가 보장된 직업으로 "사짜"가 붙은 여럿을 거론하지만, "변호사"의 "사"나 검사, 판사의 "사"는 발음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그리고 평판과 격도 낮은 의미의 음소일 뿐입니다.


서 양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를까요? "배움과 지혜, 수련의 궁극에 도달한 이"라는 뜻의 doctor는, 통상 8년 간의 혹독한 수업 기간을 거쳐 내리는 학위입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학부 과정만 거쳤음에도 이와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분야는 오로지 의학뿐입니다. 한때 이발사가 의약 시술을 겸한 암울한 미개의 시절도 있었다지만, 서양 역시 본격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의사들에게 베푸는 대접은 여타의 직군과 비교할 바 아닐 만큼 각별했다는 사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의술이란, 따라서 동과 서를 막론하고, 그를 행하는 이에게 최고의 존경과 영예가 베뤂어졌음은 사정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료인도, 물질 대사를 위한 최소한의 자양 섭취를 이뤄야 하는,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마 련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여느 학자나 기능인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된 수련 기간을 거치고, 실무에 본격 투입된 후에도 그 노옹의 강도가 타 직업인과 감히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들이 제 기능, 제 능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그저 정신적, 무형적 존경이 바쳐지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사회에 기여아는, 개인에 끼치는 공헌과 은혜가 특별한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물리적 대가를 치르는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는 "각자에게 그의 정당한 몫을"이라는 정의의 원칙 그 요청이며, 다른 면으로 고된 수고와 고결한 재능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젊은 세대로부터의 인력 충원을 바라보기 어렵다는 현실적 요구의 결과입니다. 의사에게는, 특별히 많은 보수가 지급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의술의 대상(代償)을, 누가 치르게 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동과 서, 고와 금을 넘어, 사람이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 온 이래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문제입니다. 병 든 환자가 각기 그 수고를 값하게 하면, 당사자 사이에서 급부 교환이 완료되므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입니다. 다만 환자가 무자력일 때에는, 의사의 용역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라고 존재하는 직분인데, 만약 모든 환자, 혹은 상당수의 환자가 자력(資力)이 부족하다면, 환 자는 도움을 얻지 못하고, 의사는 의술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결국 힘들여 의사를 양성한 이유가, 최소한 사회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 죽어가야 하는 환자의 비통함이나, 올바른 영혼을 지닌 의사 개인이 느끼는 자괴감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요.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구빈원, 혜민소 등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 의 료 기능은 이처럼 개인의 문제로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사회, 정부가 개입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많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지내다 결국 "혁명"이라는 극약 처방을 쓰긴 했으나, 유럽의 봉건 체제 역시 극빈자, 중환자의 구호는 사회의 몫이었습니다. 건 강과 생명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당 개인에게 맡기는 체제는, 청동기 혁명 이래 존재하지 않았으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시민과 인간의 권리를 부르짖은 시민 혁명 이후 regime의 위상으로 모두를 지배하기에 이른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이 의료 서비스가 영리의 영역으로 거의 넘어가고 만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못 다룰 일이 아닌데도, 돈이 없으면 병도 못 고치고 죽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의 모순은 놀랍게도 전근대 아닌 근대의 생활상 그 일부였던 것입니다. 문명이 과연 전진을 하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이 더 못 살 모습으로 뒷걸음을 치는 걸까요?


짙푸른 북태평양과 장쾌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세련되고 활기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구한말 우리 조상들도 신식 문물을 배우러 힘들고 먼 발걸음을 마다지 않은 대도회,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부터 대뜸 떠오른다는 게, 모순적 체제가 성원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의 왜곡입니다), 환자를 이윤 창출의 원천이 아닌, 돌봄과 공생 공존 공감의 대상으로 보는 대규모 시설이 있다고 하합니다, 이름하여 "라구나 혼다"입니다. 연혁을 알고 보니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17세기, 왕정이 아직 공식 헌정의 지위를 유지할 무렵, 오갈데 없는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던 "파리시립병원"의 후신이라는 군요. 신생 독립국 미국이 프랑스의 지원으로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을 모색할 무렵, 이곳 극서(極西)의 땅은 아직 합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지조차 않은, 히스패닉과 아메리카 토착인의 앞마당이었습니다. 역사의 곡절과 인연이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돌아, 체제와 이념의 변천이 어떠하건 인간이 그 본성과 영혼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는 준열한 가르침을 전하는, 휴머니티의 영조물적 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호텔". 사실 여기서 "신"이란 심상이 전하는 바는, "신성한, 거룩한" (그러므로) "지극히 인간적인"의 의미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그 반대인 "특권적, 사치스러운"의 내포가 아니구요). 호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온갖 도회적 영화의 상징처첨 되어버린 개념이지만, 본디 접객업이란 지방 토착의 부호가 넉넉한 인심을 객(客)들에게 베푸는 곳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라구나 혼다"는, 우리가 일찌감치 잊어버리고 그저 낭만이나 이상향의 한 토막으로만 치부하던 상황을, 마치 시공의 차원을 잘못 맟춰 낙오나 한 듯 부조화스러운 모습으로 이 살벌한 자본주의 한복판에 영사(影射)하는 성상(聖像)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을, 그 반대가 오히려 정상인 양 착각하고, 부조리와 불의를 정상과 원칙인 양 착각하는 우리들에게, "신의 호텔"은 화끈한 자각몽으로 작용하는 셈입니다.


