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콘텐츠를 봐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자신을 콘텐츠 중독자, 콘텐츠에 절어있는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 코로나 이후 더 심해졌다. 극장과 OTT를 번갈아가며 몸이 마르고 닳도록 영상을 접한다. 그전에는 활자를 접했다. 과거에는 활자에 미쳐 눈에서 피가 났다면 지금은 영상에 미쳐 눈에서 고름도 함께 난다. 항상 고민이었다. "내 몸이 2개만 되었어도 좋겠다", "멀티버스가 있어서 여기서 영상 다 보고 오고 싶다.." 이런 고민을 매일 한다.
작년과 올해 어쩔 수 없이 봐야 할 영상을 딱 두 번 빨리 감기로 봤다. 뭐였나고? 영화 <해피 뉴 이어>와 드라마 [종이의 집: 경제 공동구역] 파트 2다. <해피 뉴 이어>는 2배 속으로 봤는데도 너무 재미없고 뻔해서 놀랐다. 대체 2시간이 넘는 영화를 강제로 봐야 하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던 경험이다.
[종이의 집]은 1.5배(2019년 8월 도입)로 2회를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설명이 많고 필요 없는 장면이라 판단하는 부분은 건너 뛰기로 넘겨 버렸다. 정말 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하면서 대사만 듣는다. 오디오 무비 콘텐츠도 있고, 오디오 클립도 있는 이유가 이런 거다. 이동하면서 영상 없이 이어폰으로 듣기만 하면서 상황을 유추한다. 은근한 상상력을 불러온다.
이후 1.25배도 도입되었는데 대사가 조금 빠를 뿐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배우의 감정이나 연출자의 예술적 미장센, 의도가 반영된 부분이 아니라면 괜찮은 빠르기다. 스킵도 자주 이용한다. 시리즈의 경우 오프닝이 반복되는데, '오프닝 건너뛰기'라는 한 번 보고 계속된 회차에서 넘긴다. 원치 않는 커플의 애정 장면도 자주 건너뛴다.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넘겨버리는 습관이 생각보다 감정 소비에 요원하다.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싶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작품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텐데..' 싶었다. 창작자의 고통과 참여 스태프에 대한 모독인가 싶어 신념을 지켜왔는데. 3년 전 선을 넘어 버렸다. 몸이 한 개라 극장 개봉 영화도 다 챙겨 볼 수 없고 리뷰도 쓸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었던 거다.
책은 일본 저자가 쓴 9편의 칼럼('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출현이 시사하는 무서운 미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일본 저자가 썼기 때문에 일본식 단어와 번역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왜 빨리 감기를 하는지 현상은 세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무척 공감한다.
긴 영상을 보기 버거워 해 유튜브 요약본을 찾고, 이젠 그마저도 힘들어 숏츠로 해결한다. 정보를 책으로 얻지 않는다. 모든 것은 검색엔진도 아닌 유튜브 동영상이다. 이 영상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영상마저도 끝까지 다 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만 요약하거나 건너뛰고, 그러다 지루하며 아예 종료 버튼을 과감히 누른다. 다시 보냐고? 너무 볼거리가 넘쳐나는 게 흠이라는 흠이다. 웬만해서 보다 만 영상은 다시 틀어보지 않는다.
MZ 세대의 새로운 콘텐츠 습득법이 아니다. 의외로 중년들도 이 포맷을 좋아하고,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를 해서 본다는 것을 알아냈다. 코로나로 인해 새롭게 생긴 습관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코로나는 이와 같은 습관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파했고 가속했다. 저자는 빨리 감기, TMI 설명 작품의 증가, 경제 침체, 인터넷 발달 등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작품이 한 뿌리임을 밝혀냈다. 빨리 감기가 현대사회를 나타내는 상징이면서도 창작 행위, 콘텐츠 제작의 미래, 소비 흐름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음을 말이다.
저자는 빨리 감기로 보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구독 서비스의 영향으로 공급이 늘어난 현상(작품 편수 증가), 둘째, 작품의 설명 과잉 경향(쉬운 스토리를 원하는 층이 커짐)이라고 말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체험하지 못한 것에 가치를 둔다면 Z세대는 체험을 따라가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앞날이나 예상하지 못한 일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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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요즘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시간도 가성비를 따진다는 거다. 결국 시간은 없는데 봐야 할 것이 넘쳐나는 Z세대의 생존법이라는 거다. 대화에 끼기 위해서(SNS 수시 접속으로 언제든지 반응을 요구받는 사회, 공감 강제력), 대사 없는 일상적인 장면은 건너뛰고, 1시간짜리 드라마를 10분 요약본으로 대체하는 건 일도 아니다. 범인이나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게 실패하지 않을 가성비 소비다. 예술은 감상하는 것 곧, '감상 모드', 오락은 소비하는 것 곧, '정보 수집 모드'라는 거다. 보고 싶다는 욕구 보다 알고 싶다는 욕구에서 오는 행동이란 분석이다.
내가 극도로 싫어해 싸우기까지 했던 사건이 바로 스포일러 유출이었다. 극도로 싫어했던 건데 이젠 나도 유연해졌다. 이들은 영화 보기 전 결말과 해석을 미리 알고 간다. 몇 년 전 왜 그러냐는 내 물음에 "영화관에서 이해 못 할까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점점 생각하지 않고 해답을 찾는 일이 잦아지면 독해력과 문해력이 떨어져 독서는 물론, 영상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도 이해된다. 긴 영화는 보지 못해 되도록 짧은 영화만 찾아서 겨우 본다는 말이 5년 정도 되니까 젊은 세대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주체적으로 감상하는 해석하는 것은 프로에게 맡기고, 시청자는 순수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거다. 게임 실황 문화(플레이어의 게임을 보면서 중계하는 말솜씨를 듣는 영상)가 영상에 흡수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밖에 이들은 처음에는 빨리 감기로 봤다가 재미있으면 보통 속도로 재관람한다. 원작을 각색 없이 옮기는 것을 좋아하고 빌런 없이 착하고 유순한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분석한다. 세 가지로 요약하자면 '시간 단축', '효율성', '편리성'이다. 영상은 TV나 PC, 노트북으로 보던 세대가 스마트폰, 태블릿으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면서 시청 스타일이 바뀌었다.
넷플릭스에서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 기능을 추가한 건. 원형이 아닌 형태의 감상을 적극 제한하는 거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아닌 사람은 또 다른 작품 감상의 방법으로 인정해 보자는 거다. 새로운 방법(문화, 미디어, 디지털 기기)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지식인은 이를 반대하고 혐오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OTT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는데 현재는 그 경계가 무너져 버렸다.
책은 Z세대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기도 하다. 앞으로 콘텐츠의 주요 소비층이 될 막강한 예비 시청층이다. 이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소비하는 콘텐츠를 만들지, 감상하는 영화(드라마)를 만들지 제작자의 입장 및 소비 채널의 방향 등. 문화의 미래를 점검하고, 소비까지 내다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이들은 빨리 감기, 건너뛰기, 스포일러가 습관화된 리퀴드 소비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행동 습관을 파악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뼈 때리는 말에 충격을 받고 공유해 본다. "현대에 들어서 감독은 그저 끊임없이 계란을 만들어내는 닭과 같다. (중략) 그들은 닭이 가진 '맛있는 계란을 낳아주는 기능'과 '인간을 위해 매일 영양원을 공급해 주는 시스템'을 사랑하는 것이지, 닭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창작자가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문제다.
본 리뷰는 도서 지원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