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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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능가하는 과학 잔혹사가 나왔어요.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실화이며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과학 잔혹사》는 과학 작가로 활동 중인 샘 킨의 책이에요. 이 책의 원제는 "The Icepick Surgeon : Murder, Fraud, Sabotage, Piracy, and Other Dastardly Deeds Perpetrated in the Name of Science" 예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들을 다루고 있어요. 과학의 여명기인 17세기의 범죄부터 미래의 첨단 중죄까지 전 세계 곳곳을 망라한 과학적 범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저자는 왜 과학의 역사에서 빛나는 업적 대신 악행, 범죄에 초점을 두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 악행이 범죄자들이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과학계를 뒤흔들 수 있고 미래 범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과학자들의 인간성은 어떻게 타락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어요. 과학의 진보가 인류의 생명을 구하고 수많은 고통에서 해방시킨 부분은 인정하지만 과학이 곧 좋은 것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면 과학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되어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게 돼요. 과학자가 목적 달성을 위해 윤리적 경계를 넘어설 때 타락한 악인이 되는 거예요. 과학 발전을 위해 도덕을 희생한다면 실제로는 둘 다 잃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자는 "타락한 행동을 잘 분석하면, 나쁜 충동을 막는 법과 사람들을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15p)라면서 섬뜩한 과학 실험의 역사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비윤리적인 과학 연구라고 하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의사들이 죄수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과 일본 731부대의 만행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이 책에서는 그에 못지 않은 실험을 감행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너무나 의외의 인물은 미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는 토마스 에디슨인데 여러 가지 인성 논란을 제외하더라도 말과 송아지, 개에게 감전사의 고통을 준 일이나 전기의자 개발에서 자신이 담당한 역할을 숨긴 점은 매우 실망스럽고 충격적이네요. 책 제목이기도 한 '얼음송곳 외과의'는 월터 프리먼이라는 미국 신경학자인데 그가 개발한 경안와 뇌엽 절개술(혹은 그의 적들의 표현을 빌리면 '얼음 송곳 엽 절개술')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의료 절차 중 하나로 알려져 있어요. 머리뼈에 동전만 한 크기의 구멍을 내어 날을 집어 넣은 뒤, 그것을 휘저어 전두엽과 감정 중추들 사이의 연결을 절단하는 수술인데 프리먼의 과도한 야심 때문에 이 끔찍한 치료법을 강제했고 전국으로 확산시켰다는 거예요. 지칠 줄 모르고 의사들을 훈련시킨 프리먼의 미친 노력 때문에 미국 전역에 엽 절개술을 받은 환자들이 몇천 명으로 늘었다는 게 너무나 소름돋는 지점이에요. 전두엽 절제술로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에가스 모니스는 노벨상까지 받았어요. 이때가 냉전 시기라서 미국과 소련 양측 모두 과학 연구를 토대로 고문에 가까운 심문 기술을 개발하고 스파이를 교묘하게 길들여 조종했다고 하니 과학자들은 냉전 정치에 휩쓸려 타락했던 거죠. 과학의 적은 광란에 빠진 정치계에 있으며, 사회가 점점 더 기술과 과학에 의존할수록 타락한 과학자들의 범행은 더 과감해질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윤리적 과학을 촉진하는 거예요. 과학자들은 실험을 설계할 때 항상 윤리를 염두에 둬야 하고 정직과 성실성, 양심적 태도를 중요시 해야 한다는 것, 결국 과학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보장책은 인성이라는 거예요. 현재 그리고 미래에 새로운 힘을 도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완화시킬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해요. 우리는 윤리의 관점에서 과학 잔혹사를 통해 드러난 충격적인 결과들을 반면교사 삼으면 돼요.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라고 했다.

오래 전에 이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코웃음쳤다.

과학자가 착하건 말건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중요한 건 오로지 발견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쓰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 샘 킨 (4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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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 갈게
임태운 지음 / 북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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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꿈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마 꿈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리에게 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재미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을 거예요.

