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저어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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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샤오밍이 그런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국가 안전부 대 외국의 일본 담당 부서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거물 침저어(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는 어류)가 일본에 잠복해 있다."

침저어. 즉 슬리퍼(Sleeper)는 본국으로부터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대상국의 한 시민으로 살며 오로지 명령을 받았을 때만 활동을 시작하는 공작원을 말한다. 게다가 후샤오밍이 들었다는 그 침저어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외무성에서 두견새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정보 제공자로부터 국내에 침저어 맥베스라 불리는 스파이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걸 밝히기 위해 경시청 내에 팀이 꾸려진다. 유출된 기밀문서는 미국과 일본의 합동위원회가 정한 '요코타 페이퍼'라는 문건으로 타이완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를 상정한 공동작전 계획이다. 이 요코타 페이퍼를 도쿄에 있는 침저어 맥베스가 중국에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베이징에 있는 두견새도 결국 고국의 배신자이므로, 일본과 중국의 배신자 두 명에 의해 기밀문서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이 내용을 처음 알려준 후샤오밍 또한 사기꾼 망명자인지 정확하지가 않고, 맥베스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부족한 상황이다.

과묵하고 무뚝뚝한 후와와 그의 파트너인 와카바야시, 맥베스로 의심되는 아쿠타가와 의원의 비서인 이토 마리는 후와와 동창이다. 경시청 외사2과 형사들 내에서도 소리마치와의 껄끄러운 관계와 새로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외부에서 영입된 도쓰이 미사키.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이야기는 그렇게 휘몰아쳐간다. 때로는 가정을 배제시키고, 때로는 동료까지 의심하며 조용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적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와, 옳고 그름이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업무적인 특수성이 이야기의 속도감을 올려준다. 극중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제거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협잡들이다. 페이지수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기도 하지만, 원가 내용 자체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처음부터 빠른 전개가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상황과 맞물려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준다.

 

와카바야시는 매우 띠어난 수사관이다. 특히 용의자 사진 가운데 범인을 골라내는 일은 그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 어떤 일로 조사한 남자인지, 어디의 누구와 연결되는 여자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얼굴 사진이 저장된 메모리와 그걸 순식간에 찾아내 해석하는 CPU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런 두뇌도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주 멈춰버리고 만다.

일본과 중국, 미국 간의 정보 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작품은 첩보, 경찰 미스터리물이다. 첩보 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경찰 미스터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떠오르기도 한다. 첩보물로서의 무게 감과 경찰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정보와 치밀한 구성, 탄탄한 문장들에 비해서는 어딘지 허술하고, 존 르 카레의 작품에서 빠른 전개와 극적인 긴장감 너머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에 비해서는 무언가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기존에 소네 게이스케의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러 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첩보물의 가장 큰 특징이 복잡한 플롯인데, 이리 저리 얽힌 관계와 끊임없이 터지는 의외의 전개와 막판의 반전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외사2과에서는 중국이나 북한의 정보 조직 및 관련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협력자를 스파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호칭으로 S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경찰 조직에 공인하는 협력자인 셈인데, S라는 존재를 통해 생겨나는 갈등도 사건을 증폭시키는데 도화선의 역할을 한다. 조직 내에서 스파이로 의심받는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묘사와 그로 인한 갈등과 인물의 고뇌, 그리고 계속 벌어지는 진실과 거짓의 뒤집기와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작품이 총격전이 난무하는 유혈 스릴러 극보다 더한 서늘함을 심어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양심과 윤리성을 가슴에 묻어둔 채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고뇌해야 하는 캐릭터라 어느 정도는 일반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 않나. 기존에 영미권 작가들의 첩보 소설만 읽어서인지 일본 작가의 첩보전은 매우 색다르고, 독특한 재미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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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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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백민석의 이번 소설집에는 신작 두 편과 십 년 전 이미 발표했던 작품을 다시 고쳐 쓴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우선 "10년 만에 돌아온"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자면, 신작 두 편에 대해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혀끝의 남자'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두 편이 신작인데, 전자는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후자에는 그가 글을 멈추게 된 과거의 정황에 대해 드러나있다.