이 솝 우화에도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은 돈이 없으니 올바른 치료를 받기 어렵겠군요..." 헌데 이는 의료가 영리를 추구하거나, 사익적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됨을 당연시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당위에서 한참 벗어난 세태를 풍자하려는 목적이었지요. 닥터  빅토리아 스위트가 전라는 천태만상의 목격담과 치료 사례는, 첨단 약품과 고가 장비가 아닌, 치료하는 자의 정성과 마음, 그리고 이의 영향을 받은 환자의 소생 의지, 정신적 힐링이, 질병으로부터의 회복 그 첫째 요건임을 (다소 불가사의할 정도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영리"와 "인술"은 함께 가기 어렵고, "인(仁)"이 빠진 의술은 환자를 낫게 한다는 그 기본적인 효능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돈이냐 생명이냐는 의외로 곳곳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양단적 선택이며, 이 중 참의료가 어느 편에 서는지는, 이 책에 나온 생생한 교훈과 증언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어요.


다시 한 번 적습니다.

의사에게는, 특별히 많은 보수가 지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환자의 주머니 외에,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가 대부분을 충당해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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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안드로이드 마케팅이다
김진 지음 / 아이티매그넷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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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처음 배울 무렵, 새로 산 PC에 공짜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깔아 보면서 실행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라했던 추억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프리웨어로 무료 배포되던 프로그램 중 유저들에게 인기를 끌던 것은, 이후 MS 윈도의 상위 버전에서 필수 요소로 통합되는 것도 많았죠. 이 시절 여러 개발자들이 내놓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나도 조금만 연습하고 공부하면 이 정도는 만들어서 세상의 유저들을 향해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만만한 모습을 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한편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동영상을 감상하고 제툴용 숙제 문서 작성 등으로 주된 용도를 삼는 이들은, 프로그램의 설치, 시범 사용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 경향도 있었구요.


세월이 많이 지나서, 사람들이 갖 고 노는 기기의 대세는 이제 퍼스널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완전히 이동한 모습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모바일 퍼스트"에서 "모바일 온리"로 시대 정신이 바뀌었다 해도 별반 과장이 아닌 세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PC시대와는 달리, 모바일 앱의 개발이라면 왠지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 같습니다. 반면, 앱스토어나 안드로이드 마켓(이제는 구글 플레이로 이름이 바뀌었죠)에 "진열"된 여러 애플리케이션들은, PC 소프트웨어 몰과는 달리 유저들의 필수 경로 코스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플레이"하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우리는 "스토어"나 "마켓"에서 보냅니다. PC시대와 지금의 모바일 시대가 다른 점은, 이처럼 개발자와 일반 유저들의 사이는 멀어지고, 반면 그 개발자들이 내어 놓은 제품들과 보통의 사용자들은 과거와 비교가 안 될 만큼 가까워졌다는 게 역설적인 특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폐쇄적 운영 체제 정책을 고수하는 애플의 생태계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보다 개방적인 플랫폼을 경영함으로써 장기적인 수익 창출의 비전과 모델을 아직은 확고히 그 방침으로 유지하는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자들은, 그 과업 수행에 있어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역시 과거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시대와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양상 중의 하나입니다. 이른바 "잘못된 트랙"에서의 분투라면 아무리 열심히 땀을 흘려도 그 성과를 보상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창의성과 오락성 가득한 앱을 짜 내어 시장에 내놓을 능력이 있는 개발자라도, 시장에서 버림 받을 체질과 습관으로 자신의 일에 임한다면, 들인 수고와 타고난 재능이 아깝게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죠.


이 책은 안드로이드 앱 개발자가 명심해야 할 원칙들을 아주 쉬운 서술과, 필요한 내용만 고루 추려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책을 접하면서 영미권 저자들 특유의 문체가 눈에 띄어 번역서인 줄 알았는데, IT 분야에서 끝없는 분투와 독보적 역량 발휘로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던 김 진 회장님께서 친히 작성하신 귀한 실무서이더군요. 대가의 솜씨는 이처럼, 그 집필 내용의 실용성과 실무 친화성 면에서 이른바 "계급장 냄새"가 안 난다는 게 장점입니다. 저자의 성함을 가리고 읽으면, 그냥 젊은 실무가가 쓴 캐주얼한 가이드북 같습니다. "가민 있어 봐. 저자가 누구였더라?"하며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그 쉽고 친근한 말투 속에 녹아난 엄청난 내공의 기미를 뒤늦게서야 깨달은 후입니다. 분야와 장르를 떠나, 대가들의 필치와 아우라는 이처럼 독자에게 보편적인 감동과 진정 어린 리액션을 유발합니다.


