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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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4년 동안 프린스턴에서 사랑받아 온 바움가트너 교수(p81). 키는 185cm 정도이며(p72), 그에게는 이제 곁에 아내가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분명 있는데, 다만 그 연장(延長)이 이제 없을 뿐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5에 나오는 연장이라는 말은, 최고의 번역가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데카르트가 썼던 용어입니다. l'extension이 불어 원어인데 영어로도 그냥 extension이라 씁니다. 대륙 합리주의의 완성자답게 그는 본질이 따로 있고, 그 본질이 차지하는 물리적 실체는 그저 "연장"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움가트너 교수님이 사랑하던 부인 애나는 사망했지만, 이는 단지 육신, 연장이 소멸했을 뿐 그녀는 여전히 교수님의 마음과 기억 속에 존재합니다. 그 본질이 이렇게 뚜렷이 그의 곁에 있는데 고쟉 그 "연장"이 땅에 묻혔다 한들 어찌 감히 누굴 죽었다고 평가하겠습니까.

p35에는 환지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환상통, 유령 감각 같은 말이 더 익숙할 텐데, 영어 원어로는 phantom pain이라고 하며, 손가락이나 팔, 다리 등이 (사고 등으로) 잘려나갔는데도 여전히 그 부분에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뜻합니다. 물론 고통이란 실제로도 팔다리가 느끼는 게 아니라 뇌가 그리 느끼는 것이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limb에 대해 아픔이 느껴진다는 게 어쨌든신기한 일입니다. 내 팔다리란 그만큼 나한테 소중했기에 없어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기이하게도 이게 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연장"과도 통합니다.

바움가트너 교수에게 아내의 부재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두뇌에 보내는 환지통과도 같으며, 교수에게는 여전히 아내가 곁에 있는 셈이기에 이걸 환상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역시 똑똑하신 지성인이라서 배우자의 사별로 인한 아픔도 대단히 형이상학적으로 체험하고 또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고 수준의 은유적 적합성(p68)입니다. 농담이고, 소설 전반을 꿰뚫는 슬픔과 허무함은 어지간히 무딘 독자의 마음에도 환지통을 전염, 전파하기에 충분할 만큼 절절합니다.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의 힘이며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페이소스의 농도가 짙습니다.

시모어 티쿰셰 바움가트너. Baumgartner라는 독일계 이름을 쓰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으며 부친 야코프(제이컵)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을 때 고작 여섯 살이었다고 p153에 나옵니다. 아버지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바움가트너 교수 역시 밀턴 프라이버그 등 진보 성향 일색인 교우관계에 싸였던 인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진보주의자들은 특히 교육 받은 이들 중에 많았으며 1939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들에게 어지간히 충격을 주었나 봅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은 그들의 삶에 직접 피해를 안기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기준으로도 170cm의 키는, 더군다나 1940년대라면 여성에게 작은 키가 아닙니다. 196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도 당시에 장신이라고 했는데 저 정도입니다. 애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잘했고 힘도 세었던 편이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고 호르몬이 제대로 작용한 후 비교도 안 될 만큼 근육량이 늘고 강해진 남자 아이들과는 더 이상 경쟁할 수 없습니다. p46을 보면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남자들과 육체적으로 경쟁하려 나선 애나가 잔인하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bite the dust는 쓰디쓴 좌절을 가리키는 관용 표현입니다. 그룹 퀸의 노래 제목도 있었죠.