《꿈으로 갈게》는 임태운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을 많이 하는데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을 통해 그 상상의 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이 소설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꿈을 공유하는 미래 시대를 보여주고 있어요. 꿈 공유 플랫폼 '드림넷'에는 280억 개 이상의 꿈이 업로드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현실의 시간 대신 돈을 지불하고 흥미로운 꿈을 체험하며 즐기고 있어요. 주인공 지후는 드림넷에서 활동하는 꿈 도둑이자 자각몽자예요.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자각몽의 기본이고, 자유자재로 육체를 움직일 수 있다면 제법 숙련된 자각몽자인데 지후가 그런 수준이에요. 근데 이번 꿈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자각몽자를 만나게 돼요. 상대는 드림캐스터를 독점 개발한 거대 기업 SOF 코퍼레이션 몽재진압반 3팀 황수현 팀장으로 지후를 스카우트하려고 왔던 거예요.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각몽자 동료들과 함께 몽재진압반에서 일하게 된 지후는 숨겨진 비밀을 눈치채게 되는데, 과연 지후는 그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겐 꿈은 온전히 혼자만의 세계라서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무한한 세계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 미래는 사람들 간의 꿈을 공유함으로써 소비되는 자원으로 만들어버렸네요. 새로운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쾌락이 때론 너무 무섭게 느껴지는 건 우리의 선택권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에요. 선택이 필요 없는 기본 설정값으로 살아야 한다면 숨 막히지 않을까요. 모두가 함께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타인의 꿈을 함부로 훔치는 건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에요. 지후는 거리낌 없이 남의 꿈을 훔치던 외톨이 도둑이었는데 몽재진압반이라는 팀과 생활하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돼요. 자각몽자들을 통해 들어간 꿈의 세계,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될 진실은 바로...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공감가는 결말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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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님의 선(禪) 명상
영화 지음, 윤희조.박재은 옮김 / 운주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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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아요.

《영화 스님의 선 명상》은 선 불교의 기본적인 명상 방법들을 소개한 책이에요.

저자인 영화 스님은 베트남 출생으로 미국에서 대학 과정을 거쳐 기업가로서 성공했으나 비즈니스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선화상인의 가르침을 접한 뒤 출가한 분이라고 하네요. 이 책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식인 선 명상법을 다루는데, 1960년 선화상인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져온 법맥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해요. 흥미로운 점은 불교의 수행 방식이지만 불교 경전에 기록된 가르침이나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곧바로 마음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물론 선화상인과 같은 깨달은 조사(祖師)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지만 선 수행의 목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본성을 보고 깨닫는 것이라고 하네요. 따라서 선 수행의 요지를 알고 책에 나온 방법대로 집중하여 각 동작들을 행한다면 혼자서도 명상 스트레칭과 명상의 기본 자세, 호흡법을 익힐 수 있어요. 서 있는 자세를 시작으로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진행되는 명상 스트레칭은 사진과 함께 목 스트레칭, 머리와 목 돌리기, 상체 스트레칭, 어깨 돌리기, 팔 떨어뜨리기, 서서 몸통 비틀기, 앞으로 구부리고 뒤로 젖히기, 무릎 돌리기, 기초 학 자세, 고급 학 자세, 발목 돌리기, 엉덩이 무릎 허리 스트레칭, 나비 스트레칭, 앉아서 상체 비틀기, 흉곽 스트레칭 순으로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요. 기존에 홈트레이닝 스트레칭과 유사하지만 각 동작마다 천천히 8초를 세며 자세를 유지하고 숨을 내쉬되 반동을 주지 않고 숫자와 날숨에만 집중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어요. 날숨에 집중하면 생각이 멈추고 자세를 잡고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게 돼요. 중요한 건 매일 갈고 닦는 마음 자세와 실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디서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다리를 틀고 앉는 행동만으로도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고 머리를 맑게 하여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결가부좌로 앉는 것은 평소에도 종종 앉아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데 역시나 매일 꾸준히 실행하기가 힘드네요. 명상에 적절한 시간은 아침에 일어난 직후인데 이 시간에 명상을 수행하면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졸립지만 습관이 되면 잠을 자는 것보다 더 편안해지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어요. 몸의 건강을 위해 매일 식사하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명상은 정신적 건강을 돌보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선 명상을 배워서 열심히 실천해야겠어요. 무엇보다도 선을 수행하며 덕을 갖추는 일, 즉 마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쁜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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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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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를 보고 살짝 놀랐어요. 아직 읽지 않은 책인데 이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라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 속 주인공에 대해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봤던 건 이 소설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만화였어요. 1781년생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소설이 원작일 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회색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그림자를 팔게 되는 이야기예요. 슐레밀은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불길함을 느끼고 피했지만 정중하게 다가와 자신의 보물 상자에서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와 그림자를 바꾸자는 제안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행운의 자루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금화, 그 반짝이는 금화에 정신이 팔려서 냉큼 그의 손을 잡았던 거예요.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내 그리자를 가져가시고 그 주머니를 주세요." (29p)

