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읽는다 지정학 전쟁사 지식 도감 지도로 읽는다
조지무쇼 지음, 안정미 옮김 / 이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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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정치와 경제를 떠받치는 근본 질서가 흔들리는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한국은 세계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이므로, 강대국 간의 역학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동하느냐를 면밀히 주시해야만 합니다. 최고의 도감 책을 펴내는 이다미디어에서 여태 출간한 대부분의 도감류는, 사실 어떻게든 지정학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자는 만약 모종의 지정학적 통찰을 얻고 싶었다면, 기존에 출간되었던 이다미디어의 도감 몇 권만 읽어 봐도 상당한 배움이 가능했을 듯합니다. 지도가 미려하고, 사실 독자들이 간과하기도 하지만 텍스트도 참 좋습니다. 관점이 중립적이고 냉철합니다.

하지만 관세전쟁으로 대표되는 중, 미 양국 간의 경제적 대립이 고조되고, 이를 넘어 중동이나 남아시아 바다에서 드디어 군사적 격돌이 임박했다는 진단이 대두하는 작금에는, 이제 지정학과 전쟁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소설 <삼국연의>도 지도와 함께 읽어야 전술 전략의 탁월함이 적실하게 간파되듯, 지정학의 탐구에는 목적에 맞게 제작된 지도가 반드시 따라 줘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간(旣刊) 이다미디어의 대부분 도감류는 지정학 도서로 독해해도 무방했다는 게 제 생각이며, 이제 이렇게 신간이 지정학과 전쟁 주제에 포커싱해 나오기까지 했으니 대단히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지도와 함께 보는 지정학 도서가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출간되어야만 했고 그 신간이 역시나 이다미디어 책입니다. 

그제(2025. 9) 갑자기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해서(=채권 금리가 폭등해서) 시장이 들썩였습니다. 트럼프의 관세 부과 조치(예고)에 격분한 일본에서 더 이상 미국 패권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고 투매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왔으며, 트럼프도 이에 놀라 관세 부과를 유예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습니다. 중국은 이미 트럼프 1기 때부터 팔아 왔기 때문에 남은 보유 물량이 많지 않습니다. 일본은 이미 작년에도 갑자기 미 증시에 깔아 둔 자금을 갑자기 회수하여(이른바 엔 캐리 트레이드) 미 증시 폭락을 일으켰었는데, 이처럼 경제라는 건 배후에 깔린 하이 폴리틱스, 지정학 구도를 모르면 그 깊은 흐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전문가 집단인 ぞうじむしょ(造事務所)는 일관되고 객관적인 프레임으로 쉽게 세계 독자와 소통하는 이들이지만,  일본만의 시야도 저술 중에 은근히 드러냅니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신 질서에 대한 일본 측의 의구심이 책에도 행간에 표시되며, 앞으로 일본과도 개별적으로 협조해야 할 한국 입장에서 참고해야 할 바가 많습니다.

제1장은 해양국가와 대륙국가 간의 대립상을 다룹니다. 영미의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 학파라면 수백 년 간의 외교사를 오로지 이 그레이트 프레임에 의해서 통찰합니다. 유럽 역사(전쟁사)도 섬(브리튼)과 대륙 사이의 싸움이며, 나폴레옹 1세의 부침(浮沈) 뒤에는 그 바톤을 제정 러시아가 이어받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을 펼칩니다. 이 구도가 동아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미-영-일이 한 축을 이루고 중국이 대척점에 서서 한판 붙은 게 청일전쟁이요, 그 후속편이 러일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도 중-소-북이 한 팀을 이루고 (불과 그 얼마전까지 교전국이었던) 일본과 미국이 한 편이 되어 피터지게 싸운 한판이었습니다.

