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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국부론, 중국에 있다
전병서 지음 / 참돌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G2의 시대를 운위하는 요즘입니다. 현재 중국의 GDP는 비록 상징적이라고는 하나 이미 미국의 수치를 추월하였고, 이번 시[習] 주석의 방한 시 국내 언론조차 앞다투어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며 다소 절박해 보이는 헤드라인을 달았습니다.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진단들이 나왔습니다. 세기가 갓 바뀌었던 무렵만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고 패권국이 될 것이다.", "이제 10년 만 지나면, 중국어 못 하는 학생들은 기업에 취직도 못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죠. 이때만 해도 짝퉁, 유독 음식, 저질 공산품 양산 기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북 공정"조차 아직 시작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2008년, 세계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으로 언제까지나 그 위세를 떨칠 것 같았던 미국에서, 사상 초유의 금융 부실 스캔들이 터져 거대 공황을 몰고 오기 직전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던 거죠. 이라크 전 마무리가 최악의 무능을 노정하며 대혼란으로 치닫던 터에, 생각지도 않았던 금융 사고까지 발생하여, 철옹성 같았던 미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했었는지 전세계에 그대로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위신도 땅에 떨어졌지만, 바야흐로 중국이 이 틈을 파고 들어, 형세의 역전을 노릴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만, 역량 부족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호기를 못 살리고 성장의 동력이 점점 꺼져 가는 모습마저 드러내자, "곧 부동산부터 해서 거품이 꺼질 것이다.", "도농 간, 동서 간의 빈부 격차 심화, 잠복해 왔던 민족 문제의 폭발, 지도층의 부정 부패 같은 시한 폭탄이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같은, 비관론이 급속하게 확산되기도 했죠.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인 전병서 선생입니다. 책은 근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알짜 분석과 진단으로만 가득한 내용이라, 읽어나감에 따라 머리가 꽉 차는 느낌이면서도, 전 분량이 언제 다 소화되었는지 시간 경과를 의심케 할 만한 독서였습니다. 책의 결론은 "우리의 장래는 결국 중국에 달려 있다. 중국의 장래가 승천하는 용이라면, 우리는 그의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만약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무기로 떨어지는 신세라면, 우리는 당장 시련을 겪겠으나 장기적으로 더 튼튼한 지위로 올라설 여지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현황과 실체를 정확히만 파악하면, 우리의 장래는 탄탄대로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제가 앞에서 적은 그간의 상황을 독자가 다 이해한다는 전제 하에, 동서고금 경제사의 다양한 실례를 거론하며 논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지리상의 발견(일단 이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이래 패권국의 지위를 지닌 여러 나라의 운명과 주기를 분석합니다. 패권국이 있었고 그에 도전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패권국이 갓 도약할 기간과 최융성기가 있고, 전쟁을 거쳐 서서히 쇠퇴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정 주기가 지나고 정해진 패턴을 겪으면, 패권국의 위치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갑니다. 이런 구조는 무력의 우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금융패권을 얼마나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하는군요. 패권국이 그 패권을 강력히 유지할 시기는, 금리 수준이 자연스럽게 0 주위를 맴돕니다. 이것이 이제 상승점으로 치고 올라갈 무렵, 패권국은 드디어 그 왕관을 타국에 물려 줘야만 할 때가 온다는 주장입니다.
패권의 교체는 꼭 전쟁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지배층의 무능과 방만은 주로 금융 섹터에서 그 곪은 상처가 터지기 십상인데, 이런 금융 사고는 최근세에 들어 아홉 차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중 압도적 다수는, 서양 쪽에서 내실과 근검으로 경제생활을 유지하지 않고, 남의 빚을 내어 사치와 타락의 풍조에 빠져들면서 벌인 사고라고 하는군요.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도 바로 그 예입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유럽만큼 타격을 입지 않은 이유는, 이 위기의 진앙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던 중국에 긴밀히 의존하고 있었던 덕이 크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가 유럽, 미국을 향해 쏟아내는 비판은 신랄합니다. 무슨 놈의 자본주의가, "자본(capital)"은 하나도 없고, 남의 빚을 내어 오히려 공갈을 쳐 가며 사치를 누리는 "부채주의(creditism)"으로 타락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3세기 전 영국의 엄청난 국력과 잠재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애써 무시한 채 제 나라가 그저 최고라고만 여겼던 건륭제의 우(愚)를, 이제 이 서양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똑같은 모습으로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국은 내부 모순 때문에 망한다. 분열된다, 거품이 꺼진다. 벌써 성장 축세가 둔회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자신들은, 훨씬 더 심각한 체제 모순에 빠져 있다는 거죠.