하지만 프라이버그가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에 들어가 파시스트 돼지들을 박살내려 들고 악마와 손을 잡은 스탈린을 바로 손절쳤듯이, 이들(애나의 첫사랑인 프랭키 보일도 포함)은 대체 마르크스적인 기계의 법칙과 그리 잘 맞는 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육신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대의를 위해 희생하려 들기도 했죠. 그들은 본래 사람 됨됨이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 에드에게 "그냥 사이라고 부르세요."라고 할 때(p15) 바움가트너 교수는 참 소탈해 보입니다. 시모어가 어떻게 Sy(사이)로 줄여지는지 이상할 수 있으나 Seymour Tecumseh Baumgartner라는 원 철자를 보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은 우스꽝스럽게 긴 그리스식 성씨를 부끄러워하고 교수는 시모어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이 이름은 양성적입니다), 사실 독자인 제게는 티쿰셰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저 이름을 이상하게도 미국 백인들은 좋아합니다(제각각의 이유에서). 교수는 가스 검침원이 자기 이름을 잘못 읽었을 때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지만, 사실 Baumgartner는 작중에서 에드의 발음처럼 읽힐 가능성이 미국에서는 훨씬 크죠. 뭘 그 연세에 새삼스럽게요. p190에는 오스터(!)라는 이름이 스타니슬라프 유대인에게는 흔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소중합니까. 연장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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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 수면과 꿈의 과학
매슈 워커 지음, 이한음 옮김 / 사람의집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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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 diplomat". 이 책 저자 매슈 워커 교수의 별명입니다. 현존하는 최고 권위의 신경과학자이자 방송 셀럽이며, 독자인 저도 미 공영라디오 NPR에 이분이 출연하여 쉽고 명쾌한 표현으로 "잠"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는 걸 듣기도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현대인은 많은 경우,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고생하곤 합니다. 현대인의 생활 패턴 중 뭔가 숙면에 방해를 주는 치명적인 루틴이라도 있는 걸까요? 이 책에서 저자는 잠의 본질이 무엇이며, 평소에 어떻게 습관을 바꿔야 양질의 수면을 안정적으로 취할 수 있을지를 매우 실용적으로 독자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독자인 저는 18년 전에 앤드루 파커 박사가 쓴 <눈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개별 생명체들(우리를 포함)이 그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세상을 인식하지만, 실제로 자외선, 적외선, 20000Hz 이상의 주파수 음향 모두가 어우러진 세계는 또 어떤 모습일지 모릅니다. p96에서 저자는 진화 과정에서 어떤 목적, 즉 시지각(視知覺. visual perception)을 위해 눈이 생긴 것처럼, 렘 수면 역시 개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사적으로 만들어내었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눈만큼이나 잠이 중요하다고 발언하는 것입니다.

뇌는 정보를, 단기 저장 장소에서 장기 창고로 옮깁니다. 이렇게 해야지 라고 의식하지 않아도 뇌가 자동으로 그런 작업을 행하는 건 정말 놀라우며, 더 놀라운 건 그처럼이나 놀라운 기능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뇌로 그런 점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장기 기억, 단기 기억이라는 걸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의식해 본 적 있나요? 학교나 인터넷에서, 혹은 독서를 통해 배우기 전에 말입니다. p186에서 저자는 자신의 실험에서, 운동 기억은 (사실과는 달리) 의식 아래로부터, 작동하는 뇌 회로 전체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 피아니스트의 경우, 처음 연습할 때 아무리 반복해도 안 되던 것을, 하룻밤 푹 자고 나니 거짓말처럼 다음날 완벽하게 되었던 경험을 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성공적인 수면은 수백 회의 연습을 능가하는 효과를 내었다는 거죠.

p266을 보면 natural killer cell에 대한 이야기를 저자가 들려 줍니다. 이 NK 세포에 대해서는, 요즘 한국인들도 워낙 건강에 관심이 많고 건기식을 자주 섭취하며, 심지어 TV 광고에서도 일상용어처럼 나올 정도이니 그 이름만은 익숙할 것입니다. 요약하면, 잠을 잘 때 이 NK세포, 천연 항암제가 생성되는데, 청년들의 경우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수면을 줄이면 NK 세포가 70%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잠 잘 자는 사람은 암에 걸릴 확률도 줄어든다는 뜻이 되죠. 

월남전 이래 미국 의학계는 이른바 PTSD에 대해 많은 연구를 이뤄 왔습니다. 꼭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도, 극한 환경에서 비일상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린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질환으로 고생할 수 있습니다. p304 이하에서 저자는 렘 수면의 질이 개선되었을 때(저자는 회복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씁니다) 이 PTSD마저도 환자들 사이에서 뚜렷한 극복 조짐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벅찬 어조로 "선생님! 나아진 것 같아요!"를 말했을 때 의사로서 학자로서 그가 느끼는 긍지와 성취감도 책에 잘 드러납니다. 이 분야 또다른 권위자 머리 래스킨드를 만났을 때의 일화도 책에 유머러스하게 서술됩니다.

