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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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의 보는 눈은 청아하고 순수합니다. 시인이야말로 예전 플라톤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물 속에 감춰진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지나치는 사물들도, 시인의 눈에는 그 속에 몇 겹으로 숨겨진 비의를 내포하고 있고, 지난 삶의 자취를 증언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예언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또한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진리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 독일의 피터 빅셀은 "책상은 책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한갓 책상도 그를 책상이라고 보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초심으로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사르트르는 돌이 돌이고 보도블럭이 보도블럭일 뿐일 깨닫는 순간, "그 지독한 일상성과 무의미성에 구토가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임을 깨닫는 게 돈오돈수의 요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식을 가진 우리 인간이란 존재와 가장 친하면서도 가장 이질스러운 존재가 사물입니다.

 

사물과 대화를 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됩니다. 사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사물을 응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사물은, 이제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의 스승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 뮤즈와 가장 친함으로써 천상의 신비에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시인들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판>에 연재되던 52주 동안, 여성의 글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마침 그 회분을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고, 책이 나오기 전에는 으레 다른 여성 시인의 글도 그 52주 동안 몇 번은 이뤄졌겠거니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유일한 연재분이었다는 게... 그 뿐 아니라 이 책 중에 유일하게 대화체로 쓰여진 글이기도 합니다. 사라 베른하르트와 레너드 코언의 대화. 코언이 베른하르트를 보고 누나라고 부르늕데, 누나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무려, 그녀가 죽고 나서 십 년 정도 지나서 코언이 태어났으니... 영혼 사이의 대화라고 부르기에도 좀 뭣한 것이, 코언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누는 크리스마스 실에 대한 대화는 좀 웃기면서도, 크리스마스 실이 풍기는 그다지 따뜻하고 정겹지 만은 않은 묘하게 산업화한 냄새를, 가내 수공업의 비인간성에 빗대어 가며 묘한 여운을 남기는 모습입니다.

조영석 시인은 야구팬입니다. 1976년생이니 이 책이 실린 분들 중에서는 중간, 혹은 그보다 조금 젊은 편인 나이겠습니다. 그는 서울 출생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를 좋아했고, 선동열을 "데모 할 때 짭새에 잘 대항할 수 있겠다"는 이유로 부러워하는 정서를 가지는 세대이기도 한가 봅니다. 야구공을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냉소적으로 "베이스볼 볼"이라 대답한다고 합니다. 마치 검은 칠판을 "블랙 블랙보드"라고 한다는 엉터리나 비슷합니다. 해설가 하일성의 말처럼, 아무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야구입니다.

 

이원 시인의 말을 보면, 이어폰은 귀도 아니고 귀 바깥도 아닌 "유희의 연장'이라고 합니다. 이어폰은 분명 귀에 부착될 때 귀를 닫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어폰을 착용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귀를 닫으려는 게 아니라,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어폰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확장이요 세상의 접근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말을 하기보다 귀를 여는 게 우선의 이치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병록 시인은 간판에 대한 깊은 사색과 추억을 동시에 털어놓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아는 시골에선, 가게 간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세운 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하나, 양두구육을 자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 아는 사람들끼리, 간판에 정해진 용건 이상은 취급 안 하는 각박함을 드러내거나 융통성 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간판은 결국 한 편의 시입니다. 맞춤법이 틀려도 그건 그것대로 정겹고, 간판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을 과연 가게 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지, 정반대 인상의 주인이 나오지는 않는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사물은 결국 다차원의 존재입니다. 나의 시선, 나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비로소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고,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나에게 고유한 의미로 다가온 사물은, 이제 소통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어느 새 그 친밀은 나를 넘어 우주로 전파되고, 세상은 자와 타가 구별되지 않는 통일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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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인터넷 - 클라우드와 빅데이터를 뛰어넘는 거대한 연결 사물인터넷
정영호 외 지음, 커넥팅랩 엮음 / 미래의창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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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사물인터넷"이란 이미 5, 6년 전부터 업계와 정부 당국의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명칭도 공모했었는데요, 이 책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사물지능통신"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었죠. 저는 지금도 이 명칭이 본래적 의미를 잘 전달한다고 판단합니다. "사물인터넷"은 뭔가 아직도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만, 이미 언론 등을 통해 대중에게 익은 위치를 선점했으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원어는 (이 책 표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Internet of Things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정보의 교류와 컨텐츠 창조의 수단이 되는 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인터넷이라면, 사물인터넷은 가전제품부터 해서 거의 모든 사물에 센서와 칩이 붙어서,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 네트웍 구축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신개념 통신망을 의미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이 사물인터넷의 상용화, 현실화가 우리 눈 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 홈 기기는 벌써 국내 가전, 보일러 업계, 아파트 건축사 등에서 사양의 일부로 포함시키고 있고, 각종 광고에서 자주 접하는 아이템입니다. 정부와 업계는 이미 컨셉트화를 마친 상태이며, 다만 아쉬운 것은 수익 모델입니다. 커넥팅랩(이 책 말고도 이미 다른 분야의 경제 전망서 여럿을 펴 낸 우수 저자 집단이죠)의 표현에 따르면, 솔루션 단계로는 여러 모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업계에서 현실로 수익을 올리는 재화와 서비스 환경이 창출되느냐 입니다. 제조 업체는 업체대로 이 미지의 불루 오션에서 강자가 되는 방안을 모색 중이고, 통신사는 자체 보유망의 활용으로 새로운 수익 창출원을 매의 눈으로 물색하고 있습니다.

