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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ㅣ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제목를 보고 살짝 놀랐어요. 아직 읽지 않은 책인데 이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라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 속 주인공에 대해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봤던 건 이 소설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만화였어요. 1781년생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소설이 원작일 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회색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그림자를 팔게 되는 이야기예요. 슐레밀은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불길함을 느끼고 피했지만 정중하게 다가와 자신의 보물 상자에서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와 그림자를 바꾸자는 제안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행운의 자루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금화, 그 반짝이는 금화에 정신이 팔려서 냉큼 그의 손을 잡았던 거예요.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내 그리자를 가져가시고 그 주머니를 주세요." (29p)
그 뒤로 슐레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옷 주머니에는 금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그는 그림자를 잃었어요. 부자가 된 슐레밀은 만나는 사람에게 금화를 던져주며 호의를 베풀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시선뿐이었어요.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자를 어디다 두고 왔냐며, 그림자가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며 그를 피하기 시작했어요.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 (32p) 슐레밀은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어요. "이 세상에서 업적과 덕성보다 돈이 훨씬 중요할지라도 실은 그림자야말로 그런 돈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 양심에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단지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말았구나.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32p) 젊은이의 헛된 욕심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어요. 그림자가 없는 걸 알고나면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피했는데 몰래 도망치듯 멀리 떠난 곳에서 충직한 하인 벤델을 만나게 되고, 어느 도시에서 수많은 돈을 뿌리며 가짜 백작으로 살게 되는데...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면 슐레밀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났겠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부와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쟁취하려는 찰나에 모든 걸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고, 바로 그때 회색 옷의 남자가 나타난 거예요. 도대체 회색 옷의 남자는 누구이고, 왜 슐레밀에게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내린 걸까요.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이 절친 샤미소에게 자신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 남기고 갔다는 '편지'로 시작된다는 거예요. 슐레밀은 샤미소에게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라면서 뼈아픈 깨달음을 전하고 있어요.
"친구여, 자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는 법을 배우게나. 돈은 그다음일세. 오로지 자네와 자네의 더 나은
자아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면, 오, 자네에게는 아무 충고도 필요 없네." (131p)
사실 이야기는 굉장히 짧은 편이지만 그 여운은 상당히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느껴져요. 이 책에는 소설 외에 해제가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의 삶을 알고 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프랑스 귀족 출신인 슐레밀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재산을 몰수당해 독일로 망명했고, 이후 평생 동안 독일을 구원의 국가로 여기며 독일인으로 살았다고 해요.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양국 간의 경계인이자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그림자를 잃은 슐레밀의 비극이 겹쳐져 보이네요. 돈 때문에 온갖 악행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에게 슐레밀의 이야기는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 싶네요.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의역되었는데,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로도 번역되었더라고요. 아참, 저자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1813년 이 원고를 절친 푸케에게 보여줬고, 그가 탐험을 떠난 사이에 푸케가 허락도 없이 출간하여 대호평을 얻었다는데, 소설 서문에 슐레밀이란 친구가 자신이 쓴 원고를 샤미소 자신에게 건네주었다는 내용을 넣어서 사실과 허구를 혼합한 기법 연출은 탁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