이 책의 제목에도 주의해서 시선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마케팅"이라는 어구가 쓰여 있습니다. 내용을 펼치면, 주로 앱 개밸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팁과 원칙으로 가득한데, 제목은 마케팅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라면 마케팅과 제조는 엄연히 구분되는 개념이 아닙니까? 이 의문은 이렇게 접근하면 해결이 가능합니다. 앱 개발자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며, 따라서 소위 1인 기업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제조 과정과 마케팅, 이후의 영업 프로세스가 서로 구별이 안 되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개발 단계에서부터 마케팅의 컨셉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두뇌 노동 그 대가를 합당한 방법으로 시장으로부터 받아 내지 못하는 결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개발 단계에서부터 효과적인 마케팅과 혼연일체가 된 입장이라야 시장에서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창의적이고 유용한 앱을 개발하여 마켓(현 구글 플레이)에 올려 놓았다고 하죠. 과연 애써서 만든 나의 앱이 많 은 유저들에게 선택되고 사랑 받아서 마침내 수익 구조의 진입으로까지 이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저자 김진 회장님은 이 점에 대해, 일반 개발자들의 어깨에서 힘이 쪼옥 빠져 나갈 만한, 냉정한 팩트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유저가 카테고리 검색이든 키워드 검색이든 일단 마켓에 들어 와서, 나의 앱에 한 번이라도 눈길을 줄 확률이란 엄청 낮다는 것입니다. 김진 회장님 같은 특별한 목적의식을 지닌 분이나, 상위 300위까지의 리스트를 스크롤이라도 할 여유를 가질 뿐, 일반 유저들은 냉정히 말해 탑 텐까지에도 제대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총애를 받기는커녕, 그런게 있는 줄도 모르고 간과될 운명이 되기가 십상이라는 거죠. 그럼, 일단 소비자의 관심이라도 받아보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과 거의 소프트웨어 마케팅, 그리고 현재 인터넷 쇼핑몰이 유통업에서 엄청난 쉐어를 차지하게 된 상황에서는, 일반 상품을 웹 서퍼에게 제대로 알려기 위해 소위 "검색엔진 최적화"라는 작업이 필수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런데 안드로이드 앱 시장이 무서운 건, 바로 단일 영역, 플랫폼인 구글 플레이(좁다면 좁은)에서, 제품의 성패와 행/불운이 바로 결판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웹의 속성과 구조에서 교훈을 얻기는 하되, 자신의 승부는 철저히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개발자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안드로이드 생태계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1. 안드로이드 앱도 자바 기반으로 이뤄지는 프로그램이다.

1980년대 이래 엄청난 시대의 변천이 진행되어 왔지만, 오라클의 자바는 지금까지도 PC, 모바일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확고한 위치를 지키며 애용되는 언어입니다. 객체 지향 언어의 최선두 주자라는 개성과 특장을 내세우며 자체 혁신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이 기린아는, 이제 모바일 앱의 개발도구로까지 선택되어 그 유용성를 더욱 확장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제아무리 타 생태계와 개발되는 시장의 구조라고는 하나, 이 자바를 모르고 어떤 안드로이드 앱 개발이 가능하겠습니까? 개발자는 따라서 자바를 꽉 잡고 있는 이 분야의 달인이어야 한다는 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항입니다.


2. 개발량의 저평가는 금물

보 통 착각을 하는 것이, 작은 화면에서 구현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그 투입자원이나 프로세스 에포트가 적게 요구되리라는 선입견입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죠. 사물의 속성을 계량함에 있어서, 사이즈만 보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만한 패착이 없습니다. 그 제한된 사이즈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담기고 본질화할 수 있는지, 그 밀도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일견 작고 아담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경쟁 플레이어들이 함께 뛰고 있고, 유저들이 판관과 관객으로서 좁은 공간을 더 열의와 흥미를 가지고 살피기 때문에, 지켜야 할 룰과 만족시켜야 할 기준이 더 많습니다. 마치 컨벤션 센터의 전체 조경이나, 청담동 한복판에 자리한 열 댓 평 카페 인테리어에 들이는 노력과 정성이, 그 사이즈에 따라 차별되지 않는 이치나 비슷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후자에 들이는 공과 정력이 더 크게 소요될 수도 있음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3. 구글의 UI 가이드라인을 최대한 수용하라.

바로 이 점입니다. 구글은 무수한 개발자들이 내놓은 앱 군(群)을 저 높은 위치에서 조망하는 입장이고, 그 전에 안드로이드라는 플렛폼, "판"을 깔아 준 오너, 창조주의 위상입니다. 최 종 판단은 소비자가 하더라도, 핵심으로 준수되어야 할 룰의 파악은 이 가이드라인 안에 압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을 머리 속에 명심하여 정리한 개발자의 작품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최종의 승자로 남을 수 있습니다.


4, 완성된 제품의 홍보는 철저히 입소문에 의지하라.