 

이 사물인터넷의 다른 명칭은  ambient of everything 입니다. 이 표현을 들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웨어러블 기기의 부상과 함께 익숙해졌던 "유비쿼터스"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이 "유비쿼터스"와 "IOT(사물인터넷)"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어디까지나 기기를 놀리고 환경 가운데에서 무엇인가를 콘트를하는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IOT는, 인간이 개재해도 좋고, 인간 없이 사물들끼리만으로도 유효한 소통과 작동이 가능하다는 데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SF에서나 보았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인공 지능 단계와는 아직 큰 차이가 있고,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에서 우리를 적잖게 겁주었던 "로봇의 인간 지배" 같은 "주체적 의식"을 담은 기기가 아니니만큼(그저 센서가 부착되어 있을 뿐입니다) 편의는 증폭시키되 역 컨트롤의 우려는 전무하니, 그저 반길 일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진보한다는 사실을 예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설렙니다. 궁극적으로는 "지능"을 갖춘 사물이 핵심 피처를 이루지만, 설사 최종의 단계까지 간다 해도 아직 IOT가 마치 스카이넷 같은 통합적 창조적 지능을 상정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의 지능은 그저 "리모컨이나 PC처럼 일일이 사람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상황의 변화애 따라 자율적으로 동작을 처리하는" 완비된 연산 체계 정도의 의미입니다.

 

예전에 어느 전문대가 "나를 알아 주는 대학"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수험생들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습니다. 사물인터넷이 고작 리모콘의 확장이나, 정해진 극소수의 명령만 수행한다면 그건 "소통"이 아닙니다. 이 책은 사물인터넷의 사물이 "지혜를 가진 물건"이라는 기본 속성을 갖는 걸로 정의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지문 인식, 홍채 인식 등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영화 등에서 아주 일찍 전부터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법적 수단을 마다않는 집단이 해당 구성원의 신체 절단 등의 수단을 통해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습니다(단일 규격 정보는 복제가 가능하기도 하죠). 사물인터넷에서 사물의 지혜는, 멤버의 신체 각 피처를 복합적으로 인식하여, 그인지 그가 아닌지를 보다 고차원적 알고리즘으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간이, 눈 크기나 머리색, 얼굴 골격 중 어느 하나로 정체성을 판단하지 않고 종합적인 사고를 거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IOT에서 사물에게 요구되는 "지혜"요건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차적으로는 스마트 홈이 구축됩니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IOT라는 개념이 우선은 소비자 개인의 편의와 행복을 목표로 하는 상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스마트 홈에서, 사람의 손(혹은 신체 어디라도)에 붙어서 중심 제어를 할 기기가 무엇인지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여기서 이 문제는 SF나 과학 기술의 영역이 아닌 경제, 산업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애플과 구글이 치열하게 싸우고, 여기에 삼성 같은 디바이스 제조사까지 혈투를 벌이는 건, 아직 이 기본 플랫ㅍ폼에 대해 결정된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넥스트 띵", 서서히 스마트폰 시장이 축소되고(바로 어제, 삼성전자의 어닝 쇼크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지금, 블루 오션 중의 블루 오션인 IOT는 기술적 조건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으나 아직 기본 패러다임만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임자인데, 필지 구획이 안 되어 있으니 서로 눈치만 보는 격입니다. 이만큼 매혹적인 프론티어도 기업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IOT는 거쳐야 할 첫 단계가 대중을 상대로 한 상품 기획입니다. B2B나 도시 계획은 아직 먼 미래입니다.