 

나는 백 년도 더 전의 한 남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백 년도 더 전의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갔다고 했다. 장바닥의 구경꾼들은 그에게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으므로,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냐고.

우리를 두려워하냐고.

그런데 신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어제 누군가 신을 죽였다면 오늘 누군가 새 신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겐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신이 일억이나 된다.

-혀끝의 남자 중에서-

 

 

'혀끝의 남자'는 인도 여행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15년 전에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는데, 10년의 공백을 여는 작품으로 인도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도란 여타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순례라는 의미로 더욱 많이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아그라, 바라나시, 보드가야 등에서 뉴델리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은 일종의 개인적인 순례기로 보인다. 작년 한해 하루키를 시작으로 출판계에 마치 '순례' 열풍이라도 분 것처럼  많이 출간이 되었었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기 위해서 16년 만에 헤어졌던 네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한 순례를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레이첼 조이스의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에서는 20년 전 회사 동료의 편지 한 통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에선 주인공 리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속죄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김정남의 <여행의 기술>에선 아들과 함께 죽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두 색깔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과정이 어찌되었든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순례'란 보통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혀끝의 남자'에서의 나도 결국은 순례를 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도 여행을 거쳐서 다시 돌아온, 2013년의 서울 사당동에서 머리에 불을 붙인 채 혀 끝을 걷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신이 없는 삶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의 존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스스로 만들어낸 신일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혀끝이 종교의 발상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문장은 그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신작 두 편 외에 기존 발표 작들도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지금 여기의 시점으로 모두 고쳐 쓰여졌다고 한다. '신데렐라의 게임을 아세요?' '재채기' 정도만 술술 잘 읽혔지만, 사실 나머지 작품들은 한 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두어 번을 읽어야 했다. 여전히 어렵고, 통렬하고, 직설적인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작품은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문장의 맛이 더 살아나곤 한다.

 

그날 나는 벤치에 ' . ' 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이 감정을 띤 형태의 것은 아니었다. 딱히 슬픈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기본형 ' . ' 는 표정 없음이다. 정서적 반응이 없으니 표정도 없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중에서-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10년 전 그가 절필을 했던 상황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어조는 가볍지만,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도 나는 어딘지 ' . ' 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문장이 작가의 진짜 얼굴과 오버랩 되면서 자꾸만 웃음이 비져 나오고 말았다. 어쩜 이리 절묘한 표현이 있다는 말인가. 이모티 콘을 나도 문자든, 웹에서든 자주 사용하는 세대이지만, 사람의 표정과 그의 감정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구나 싶어 이모티 콘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그렇게 절필을 선언하게 된 그 무렵 그의 몸무게는 거의 백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해 있었고, 거의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한다. 기본형 ' . ' 에서 입까지 사라진 '  ' 가 되었다고.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여서, 그의 나머지를 살게 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시 글을 쓰기 위해서 10년 이라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와중에도, 책은 계속 읽었다. 왜냐하면 그는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도서관 소년이었고,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또 하나의 자신인 도서관 소년은 살아 남아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 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자신을 위해서도 더 이상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바래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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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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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라는 제목과 구스타프 클림프의 그림을 표지로 한 탓에 나는 이 책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저서들이 그 유명세를 증명하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짚어보자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마지막으로 사망한 걸로 정리가 된다. 저자인 고체 스밀레프스키는 바로 그 즈음 그가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 누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남겨진 누이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당시에 프로이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지 않게 누이들의 출국비자를 마련해서 그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누구도 알아낼 수 없는 프로이트의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누이들의 생이었다. 누이들 중에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었던 아돌피나, 어머니에게 학대 받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평생 외롭게 살았던 그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의 생애 속에 감춰진 주변 인물을 그려내는 작업이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품은 커다란 역사 속의 한 귀퉁이에서 그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오롯이 그려낸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프 <죽음과 삶>