책에서는 투르푸아티에 전투(해양의 이슬람, 대륙의 프랑크 제국), 가우가멜라 전투(해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대륙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등이 다뤄집니다. 이 관점이 항상 해양세력의 승리로 마무리하는 건 아니어서 이른바 레그니차 전투는 대륙 세력인 몽고 제국이 유럽 연합을 박살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1장에서 좀 특이한 건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다뤄진다는 건데, 딱히 대륙과 해양 사이의 갈등이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아마도, 일본 입장에서 영원한 아치에너미인 통일 중국이 처음으로 그 원형을 갖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대표적인 해양-대륙 충돌 사례인 러일 전쟁은 제3장에 나오는데 이는 제국주의의 선발-후발 대립으로 더 정확히 고찰된다고 보는 이 책의 태도 때문입니다. 특히 이 책은 제국주의 대립의 경우 사실상 그 배후에 경제 팩터가 강력히 작용한다고 보아서인데 국제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에 책 전체에 더 신뢰감을 보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제2장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은 제목 그대로 종교간 대립이 지정학 충돌에 그대로 대입된 사건입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도한 잉글랜드와 펠리페 2세의 에스파냐 제국 간의 대결, 도버 해협 등에서 일어난 아르마다 해전이 이 책에서 소설처럼 재미있게 서술됩니다. 책에는 특히 네덜란드(이후 호국경 크롬웰 시대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의 협력이 요긴히 이뤄져 스페인(식민 본국)의 군사 작전이 방해된 점도 기술됩니다. 역사, 특히 전쟁에는 이처럼 각종 요행과 변수가 다양하게 개입하여 거대한 흐름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오스만의 콧대를 꺾은 스페인의 패배라서 이 사건의 여파가 더욱 충격적임은 이 책에서 아주 실감나게 설명합니다. 그 태반은 예쁜 지도의 힘 덕분입니다.

프랑스는 1930년대 내내 정정이 불안하여, 패전국 독일보다 경제력, 인구, 심지어 군사력마저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노선만 믿고 방심한 상태로 지내다가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야전 사령관들의 놀라운 전술에 예측도 할 수 없었던 역습을 당해 단시간 안에 패배했습니다. 히틀러는 신이 나서 파리로 이동하여 프랑스인들에게 굴욕을 안겼고, 나치의 괴뢰 노릇을 하던 비시 정부는 (p217의 도판에 나오듯) 근엄한 얼굴의 페탱 원수가 새겨진 깃발 아래 전체주의의 주구로 굴려졌습니다. p212에는 이 당시 유럽의 정세가 어떤 구조로 놓였는지 저자들의 탁월한 솜씨로 간략화한 표가 나와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세계는 지금 2차 대전 종전 후 80여년 만에 근본적으로 재편될 전환점에 놓여 있습니다. 지정학의 정확한 인식이 전쟁을 예방하고, 혹 발생할지 모르는 미래의 전쟁에서 어떠한 포지셔닝이 우리의 생존을 담보해 줄지, 이 책이 분명한 가이드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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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경복궁 - 초등학생을 위한 어린이 궁궐 탐방 1
이향우 지음 / 인문산책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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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우 선생님이 쓰시는 인문산책 궁궐 시리즈가 이번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책도 이렇게 나온 것 같습니다. 작년(2024) 12월에 저는 이 시리즈 중 컬러링북을 리뷰했었는데, 그 책에는 평소와는 달리(?) 저자 이향우 선생님을 캐릭터화한 일러스트들도 들어 있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번 신간은 아예 대놓고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초등학생 독자들의 궁궐 여행을 이끌어 주는데, 저자 이향우 선생님도 세 캐릭터 중 한 명으로 활약하심은 물론입니다. 이제 신간마다 이 차림으로 아주 계속 나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초등학생용 책답게 궁금이 유진과, 남학생인 동궁이가 등장하여 친구들의 지면 여행을 돕습니다. 특히 동궁이는 이름값을 하느라고 전생에 세자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동궁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독자도 (아무리 얘가 반팔티에 반바지 차림이라 해도) 몸가짐을 바로한 후 읽게 되었습니다. p16에서 보듯 어른들도 모르는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데, 역시 세자마마라서 뭐가 달라도 다르고 태도도 의젓합니다. 이 책은 초등학생용이라서인지 책 서두와 본문 여기저기에서 기초 지식을 많이 가르쳐 주는데, 이를테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이 무엇무엇이 있는지 p13에서 연도별로 정리해 알려 줍니다. 과연 우리 어른 독자들은, 한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전 이 책을 보고서 비로소 전체를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궁궐 관련해서는 의외로 창덕궁 1건뿐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네요.