 

이제 스마트 시티 단계로 넘어가면, 친환경 설계나 에너지원의 그린화 등 그간 정책 결정자의 골치를 썩게 했던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 단계로 접어듭니다. 감시 당국이 일일이 인력을 동원하여 현장 감찰에 나서지 않아도, 사물에 붙어 있는 센서, 아니 지혜를 발휘하는 연산 장치가, 규율 위반자의 신원을 보고하고, 온실 가스 배출량도 업계 총량 차원에서 자동 규제가 가능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이러한 로봇은,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발생핳 수 있는 알고리즘상의 버그 때문에 시스템 정지를 초래할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무결점이면 역 통제의 문제가 생기죠.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IOT에는 4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합니다.


1. 사물은 지속적으로 호흡 가능해야 한다: 기술적 문제입니다. 저전력과 무선 충전이 핵심이라고 하네요.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현재 가장 각광받는 연료 소재는 wood fiber라고 합니다.
2. 사물은 (단수 혹은 복수의) 표준어로 소통해야 한다
여기서 플랫폼의 문제가 나옵니다. 혹시 주식 공부하려고 이 책 사신 분들은, 다른 건 설사 허무맹랑한 느낌이 들더라도 이 챕터만은 꼭 읽어봐야 합니다. 왜 애플이 아니라 구글인가가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주식은 고립된 자기 소신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생각, 시장의 동향을 읽어야 합니다.
3. 사물에는 자물쇠가 채워져야 한다
4. 기존 투입 개인정보보다, 사물이 산출하는 정보가치가 더 우월해야 한다

 

사물인터넷은 매우 가까이에 와 있지만, 아직은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이를 홯용하는 인간의 지혜와 마음가짐입니다. 빅데이터다 클라우딩이다 해서 각종 프레임이 많이도 강조되었지만, 이제 IOT로 큰 틀이 통일되는 느낌도 듭니다. 아직 시장에 절대 강자가 없고, 시장의 기본틀도 형성되지 않았으니, 업계와 개인은 반드시 최신 동향 파악에 주의를 곤두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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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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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눈길을 돌려 과거를 바라본다."


이것은 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데요, 출처는 니체라고 합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과거"로부터 눈길을 돌려서, ⒝ 과거를 바라보는 게, ⒞ 꼭 낭만주의적 예술가라야 가능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낭만주의적 예술가가 언제나 그렇게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니체의 위대한 사상적 편린은 둘째 치고라도, 한 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면, 들어서 마음이 엄청 설레는 말도 아닙니다. 현세적 성공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가는 우리들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밀로시 우르반의 이 작품은 보통 "고딕 미스테리"의 범주에 넣습니다. 사실 제가 읽기로는, 몇몇 소름끼치는 장면 묘사라든가, 등장 인물이 약간 상궤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든가, 작가가 그렇게나 의식하는 것처럼 배경을 체코 고(古)건물로 삼고 있다거나 하는 점 외에, 딱히 저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소속을 무엇으로 잡든 간에, 단단하고 치밀하고 에피소드가 풍성하며 재미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고딕 미스테리"의 핵심은 여튼 낭만주의입니다. 회고적 분위기 속에 현실의 제약을 무시한다는 게 낭만주의의 핵심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퍼스트네임을 "크베토슬라프"라고 씁니다. 이름이 저렇게 무신경(왜 그런지는 책에서 찾아 보세요)하기 지어진 이유는, 그의 부모가 이 사람의 양육에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어서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현실이 괴로웠던 부적응자였고, 커서도 루저로서 일생을 연명해 갑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영웅적으로 멋지게 죽는 순간을 잡기 위해(진짜 죽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경찰직을 택하지만, 광신도들이나 진짜 영웅처럼 "무엇을 위해" 죽을지에 대해선 전혀 개념이 업습니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인생에 대한 회의, 리셋 본능으로 내세를 지향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온통 과거 역사를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분위기도 그렇고, 주인공의 컬러도 그렇고, 우리가 낭만주의 하면 퍼뜩 떠오르는 바이런 경 식의 비비드한 낭만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습니다. 하긴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 세계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그 모든 비관적 묘사를 위상기하학적으로 비틀면 완전한 이상향이 나온다는 짖궂은 낙관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죠.