의예과 대학생이 아니라도 somnambulism이라는 단어를 구경은 해 봤을 것입니다. "잠"이라는 어근 somn-와, "걸어다니다"는 뜻의 ambul-이 결합한, 어원 중심 영단어 공부의 아주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입니다. p338에 잘 나오듯 몽유병(夢遊病. 수면보행증)은 아직 그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질환 중 하나입니다. 이 페이지에서 설명되는 대로 해당 질환은 비(非)렘수면의 가장 깊은 단계, 그리고 꿈꾸지 않는 렘 수면 단계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비렘수면이 지하실, 각성(覺醒. awakening)이 펜트하우스라면(저자의 비유입니다), 갑자기 신경이 전기 충격으로 깨어나면서 뇌가 지하와 펜트하우스 사이에 갇혀버린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잠은 기본적으로 뇌의 기능이며, 이 뇌의 건강한 풀가동에 렘수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세계 최고 두뇌의 권위자가 베푸는 설명과 비유의 향연으로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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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를 만나다 -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
백숭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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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사르트르는 "작가는 무엇인가의 도구가 되는 걸 거부해야 한다"며 자신에게 수여된 노벨 문학상을 사양하기도 한, 자기 시대의 양심이자 가장 명석한 두뇌였습니다. 파리 고등사범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20세기 페미니즘의 대모라고 할 시몬 드 보부아르 여사와 계약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띠지에는 유명한 말이 새겨져 있는데, "우리에게는 자유롭기를 그만둘 자유가 없다."가 그것입니다.

(*북유럽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freedom fighter라는 직분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동료 인류를 위해 미래의 후손을 위해 개체의 이익을 포기하고 그런 고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의미 추구를 중단하고 말초적 쾌략만을 추구하며 극단적 감정만을 표현하는 반지성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재기 넘치던 천재의 화려한 문장과 심오한 사색을 톺아보며 무엇이 참된 삶이고 가치일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투(被投)적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본디 마르틴 하이데거가 Geworfenheit라는 개념으로 코인한 것인데, 독일어 동사 werfen(던지다)에서 유래했습니다. 과거형은 warf, 과거분사형은 geworfen인데 이 과거분사형에서 저 단어(명사형)가 나왔습니다. 하이데거는 히틀러와 나이가 같고,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는 그보다 16살 어렸습니다.

프랑스어로는 저 피투성(被投性)을 etre jete라고 하는데, 청년 P가 사르트르 살롱에서 어느 교양 있는 신사에게 처음 듣는 철학용어(p34)입니다. 발레 용어 그랑주떼라고 할 때 그 jete와도 같은 단어입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이렇게 던져져서 이처럼이나 고생을 하며 살지만, 그 와중에도 생존만을 위해 존엄을 포기하지는 않기에, 우리 인간은 (파스칼의 말처럼) 전 우주보다도 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썼고,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우리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궁극의 질문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입니다. 이보다 더 고차원적인 질문은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상정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le vertige, "현기증"이라고 하면, 사르트르에게는 이것이 "존재의 불안"에 붙인 보조관념이었습니다.

이 책 p93에서 수수께끼의 신사는 현기증이라는 게, 어려서부터 두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시(斜視)로 고생한 사르트르의 일생을 따라다닌 장애로서 자연스럽게 생각난 비유일 것이라는 취지로 청년에게 이야기합니다. p100에, 유명한, 토끼인지 오리인지 모를 착시 그림이 인용되는데 이게 의외로 역사가 오래되었고 심지어 사르트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제작되었다고 하죠.

p128에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언이 인용되는데, 신사는 이 말을, 실의에 가득찬 청년 P에게 격려의 취지로 들려 주는 듯합니다. 이걸 책에서 그대로 필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L'homme n'est point la somme de ce qu'il a, mais la totalité de ce qu'il n'a pas encore, de ce qu'il pourrait (avoir).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 봐도, 그 해석만 놓고 봐도 멋진 말입니다. p131에는 <슬픔이여 안녕>이란 작품으로 어린 나이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프랑수아즈 사강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는데, 사르트르와도 만난 적이 있다고 나오네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그 당/부당에 무관하게 유명하죠.

p156에 보면 사르트르는 존재에 아무 이유가 없고 그저 모든 게 우연이라고 선언했는데 실존주의라는 철학의 출발점과도 같습니다. 존재 이유(raison d'etre)라는 걸 존재를 걸고 집요하게 따지던 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사르트르는 감각적이면서도 현란한 문체로 그 부조리를 냉소했습니다. 실존(l'existence)이란, 이면의 본질(l'essence)이 규명되기 전의 현상(le phenomene)을 가리킨다고, 신사는 p158에서 청년 P에게 아주 깔끔하고 쉽게 가르쳐 줍니다. 용도가 평생 고정된 채 존재해야 하는 의자와 달리, 사람은 자유롭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의지로 살아갈 수 있으며, 위의 명언도 이런 그의 철학적 스탠스를 알고 읽으면 그 의미가 완전히 새롭습니다.