입소문이란 주로 1) 제품의 명칭 자체, 2) SNS, 3) 유저들의 리뷰, 4) 아이콘 등을 통해 이뤄집니다. 저는 얾마 전 <필립 코틀러 인브랜딩>이라는 책을 통해, 제품의 브랜드 안에 그 제품의 속성을 핵신적,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 이름만 듣고도 뭐 하는 앱인지, 핵심 개성은 무엇인지 바로 연상이 되어야 좋다는 주장입니다. 다음으로, 앱이 좋으면 바로 지인들에게 입소문이 날 수 있게, 유저에게 편의를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도 흔히 보는 좋아요. 트윗 버튼을 바로 곁에 두어야만, 이런 SNS 입소문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심리이지만, 호의적인 리뷰가 많이 올라와 있는 앱은 일단 믿게 되고, 반대로 욕설과 불평으로 채워진 평이 올라 있으면 설사 분별 없는 사용자의 소행이거니 해도 일단은 호감이 사라집니다. 사용자의 평은 언제나 개발자가 신경 써야 할 덕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어이 없는 일이지만, 아이콘이 예쁘면 설사 그 앱이 쓸모가 없어도 이용자는 자신의 폰에 남겨 놓는 게 보통이라는 심리도 최대한 이용하라는 조언입니다. 이건 저부터도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오히려 성실한 개발자일수록 제품 내용에 치중하지 이 부분은 차라리 등한히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게 하는 충고였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두고 읽었던 챕터는 8장, 가격 전략을 알맞게 수립하라, 였습니다. 우리는 과거 가장 활설화된 커뮤니티 사이트였던 프리챌이, 유료화 선언 이후 어떻게 붕괴되어 그 흔적도 못 찾을 지경이 되었는지 잘 지켜 봐 왔습니다. 인기 소프트웨어였던 여러 프리웨어 쉐어웨어들이 아무리 사용자에게 사랑을 받았다 해도, "돈 냄새"를 풍기는 그 순간 썰물처럼 황량하게 소비자 이탈을 겪는 일도 부지기수로 보아 왔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전기요금 본전도 빼지 못할 무료 정책을 고집할 수도 없습니다. 반면, 한때 세계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모델을 구축하여 웹을 석권할 것만 같았던 싸이월드도, 지금은 마치 배드 뱅크 떨어내듯 네이트로부터 계열분리되어, 고작 SK의 계륵으로 추락한 신세입니다. 이처럼 수익화 모델로의 전환이란 도무지 정답이 없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평생 체리 피커의 호구 노릇이나 하다 사라지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유저들의 충성도와 사랑을 유지할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저자는 제품에 따라 차별화한 어프로치를 취할 것을 권유합니다.


일단, 흔하지 않고 분명한 차별성을 갖춘 앱이라, 저가 공세를 펼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특히, $0,99라는 가격의 책정은,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할 선택이라고까지 하는 일각의 주장도 소대합니다.  $0,99이라도 지불할 용읙가 있다면, 그 유저는  $1,99나 $2,99 역시 기꺼이 지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소비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들이 내놓고자 하는 추가의 금액을 공연히 거절하고 마는 결과겠습니다. 구매 욕구가 확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무료 앱만 찾아 다닐 뿐, 최저가 앱이라고 해서 선뜻 결제하지는 않는 성향이며, 다른 말로 $0,99와 $1,99 사이는 무시로 넘나드는 낮은 담장이지만, 무료와 $0,99 사이에는 시쳇말로 "넘사벽"이 존재한다고 해도 됩니다. 만약 고소득층을 겨냥한 맞춤형 앱이라면, 대담하게(물론 상식을 초월한 선, 예컨대 $49 대 등은 곤란하겠지만) 고가로 책정하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일단 중간 레벨 이상의 가격을 치르고 설치한 앱에 대해서는, 사용자듫이 쉽게 제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독자에게 들어주고 있습니다(이른바 본전 생각), 이런 까닭에 구글이 평가하는 평점 기준에서, 일단 폰에서 잘 안 빠져나가고 어떻게든 유지되는 앱은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으며, 이는 사용자에게 잦은 빈도로 노출될 전망도 더 높다고 하겠습니다. 


