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진짜 메이저리그다
제이슨 켄달.리 저지 지음, 이창섭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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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회초 1사 만루의 상황에서 중심 타선인 5번타자, 6번타자가 모두 삼진 아웃 당한다. 그렇게 득점을 실패하고 이어진 1회말, 상대팀은 쓰리런 홈런과 더불어 폭풍의 7득점. 스코어 0:7. 경기는 이제 시작인데 7점차라는 점수는 어쩐지 응원하는 기분을 사그라 들게 만들고 만다. 혹시나 기대했던 선발 투수에 대한 역시 나의 실망감. 경기를 관람하는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들고 만다. 간간히 티비에서 들려오는 중계 소리만 들으며 책 속으로 빠져드는데, 3회부터 조금씩 따라붙던 점수가 결국 5회에 이르러서는 역전이 되고 만다. 맙소사. 결국 이날 경기의 스코어는 0:7에서 10:8이 되고 만다. 이런 게 바로 야구의 묘미다. 예를 들어 수비 실책 남발에, 선발 투수의 제구 난조에, 상대팀의 운 좋은 안타까지 이어지면서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야구는 9회말 끝까지 가보기전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진짜는 9회말 투아웃부터 라는 얘기처럼, 실제 다 잡은 경기를 9회말 투아웃에서 끝내기로 지는 경우도, 마무리투수가 블론 세이브를 하고 연장으로 넘어갔지만 다시 이기거나, 결국 지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진부한 표현도 야구 경기에 있어서만은 무릎을 치게 만드는 감탄사가 되는 것이다.

 

야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야구장엔 내가 몰랐던 경기 속의 경기가 존재했다. 난 항상 코앞에서 야구를 지켜봤지만 누군가 알려준 후에야 경기장에서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예전엔 야구가 느리고 때때로 지루한 경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야구에 대해 배운 이후론 경기장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져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됐다. 이젠 주목해야 할 것들이 수십 가지로 늘어났고, 단 한 번의 타격도 여러 개의 줄거리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결투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야구 팬이자 기자인 리 저지가 선수의 관점에서 야구를 기술하고 싶어서 시작되었다. <선수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선수가 하는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감독이 평소보다 이르게 내야수에게 전진 수비를 지시한 이유와 3루 코치가 주자에게 3루를 지나 홈으로 뛰게 한 이유 혹은 볼카운트 3볼인 상황에서 주자가 2루를 훔친 이유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16년 동안 선수로 뛰었던 베테랑 포수인 제이슨 켄달은 메이저리그 경기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선수들이 어떤 경기를 펼쳐야 하는지, 야구와 야구를 하는 선수들을 이해하려면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그것을 리 저지가 지면에 옮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야구팬들이라면, 꼭 봐야만 하는, 볼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류현진 선수와 윤석민 선수, 그리고 추신수 선수 덕분에 요즈음은 메이저리그 중계를 정규 방송에서도 편성해서 보여줄 정도이니 책 속 내용들이 더욱 친숙하고, 쉽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야구장 밖에서는 알 수 없는 메이저리그의 생생한 진짜 이야기. 도대체 진짜 메이저리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짜 프로선수들은 경기를 어떻게 보는 것일까? 홈플레이트에서 포수와 구심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팀원끼리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 걸까? 필드 밖에서 바라보는 야구가 아니라, 필드 안에서 바라보는 진짜 야구 이야기가 그렇게 펼쳐진다. 경기가 시작 되기 전에 어떻게 몸을 풀고, 선수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타자, 주자, 감독으로 나뉘어서 각각의 포지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경기를 잘 풀어가려면 어떤 부분을 공략해야 하는 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야구는 정말 빨리 진행되지만, 직접 경기해 보지 않으면 - 혹은 필드에서 경기를 관람하거나 - 야구가 얼마나 빠른 스포츠인지 알 수 없다. 타구, 투구, 송구. 필드에서 보면 이 모든 게 완전히 달라 보인다. 야구가 길고, 느리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TV에서 볼 땐 야구는 정말 쉬워 보인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내야수들의 능력은 상상도 안 될 만큼 뛰어나다. 터무니없을 정도다. 훌륭한 내야수는 본능이 남다르다. 투구와 타자의 스윙을 읽을 후에 타구가 날아오기도 전에 몸을 움직인다.