자유, 엘란 비탈로 가득한 인생은 결코 구토에 시달리지 않으며, 평행우주에서 앙투안 로캉탱과 Ogier P(혹은 도서관의 독학자. l'Autodidacte a la bibliotheque)는 다시 개운한 마음으로 재회하여 유쾌한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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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 한달 완성 러시아어 말하기 Lv.1 - 알파벳부터 기초 회화까지 한 달 완성 한권 한달 완성 러시아어 말하기 1
최수진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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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лаза́ боя́тся, а ру́ки де́лают. 이 책 p5 머리말에서 마샤샘이 인용하는 러시아 속담입니다. 그 뜻은 "눈은 무서워하지만 손은 일을 한다."라고 책에 나옵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보면 "글라자 바얏샤, 아 루끼 젤라윳" 정도 되겠습니다. 이 말은 곱씹어 생각할수록 깊은 뜻을 갖는데, 다만 우리가 아무 각성을 이루지 않았는데 손만 알아서 부지런해질 리는 없습니다. 초보자에게 부담을 덜어 주고 가볍게 첫발을 떼게 돕는 데에 최우선적으로 노력했다는 말씀대로, 좋은 책이 있으면 학습자 역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교재를 공부하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처음에는 러시아어 알파벳부터 배웁니다. 어려운 글자도 보이는데, щ 같은 게 그 예입니다. 발음은 [시차] 비슷하다고 책에 나옵니다. 예시로는 비옷이라는 뜻의 плащ(쁠라시)가 책에 나옵니다. 그런데 책에도 나오지만, плащ에서도 벌써 시치가 아니라 시 비슷한 발음입니다. 시원스쿨 사이트 자료실에서 다운받은 음원(용량 2.27Mb)에서도, 여성 성우가 시차 아닌 샤, 쁠라시치 아닌 쁠라시로 읽습니다. 이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발음이 바뀌어서인데, 자세한 건 최수진 선생님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보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도 됩니다.

ъ는 경음부호입니다. p17에 나오듯 이름은 러시아어로 твёрдый знак, 뜨보르지이 즈낙 비슷한 발음인데, 러시아어 특유의 경음, 연음 구분이 자음 대부분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역시 자세한 건 최수진쌤 본강의를 참조하면 됩니다. 초보자에게는 좀 어렵기는 하죠. 알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ь는 연음부호이며, мягкий знак, "먁끼 즈낙" 비슷하게 읽힙니다. е는 [예] 비슷하게 읽히고, 이에 대응하여 э는 [에]처럼 읽힙니다. 러시아어 알파벳(끼릴 문자)에만 있는 이런 특이한 글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Ма́ша хоро́шая преподава́тельница.라는 문장이, 이 책 3과(урок 03)의 제목입니다. 읽기로는 "마샤 허로샤야 쁘리빠다바쪨니짜" 비슷합니다. 그 뜻은 "마샤는 잘나가는 강사래."인데, 과연 그렇습니다. 시원스쿨 러시아어 대표강사시니 말입니다. 바로 옆 페이지에는 студент(스뚜졘뜨), студентка가 남녀 쌍을 이루는 단어라고 나옵니다. 인도유럽어족을 배울 때는 이런 점에 특히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같은 페이지에는 коре́йцы라고 해서 "한국인들"이란 단어가 나오며, 발음은 책에 "까례이쯰" 비슷하다고 합니다. 경음/연음을 다 의식하며 발음하면 저렇게 되죠. 례(ре́)에 강세가 있습니다.

урок 08(p85 이하)에서 장소 부사, 소유대명사 등을 배웁니다. сле́ва는 "왼쪽에"라는 뜻이며 그 반대는 спра́ва입니다.발음은 각각 슬례바, 스쁘라바 비슷하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게 너의 가족이구나."라는 문장은 Э́то твоя́ семья́.(에따 뜨바야 씨먀)인데, 이런 경우에는 러시아어는 영어의 be동사 비슷한 것(계사)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 좀 특이합니다.

p111에서는 의문소유대명사에 대해 배우는데, чей чья́ чьё 등 세 가지로 모양이 나뉜다는 게 다릅니다. 남성, 여성, 중성의 모양새인데, 책에 설명이 나오듯이 뒤에 따라오는 명사의 문법적 성(gender)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문법적 성에 대해서는 p52 이하의 урок 08에서 자세히 다루는데, 러시아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도 다 같죠. p115에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카테리나 2세 궁전은 Екатеринский дворец라고 쓴다고 하며, 간단한 설명이 나옵니다.