문 제는 소위 대체재가 얼마든지 경쟁 개발자에 의해 폭풍처럼 유입되는 분야의 앱 개발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무료화 전략을 유지해야 합니다.가격이 0이라고 해도 선택이 될지, 아니 이용자의 눈에나 뜨일지 의문인데, 이용자의 지갑에서 단 몇푼이라도 빠져 나가는 쪽으로 정책이 바뀌는 그 순간, 시장은 냉혹하게 그 앱으로부터 등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 많은 게임들은 앱의 다운로드가 아닌, 앱 설치, 살행 후 그 내부에서 결제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이른바 앱내 결제). 그런데, 게임 내의 모든, 혹은 상당수에 유료화 정책을 도입하면, 당장은 게임에 몰입한 유저들의 지출이 개발자의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현금 아이템과의 과도한 접촉으로 유저들이 흥미와 매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이른바 게임 밸런스의 상실). 이를 피하기 위해, 직접적 아이템은 게임 머니 방식으로 취득하게 하고, 부수적 아이템에 대해서만 현금 연동으로 처리하는 가상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속성을 요약하여 프리미엄(Free+ Premium을 합성한 조어입니다) 방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 실 시대의 대세는 마케팅에서 판가름납니다. 사람들이 보다 현명해져서, 홍보 없이도 남이 아닌 자신에게 유리한 애플리케이션은 바로 알아 봐 주었으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어지는 그 번거로운 잉여 노력이 사라져서 좋을 것입니다. 현실은 그러나, 그 불편한 여러 인지적 장애와 편견을 제거하고, 사랑을 얻기 위한 번잡한 "작업 노력"이 필요하며, 우리는 이걸 두고 "마케팅 능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나마 안드로드 앱 개발자들은, 실물의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비효율 팩터가 제거되지 않고 번잡한 상수(CONSTANT)로 자리하는 지를 알고, 이 안드로이드 생태계, 어느 정도의 창의성과 재능만 있으면 대박이 가능한 시장판을 천국으로 여기고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책 한 권으로 이처럼이나 많은 실전용 팁이 전달 가능한 것도, 아직은 안드로이드 모바일 필드뿐입니다. 이제 이 곳도 앞으로 어떤 레드 오션으로 바뀔지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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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경영하라 - 어떻게 똑똑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민재형 지음 / 청림출판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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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생겼다"는 지적과 "무식하다"는 지적 중 어느것이 더 가슴아프게 다가올까요? 청소년이나 대학생 시절에는 몰라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 누가 더 많은 수익, 실적을 올리느냐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성인 시절에는, 아마 후자가 더 깊은 상처를 안길 수도 있습니다. 후자는 지적 능력의 결핍, 무능력, 이로 인한 현재의 열악한 경제상황까지 포괄적으로 암시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아예 어떤 사람은 아마 이 두 가지 말을 모두 듣고 지내는, 지속적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이상 성격과 낮은 학교 성적으로 왕따 신세, 사회로 나오면 무능으로 인한 백수 신세. 하지만 이것으로 인생이 끝난 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면, 반전의 기회는 평균적 확률만큼은 그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중 요한 건 느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초래되는 효용, 다른 말로 통장 잔고입니다. 지적을 받든 말든, 그 사람이 실속 없는 감정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착실히 내실을 다지는 선택을 한다면, 언제가 그 사람은 오히려 남들을 향해 편안히 그런 지적을 할 수 있는 우월 권력자의 위상으로 올라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현재의 비참한 실상을 가리러 거듭되는 bluffing, 전망 없는 투기,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자신 주위의 극히 일부 지인을 제외한) 얼척 없는 스펙 쌓기, 나아가 자기 만족을 위한 터무니없는 도발, 깜짝쇼 따위에만 몰입한다면, 그 사람의 미래란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파멸로 치달을 것입니다.

우 리는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당장의 나은 결실, 미래의 더 나은 비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기분에 따른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면, 당장은 물론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나쁜 처지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다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선택의 순간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습관"이 들어있는지를 그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거나, 점점 더 나빠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비합리적 사고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근 대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대전제 하에 그 화려한 발전상을 보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거래, 교환, 생산 등의 치열한 상호작용이, 이처럼이나 정교하고 정연한 수학적 구조로 표현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에, 애덤 스미스가 창안하고 레옹 발라(왈라스) 등이 극성(極盛)의 치장을 들인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으로까지 칭송 받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이런 평판과 권력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이 그 현실적 결과를 예측하는 데에 상당한 오차를 매번 보인다면, 그 이론이 타당성은 근본에서부터 의심을 받아야겠죠. 이이 대한 심각한 반성의 산물로 나온 것이, 카너먼과 故 트버스키 등의 "행동경제학"이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가르치기 위한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습관이, 합리적이어야 할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자꾸만 몰아가는가?"를 규명하는 의도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쁜 습관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무엇인지를 짚어 내어, 그를 바로잡거나 제거해서 합리적인 인간, 선택의 순간에 착각을 범하지 않는 인간으로 교정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 책은 "잘 경영되고 잘 관리된, 다듬어진 생각이, 언제나 내가 하는 선택을 합리적이고 실속 있는 것으로 만들게 하자"는 취지 아래,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장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첫 장은 "왜 종래의 생각 습관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지"에 대한 서론이며, 본론 6챕터에서 이어질 주장이 군데군데 요약, 암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착각을 유발하는지 많은 사례를 들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위 의 그림을 보시면 왼쪽이 종래의 케첩 용기이고, 오른쪽이 개량된 것입니다. 굳이 손으로 흔들어 치고 짜내는 수고를 할 것 없이, 보관 상태의 지속만으로 자연스럽게 사용상의 불편이 해소되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이 아이디어가 어느 시장에서나 우월 통용력을 확보하리라는 기대는 곤란합니다. 나라에 따라서는 용기의 전복된 형태가 막연한 시각적 불안감을 유발할 수도 있고, 내용물의 용기 잔여에 대해 큰 집착을 보이지 않는 행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국에서 하인즈 메이커가 고전하는 이유(일부 특징적 거주 지구는 제외)는, 단지 입맛에서의 취향 차 외에도, 이런 디자인에서의 이물감이 한몫하는 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고정 관념에서의 탈피"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공의 가장 큰 적은 성공"이라는 명제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한 시장에서 통하던 비결이, 다른 시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리라고는 절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 2장부터 제 7장까지에서 "우리의 판단에 개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제목 아래,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비합리성 팩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 떤 판단을 할 때에는, 그 판단과 직접 관계 있는 정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자기 머리 안에서 잘 떠오르는 정보, 그것 하면 먼저 딱 떠오르는 정보를 꺼내어, 상황에 가장 먼저 적용을 시킵니다. 중요하지 않은 정보이지만, "아니라면 왜 내가 가장 먼저 그것부터 생각했겠어?'하는 과신 때문에, 하찮은 정보를 가지고 큰 용기를 얻어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유아적이고 성숙한 자아를 갖추지 못한 이들이 흔히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책에서 예를 드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광고입니다. 품질을 따져 보고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잦은 광고에 노출되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를 대뜸 고르게 되는 습관이, 이 회상용이성(availability)의 좋은 실례죠. 이와 관련된 오류의 또하나의 예가 "선례의 함정"입니다. 과거에 이렇게 해 보니까 되었다고 해서, 현재에 같은 방법이 또 통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다른데, 이를 같다고 착각하는 습관이 바로 비합리성의 덫인 셈이죠.