애초에 경찰직을 특별한 소명 의식으로 시작하질 않았으니, 그 업무인들 제대로 행할 리 없습니다. 펜델마노바라는 이름의(물론 펜델만이라는 남자의 배우자겠죠) 어느 부인에게 "무슨 경찰이 사격 연습 같은 건 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만 몰두한담?"하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얼빠진 주인공은 그저 맞다고 웃어 줄 뿐입니다. 근데 우연인지 필연인지(결말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런 크베토슬라프, 혹은 K가 직무 중인 그날 하필, 이 부인은 경위가 대단히 미심쩍은 살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작품의 사건은 일단이 변사를 시발로 전개되고, 넉 달 뒤 벌어진 더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맞물려 더 파장이 커지는 식입니다.


살인이든 뭐든 이렇게 매사에 미적지근한 낙오자 유형이, 가장 활기 있고 명철하며 신체적으로도 강인해야 할 탐정 노릇을 제대로 할 리가 없죠, 그에게는 따라서 "의외의 의뢰인"의 출현이 필요합니다. 다소 신원이 의심스럽기는 하나, 엄청난 재산과 거대한 신체적 골격을 가진 "백작" 그뮈드, 그리고 진실로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종(광대?) 난쟁이 프록슬린이, 생의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몽상가 크베토슬라프의 동기유발자입니다. 어려서부터 크베토슬라프, K의 장점을 분명히 봐 준 사람은  단 둘 뿐이었는데, 고등학교 역사선생(딸보다 어린 학생과 결혼하여 퇴직한),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백작 뿐입니다.


K의 장점이 무엇인가. 저 위의 니체의 말을 다시 보십시오, 과거를 바라보긴 바라보되, 마치 영화를 보듯, 혹은 다차원의 존재 패턴을 갖고 있어 타임리핑이나 하듯 지나간 과거의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장점입니다. 이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 같은 건 아니구요, 그만의 병적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능력, 과거 역사에 대해 "문서의 출전 제시" 같은 기계적 수월성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과 시대를 사는 참여자의 느낌으로 두 세계를 이어 주는 능력이, "괴백작과 그의 미친 광대"에게 매우 요긴한 수완이라는 사실입니다. 끔짝한 살인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동시에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저 백작의 계획도 만족되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꿍꿍이에 품고 있으며, 잔혹한 범죄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대담하게도 간단한 조작으로 경찰서장의 전화를 도청하는가 하면, 제 고용주의 표현 중 시제를 정정(현재르 과거로)해 주기도 하는 섬세한 언어 감각(이 정정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누구로 보고 있는지, 혹은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입니다)을 지닌 난쟁이는, 거대한 체격과 위압적인 용모를 한 제 주인인 백작과 여러 모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괴기스러움은, 현대인들로부터 대숙청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고딕 양식의 그 오랜 건축물들의 묘사와 함께, 소설의 분위기에 형식적 "고딕스러움"을 더합니다. 분위기만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이 3인은 고딕 예찬론자입니다. "바로크 같은 썩은 야만 풍습이, 순수하고 장엄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했던(그러나 제 주제를 넘지도 않았던) 고딕을 말살하려 들다니!" 하며 붅개하는 모습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K는 사회적 낙오자라서 현재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 당당한 체구의 "지배자" 그뮈드는 대체 무엇 때문에 환각적 과거를 낙오자와 장애인과 공유하려 드는 것일까?