урок 16(p149)에는 1식 동사 변화형 어미가 나옵니다. p151을 보면 чита́ть(읽다)라는 동사의 변화표가 나옵니다. p154의 연습문제에서는 이 чита́ть를 변화시키게 하는데, 역시 쉽게, 학생들에게 부담을 안 주면서 머리에 잘 들어오는 듯합니다. 어서 lv.2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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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불안한 인생에 해답을 주는 칸트의 루틴 철학
강지은 지음 / 북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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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러시아령인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에 머물면서 항상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하여 주민들이 그를 보고 시각을 맞췄다는 일화가 남은 인물이 바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입니다. 칸트는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을 마치고 장래를 설계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과목은 지리학이었다고 합니다. 이무렵이면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켜 세계 곳곳을 탐험할 때인데, 칸트 역시 최신 지식을 흡수하여 그의 지적 호기심을 채웠다고 합니다. 평생 한 장소에만 거주했다는 선입견과는 다소 대조되는 행적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는 젊었을 적 칸트의 이 행적에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라고 권합니다. 지리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지속적으로 내용이 채워지고 개정되고 완성되어 가는 학문이었습니다. 하나의 정해진 텍스트만을 붙들고 암기하며 떠받드는 학문은 이런 젊은 지성의 갈증을 만족시킬 수 없고, 사회에 공헌하는 바도 적습니다. 또 칸트는 어떤 특별한 성취를 이루려고 강박에 시달리기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루틴을 만들어 발전을 이루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을 전달합니다. "무엇을 잘하기는 힘들어도 매일 꾸준히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또 저자는 "루틴은 존재의 불안을 제거한다"는 멋진 말씀도 들려 줍니다. 사실상 이 책의 주제에 가까운 명언입니다.

이 세상에는 경험으로 아는 게 있고, 경험 이전에 우리가 아는 게 있습니다. 후자를 가리켜 선험적인 앎이라고 부릅니다. 또 칸트적 의미에서 "순수하다"는 건, 그 선험적 앎이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앞선 시대의 데카르트도 그러했지만, 철학의 가장 기초되는 바는 의심이라고 칸트도 보았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말합니다. "소셜 미디어를 보면 슬픔이라는 게 없다. 누구나 행복하고 풍요롭고 멋진 삶을 산다. 과연 이 모든 게 진실일까?" 소셜 미디어의 발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줄이고 소통을 증진하는 게 아니라, 남과 나를 비교하고 더 불행해지는 게 역설이라면 역설입니다. 칸트의 비판 정신이 소셜미디어의 이런 환각과 허풍에 대해 의심해 보게 하는 순기능도 행하는 것 같네요.

왜 선험적인 게 중요한가? 경험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경험에 바탕하여 판단을 내릴 건데 과연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을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p77). 양 당사자가 싸울 때 제3자를 불러 중재를 요청한다 해도, 그 3자가 누구 하나의 편을 들면 다음에 또 누군가(새로운 제3자)를 소환해야 합니다. 이런 제3자 퇴행논변의 무한연쇄를 막으려면 우리는 시비의 여지가 없는 연역적 진리, 선험적 앎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연구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골목에서 주변이 뿌예지도록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중학생들을 보고서도 지나가던 어른들이 아무도 훈계를 하지 않는 게 요즘입니다(p102). 저자는 이런 현실이, 파편화한 개인주의 때문에 도덕과 윤리가 실종된 대한민국 사회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칸트가 강조한, 윤리의 실천성을 강조합니다. 알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이미 지식도 뭣도 아닙니다.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단절적인 개인주의가 극복되어야, 나의 자유도 역설적으로 최대한 신장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 깨닫고 남의 강요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면이 있어서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다 보니 아무 강제도 없이 모두가 잘 알아서 하리라 막연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에는 법이라는 게 필요하고, 형벌의 위하(威嚇) 효과에 기대어 질서가 유지되기도 하는 것입니다(p117). 칸트가 말한 정의(正義)도 이렇게 해서 실현되겠는데, 언제나 필요한 건 우리 모두의 강력한 실천 의지라고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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