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교수의 ‘간다라 미술’에서 무불상(無佛像) 표현이란 말을 만났다. (불)상을 만드는 대신 상징적인 것으로써 붓다의 생애를 도해(圖解: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함)하는 것을 말한다.

빈(empty) 대좌(臺座: 불상을 올려놓는 대), 붓다의 발자국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붓다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행 이후 붓다를 점차 신적 존재로 숭앙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붓다를 인간의 모습을 한 상으로 직접 대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교도들 사이에서 점차 강해졌다.

하지만 무불상 관행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인간적 형상은 보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강한 정서적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원형(붓다)과의 관계가 모호하고 언제든지 그런 모호성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손의 엘랑 비탈(삶의 약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논의한 이정우 교수의 시도를 생각하게 된다.

약동은 낭만적 이미지 또는 정서적 이미지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실은 결정론적 과정을 무너뜨리는 절대 차이를 말한다. 추상적인 것이다.
문제는 결정론을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내 역량이다.

인간적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힘과, 삶의 약동을 낭만적 이미지로 보는 것을 한 데 묶어 논의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까?

형상화에 대해 조심스럽던 태도로부터 불상이 출현한 것을 놀라운 일로 전제한 뒤 새로 등장한 법신(法身: 붓다가 설법한 정법正法) 사상(법신에 호소하는 것)이 오히려 형상화에 대한 제한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하는 책(명법 스님 지음 ‘미술관에 간 붓다’ 220 페이지)은 인상적이란 말을 하고 싶다.

상상력의 한 진경(眞境)을 보여주었다고 해야 할까?

다만 궁금증이 드는데 그것은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삿된 길을 걷는 것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과, 법신 및 색신(色身)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연결지을 수 있는지, 이다.

불교 조각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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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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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小說)과 대설(大說)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디테일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고 대설은 스케일 큰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대설에 어울리는 형식은 무엇일까? 풍자(諷刺)가 아닐지?

 

이 즈음에서 생각나는 시인이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했고 때로 자신을 까발렸다. 가령 이렇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이다. 그럼 풍자(諷刺)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간 시가 김수영에게 있을까? 있다. 바로 누이야 장하고나란 시이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김수영을 언급하는 사설(辭說)이 길었다.(사설이란 판소리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유는 홍성담 화백의 난장의 장르인 대설(大說)의 첫 걸음을 떼어 놓은 김지하 시인이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란 산문으로 김수영 시인의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란 시를 창조적으로 배반(?)했기 때문이다.

 

홍성담 화백. 박근혜를 풍자한 세월오월을 그린 분이다. 세월(世越)이란 바로 세월호 사건(2014416)을 말한다.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대설 난장(亂場)’은 한 바탕 시원하고 짜릿하게 썰을 푼 홍성담 화백의 작품이다.

 

홍성담 화백은 난장을 출간한 같은 출판사의 월간지20145월부터 20161월까지 바리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난장은 역시 전기한 월간지에 실었던 그의 죽음 뒤엔 음악이 흘렀다를 수정, 보완한 작품이다.

 

특기할 것은 연재 시작과 함께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는 점이다. 정해진 이정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엄청난 사건이 터진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그 사건을 담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가능하다.

 

사건이 터지고 홍성담 화백은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단원고 학생도 희생자 가운데 있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28세의 여자 화가 오현주이다. 검은손에 의해서 쫓기면서도 그 검은손의 정체를 쫓는 인물이다.

 

3년의 수감 생활을 거쳐 석방된 그는 어느 날 매복꾼들에게 기습을 당한다. 그 위기에서 그는 매복꾼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는 대신 불암산의 큰 바위 절벽에서 투신을 하는 길을 택한다. 1829년에 죽은 처녀귀신인 천무생이라는 어린 귀신이 함께 몸을 날린다.

 

두 사람 아니 귀신은 중랑천 물속으로 떨어지는데 거기에는 투명한 흰 정체의 사람들이 이어가는 긴 행렬을 펼쳐졌다. 흰 정체의 사람들이란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서 수장당한 세월호 희생자들로 자신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해 그 이유를 따지기 위해 청와대로 가는 무리였다. ”그럼, 지금 이 행렬의 목적지가 어딘가?“.. ”청와대.“

 

난장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색채를 보임에도 직설적이다. 아니 그런 색채를 보이기에 직설적이라 해야 할까? 홍성담 화백은 어릴 때 눈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 웅얼웅얼 비나리를 하신 할머니의 심정으로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배신당하고 찢긴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 분이었기에 걸판진 한 바탕 대설을 늘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난장은 자신들을 쫓는 검은손의 정체를 역으로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검은손의 윗 대가리란 것들이 가진 특성이다. 바로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압권이다. ”! 이제 끝났다? 시작도 끝도 없고, 삶도 죽음도 사라진, 중심도 주변도 없는 곳에서, 영원도 찰나도 없는 시간에,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속도 단절도 없이 마냥 존재할 뿐이었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듯 사회성과 실존성이 교차하는 느낌을 준다. 하기야 죽음을 애도하고 항의하고 난장처럼 풀어내는 것은 사회적인 동시에 실존적인 것이 아닌지? 한바탕 굿을 본 것 같은 마음이 가득하다. 작가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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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호칭‘이란 시가 없는 ‘다정한 호칭‘이란 시집에서 다정한 호칭이란 시어를 만난다. ‘심야발 안부‘라는 시.