소설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체코 현대사를 좀 알아야 합니다. 체코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본격 번지기도 전에, 후스라는 선구자를 맞이해서 가톨릭의 억압 기제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려 했던 대단한 자유주의의 선구였습니다(이 소설에서 재밌는 부분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후스를 어리석은 광신도로 폄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경과 속에서도(한참 뒤 벌어진 30년 전쟁도 그 시발은 보헤미아였죠) 정작 체코만은 종교의 자유를 찾지 못하고, 국민의 절대 다수는 무려 1차 대전 종전까지 합스부르크적 카톨릭의 믿음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자취가 바로 이 작품의 소재인 Sedmikostel, 일곱 성당입니다. 주인공 K와 출세주의자 경사 유젝, 죽은 펜델마노바, 그리고 그뮈드 등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 격변과 파란 많은 역사의 희생자들인데, 사회의 지배층이 하루 아침에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몰락하는 일을 반 세기만에 두 번 겪은 것도 체코 외에는 드뭅니다. 그리고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관된 영지이자 핵심 봉토였지만, 그 거주자들(평민)은 언제나 식민지 노예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는데, 체코 출신 귀족이라는(나중에 덴마크 귀족 가문과도 연을 맺었다는) 그뮈드 가의 내력이 이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유럽 배낭 여행을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마기스트랄레는 EU 국가들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며 브라티슬라바에서 끝나는 하이웨이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체코 프라하를 지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마기스트랄레는 그와는 무관한, 소설 속에 자주 나오듯 무자비하고 신중치 못한 체코 도시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프라하 시내의 대로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리고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 관광객을 유혹하는 오랜 보헤미아의 건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유산이되, 다만 그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줄 능력이 (언제나) 미비했던 거주자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억울한 소멸의 위험에 최우선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가 열려 있는 영혼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거는데, 그 응답자 중 하나가 바로 K였습니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이 보헤미안들에게는 "성당들이야말로 살아 있(었)다"가 되는 셈입니다. 인간보다 더 진실한 의식과 "순수함"을 지닌 이 과거의 유적이야말로, 원초적 순결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 먼 옛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휴머니티의 정수 바로 그것이었다는 "피맺힌" 증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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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
데이비드 R. 도우 지음, 이아람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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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의 매일같이 관찰하고, 돌봐 주기까지 해야 한다면, 그건 참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분들, 장의사들, (사형을 실제 집행하는 나라, 지역의) 교도관들 등.... 특별히 그쪽으로 적성이 맞다면 모를까, 단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면, 육체적 직무 강도에 감정노동의 문제까지 겹쳐,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암걸릴" 만큼 스트레스가 클 것 같습니다.

 

대단히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직무에 통달해 있으며, 대학에서 교수직까지 맡고 있는 분이, "돈되는" 분야를 다 마다고, 하필 사형수 구제에 관련한 소송만 전담하듯이 맡고 있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변호사라고 해도 그 능력, 열의, IQ 등은 천차만별입니다. 일 못 하는 변호사가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는, 겪어 본 의뢰인만 압니다. 일 잘하는 변호사는 "돈되는 사건"만 수임하는 게 보통이고, 일 못 하는 변호사들만 그 자리(교통사고, 자질구레한 사기 등등)에 뒤처져서 물정 모르는 서민들의 푼돈을 뜯어낼 생각만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판에, 승소 확률도 적지, 수임료로 지불할 돈도 별로 없기까지 하지,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애초에 소속 커뮤니티로부터의 평판도 나쁘지, 대체 이런 "낙인 찍힌 인생들"을 뭐하러, 자신의 정력과 귀한 시간까지 써 가며 돕는 것일까요? 그렇게나 커리어 좋고 능력도 우수한 분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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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David R Dow (출처: 휴스턴大 로센터 홈페이지 )

 

 


이 책은 텍사스 주에서 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가며 법률적 절차를 통해 구명 활동을 펼치는, 대학교수 겸 변호사인 데이비드 도우 씨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가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강도 사건(한국인이 경영하는 주유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으로 피소되어 유죄가 확정된 Eddie Waterman이란 죄수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사연들입니다.

 