 

오빠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 벽에 걸려있는 70년 전 우리 프로이트 집안의 자식들을 그린 유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이 그려진 당시 한 살 반이던 알렉산더가 훗날 기억하기로, 그가 조금 컸을 때 지그문트 오빠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누이들하고 같이 있으니까 꼭 한 권의 책 같구나. 네가 막내고 내가 장남이니까. 우리가 튼튼한 표지가 되어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너보다 앞서 태어난 누이들을 굳건히 보호해줘야 해. "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오빠가 다시 그 그림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건 따로 싸자꾸나." 오빠는 손을 뻗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려 했다.

"오빠는 그 그림에 손댈 자격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을 가면서, 그는 올케, 조카들, 집안 식솔들, 올케네 여동생과 가정부 둘, 그의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들까지.. 강아지 요피 까지 데려갔다. 그러나 누이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남겨진 그의 누이들은 오빠가 런던에 가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비엔나에서 빼내 줄 거라고,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궁핍과 공포에 떨면서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가 왜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추해볼 수 있는 건, 프로이트가 평생 인간의 본질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고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아버지라는 적의 죽음을 갈망했기 때문이다>라는 지그문트의 말처럼,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력한 존재가 원초적인 죄를 저질렀다는 이론에 따르자면 뭐.. 설명이 안 될 법도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이니 우리는 이 작품의 내용에 주목 해야 한다.

아돌피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많이 아팠고, 여섯 살 위였던 프로이트는 다른 누이들보다 그녀에게 더 살갑게 대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도서관에 들락거렸었고, 어린 그녀는 그런 시간들 덕분에 엄마의 힐난과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었다.  어린 아돌피나가 기침을 하거나 토하거나 열에 들떠 정신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엄마의 푸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은 그녀에게 상처로 박힌다. 물론 그녀 또한 엄마가 자신을 얼만큼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했고, 그 고통은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어린 그녀에게 사랑 만큼의 미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아돌피나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 사랑했던 라이너의 배신과 그의 자살로 인한 충격, 이어지는 낙태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 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장마다 삽입되어 있는 뒤러의 판화<멜랑콜리아>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뒤러의 판화 속 멜랑콜리아에는 날개가 있지만 그녀가 날개를 펼치고 날 거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아돌피나가 사랑하던 라이너와 헤어지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복잡한 애증관계에 있던 엄마와 지내던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결혼한 뒤 신혼 집에 의원을 열고 정신과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진료를 했다. 외로웠던 그녀는 오빠네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애원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식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돈도 부족하고 공간도 넉넉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아돌피나는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매일을 한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그녀의 일부는 침대에 그냥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으로 말이다. 그때, 그녀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를 본다. 자신의 몰골을 마주하기 싫어서 일부러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판화 속의 여인은 날개는 있지만 천사는 아니고, 아무데도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돌피나 역시 망연자실한 상태로 몇 해를 보냈으니, 곁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상태에서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으리라.