선 례의 함정이, 일종의 무사안일을 부추긴다면, "횟수주의(frequency counting)" 역시 우리의 바른 인지를 방해하는 착시 팩터입니다. 책에는 기아차의 리콜, 수리 횟수를 제시할 때, 다른 브랜드와 절대 수치를 단순 나열하여 마치 횟수만 가장 높으면 불량률도 따라서 높은 것처럼 착각을 유발하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많이 팔린 차는 자연스럽게 리콜 횟수도 높아질 테지만, 전체 비율은 덜 팔린 브랜드보다 오히려 낮을 수도 있습니다. 우량품과 불량품을 가를 때에는, 단순 절대치보다 상대 비율을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frequency가 아니라, ratio가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1=2가 언제나 긍정적인 영향을 낳는다는 착각도 있습니다. 한 번의 실패에 또다른 실패를 거듭하면, 그것은 불행이 가중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 보다는 둘이 낫다는, 철저한 비합리와 충동적 사고에 매몰된 자는, 한번의 실패도 부족해서 두번의 무모한 도박을 감행합니다.


이 와 관련해서 중요한 명제 하나가, "실수를 하되 빛나는 실수brilliant mistake를 하라"는 주문입니다.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를 할 이유도 없죠.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무위도식으로 생을 채운다는 자체가 벌써 실패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중입니다. 에디슨은 전구 필라멘트 적합 소재를 찾는 데에 엄청난 시행 착오를 기록했지만, "이제 부적합 소재 9999개를 발견했을 뿐"이라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설사 일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실패를 해야지, 위에서 본 대로 "그저 제 기분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좋은" most available, most favorable한 실수를 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특히 자아가 성숙하지 못 하고, 충동적으로 "이러면 내 기분이 좋아져!"라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타입의 실수는, 생산적 실수가 아닌 그저 파멸에의 돌진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 분이 좋아진다고,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고 어떤 성과가 저절로 나올 리는 없습니다. 효과를 내기 위한 유효적절하고 직접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과도한 장밋빛 전망을 가지기에, 때로는 처참한 실패를 맞이하곤 합니다. 이를 두고 Stockdale paradox라는 유명한 말이 생긴 거죠(Stockdale은 물론, 엄혹한 환경의 시련을 극복하고 생환된 사람입니다). 지난 번 집필이 대실패로 끝났으니, 이번 건은 반드시 대박을 칠거야! 실패하는 얼치기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기대 끝에 똑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거듭된 실채를 통해 이미 학습된 기억이 부실한 머리에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기왕 망하는 것 기분이라도 좋아지자!"하며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컨텐츠를 채우다가, 소송에 걸려 자신과 주위를 패가망신으로 몰아 넣기도 합니다. 이기는 습관, 지는 습관이란 그것도 습관이기에, 사람마다 들이기 나름이고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데, 루저, 백수는 그 간단한 인격 교정이 안 되어 나중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되죠. 퇴폐적이고 말초 향락만을 추구하는 매춘부 역시,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과거 편향(past bias)에 빠져 가망 없는 현재는 물론 먼 미래에도 손쉬운 생업 영위가 가능하리라 최면에 빠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는 "잘나가던 과거"조차도 없었습니다만, 편의적 인지 왜곡에 빠져 현재의 오류와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신 포도(sour grape)"의 행태를 보이는 거죠.


(스톡데일 제독)

이 와 같은 모든 "나쁜 습관"을 제거한 후,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을 새로 들여 놓아야 할까요? 우리가 올바른 "생각 습관"을 몸에 붙여야 하는 이유는, 결국 "정확한 미래 예측"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말한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이를 위해 대략 다음과 같은 준칙을 제시합니다.
1) 준거집단을 설정하라
2) 그 준거집단의 분포를 분석하라
3)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전문가의 예측을 안출하라.
4) 그 예측치의 질을 평가하라.


보 통 3)의 단계에서 머물고 말지만, 위에서도 보듯 한 번의 시도에 만족해, 최적해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3)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조정의 대상이 됩니다. 4)라는 피드백은 언제나 수반되어야 하며, 이것 없이는 프로세스의 개량이 불가능합니다.

이 단계를 거친 후에 비로소
5) 최종적 조정을 행합니다. 이 공식은
(준거집단의 평균)+(상관계수)×(직관적 예측치-준거집단 평균)
입니다.