에디 워터맨은 강도단의 일원이었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아닌 공범의 행위로 인해 살인행위의 유죄가 인정되어,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입니다. 한국의 법제로도 이런 취급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법치국가는 엄연히 "자기 책임의 원칙"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나 아닌 다른 공범자의  행위책임을 연대하는 건 소위 "Felony Murder Act"가, 텍사스 주에서 효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공범자 법"이라고도 불립니다(책에는 "당사자 법"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the law of parties 입니다. 여기서 party는, "당사자"가 아니라  공범자 집단이라는 뜻입니다. 오역이므로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식으로는, 소위 "공모공동정범" 개념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런 학설은 한국 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실정법과 실무에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텍사스 주의 법현실과 의식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도우 교수는, 사형수 워터맨을 살리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쓰고, 우수한 보좌진과 함께 머리를 짜 냅니다. 하지만 1심 재판의 변호사가 일처리를 부실하게 하는 바람에, 사실상 써 볼 방책이 별로 없습니다(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만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열의와 능력을, "돈되는" 기업 사건이나 부호의 변호에 쏟았다면, 그는 벌써 돈방석에 앉아 카리브해에 호화 별장 몇 채를 간수하고 있었을 겁니다. 헌데도 그는 마치 돌을 굴리며 경사를 오르는 시쉬포스처럼, "헛된 수고"를 거듭할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뿐이죠. 올바르지 못한 일을 멍청한 이들이 권좌에서 반복하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법과 원칙은 별개의 존재다. 그러나 잘못된 신조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법관 자리에 있다면, 그 둘은 일체가 되어 버린다." 도우 교수는 인종적 편견, 명예욕, 비뚤어진 세계관 때문에 유색 인종에게는 성의 있는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기계처럼 유죄 선고를 내리는 판사, 그런 판사 위에 사실상 군림하는 악덕 검사와 맞서 싸우는 게 거의 하루 일과입니다. 텍사스에서는 기일을 초과하여 증거 자료를 제출하면, 그 변호사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도우 교수는 부실한 자료를 기한에 맞게 제출하느냐, 아니면 충실한 자료를 기한 넘겨 제출하느냐를 두고 갈등에 빠집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워터맨은 그냥 죽어야 합니다. 후자를 선택해도 워터맨이 살 수 있을 가능성은 그저 미미하게 상승할 뿐이지만, 자신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집니다. "모험을 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의뢰인인 사형수의 이익을 위한 결단을 내립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명심에서 괜한 과시적 업무 수행을 한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일단 이 책에 나오는 그의 사연, 고백, 진술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질 것입니다. 교도소에는 아주 지능이 높은 죄수도 있습니다. 건축, 공학 등 평범한 두뇌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의 서적, 문헌을 한 주에 천 페이지씩 읽는 괴물도 있습니다. 이 자가 어느 날 도우 교수에게 읽어 보라며 자료를 줍니다. 도우 교수가 자신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일만 처리하려면 이렇게 자주 교도소에 들르실 필요가 없을 텐대요?"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맡을 필요도 없었겠죠?" 그는 소송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이기면 좋겠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사형수와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 비인간적인 제도가 궁극적으로 폐지를 맞게 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 아내의 부친, 그러니까 장인 어른 되시는 분도 보통이 아닙니다. 사위와 세계관은 사뭇 다르고, 유태인인 사위와 서로 껄끄로울 만하게, 독일 혈통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나 실로 교양 있고 깊이 있는 지성인이기에,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젊은이를 딸의 배필로 인정했고,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사위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가며 더 친해졌습니다. 사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환경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죠." 장인은 어느 순간 암 선고를 받았는데, 자기 확신이 지나친 분이라 너무 늦게 종양을 발견한 탓에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그는 사위를 다시 부릅니다. "이 사람아, 환경 운동이 취향 문제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자네 같은 리버럴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속으로 얼마나 화났는지 알기나 하나?" "......." "헌데, 내가 자네를 알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나를 향해 논쟁의 떡밥을 던진 거였어." 참으로 만만치 않은 사위와 장인입니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영혼인 줄 잘 알면서도, 거의 필사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전쟁을 벌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누가 더 높은 인격과 고매한 정신으로 상대를 잘 이해하는지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나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어. 나의 아내, 내 딸(즉 도우 교수의 부인), 이들도 물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발언권이 있지. 그러나 나의 생명 처분에 있어서 나와 같은 투표권을 가진다는 건 좀 아니라고 봐. 항암치료고 뭐고 다 그만 두고, 내가 예측 가능한 날짜에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나? 자네 부인(자신의 딸)을 좀 잘 설득해 보게." "장인 어른, 그 말씀도 맞습니다. 제가 그런데 이야기 하나 해 드리면 안 될까요? 아이가 없던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드디어 임신 진단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뱃속엔 태아 다섯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네요? 안전한 출산을 담보할 수 없어 둘을 유산시켰답니다. 셋은 지금 잘 자라나 있습니다." "그 얘길 나한테 지금 왜 하는 건가?" "이 아이 엄마는, 느닷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새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아이 셋과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금 어떤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커밍아웃이건 새로운 결합이건 그 엄마의 자유입니다. 장인 어른은 그러나 그 여성을 비난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장인은 사위의 이 말에 한 마디도 반박을 못합니다. 아내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신 덕분에 내 아버지가 일단 삶을 선택한 거죠."