p14를 보면 깔끔하게 정리된 한양도성 지도가 나옵니다. 이게 의외로, 인터넷에 찾아 보면 세칭 4대문과 4소문, 내사산(內四山)을 이은 구조를 선명하게 도시한 그래픽이 생각보다는 잘 안 나옵니다. 이 점에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p18에는 백두대간과 정맥(正脈)이 표시된 한반도 지도가 나오는데 한양(서울)이 반도 전체에서 풍수지리상 어떤 위상인지 어린 학생들도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북한산은 한북정맥, 관악산은 한남정맥! 동궁이가 자신있는 화살표까지 그려가며 강조하는데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골똘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궁금이인 유진이가 p33에 나옵니다. 법궁(法宮)은 공식적인 궁궐이며, 이궁(離宮)은 그 법궁 외의 궁궐이다! 이어(離御)도 어른 독자에게조차 어려운 말입니다. 뜻은 임금님이, 그 머무는 궁궐을 옮아간다는 뜻입니다. 또 임어(臨御)는 궁궐에 머무신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조선 500여년 동안 어느 왕이 어떤 궁궐에 머물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되는데 이로써 조선 역사까지를 간략하게나마 배우거나 다시 환기할 수 있겠습니다. 아관파천 동안 수리를 하던 경운궁은 1897년 고종이 돌아와 법궁 구실을 하게 되고 그의 퇴위 후에는 덕수궁이라 불린다고 나오는데, 이로써 비운의 대한제국사가 짧게나마 짚어지기도 하네요.

기별(奇別)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그저 소식을 전한다는 정도로만 알지만, p61을 보면 놀랍게도 승정원에서 아침마다 중요 안건을 공포하던 일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조보(朝報)라고도 했는데 인구도 많고 복잡한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의 행정 시스템을 엿볼 수 있으며 오늘날의 공포(公布)와 크게 다를 바 없죠. 행정행위나 법률이 대외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필요에 따라 이는 지방에 파발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는 설명이 곁들여집니다. 유화문(維和門), 궐내각사(闕內閣司), 기별청 등의 의의, 기능이, 사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안 나오던 바를 여기서 쉽게 배웁니다.

궁궐은 그저 임금이 먹고자는 공간이 아니며, 임금이 따로 사무를 보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는데 이런 한자 표기와 함께 설명이 이어지니 이해가 빨라지는 듯도 합니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옛 성현들은 이름 하나를 지어도 사려가 가득 담긴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께서는, 쟁쟁한 대신들, 학식이 고매한 관료들과 함께 토론하며 정사를 보는 임금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만 했을지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왕정 시대도 이러했거늘 하물며 민주주의 체제라는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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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링
이상권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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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 청소년들의 공동체인 학교도 일종의 사회입니다. 인간의 본성, 즉 질투심, 승부욕 등이 폭력이나 계략, 유치한 시비 등으로 표현되는데 따지고 보면 어른들과 별로 다를 바도 없습니다. 청소년답게 바르고 순수하게 자라 줬으면 하는 마음 역시도 어른들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며, 결국은 각자가 부딪히는 문제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도를 넘으면 어른들이 개입해야 하겠으나).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미주 같은 애는 어디서건 눈에 띌 법합니다. 180cm이 넘는 키, 100kg가 넘는 체중(p15)이라는데 남자도 이런 피지컬이 많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꽤 예쁘다는데 책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듯이 매우 기이한 조합이긴 합니다. 글로만 봐선 대강 누구하고 비슷할지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이 학교에서 안민수라는 아주 악질인 녀석에게 피해를 (결국) 겪게 된 건, 주인공 강수채 건이 꼭 아니라고 해도 이런 특징적인 외모가 한몫했을 것입니다. 물론 놈의 잘못이지, 미주가 남의 시선을 끈 탓이라는 게 아닙니다.