지그문트 오빠가 집에서 나가 병원에서 살기 시작하고, 안나 언니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파울리나와 마리 언니도 결혼해서 베를린으로 떠나고, 부모님만 남은 집에 아돌피나는 홀로 쓸쓸히 남아 있었다. 집안 어디에서도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결핍, 공허, 무력감과 우을증.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존재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표지에 삽입된 클림프의 <죽음과 삶>과 뒤러의 <멜랑콜리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의 양면과도 같이 사실은 별 다를 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돌피나는 결국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것이라 되뇌 인다. 엄마도, 아기도, 오빠도..이 모든 고통도.. 상처받기 쉬운 자신도...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살면서 가장 고통 덜 받는 곳으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어쩐지 웃을 수 없는 농담처럼 느껴지는 슬픈 장면이었다. 나는 이 매혹적인 책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히려 더 관심이 갔다. 정작 이 작품에서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그의 누이 아돌피나의 목소리만 들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어쩐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게 여운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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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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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화제작은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이었다. 내가 아직도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가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순간이었고, 그때 설레 이는 마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느라 내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가장 궁금했던 영화 중의 하나가 <트레인스포팅>이었는데, 다소 얌전한 취향이던 내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결국 최초로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가 되고 말았다는 기억도 남겨준 작품이다. 대니 보일의 감각적인 연출, 이완 맥그리거라는 배우의 발견, 그리고 루 리드의 음악까지.. 마약과 환각, 절망으로 얼룩진 세기말의 청년문화를 그린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기에 원작 자인 어빈 웰시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데뷔작인 <트레인스포팅>을 영국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팔았고 이후 출간된 <포르노> <필스>도 모두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98년에 출간된 필스를 이제야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2013년에 이 작품이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으로 영화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찌되었든 그의 작품은 영상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사실은 이런 걸 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대놓고 그러니까, 완전히 노골적으로 저속함을 드러내면 우리는 그걸 비웃으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욕망의 배출구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것처럼, 저속함이 있어야 그 반대인 청순, 고결함도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하면 좀 아이러니 할래 나. 아뭏튼 빛과 그림자처럼 어쩔 수 없이 극단의 양면이 모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란 얘기다.

 

어빈 웰시는 사람들이 모른 척 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는 데 기막힌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일명 타탄 느와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어둡고, 익살스럽고, 매우 폭력적이다. 배경만 스코틀랜드일 뿐, 문학적으로는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마약은 기본이고, 도덕적 가치의 혼란과 죽음, 섹스가 난무해서 아주 극단적으로 치솟는 속수무책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혐오스럽고, 음탕하고, 저속한 묘사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트레인스포팅>은 관객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스코틀랜드를 보여주었었다. 영화를 통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고 역겨운 장면들을 초현실적 느낌으로 바꿔놓은 장면들이었던 터라 조금 받아들이기 나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에 영화를 보면서 내내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 <필스>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의 에든버러를 배경으로, 타락한 경찰이 서서히 파국을 향해 몰락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영화도 꽤나 인상적이다. 역시 배우의 비주얼이란 인물들이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수긍내지는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모양이다.

 

             

 

에든버러 경찰서의 브루스 로버트슨 경사는 인종 차별, 권력 남용, 살인, 절도, 협박, 강간, 거짓말, 마약, 불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르며 거리를 누비는, 말 그대로 갈 때까지 간, 타락한 경찰이다. 경사에서 경위로의 승진을 꿈꾸는 그는 살인 사건을 맡지만, 정작 사건 수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이 승진하는데 라이벌이 될만한 동료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이간질,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상관과 친구를 궁지에 몰아넣고, 처제와 섹스를 즐긴다. '막장'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처절하게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코스를 달려가는데, 그 속에 있는 당사자만 모른다는 그런 얘기다. 온 세상에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크리스마스에 그는 결국 파국에 이른다.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하랴. 그렇게 막 되는대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 버린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이니, 책임을 질 사람도 자신밖에 없는 것을.

 

<게임은 우리가 일을 버텨낼 유일한 방법이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보잘것없는 허영과, 나름대로 보잘것없는 자부심이 있다>는 그의 자부심은 세상 만사 모든 것을 다 게임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어떤 새끼나 다 아킬레스건이 있고, 나는 내 지인들의 아킬레스건을 으레 기억해둔다. 그들의 자아상을 허섭쓰레기로 뭉개버리는 무언가.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언젠가 이용할 수 있도록 저장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약점을 기억했다가 그걸 적시에 이용하고 써먹는다. 그는 <경찰봉과 방패를 들고, 국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찢어진 주둥이와 돼먹지 못한 태도로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버릇없는 쓰레기들을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드는 생각에 기분>으로 한껏 달아오른다. 그는 이런 세상을 '멋지다'고 여긴다.