이 식을 제가 조금 변형해 보겠습니다.
(1-상관계수)×(준거집단의 평균) + (상관계수)×(직관적 예측값)

상관계수가 점점 늘어나서 1에 가까워지면
(1을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비율이 100%를 넘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답은 그냥 (직관적 예측값)입니다.

그렇지 않고 0이라면 답은 (준거집단의 평균)입니다.

여 기서 (직관적 예측값)이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척 보고" 도출한 휴리스틱 결과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상관 계수가 높다면, 이 직관(휴리스틱)도 맞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대로 낮다면, 직관은 그저 무시하고 준거집단의 평균, 실측치에 따라야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준거집단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프로젝트의 생사가 달릴 것 같습니다.

저 변형 공식에도 나와 있듯이, 올바른 예측은
실제로 행한 조사와, 과거에 이러이러했다는 경험적 직관 사이의 어느 지점입니다. 어느 하나에만 완전히 의존하면 안 됩니다. 상관계수란 결국 어느 요소를 어느만큼 늘리고, 다른 걸 얼마만큼 줄이냐 하는 배합 비율의 선택입니다.

올 바른 선태을 하려면, 연관 논리의 오류associative logic error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좋은 예로, 천재들은 약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여성인 경우 가슴이 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역형태로 바꾸어, 약물에 의존하거나 가슴이 크면, 그 사람이 곧 천재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성립하기는커녕 경험칙에조차 강한 강도로 반하며, 어느 누구도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리학의 절대 진리 중 하나가, 원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그 역이 참이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는 거죠. 많은 실패자들은, 바로 이 연관논리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패가 거의 투기등급에 가까운 것임에도 이를 눈 질끈 감고 외면합니다. A가 잘 되었으니 나만 유독 안 되라는 법이 있겠어? 초기 조건, 세부 조건이 모두 다르므로 우연에 의한 국소 조건이 겹쳤다고 같은 결과가 나옳 수는 없죠.

계 속 실패만 해 온 사람은, 실패를 하는 그 습관이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습관을 고쳐서 상황을 개선해야겠다는 자체가 합리적 사고 습관의 시발점인데, 이 첫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은 거죠. 이 책에서는 안전지대secirty zone과 안온지대comfort zone의 구별을 제시하며, 후자에서 전자로 빨리 이행하는 게 합리적 사고의 실행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여기에서도 타당히 적용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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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
마거릿 폴 지음, 정은아 옮김 / 소울메이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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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으로는 "내일 일찍 일어나서 자료를 챙기고, 회의에서 제기될 어떤 안건에 대해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지." 하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러나 막상 새벽녘이 되면, 시틀 르 걷고 단호하게 일어나기를 망설입니다. "이 회사에서 과연 내 능력에 맞는 대우를 내게 충분히 해 주었던가? 그저 남들 하는 만큼만 일하고 때 되면 적당히 승진이나 챙기는 게..." 이상하게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선, 5분만 더 자는 게 그간 상처 입은 자존심을 보상 받는 길인 양 뒤척이고 또 망설입니다. 이건 옳지 않습니다. 일단 맡은 바 소임이 있는 이상, 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는 게 나 자신에게 떳떳한 자세입니다. 결국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행동을 의지에 맞게 통제할 줄 아는 내가 이깁니다. 그러나 따스하고 포근한 침대 안으로 마냥 날 머물게 하려던 건 대체 누구였을까요?


저자 마거릿 폴 박사는 이런 현상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성인자아(Inner Adult. 저자는 다소 독특하게 이 단어를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내면아이(Inner Child)라 는 두 실체를 상정합니다. 내면아이는 우리 안에서 끊임 없이, 상처 입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보상해 달라고 조르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성인자아"는 이런 내면 아이의 페이스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우리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다 이 둘의 밀고 당기는 싸움에서 유래합니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매번, 혹은 감당 못 할 만큼의 상처를 입지는 않습니다. 그런 드문 경우라면 현장에서 상대에게 해명을 요구하거나, 사적 자치 차원에서 해결이 안 될 시에는 법정 싸움으로 끌고 가면 됩니다. 합 리성이 어느 정도 통하는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상처를 입을 일이 자주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내가 그 과실을 누리기에 객관적으로 부족했으니 나의 차지가 못 된 것입니다. 상처를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의 성인 자아는 이 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한 우리는, 그날 동안 직장이나 다른 공간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상처(특별히 발생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를 달래고 보상 받기 위해, 때로는 나 자신에게 피해가 올 만한 선택도 저지르곤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저 위의, 출근 시간 임박해서 미리미리 자료를 챙기지 않고 별 효용도 없는 토막잠에 빠지는 선택입니다.


이 "내면아이"를 처음 발견해 낸 사람은, 저자에 의하면 칼 융이라고 합니다. 융은 물론 "내면 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이 용어는 저자가 독자와의 웡활한 소통을 위해 고안한 것입니다). 융의 명명으로는, 이 "내면아이"는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ness)라고 칭했습니다. 이 전의식이란, 무의식과 의식 가운데 단계에 자리한 것으로서, 우리의 감정, 직관, 느낌 같은 걸 모두 대변하는 기제입니다.