피지컬이 이렇게 좋으니 미주가 남자애들을 때리고 다녔다는 헛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어른들도 생각없이 말을 옮기는 등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까. 애들이야 못난 어른을 보고 따라하는 거지 애들을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p14를 보면 덤덤이(작명 과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집 상량식(?) 과정이 나오는데, 아이들다운 모습이라고 우리 어른들이 기대하는 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남달리 사납지도 않고 묵묵하게 개체의 생리 작용만 이어가는 착한 강아지. 그런 강아지를 둘러싸고 으쌰으쌰 해 주며 마치 자신들을 동일시하듯 집단 돌봄을 베푸는 아이들. 글로만 읽어도 아주 흐뭇합니다.

우스운 건, 예를 들어 p51 같은 데 나오는 장면입니다. 덤덤이는 목에 줄이 걸려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슬픈지 사료를 줘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자 강시언(수채 아빠)가 "너를 믿지 못하고 묶어서 미안해."라며 덤덤이의 줄을 풀어 줍니다. "덤덤이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소리치더니..." 과연 강아지가 어쨌길래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요? 아무튼, 고마운 줄도 알다니 개가 사람보다 낫습니다. p68, p105에는 한숨이라는 생리작용에 대해 좀 특이한 설명이 있습니다. 두 번 다 수채 엄마인 김소두가 쉬는 한숨인데 이유가 조금은 다릅니다. 한 번은 여자인 미주 때문에, 한 번은 무진이 때문인데 딸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너희 보더콜리 종은 다른 종과는 짝짓기를 안하지?(p102)" 그렇다고 하죠. 원래는 사과와 수박이가 어울려야 하는데(같은 보더콜리니까), 그러지 않고 스타와 사과가 친합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셈이지만 이 역시도 개체의 감정과 마음이 그리 향하는 걸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애를 배고 난 사과는 더 이상 스타를 반갑게 맞지 않고 시무룩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처방을 받아 입으로, 사산한 태아를 토해 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몸 안에서 생명이 죽어간다는 걸 깨닫고 사과는 마음이 그리 울적해졌겠지요. 개들의 휘파람이라는 게 이 대목에서 좀 슬프게 묘사되는데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도 좀 다르게 다가옵니다.

"숲은 개들에게 해방구다. 학교도 애들에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p130)" 전남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님의 이 문장 첫 구절까지만 읽어도 뒤의 말이 무슨 소리가 따라나올지 훤히 짐작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스타가 저 모습이 되고, 덤덤이도 전신마취 수술만 세 번을 한 그 엄청난 일이 터지고 나서, 민수와 배 교수가 찾아와 사과까지 하지만 강수채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사실 어른이 들어도 소름이 끼칠 만한 무서운 사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도, 자연도 그렇게그렇게 피투성이의 사건과 비극을 거쳐 가며 어떻게든 자기 리듬에 맞춰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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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시간과공간사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송용구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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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공간사에서 이제 고전을 본격적으로 시리즈화하여 펴내는 듯하여 독자로서 기대됩니다. 송용구 교수님은 시인이기도 하고 지금껏 독일권 저작들을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소개해 온 분입니다. 첫권이 헤세의 <데미안>이라 설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7 하단에는 역주가 있는데 벌써 이런 배려가 독자에게는 가외의 레슨이 되는 것입니다. 헤세의 다른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를 보면 주입식 암기 공부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을 한 주인공 한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자의 말대로 헤세 역시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이 비슷한, 혹독한 체험을 거쳤기에 작품마다 유사한 환기, 세팅이 지나가듯 등장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이런 문호가 탄생했으니 공부는 설령 그 부작용이라고 해도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솔직히 모든 학교는 크램스쿨이라야지, 지금처럼 죽도밥도 아닌 시스템이 최악이라는 주의입니다ㅋ. 그게 싫으면 나가서 검정고시 치면 됩니다. 그 중에 또 헤세가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데미안은 p84 이하에서 기독교의 결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만물을 창조한 신이라면 사람한테 아름답고 선하고 거룩한 것만 보여줘야지,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있으면 모조리 사탄 타령이니 이게  얼마나 무책임하냐는 게 그 핵심입니다. 독일인들은 저 무렵 중동, 특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문물을 접하고 연구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결과 전통적인 기독교 문명을 메타적으로, 시니컬하게 보는 게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헤세의 작품 곳곳에도 그 흔적이 배어나며,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설의 이 대목 데미안의 비판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저 청소년의 투정, 넋두리입니다. 우리 독자들도 지금 사춘기가 아니기 때문에, 데미안의 일장연설을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습니다. 단,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에서 이반의 도도한 설파에 대해서는 그게 여전히 쉽지 않더군요.