선수들은 "상대하기 가장 힘들었던 투수는 누구죠?"라는 질문에 항상 똑같이 대답한다고 한다. "상대해 본 적이 없는 투수요."라고. 상대 투수가 어떻게 경기하는지, 공이 어떻게 움직이고, 그 공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르면 그만큼 불리하다는 얘기다. 야구는 철저하게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진행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야구 만큼 기록도 많고, 경기 규칙도 많은 스포츠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야구는 알면 알 수록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그만큼 더 재미있어지는 신기한 종목이다. 야구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이다. 야구에 흥미가 이제 막 생겼다면, 혹은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더 재미있게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야구에 관련된 책들이 야구를 오래 보아온 소위 선수들에게는 다 그렇고 그런 아는 얘기들을 정리해놓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나 야구 좀 봤다. 싶은 이들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우의 수가, 두 세 시간짜리 야구 경기 안에서 전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매번 신기하기도 하고, 색다른 쾌감을 주기도 한다. 야구에서는 벌어지는 매 순간의 선택. 그 사소한 선택 하나가 그날의 경기 결과를 바꾸기도 하고, 한 선수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하는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회의 때 이걸 발표해야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해야지. 오늘 이걸 입을까. 아니야 저걸 입어야겠어. 이쪽 길이 빠를까. 저쪽 길이 빠를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벌어지는 우리의 선택.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뒤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모두 스스로의 책임이다. 아쉬운 건 이미 결정된 선택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 하지만 야구에서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묘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선택을 통해 배우고, 그걸 활용해서 멋진 드라마를 새로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려면 감독, 코치, 선수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진짜 야구를 만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야구장으로 가보라. 그게 여의치 않다면 시원한 집에서 이 책을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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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1997 - 상 - 어느 유부녀의 비밀 일기
용감한자매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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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국 엄마의 바람대로 '시집이나 가서 남편 돈으로 생활하며 편하게 취미로 소설이나 쓰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글쓰기는 아예 포기해버렸다. 글은커녕 내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었으니까.

나름 굴곡 많은 결혼 생활에서 겨우 버텨냈다 싶었는데, 마흔이었다. 작년에는 친구들이 마련해준 마흔 번째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대성통곡했지. 이렇게 한 해, 한 해 무의미한 존재로 소멸해버리나 싶었다. 한 해, 한 해 늙어갈 테고, 무능해질 테고, 무감각해질 테지, 싶어서. 

 

송지연,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실연의 아픔으로 썼던 소설 '줄리아나 1997'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책으로 출간되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 권도 쓰지 못한 소설가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살림을 꾸리다가 보니 글을 쓰고자 했던 열망은 어느 샌가 사그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흔한 살의 어느 날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고, 그녀는 그 방송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이 뭔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얼마 되지 않아 막을 내리고, 그 쫑 파티에 서 유명한 남성 패션 잡지 <트렌디>의 편집장인 진수현을 만나게 된다. 그 이후 어느 유부녀의 발칙한 비밀일기가 시작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핸드폰도, 인터넷도, 내비게이션도, 케이블 방송도 없던 시절, 그녀는 줄리아나 나이트클럽을 몇 년 동안이나 주름잡았었다. 자칭 타칭 '줄리아나 오자매'라고 이름이 붙은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어림잡아 매주 한 번씩 갔다고 하니 말 그대로 줄리아나 죽순이였던 것이다. 줄리아나 오자매는 모두 이대생이었는데, 송지연과 박은영은 국문학고, 김정아는 법학과, 이세화는 영문학과, 황진희는 비서학과였다. 로펌 대표 아버지에 자신도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인 정아, 광고대행사에서 인정받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은영, 줄리아나에 처음 이들을 인도하고, 제일 먼저 줄리아나를 졸업했던 세화, 미모와 관능으로 남자들을 홀렸던, 현재는 '줄리아나 바' 사장인 진희까지.. 이들 중에 유난히 남자 복이 없었던 은영만 아직 미혼인 상태이다. 학창시절에 좀 놀아본, 화려하게 그 시절을 보냈던 이들일수록 좋은 남자 만나서 착실한 아내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이들은 모두 20년 후 각자의 삶을 나름 성공적인 모습으로 살아내고 있다. 그러나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그녀들의 인생 역시 가까이서 보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이란 틀에 들어와 14년을 살면서 억울함과 분함이 생겼다. 남편의 희로애락에 나의 희로애락이 맞춰졌고, 남편의 결정에 내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 남편이 멋대로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들어먹어도 나는 내조 못하는 와이프가 됐고, 남편이 어린 여자랑 바람이 나도 나는 남편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내가 되었다. 절망과 무기력함이 나를 짓눌렀다. 페미니스트도 아닌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인 나에게 저항의 기운이 가득 찼다.