 

구토와 배설물로 가득한 세계. 마치 더럽혀진 육체와 부패한 영혼을 묘사하듯 이 작품은 시종일관 '지저분함'을 표출한다. 브루스는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쩌면 그도 은연중에 그곳이 자신이 머물고 싶어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망각이란 떨어질 데까지 떨어지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어쩌면 브루스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모두 그냥 갈 데까지 가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증오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분노를 지킨다> 페이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촌충의 목소리와 브루스의 비정상적인 정신세계는 가끔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또 가끔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가끔은 불량식품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나. 나쁜 것을 통해서 야만 볼 수 있는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이 머리 아픈 페이지들 속에서 브루스에 대한 여러 가지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동생의 죽음과 아버지의 학대, 자신을 버린 아내, 조울증과 편집증... 지독하게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끝내 연민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어빈 웰시의 솜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모든 파멸은 재미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누구나 가끔은 나쁜 짓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어빈 웰시의 작품을 만나보자. 아마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그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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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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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랑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실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 재능의 영역과 오로지 노력으로 얻은 후천적인 것의 영역을 명쾌하게 구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 달에 문학동네 팟 캐스트를 듣는데 천재란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유사한 이야기를 했었다. 재능과 노력을 굳이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짧은 시간을 두고 보자면, 재능과 노력은 선명하게 구분이 되며 재능이 노력을 압도하는 사례가 많다. 노력이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곳에 그런 종류의 재능은 천재라고 부를 수밖에 없으니, 천재란 시간을 무력화하는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재능이 많은 A와 노력을 많이 한 B가 도달한 지점이 같아지거나, B의 노력이 A의 재능을 추월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재능의 영역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고,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것이 하나의 과정이고, 그 과정이란 결국 노력을 의미한다고 보자면, 노력으로 안되는 재능의 영역이 있다는 그 생각은 재능을 갖고 있는 누군가를 경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노력으로 재능을 보충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천적 재능보다는 후천적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재능이 후천적인 노력보다 다 더 결정적인 거라는 생각은 우리 삶의 의미를 상당부분 박탈해 버릴 테니 말이다. 따라서 재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가치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의견일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드러날 수 없을 테고, 반대로 가진 걸 다 쏟아 부어 노력을 하더라도 타고난 것이 없는 사람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 결국 재능을 어느 정도 타고나긴 해야 하지만, 노력으로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명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스포츠 재능을 유전자적으로 분석해서, 선수를 조기에 발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평범한 소재도 확실한 엔터테인먼트의 도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 재능이야말로 히가시노 게이고 만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자질이라 하겠다. 이 작가는 어떤 작품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수준을 매번 보여준다. 엄청나게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보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유즈키 씨는 지금까지의 내 실적이 노력이 아니라 유전자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어떻게든."

"전에도 말했겠지만 노력에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면 백 미터 달리기 결승전에 왜 흑인들만 진출하겠느냐고."

"백 미터 달리기와 스키는 다르죠"