 

생명을 존중하고 그 신조에 충실한 도우 교수는, 결국 일 때문으로 만난 사람이건 자기 아내의 아버지이건,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에서 선물로 받은 생명을, 자의건 타의건 결코 포기하지 않게 그의 모든 노력을 바칩니다. 위대한 지성인이고, 자신의 지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분입니다. 강도 워터맨과 그의 장인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간의 대화,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은 마치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처럼 심오하고 철학적입니다. 그러나 전달하려는 진실은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 혹은 타인의 생명을 앗을 권리가 있는가?" 대답은 책을 읽은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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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국부론, 중국에 있다
전병서 지음 / 참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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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의 시대를 운위하는 요즘입니다. 현재 중국의 GDP는 비록 상징적이라고는 하나 이미 미국의 수치를 추월하였고, 이번 시[習] 주석의 방한 시 국내 언론조차 앞다투어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며 다소 절박해 보이는 헤드라인을 달았습니다.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진단들이 나왔습니다. 세기가 갓 바뀌었던 무렵만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패권국이 될 것이다.", "이제 10년 만 지나면, 중국어 못 하는 학생들은 기업에 취직도 못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죠. 이때만 해도 짝퉁, 유독 음식, 저질 공산품 양산 기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북 공정"조차 아직 시작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2008년, 세계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으로 언제까지나 그 위세를 떨칠 것 같았던 미국에서, 사상 초유의 금융 부실 스캔들이 터져 거대 공황을 몰고 오기 직전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던 거죠. 이라크 전 마무리가 최악의 무능을 노정하며 대혼란으로 치닫던 터에, 생각지도 않았던 금융 사고까지 발생하여, 철옹성 같았던 미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했었는지 전세계에 그대로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위신도 땅에 떨어졌지만, 바야흐로 중국이 이 틈을 파고 들어, 형세의 역전을 노릴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만, 역량 부족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호기를 못 살리고 성장의 동력이 점점 꺼져 가는 모습마저 드러내자, "곧 부동산부터 해서 거품이 꺼질 것이다.", "도농 간, 동서 간의 빈부 격차 심화, 잠복해 왔던 민족 문제의 폭발, 지도층의 부정 부패 같은 시한 폭탄이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같은, 비관론이 급속하게 확산되기도 했죠.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인 전병서 선생입니다. 책은 근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알짜 분석과 진단으로만 가득한 내용이라, 읽어나감에 따라 머리가 꽉 차는 느낌이면서도, 전 분량이 언제 다 소화되었는지 시간 경과를 의심케 할 만한 독서였습니다. 책의 결론은 "우리의 장래는 결국 중국에 달려 있다. 중국의 장래가 승천하는 용이라면, 우리는 그의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무기로 떨어지는 신세라면, 우리는 당장 시련을 겪겠으나 장기적으로 더 튼튼한 지위로 올라설 여지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현황과 실체를 정확히만 파악하면, 우리의 장래는 탄탄대로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제가 앞에서 적은 그간의 상황을 독자가 다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동서고금 경제사의 다양한 실례를 거론하며 논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지리상의 발견(일단 이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이래 패권국의 지위를 지닌 여러 나라의 운명과 주기를 분석합니다. 패권국이 있었고 그에 도전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패권국이 갓 도약할 기간과 최융성기가 있고, 전쟁을 거쳐 서서히 쇠퇴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정 주기가 지나고 정해진 패턴을 겪으면, 패권국의 위치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갑니다. 이런 구조는 무력의 우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금융패권을 얼마나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하는군요. 패권국이 그 패권을 강력히 유지할 시기는, 금리 수준이 자연스럽게 0 주위를 맴돕니다. 이것이 이제 상승점으로 치고 올라갈 무렵, 패권국은 드디어 그 왕관을 타국에 물려 줘야만 할 때가 온다는 주장입니다.