미국은 기축 통화국의 위치를 남용하여, 남의 나라 재화를 "프린터 인쇄 비용"만으로 강제 취득하고 있는 셈이라며 비판합니다. 달러의 가치를 담보하는 건 닉슨이 금의 태환을 중지한 이래 현재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석유 거래에 있어 강제적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그 사실 뿐입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통화 발행권 남용으로 실물의 뒷받침 없이 제조업 중심 국가로부터 금융, 서비스 중심 국가로 부의 강제 이전을 꾀하는 미국의 전략을 비판합니다. 남의 빚에 의지한 채 낭비를 일삼는 나라가 오래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중국은 재정 건전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미국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채권국입니다.
재미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의 이런 패권국 지위에 도전하기 위해, 정면으로 싸움을 건 나라들- 일본, 독일- 은 반드시 패망했다는 겁니다. 중국은 그래서, 미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보다, 가벼운 잽은 맞아 가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하네요. 현재 중국은 이미 제조업 분야에서는 미국을 능가했지만, 아직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분야가 금융 산업이라고 합니다. 금융의 체질이 허약하기 짝이 없기에, 이 분야의 개방은 극구 미루면서 체질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태가 이러하다면, 중국은 예전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도광양회 단계를 아직 탈피하지 못했다는 인상도 줍니다. 차이나 3.0을 논하는 시점인데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어제 한중 정상회담에서, 원-위안화 직거래소(청산결제은행)을 서울에만 두기로 합의한 사실과 연관하여 다시 주목됩니다.
미국이 중동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한 것이 셰일가스 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더 이상 석유가 아닌 대체 자원을 통해, 중동 정세에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패권국의 위치를 굳힌다는 전략임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셰일가스층의 최대 매장량은 오히려 중국이 확보하고 있으며, 현재 달러의 기축 통화 위치가 석유 거래 결제 수단이라는 그 하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제 셰일 가스로 이 위상마저 흔들린다면 달러는 급속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명을 재촉할 수 있다는 논리죠. 다만 이것이 현실화되려면, 저자 스스로도 지적하듯 "물 없이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신기술이 개발되어야"만 합니다. 중국에서 부족한 게 바로 물 자원이기 때문이죠.
중국의 지도층은 과연 건전한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낙관적인 분석을 내놓습니다. 한 대를 건너 뛰며, 다음 지도자를 현직이 지명하는 식으로 각 계파의 이해를 배려하는, 대단히 유익한 지혜가 발휘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지명했으며, 지금의 시 주석은 장쩌민이 지목한 후계자라는 거죠. 시 주석은 처음에 대단히 취약한 권력 기반에서 주석직을 시작했지만 현재 아무 문제 없이 대국을 리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중국식 집단 지도 체제가 대단히 안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독자 스스로 기준을 세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며 읽어야 할 줄 압니다. 최고 수준의 중국 전문가인 저자는, 애널리스트라기보다 자기 계발 톱스타 강사처럼, 현란하고 명쾌하며 재미있는 어조로 책에서 시종 일관 독자를 매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중국 측의 전략이 매번 잘 먹히는 건 아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친미 대열에서 이탈하여 중국에 기운다는 사실은, 현재 필리핀 등의 태도를 보아도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건,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부실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겁니다. 설사 중국이 어리석고 무능해도, 미국이 지금처럼 패착을 거듭한다면, 패권이 정말 중국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냉철한 현실 감각이고, 그것이 우리 같은 작은 나라가 생존을 도모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