하지만 수현을 만나면서 난 희망과 생기가 생겼다. 바람 피우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도 생긋생긋 웃어주는 여유도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독립적인 여자로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기쁨과 희망을 얻었는데, 그는 나 때문에 집에서 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수현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자존 감을 되찾은 것 같다고 고민하는 지연에게, 정아가 말한다. 핑계 대지 말라고. 아무리 미화시켜도 넌 바람 피우는 거고, 불륜은 합리화시킬 만한 일은 아니라고. 그 만남이 너한테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은 덜어지겠지만, 너는 그를 만나기 전에도 독립적인 여자였다고 말이다. 물론 수현과 헤어지는 것도, 아이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연을 포함해서 이들 다섯 명 친구들의 사연을 하나씩 읽어보다 보면 공감이 되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 것도 많았던 이유가 다소 전형적인 갈등 전개 때문이 아니었다 싶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자들의 이야기이기에 적나라한 묘사도 있고,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비현실적인 인물들도 있다. 한없이 외설스럽게도 느껴지다가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순애보를 보이는 인물 때문에 이들이 40대인지, 20대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잊어버리곤 하는 드라마들처럼,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읽기엔 최고의 페이지 터너 이긴 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정한 막장 드라마를 보려면 고전 소설을 읽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위대한 고전으로 칭송 받는 몇몇 작품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런 소설이 진정한 막장 드라마의 시초라고 했었다. 무슨 소리냐며 처음엔 갸우뚱하다가 그 작품들의 스토리라인을 떠올려보면서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기억이 난다. 불륜부터 시작해서 출생의 비밀, 억지스런 우연의 남발 등 소위 현대판 막장 드라마에서 너무도 자주 사용하는 장치들이 우리의 위대한 고전에도 항상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막장과 문학의 차이는 '스토리'가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깊이였을 것이다. 엄청나게 디테일한 장면 묘사와 심리 묘사는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어주고, 평범한 스토리에도 문학적인 깊이를 주고 행간의 숨겨진 뜻을 헤아리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줄리아나 1997>은 명백하게 전자이다. 문학적인 표현들은 싹 걷어내고, 티비 드라마 처럼 인물들의 대사와 스토리전개에 비중을 두어 속도감은 최고이다. 그러나 마냥 막장으로 치부하기엔 좀 아쉽긴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군가에겐 '사랑과 전쟁'이 될 수도, 누군가에겐 '섹스 앤 더 시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도가 어떨까. 노골적이고, 솔직해서 트렌디하게 느껴질 수도, 어디서 본 듯한 뻔한 갈등 구조에 심심함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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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가렵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4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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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른들 말에는 무조건 반항하고, 말만 많은 중2 학생들과 열정 넘치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김선영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생각은, 엄연히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데 왜 어른인 내가 읽어도 이렇게 공감되고, 재미있을까라는 것이다. 분명히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고,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데도 그들만의 불안과 고통들이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고 나도 이해 받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을 살고 있는 각 세대의 가려움(불안)을 꺼내어 서로가 서로에게 납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해'에 방점을 두고 시작된 이야기라 어른의 시선이지만 담백하게 표현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과는 상반된 이 아이들의 반응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수인은 눈앞이 아득했다. 어떤 것도 순탄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 같다. 아이들과도 학교와도 매번 힘든 고갯길을 넘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동굴의 아가리처럼 커졌다. 수인은 아이들과 소소한 신경전을 벌일 때마다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일종의 염증 같은 거였다. 수인은 꼭 그 정도의 비겁함과 꼭 그 정도의 혈기 방자함, 난관이 닥치면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겁쟁이에 소심함까지, 밀어붙이지도 못하면서 비겁하기는 싫고 그게 싫어서 덤빈 이후 다시 비겁해지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자신을 보며 네가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찾아온다. 그래, 이게 나야, 하고 그만 두 손 들고 싶었다.