그 뒤로 슐레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옷 주머니에는 금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그는 그림자를 잃었어요. 부자가 된 슐레밀은 만나는 사람에게 금화를 던져주며 호의를 베풀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시선뿐이었어요.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자를 어디다 두고 왔냐며, 그림자가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며 그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32p) 슐레밀은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어요. "이 세상에서 업적과 덕성보다 돈이 훨씬 중요할지라도 실은 그림자야말로 그런 돈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 양심에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단지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말았구나.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32p) 젊은이의 헛된 욕심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어요. 그림자가 없는 걸 알고나면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피했는데 몰래 도망치듯 멀리 떠난 곳에서 충직한 하인 벤델을 만나게 되고, 어느 도시에서 수많은 돈을 뿌리며 가짜 백작으로 살게 되는데...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면 슐레밀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났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쟁취하려는 찰나에 모든 걸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고, 바로 그때 회색 옷의 남자가 나타난 거예요. 도대체 회색 옷의 남자는 누구이고, 왜 슐레밀에게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내린 걸까요.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이 절친 샤미소에게 자신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 남기고 갔다는 '편지'로 시작된다는 거예요. 슐레밀은 샤미소에게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라면서 뼈아픈 깨달음을 전하고 있어요.

"친구여, 자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는 법을 배우게나. 돈은 그다음일세. 오로지 자네와 자네의 더 나은

자아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면, 오, 자네에게는 아무 충고도 필요 없네." (131p)

사실 이야기는 굉장히 짧은 편이지만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느껴져요. 이 책에는 소설 외에 해제가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의 삶을 알고 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프랑스 귀족 출신인 슐레밀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재산을 몰수당해 독일로 망명했고, 이후 평생 동안 독일을 구원의 국가로 여기며 독일인으로 살았다고 해요.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양국 간의 경계인이자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그림자를 잃은 슐레밀의 비극이 겹쳐져 보이네요. 돈 때문에 온갖 악행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에게 슐레밀의 이야기는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 싶네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의역되었는데,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로도 번역되었더라고요. 아참, 저자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1813년 이 원고를 절친 푸케에게 보여줬고, 그가 탐험을 떠난 사이에 푸케가 허락도 없이 출간하여 대호평을 얻었다는데, 소설 서문에 슐레밀이란 친구가 자신이 쓴 원고를 샤미소 자신에게 건네주었다는 내용을 넣어서 사실과 허구를 혼합한 기법 연출은 탁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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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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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얼마가 됐든 돈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잠시 전화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라고?"

이윽고 딴 사람이 된 듯한 사야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며칠 동안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엄청난 굴욕과 고통을 맛보았지만,

사야카가 내뱉은 그 "뭐라고?" 만큼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순간은 없었다. (66-67p)


돈 때문에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미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이후에 협박 당하는 장면들이 많기 때문에 불법 사채가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한 경고는 될지언정 돈을 빌린 사람의 사연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들은 왜 위험한 줄 알면서도 불법 사채라는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아무도 그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이 소설이라면 지옥 같은 현실을 목격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시가 아키라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작년에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원작이 시가 아키라의 동명소설이라고 해요. 미스터리 공포 범죄 스릴러 장르였는데 이번 소설 역시 불법 사채 지옥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네요. 주인공 다카요는 남편의 폭력과 빚 문제로 도망치듯이 집을 나와 일곱 살 딸아이와 단둘이 사는 싱글맘이에요. 현재 실직 상태로 임대료가 밀리면서 돈에 쫓기는 상황이 되자 SNS 불법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들이 다카요의 시점에서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어요. 세상에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빚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의 주변에는 이상하리만치 나쁜 놈들뿐이네요. 세렝게티, 대초원은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롭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먹고 먹히는 잔인한 생존 싸움이 펼쳐지는데, 무리에서 떨어지거나 상처를 입고 약해진 동물은 포식자들에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아요. 인간 세상에서 돈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당신이 속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요. 읽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처음엔 석 달 치 월세가 밀렸을 뿐인데, 그 임대료를 내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다음은 생활비 때문에, 그 다음은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빚 때문에... 그야말로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다카요를 보면서 첫 장에 적혀 있는 문장을 곱씹게 됐어요. "내 인생의 좌절은 그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7p)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떠올려 보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과의 인연이 중요한 변수였어요. 다카요는 '그 남자'라고 말했지만 여기엔 단순히 한 사람만 해당되는 이야기로만 볼 수 없어요. 그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이 '속는 사람'과 '속이는 사람'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가 있었네요. 돈은 잘못이 없어요. 불행의 책임은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으니까요. 인류 역사 이래로 돈의 힘이 가장 강력해진 건 사실이지만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건 돈이 아니라 돈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싶네요.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요. 덫이든 늪이든,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는데 진짜 위험은 인간이길 포기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어떤 핑계로도 납득할 수 없는 악의 끝을 보고나니, "헉!"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허무하고 슬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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