패권의 교체는 꼭 전쟁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지배층의 무능과 방만은 주로 금융 섹터에서 그 곪은 상처가 터지기 십상인데, 이런 금융 사고는 최근세에 들어 아홉 차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 압도적 다수는, 서양 쪽에서 내실과 근검으로 경제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남의 빚을 내어 사치와 타락의 풍조에 빠져들면서 벌인 사고라고 하는군요.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도 바로 그 예입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유럽만큼 타격을 입지 않은 이유는, 이 위기의 진앙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던 중국에 긴밀히 의존하고 있었던 덕이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유럽, 미국을 향해 쏟아내는 비판은 신랄합니다. 무슨 놈의 자본주의가, "자본(capital)"은 하나도 없고, 남의 빚을 내어 오히려 공갈을 쳐 가며 사치를 누리는 "부채주의(creditism)"으로 타락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3세기 전 영국의 엄청난 국력과 잠재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애써 무시한 채 제 나라가 그저 최고라고만 여겼던 건륭제의 우(愚)를, 이제 이 서양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똑같은 모습으로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은 내부 모순 때문에 망한다. 분열된다, 거품이 꺼진다. 벌써 성장 축세가 둔회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자신들은, 훨씬 더 심각한 체제 모순에 빠져 있다는 거죠.

미국은 기축 통화국의 위치를 남용하여, 남의 나라 재화를 "프린터 인쇄 비용"만으로 강제 취득하고 있는 셈이라며 비판합니다. 달러의 가치를 담보하는 건 닉슨이 금의 태환을 중지한 이래 현재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석유 거래에 있어 강제적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그 사실 뿐입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통화 발행권 남용으로 실물의 뒷받침 없이 제조업 중심 국가로부터 금융, 서비스 중심 국가로 부의 강제 이전을 꾀하는 미국의 전략을 비판합니다. 남의 빚에 의지한 채 낭비를 일삼는 나라가 오래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중국은 재정 건전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미국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채권국입니다.

재미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의 이런 패권국 지위에 도전하기 위해, 정면으로 싸움을 건 나라들- 일본, 독일- 은 반드시 패망했다는 겁니다. 중국은 그래서, 미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보다, 가벼운 잽은 맞아 가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하네요. 현재 중국은 이미 제조업 분야에서는 미국을 능가했지만, 아직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분야가 금융 산업이라고 합니다. 금융의 체질이 허약하기 짝이 없기에, 이 분야의 개방은 극구 미루면서 체질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태가 이러하다면, 중국은 예전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도광양회 단계를 아직 탈피하지 못했다는 인상도 줍니다. 차이나 3.0을 논하는 시점인데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어제 한중 정상회담에서, 원-위안화 직거래소(청산결제은행)을 서울에만 두기로 합의한 사실과 연관하여 다시 주목됩니다.

미국이 중동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한 것이 셰일가스 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더 이상 석유가 아닌 대체 자원을 통해, 중동 정세에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패권국의 위치를 굳힌다는 전략임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셰일가스층의 최대 매장량은 오히려 중국이 확보하고 있으며, 현재 달러의 기축 통화 위치가 석유 거래 결제 수단이라는 그 하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제 셰일 가스로 이 위상마저 흔들린다면 달러는 급속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명을 재촉할 수 있다는 논리죠. 다만 이것이 현실화되려면, 저자 스스로도 지적하듯 "물 없이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신기술이 개발되어야"만 합니다. 중국에서 부족한 게 바로 물 자원이기 때문이죠.

중국의 지도층은 과연 건전한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낙관적인 분석을 내놓습니다. 한 대를 건너 뛰며, 다음 지도자를 현직이 지명하는 식으로 각 계파의 이해를 배려하는, 대단히 유익한 지혜가 발휘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지명했으며, 지금의 시 주석은 장쩌민이 지목한 후계자라는 거죠. 시 주석은 처음에 대단히 취약한 권력 기반에서 주석직을 시작했지만 현재 아무 문제 없이 대국을 리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중국식 집단 지도 체제가 대단히 안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독자 스스로 기준을 세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며 읽어야 할 줄 압니다. 최고 수준의 중국 전문가인 저자는, 애널리스트라기보다 자기 계발 톱스타 강사처럼, 현란하고 명쾌하며 재미있는 어조로 책에서 시종 일관 독자를 매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중국 측의 전략이 매번 잘 먹히는 건 아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친미 대열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기운다는 사실은, 현재 필리핀 등의 태도를 보아도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건,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부실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겁니다. 설사 중국이 어리석고 무능해도, 미국이 지금처럼 패착을 거듭한다면, 패권이 정말 중국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냉철한 현실 감각이고, 그것이 우리 같은 작은 나라가 생존을 도모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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