수산나 고등학교에서 성공적으로 도서관을 꾸려가던 수인은 울창한 수풀 속에 방치해둔, 낡은 목조 건물의 도서관이 있는 형설중학교 사서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는다. 새로운 학교에서 기존 선생님들의 텃세도, 반은 강제로 모임에 나온 독서회에 나온 아이들과의 첫 만남도 만만치가 않다. 그녀에게는 상위 1% 엘리트에 속하지만 늘 불안에 쫓기는 연인 율이 있다. 아직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를 잡기로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커플이었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더 나은 스펙을 쌓겠다며 일방적으로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관행에 젖어 있는 새 학교의 시스템과 동료 교사들도, 종잡을 수 없는 아이들과의 좌충우돌 학교생활도 그녀에겐 감당하기 벅차기만 하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유일한 어른인 수인이 무작정 이해심 많거나, 완벽하게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뻔한 선생님 캐릭터가 아니라서 무엇보다 공감이 되었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그런 평범한 인물이라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좋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싶다.

폭력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전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도범은 이번에는 부모님을 위해 일진 생활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도범을 괴롭혀 일진에 돌아오게 하려는 대호 일당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을 짓찧었다. 새처럼 생긴데다 촉새처럼 말이 많다고 해서 새라는 별명을 가진 세호, 말더듬증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고 가방 속에 망치를 넣어 다니는 해명(해머), 혼자서 겉돌며 책 읽기를 즐기며 책이 자꾸 말을 한다는 이담까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의 사연들은 각각의 캐릭터를 입체감 있고, 현실감 있게 느껴지게 했다. 특히 <왜 자기 이야기의 뒤를 이어주지 않느냐고 말하는 책을 봤어요>라는 이담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충분히 공감할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책이 누가 더 이야기를 붙여달라는 말처럼 들린다는 건, 책을 그만큼 사랑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담이는 제대로 책과 놀 줄 아는 아이였던 셈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자신을 내치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밖에서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끄덕 없어요. 밖이 뭐가 중요해요. 안이 중요한 거지. 스스로가 채워지지 않았는데 밖에서 아무리 채우려고 해보세요, 채워지나, 오히려 불행하고 불안한 자신만 발견할 뿐이죠. 그런 어른들이 희곤이 같은 아이들의 싹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학생들에게도 예측 불허의 인물로 치부되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스스로 왕따 처럼 구는 특이한 인물인 미술 선생 양희순은 아이들이 또라이 또는 광녀라고 부르는 것처럼 정말 이상해 보였다. 수업을 하다가 혼자 제멋에 겨워 자지러지게 웃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낯설게 하기의 달인으로 통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수인이 도서관 건물과 교무실 건물을 바꾸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해서 모든 선생님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을 때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수인의 편이 되어 주었고, 성적 스트레스로 인해 미쳐버려 학교를 떠도는 희손이라는 학생도 편견 없이 바라보며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 수인의 눈에도 어떤 규범과 제약도 너끈하게 뛰어넘는 에너지 넘치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수인의 어머니는 지독한 가려움을 가장 볼품없는 중닭에 빗대어 말한다.