"육체의 능력을 겨룬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노력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모두가 최대한 노력한다는 전제하에 마지막 순간 승패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 얘기를 하는 거라고. 설마 너 그걸 마음가짐이나 정신력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계획이란, 유전자를 통해 스포츠에 적성이 있는 인재를 발견하고 초기에 최적의 지도를 함으로써 우수한 선수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 유전자의 조합을 발견했고, 카자미가 지닌 F패턴과 신고가 지닌 B패턴이다. 유즈키는 카자미가 부모에게 F패턴을 물려받았다는 걸 증명하고자 히다에게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고, 전직 등산가였던 가쓰야에게서 발견된 B패턴을 아들인 신고가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를 선수로 스카웃한다. 그러나 히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는 재능이란 것이 선천적인 능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이유는, 딸인 카자미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스키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이력도 있었던 그는 당시 훈련 일정으로 인해 아내가 출산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아내가 의문의 사고로 죽고 나서 액자 뒤의 신문을 발견하고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내가 다녔던 병원에는 그녀의 출산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그가 유럽으로 훈련을 떠난 직후 유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문의 신문기사는 당시 그 병원에서 신생아가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의 이유 없는 자살과 그녀의 유품에서 발견된 신생아의 유괴기사는, 카자미가 그의 딸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도 자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10여년 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고, 자신과 카자미의 DNA를 채취한다면 친자관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유즈키의 집요한 제안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출생의 비밀이라니,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바꿔 치기, 혹은 납치했다는 소재는 이미 너무 많은 작품에서 등장했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닌가. 그는 진부한 소재도 솜씨 있게 요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유즈키 씨, 뻐꾸기라는 새는 말이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는군. 때 까치나 멧새 둥지에 말이야. 그러고는 다른 어미 새에게 새끼를 키우게 한대. 아나?"

"들은 적 있습니다. 탁란이라고 하는 거죠?"

"재능의 유전자란 게 말이야, 그 뻐꾸기 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몸에 쓰윽 들어와 있으니 말이야. 신고가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건 내가 녀석의 피에 뻐꾸기 알을 떨어트렸기 때문이야. 그걸 본인이 고마워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

 

히다와 카자미 부자의 스토리 외에 또 다른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주니어 스키 부에 소속 중인 신고이다. 기타를 좋아했던 신고는 어느 날 갑자기 그들 부자를 찾아온 신세 개발 스포츠부의 고타이와 유즈키에게 엄청난 제안을 받고 꿈을 접게 된다. 신고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를 스카웃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가쓰야는 아내와 이혼 후 무직이나 다름없었고, 아파트 집세도 석 달이나 밀려있고, 신고의 급식 비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아들만 맡겨주면 취직도 시켜주고, 살 곳도 마련해주면서 학비도 내주겠다는 제안을 그들 부자가 어떻게 마다했겠는가.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버려야 했던 신고의 내적 갈등과 재능을 타고 났지만 이런 이유로 노력을 하지 못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라이벌 구도, 의문의 협박 편지를 통한 긴장감과 갑작스런 사고로 인한 테러 위협까지. 이야기는 어느 한 부분 지루할 틈 없이 달려간다.

뻐꾸기의 탁란은 생태적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한다. 둥지도 짓지 않고 알만 남의 둥지에 낳아 두면 둥지의 임자가 자기 새끼로 알고 애지중지 먹이를 물어 날라 키워주는 것이니 말이다. 딱새는 그렇게 자신의 둥지에 있는 새끼를 정성껏 키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뻐꾸기 새끼는 뱁새 새끼보다 일찍 알에서 나와 곁에 있는 것들을 밀어내는 습성이 있어, 정작 딱새 새끼들은 둥지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고 한다. 뻐꾸기의 탁란이 자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인간 세상에서도 버젓이 행해진다는 걸 보여주는 멋들어진 제목이 과연 히가시노 게이고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 수많은 다작들이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이 주요 모티브이지만 삼류 드라마 같지도, 진부하거나 상투적이지도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출생의 비밀뿐만 아니라 스포츠 세계에서의 경쟁과 질투,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의 차이 등 이 작품의 주요 이야기 거리들은 사실 스토리가 어찌 진행될지 뻔히 보이는 평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참 많이 읽은 편인데, 떠올려보면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항상 평범한 플롯으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스토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재미있을까. 특히나 출생의 비밀과 관련하여 병원에서의 신생아 바꿔 치기 등은 이제 너무도 많이 다뤄졌던 터라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이다. 그런데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안에서는 기묘하게 지루하지가 않다. 그의 새로운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챙겨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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