온전히 묵살된 악마의 세계에 대해서도 대변(代辯), 혹은 어떤 해명이 필요하지 않냐는 싱클레어의 공감, 동조, 고백은 물론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런 건 이 세상과 자연 속에 던져져 보면 바로 지옥의 실감이 피부로 다가오므로 따로 변설이 불필요합니다. 자연 역시 약자가 강자에게 생으로 살점이 뜯기고 심지어 암컷이 밴 태아가, 그 모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배가 갈리고 하이에나의 강한 턱과 이빨에 피투성이로 분리되는 게 정글에서는 일상으로 마주하는 바입니다. 새삼 종교다 철학이다가 뭘 번거롭게 말로 설명할 가치가 없습니다. 한 번만 구경해도 책 만 권 분량의 각성이 1나노초만에 내 정신에 입력 이식됩니다.

p106을 보면 여전히 불안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청소년 싱클레어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청소년 때에는 다 저런 거죠. 세상이 나를 위해 더 좋은 자리를 내어놓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세상이 입어야 한다... 다만 헤세도 주인공 싱클레어의 생각이란 걸 저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그 미숙함을 독자 앞에 절절하게 드러내는 의도이겠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파문을 던져 놓고 수습까지를 안 해 줘서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한 데미안에 대한 원망(p108), 한때 영적 구원자, 육적인 보호자로까지 고마워했던 데미안에게 이젠 이런 마음을 품으니 사람이라는 게 이처럼 얼척없고 간사합니다. 이게 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여 적절한 충고를 해 줍니다. 아무래도 인생 연륜의 깊이가 다르니 입에서 나오는 말도 훨씬 성숙하며 그저 데미안류의 화려함이 없을 뿐입니다. 헤세의 작품에 대놓고 그런 말은 없지만 그의 이런저런 수상록을 봐도 헤세나 그의 주인공들이 가장 고뇌했던 건 육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헤세는 몇 살 때 어떠어떠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작업을 걸었다 어쨌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만, 저는 남아 있는 그의 사진 같은 것을 보았을 때 과연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나 했을지 극히 의문스러웠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으니 말빨로 여자를 홀릴 수도 있었겠으나 헤세는 왠지 체질적으로 그런 것도 힘겨워했을 듯합니다. 사람은 그에게 결여된 걸 놓고 가장 괴로워하게 마련이며, 청소년 싱클레어 역시 그에게 제일 아쉬운 욕구가 해소가 안 되니 엉뚱한 핑계를 찾아대는 것입니다. p156 같은 데를 보면 피스토리우스가 노련하게 애를 꿰뚫어보고 딱 맞는 충고를 해 주지 않습니까.