˝다정한 호칭도 / 거짓된 근황도/ 추한 질문도/ 잠시의 위로가 될 추측도/ 설익은 반성도/ 우격다짐일 다짐도/ 다음 세상 운운할 약속도/ 적히지 않을 편지를 쓴다˝

조심스레 헤아려 보니 시인(이은규)이 말한 것들은 내가 때로 전하거나 하거나 건네는 것들이다. 다정한 호칭, 거짓된 근황, 추한 질문, 잠시의 위로가 될 추측, 설익은 반성...

바로 다음 장에 실린 ‘손목의 터널‘이란 시에서 나는 ‘심야발 안부‘에서 얻은 반성거리보다 더 한 반성거리를 얻는다.

˝통증을 곁에 두고 보다가/ 늦은 진단을 받았다/ 몸이 마음에게 보내는 어려운 안부// 손목터널증후군˝

시인은 통증마저 곁에 두고 본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놓치다, 봄날‘ 중에서)는 시인이니 그럴 법 하다.

그런 반면 최근 나는 불확실한 감정들을 두고 보지 않고 서둘러 내보냈다. 왜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을 밖으로 드러냈을까?

˝혜성은 상서롭게 빛나는 별// 가설과 정설 사이를 망설이는, 별 하나˝(‘살별‘ 마지막 부분)란 구절이 조금은 아프게 읽힌다.

망설이기라도 하고 감정을 드러냈다면 조금이나마 낫지 않았을까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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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나치 수용소에 징발(徵發)된 유일한 예술 장르이다.“ 이 파격의 메시지를 담은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1948 - )의 신간 산문집 ‘음악 혐오’를 접하고 몇몇 이름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키냐르의 말처럼 나치는 여성 수인(囚人)들로 구성한 오케스트라를 통해 교수형 집행장에서조차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하게 했다.

이에 여성 수인들은 ”하느님, 이런 데서 음악이라니요?“ 하며 울부짖었다.(서경식 지음 ‘나의 서양음악 순례’ 285 페이지)

저자는 이 야만을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파괴였다고 표현한 폴란드 출신의 여성 수인 조피아 조코비악에 대해 전한다.

그 여성 음악단원들은 나치로부터는 우대받았지만 다른 수인들에게는 모멸과 원한과 한탄의 대상이 되었다.

소환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 하나는 올리비에 메시앙(1908 – 1992)이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인 1941년 1월 독일령 실레지아의 괴를리츠 포로 수용소에 갇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성경을 묵상하던 메시앙은 요한계시록에서 영감을 얻어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란 작품을 만든다.

극심한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로 인해 침묵 속에서 시연(세계 초연)된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 연주에 대해 훗날 메시앙은 ˝그처럼 대단한 관심과 이해를 보여준 무대나 관객을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소환하는 두 번째 이름은 현대 음악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이다.

1963년 4월 오랜 친구 최상학의 주선으로 쳥룡, 백호, 주작, 현무의 강서 고분의 사신도(四神圖)로부터 작곡을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한 윤이상은 박정희 정권의 조작(1967년 동 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는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 확대 해석된 사건이다.)으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다.

서울 구치소에서 윤이상은 자살 시도 끝에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작곡한다.

그는 달라피콜라, 리게티, 슈톡하우젠 등 세계적 음악가들의 탄원에 힘입어 수감 1년 8개월여 만에 석방되지만 끝내 정권(政權)의 방해로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5일 영부인(令夫人) 김정숙 여사가 베를린의 윤이상 묘소를 방문해 그의 고향인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성악 전공의 김 여사는 윤 선생은 학창 시절 영감을 많이 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문구의 윤이상의 묘비명과 부인 이수자 여사와 딸 윤정(1970년대 독일 전위 록 그룹 Popol Vuh의 보컬이었던...그들의 Hosianna Mantra를 꼭 들어보시길...)의 사진을 보며, 그리고 윤이상의 어머니가 꾼 태몽인 상처 입은 용을 생각하며 윤이상 음악제가 열리는 통영에 꼭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 이름도 낭만적인 ‘물결 높던 날들의 연가’란 책에서 서우석은 중요한 것은 공기의 파동이 귀에 들어와 우리의 뇌에 이르면 우리 마음이 무의식에 있는 여러 유형들을 꺼내 그 소리들을 곱게 또는 곱지 않게 옷을 입혀 우리 의식에 자리를 잡아주고 앉혀주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29 페이지)

우리 무의식이 곧 세상이니 음악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세상이라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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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웅(吳經熊)의 ‘선학의 황금시대’에 시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일화가 나온다.

한 할머니가 덕산 선사에게 금강경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자고 하시는 것이냐, 대답을 잘 하면 점심을 공짜로 드리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답을 못한 선사는 점심을 얻어 먹지 못했다는 일화이다.

선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우리는 밥을 먹는 것이지 시간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학의 황금시대‘라는 불교 철학의 정수가 말하는 시간에 대한 결론과 일치하는 내용이 물리학과 뇌과학을 전공한 슈테판 클라인의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에 나온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 시간은 없다는 결론이다. 물론 우리는 정확하게 지정되는 표준 시간에 따라 자신들의 일정을 맞춘다.

하지만 하는 일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면 생활 패턴이나 리듬, 속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절대 시간이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한 삶의 여건과 처지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는 의미이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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