"어디에서 어디로 넘어가는 것이 쉬운 법이 아녀. 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갈 수 있는 겨. 애들도 똑같어. 제일 볼품없는 중닭이 니가 지금 데리고 있는 애들일 겨. 병아리도 아니니께 봐주지도 않지, 그렇다고 폼 나는 장닭도 아니어서 대접도 못 받을 거고. 뭘 해도 어중간혀. 딱 지금 니가 가르치는 학상들 아니겄냐... 그애들이 지금 올매나 가렵겄냐. 너한테 투정 부리는 겨, 가렵다고 크느라고 가려워 죽겄다고 투정부리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고, 안 알아주고 가려워서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몸부림치는 놈들한티, 대체 왜 그러냐고 면박이나 주고, 꼼짝없이 가둬놓기만 하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겄냐."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해도 네가 어디가 가렵구나, 그래서 가렵구나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다.  말 안 듣는 놈 있으면 아, 저놈이 어디가 몹시 가려워서 저러는 모양인가 부다 하면 못 봐줄 것도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수인은 짧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만다. 그제야 그들의 행동이, 말이 모두 이해가 되었던 거다. '가려웠구나, 가려운 거였구나.' 하고 말이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막막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마다 이렇게 속 시원히 긁어줄 수 있는 존재는 아마도 엄마란 존재밖에 없지 않을까. 살아 있는 것들은 죄 가려운 법이라, 누구나 자신만의 가려운 데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 던져도 통찰력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수많은 세월을 견뎌온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인의 어머니도, 미술 선생 희순도, 그리고 수인과 아이들도 모두 각자만의 가려움을 견디고, 더 멋진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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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입시
미나토 가나에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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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미나토 가나에가 최초로 드라마 극본에 도전했던 작품이다. 후지TV 인기리 방영했던 드라마 〈고교입시〉가 소설로 출간되었다. 명문고 입시를 둘러싸고 48시간 동안 펼쳐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으로 과열된 입시 경쟁과 집단 따돌림, 인터넷상에서 붉어지는 익명성의 폭력 등을 다루며 학교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그리고 있다. 교사 입장에서, 학생 입장에서, 학부모 입장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고교 입시'를 얘기하고 있다. 화자가 계속 바뀌고, 매 장마다 한 줄씩 의문의 인터넷 게시판 글이 보여진다. 입시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게시판에서 실시간으로 올려지는 글인데, 놀랍게도 같은 시각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입시 관련 상황들이 즉각 업데이트되고 있다. 등장 인물도 많고, 그들 모두가 각자 화자로 등장하다 보니 초반에는 내용 파악이 좀 어렵기도 하지만 인물보다는 벌어지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퍼즐은 어느 샌가 맞춰진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형제가 있는데, 형은 이치고에 붙어서 졸업한 후 삼류 대에 진학하고 동생은 이치고에 떨어져서 다른 학교에 가서 졸업한 후 일류 대에 합격했다고 쳐. 어느 쪽이 자랑스러운 아들인지 알아?"

아이다 선생이 간단한 예를 들어 쿄코 선생에게 설명했다."

"난 동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의 상식으로는 형?

"정답."

인생을 걸고 시험을 치지만, 채점하는 놈들은 타인의 인생이 걸렸다는 생각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한 적 있어?

 

이야기의 주요 배경인 지역 최고의 권위를 가진 명문고인 이치고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학생과 학부모들에게서 맹목적인 선망을 받고 있다. 이곳의 합격 여부가 마치 인생의 승자와 패자를 정해버리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니 졸업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하고, 이치고 출신 교사들인 이른바이치고 OB’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치고에 합격한 후 책상을 버리는 행위를전설이라 부르며 멋있는 전통인양 떠들고, 현재 비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거나, 변변치 않은 직장도 못 다니고 있더라도 이치고 출신이면 전혀 상관없고, 좋은 회사를 다니고 있더라도 일반 고등학교 출신이라면 어느 정도 무시하는 분위기마저 생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역에서 가장 명문고인 이치고의 입시 전날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시험을 시행하는 날을 거쳐 합격자 발표 날까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입시 전날 <입시를 짓밟아버리자>라는 내용의 벽보와 칠판 위에 숨겨진 교사의 휴대전화 등으로 불길한 암시를 주며 시작된 입시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입시 중간에 휴대전화가 울려 실격 당한 학생은 알고 보니 현 의원의 딸인데다, 자신은 그에 대한 전혀 주의사항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 소동에 편승해 누군가는 커닝을 했다고 하고, 채점을 위해 걷은 시험지 중에 한 장이 모자라고 빈 시험지도 발견된다. 나중에 시험지를 찾게 되지만 동일한 수험번호가 두 개 발견되는데, 유난스러운 동창회장의 아들의 시험지로 밝혀지는데다 그 두 장의 점수는 또 확연하게 다르다. 휴대전화 사건으로 인한 실격과 시험지 분실과 관련해서 극성맞은 부모들은 학교로 난입하고 우연히 발견된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렇게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에 대해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교사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입시 전날과 당일에 발생한 사건에 점점 휘말리기 시작한다.