고전은 언제 읽어도 고전만의 묵직한 울림이라는 게 있습니다. p203에서 언급되는 카발라 교도, 톨스토이 숭배 모임 같은 세팅도 읽을 때마다 새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역자의 적절한 역주가 독해에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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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임체인저다 - 나는 JP모건을 버리고 트럭 비즈니스의 판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혜인 지음 / 라온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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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 저자 정혜인 대표가 어렸을 때 화장실에 가는 길을 묻자 "엄마도 아빠도 모른다"며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을 요구했던 어렸을 때의 일화가 나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주변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며 정신 안의 개념과 개성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러나 모방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내는 어떤 breakthrough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 정혜인 대표는 원래 JP 모건에 근무하던 분인데, 전혀 무관한 분야인 상용트럭 플랫폼을 설립하여 운영 중인데, 그녀의 이런 도전 정신을 일구는 데는 저런 어렸을 때의 체험도 그 바탕이 된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한국에서 휴대전화가 일반화한 것은 대략 1998년 정도, 스마트폰은 2011년쯤이면 누구라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바일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에서는,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나의 큰 돈이 소요되지 않고 비교적 적은 부담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최대한 이 한국적인 환경의 이점을 볼 수 있는 사업 전략을 짜려고 애썼으며 교보문고 등에서 플랫폼 서적을 많이 들추며 연구했다고 합니다.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p71을 보면 저자는 10년 전 한국은 부동산 중개 시장이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대중교통연결, 법조서비스 등이 독자 플랫폼을 마련하는 단계였죠(배달은 한참 앞). 다만 트럭 중개는, 과연 한국에 얼마나 많은 트럭이 민간 차주에 의해 보유되는 지도 모르고, 도로에 불법 주차된 차량만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정도라서, 여기서 사업성을 찾았다면 저자의 눈썰미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미 대륙에는 트럭 소유주가 무척 많으므로 아마 거기서 어떤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p116을 보면 저자는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아이트럭을 창업하고 이런저런 직원을 겪다보니 예상치 못한 많은 피해를 받았나 봅니다.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심지어는 업무 파일을 모두 삭제하고 퇴사해 버린 사람(이런 건 업무방해로 형사고소를 해야죠), 퇴사 후 악성 후기를 남긴 사람 등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악질들 때문에 고생하신 기록이 책에 잘 나옵니다. 아마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이런 타입의 인간 유형을 못 겪어 보셨겠죠.

그런데 저는 솔직히 정 대표님이 사람을 대할 때, 북미식으로 그저 부품이나 타자처럼 대하신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인적자원관리는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내 치밀한, 합리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계획만으로는 사람 다루기가 힘듭니다. 무조건 잘해주라는 게 아니라, 합리성만으로 사람 상대하려면, 니가 나한테 복수라도 하려 들 때 어떤 불이익이 따르는지 상대에게 확실하게 (암묵적, 명시적) 고지를 해야 합니다(경제학의 게임이론에도 나오죠). 어설프게 내 할 도리만 다하면 반드시 저런 탈이 납니다. 아니면 한국 특유의 방식으로 잘해 주든지 말입니다.

한국은 사회에 신뢰라는 게 없어서 남의 일거리를 약탈적으로 뺏고,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하면서 쓰레기 점포를 권리금까지 받고 떠넘기는 사기꾼들이 버글버글합니다. 중고트럭을 매입하고 돈도 안 주고 잠적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쓰레기들이 있으며, 그러고선 "속은 게 등신이지!"를 외치며 손뼉을 치고 좋아들 합니다. 한국의 이런 독특한 현실을 파고들어, p148같은 데를 보면 구매동행서비스 같은 걸 개발하여 척박한 상황에서 운전자, 차주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개발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그래도 이 험한 세상에서 내편이라는 게 있구나, 여긴 좀 다르구나 같은 생각에 이용자로서 로열하게 되죠. p182에 나오듯 플랫폼 기업이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투자사들의 태도까지 바꿔놓은 데는 이처럼 비범한 구석이 꼭 있기 마련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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