우 리가 어떤 때 불행해지고 고통을 느끼는가 하면, 바로 이 내면아이와 성인자아가 다른 방향으로 따로 놀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극심하 불운이나 실패를 경험한다 해도, 냉철한 판단을 하는 성인자아의 보조에 내면아이가 잘 따르고 있을 때에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설령 객관적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있더라도 해도 말입니다. 반 대로, 비록 객관적으로는 아무 문제나 불안 요인 없는 평탄한 삶을 사는 이라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건 내면아이가 성인자아와 다른 방향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은 불행하고 고통을 느낍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다든가. 과거의 어떤 트라무마 때문에 갑자기 몸서리를 친다든가, 뭔가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충동 때문에 비이성적  도발을 한다든가, 이런 경우가 다 두 "내면"이 따로 놀아서 발생하는 결과들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면아이가 어떤 식으로건 적절한 대우를 받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극심한 만성적 스트레스 아래 놓여 신체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아니면 비이성적 돌출 행동으로 큰 사고를 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겪는 고통의 양상도 다양합니다. 성인자아가 너무 높은 기준으로 형성된 사람은, 비록 내면아이가 비교적 순한 기질을 지녀도 만성적인 둘 사이의 괴리에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죠. 반면, 아예 성인자아가 형성되지 않고, 내면아이가 그의 모든 판단과 선택을 맡아하는 경우도 봅니다. 이런 사람도 성인자아 유사한 의식과 내면아이 사이의 갈등을 잠시는 겪게 되는데, 그 잠시의 불균형과 갈등을 참지 못하고 "그냥 저질러 버리"는 걸로 나름의 "해결"을 모색합니다. 이런 사람은, 학교나 직장 등 소속 집단이나 강제 규준을 정해 주는 환경에 머물면 몹시 괴로워합니다. 내면아이가 그를 한시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직장에서 해고되고, 집에 홀로 놓여 은둔자가 되는 그 순간, 그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전보다 더 나은, 행복한 내가 되었다"며 최면을 겁니다. 내면아이에 일체의 인격이 매몰되고 굴복하는 끔찍한 경우입니다.


성인자아와 내면아이가 단절되면, 사람은 일단 고통을 느낀다는 건 앞에 적었습니다. 만 약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면아이를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자가 이 전의식을 굳이 "내면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이 전의식이 끊임 없이 누군가의 위로와 보호를 받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내면아이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의 성인자아에 관심과 보호를 요청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가 강조하는바, "끊임 없이 내면아이를 달래주고 보호하라."는 주문이 나옵니다. 자, 여기서, 만약 내면아이가 성인자아의 보호를 받지 몫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인자아가 어느 정도 형성이 된 사람의 경우입니다. 없거나 발달장애를 보인 이라면 바로 내면자아의 폭주가 발생함니다) 이 내면아이는 타인의 보호와 관심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큰 위험이 이어집니다. 남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다가 만족이 안 되면 격분, 자해, 망상적 분노 표출을 일삼는 사람은, 바로 내면아이를 타인으로부터 보호 받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이들입니다. 연애나 결혼에서 실패하는 여성들 중 이런 타입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이런 사람들을 잘 조종하는 유형이 바로 사이코패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히 위험하다는 건, 사이코패스의 가장 손쉬운 표적이 된다는 점에서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내면아이를 잘 달래고 도닥여서, 사고를 치지 않게 만들어야 할까요> 문제청소년이 있으면 일단 그 애한테 문제를 맡겨서야 일이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어른이 나서야 합니다. 내면아이도 마찬가지, 극심한 내면적 갈등 때문에 일상이 힘들 정도인 사람들은, 일단 전문가를 찾아가 봐야 합니다. (꼭 약물치료가 권해지거나 처방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껏 성인자아가 내면아이를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는 말이니, 다른 사람(의 성인자아) 도움이라도 받아서 달래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에 언제까지나 의존할 수 있을까요? 결국은 아이는 부모 곁으로 돌아가야 올바른 훈육이 이뤄지듯, 내면아이 역시 그를 버린(!) 성인자아의 도움을 받아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를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성인자아를 먼저 돌아봐야겠습니다. 괜한 강박 관념, 죄의식 때문에 스스로를 쓸데없이 옭아매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언제부터 생긴 버릇이나 태도입니까?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충분한 애정을 쏟지 않았던 어머니? 학급에서 유난히 당신을 부당하게 대우한 담임 선생님? 이들 중 누구 한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를 교정해야 합니다. 과거의 그를 찾아갈 수는 없고, 마음에서 자꾸 잊으려 들고 지우려 하는 괴로운 기억을 정면으로 끄집어 내십시오. 그건 더 이상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나, 벽장이나 골방 속에 묻혀 있으면 귀신이 되어 당신을 어둠에서 지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먼저 성인자아를 점검하는 과제입니다.


책에는 다양한 내담자의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끔찍한 학대를 입은 이들도 있고, 성 장 과정에서 타인에게 부당한 상처를 입어 끝내 극복 못한 채 성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인정할 때, 성인자아의 자존, 내면아이의 격정이 차례로 위안되고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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