 

 

"공립 고등학교 입시에서 채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게 들통이 났구나. 학교는 비밀주의여서 채점 실수가 있어도 잠자코 있을 것 같은데."

형은 채점 실수를 발각한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수험생이 현 교육위원회에 답안지 개시 청구를 했다고 한다.

개시 청구에는 2단계가 있다. 한 가지는 다섯 과목의 점수만 보는 것. 다른 한 가지는 채점이 끝난 자신의 답안지를 보는 것이다. 후자는 형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아는 것은 자신의 점수뿐이다. 학교별 합격 최저점은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합격 점수에서 몇 점이 부족한지는 알 수 없다.

합격 최저점을 공표하지 않는 것은 학교 순위가 명확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번에 채점 실수를 발각한 사람은 입시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1단계인 점수 개시 청구를 했다. 그랬더니 임시 채점 결과와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제2단계인 답안지 개시 청구를 했더니, 채점 실수가 발각되었다.

 

우리나라의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 입시나 명문 대학에 대한 선망, 그리고 매해 수능시험 후에 자살 사건들이 숱하게 보도되는 우리의 입시 현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합격에 목을 매는 분위기 속에서 공명정대하고 정확하게 처리되어야 할 시험 채점에 문제가 생긴다면, 극중 이치고의 상황처럼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을 것이다. 채점도 사람이 하는 거라면 당연히 실수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학교가 분명히 져야 할 테니 말이다. 극중에서 보도된 뉴스로는 <과거 5년간의 채점 실수가 500건 이상 있었던 것으로 판명. 현 교육 위원회는 합격 여부 판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나오지만, 이 또한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채점 실수에 따라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불합격해서 그 이후의 삶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학교에 쳐들어온 학부모들을 어쩌지도 못하고, 사라진 시험지의 처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48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긴박감 넘치게 펼쳐진다. 미나토 가나에 특유의 교차 서술도 여려 명의 독백으로 숨쉴 틈 없이 전개되고 있다. 다만 드라마로 먼저 만들어진 작품을 소설로 바꾸어서인지 기존의 작품에 비해서 밀도는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서로 다른 화자들의 독백 가운데 툭툭 끼어드는 인터넷 게시 글의 효과도 영상으로 본다면 바로 이해가 되고 긴장감을 주었겠지만, 초반에 사건 진행이 두드러지기 전에는 이야기 전개를 더디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직이 고등학교 교사였던 탓에 누구보다도 리얼한, 진짜 학교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혀 이의가 없다. 이들의 유난스러운 고교입시나 우리네의 살벌한 대학입시나 별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되고, 몰입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도 모르게 진정한 학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입시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벚꽃이 피는 이 날은 절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새로운 무대의 출발점이다. 고등학교란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니, 아이들은 모두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부딪히며 해나가면 된다. 때로는 깨지고, 다치고, 눈물 흘리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온 힘을 다해 막아주는 어른이 있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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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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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이번 신작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과 함께 이어지는 미국 3부작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는데, 1960년대 말의 혼돈스러운 미국을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껏 달아오른 미국의 분위기가 베트남전쟁의 실패와 맞물리면서 어떻게 한 순간 사라지는지를 한 개인의 삶 속에서의 비극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유대계 미국인인 스위드 레보브는 뛰어난 외모와 온화한 성품, 거기에 운동 능력까지 갖춘 위퀘이크 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당시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스위드라는 이름은 마법이었다. 그는 풋볼에서는 엔드, 농구에서는 센터, 야구에서는 일루수로 활약했는데, 팀의 성적과는 별개로 치어리더들은 스위드만을 위한 응원 구호를 따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또래 남자아이들, 여자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 또한 전폭적으로 그를 우상처럼 숭배했던 것이다. 이것은 스위드의 남동생 제리와 동기였던, 작품의 서술자이기도 한 네이선 주커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네이선 주커먼이라는 인물은 필립 로스의 작품 여럿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필립 로스의 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네이선은 1995년 동창회에서 스위드의 비극적 인생에 대해 듣고서 그에 관한사실주의적인 연대기를 쓰고자 하는 작가적 열망을 느끼고 주커먼의소설혹은상상속에서 스위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위드는 삶이 가르쳐줄 수 있는 최악의 교훈을 배웠다.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배우게 되면 행복은 두 번 다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없다. 행복은 인위적인 것이 되며, 그나마도 자신과 자신의 역사와 고집스럽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갈등이나 모순에 온화하게 대처하던 착하고 다정한 남자, 공정한 적과는 무슨 싸움을 하더라도 분별력 있게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던 자신만만한 운동선수 출신의 남자는 공정하지 않은 적, 즉 인간관계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악과 만나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 나버리고 만다.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천성적 고귀함을 타고났던 사람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는 바람에 다시는 순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스위드는 2차 대전 후의 호황기를 누리며 자라 미스 뉴저지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장갑공장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전원적인 집까지 마련하고, 목가적인 삶을 향한 그의 꿈은 모두 완벽하게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스위드의 찬란했던 꿈이 산산이 깨지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딸 메리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살아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스위드 레보브의 삶은 역사적 광풍 속으로 휘말려 들면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반전운동에 도취된 딸은 미국인을 향해 폭탄 테러를 가하고, 가업은 서서히 몰락하고, 사랑하는 아내는 외도를 저지른다. 보통의 미국인들처럼 평범하고 목가적인 삶을 꿈꾸었던 성실하고 나무랄 데 없는 한 유대인 가족에게 닥친 이 비극은 시대적 사건들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떻게 비극적으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그리고 있다. 1960년대 말 미국은 위기에 처한다. 2차 대전의 승리가 가져온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집단적 도취의 기간을 보낸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지만 수세에 몰린다. 급기야 베트남의 기습으로 미국 대사관마저 피해를 입게 되자, 미국 내 반전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어지면서 바야흐로 반정부, 반체제 운동으로 폭력과 무질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갔던 무수한 참전용사아버지들은 졸지에 반전주의자아들들의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고, 피땀 흘려 일군 가업은 인종차별에 반발한 흑인들의 폭동으로 어려워진다.

 

미스 아메리카를 원했어? 그래, 형은 미스 아메리카를 얻었네. 말 그대로 말이야. 형 딸이 미스 아메리카잖아!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진짜 미국 해병대가 되고 싶었고, 아름다운 이방인 아가씨를 품에 안은 진짜 미국 거물이 되고 싶었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미합중국에 속하기를 갈망했어? 그래, 이제 그렇게 됐네. , 딸 덕분에 말이야. 이곳의 현실이 바로 형 입안에 있어. 딸 덕분에 형은 그 똥더미, 진짜 미국의 미친 똥더미 속으로 내려갈 수 있는 한 깊이 내려가 있단 말이야. 미친 듯이 날뛰는 미국에! 길길이 날뛰는 미국에! 젠장, 시모어, 이 빌어먹을 인간아, 네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뇌하는 레보브, 그의 딸 아이는 처음에는 말더듬이였다가, 다음에는 살인자였다가, 다음에는 자이나교도가 된다. <그는 평생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잘못을 저질렀다. 그가 그 자신 안에 가두어두었던, 그가 있는 힘을 다해 깊이 묻어두었던 모든 잘못됨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는 표현처럼 이 또한 모두 그의 잘못인 걸까? 미국의 목가가 파괴된 이유를 찾으려는 네이선 또한 스위드의 삶을 파헤쳐가지만 사실 이것은 답 없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선하고 도덕적인, 한때 모두의 영웅이었던 그의 노력과 성실함으로도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생의 광포함. 이것을 과연 개인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까? 유대인인 스위드가 이방인과 결혼까지 하여 미국 주류 문화에 깊숙이 동화되었다는 환상에 빠져 살다가 딸이 미국 사회의 격변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삶 전체까지 크게 뒤흔들리게 되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자체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전작인 <에브리맨>에서도 주류의 삶을 살아왔다는 착각에 빠졌던 한 유대인의 말년을 그린 적이 있는 필립 로스는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유대인이 아니라 미국에 관해서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가 유대인 작가만이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것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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